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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뮤얼 스텀프] 서양 철학사 - 제3부 근대 초기의 철학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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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뮤얼 스텀프] 서양 철학사 - 제3부 근대 초기의 철학

Baek Kyun Shin 2020. 7. 17. 00:25

제9장 르네상스 시대의 철학

1. 중세의 마감

중세가 끝나가면서 중세 종교와 철학의 융합은 뒤틀리기 시작했다. 르네상스가 도래하자 이 둘은 파탄에 이르게 되었다. 르네상스는 문자 그대로 재생(rebirth)이라는 뜻이며, 15~16세기 동안 일어난 고대 그리스 학문의 부활을 일컫는다. 중세 시대 학자들은 플로티노스나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작물에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간접적으로 접했다. 그러나 르네상스 기간 동안 그리스 필사본이 아테네에서 로마로 유입되어 원전을 직접 접할 수 있게 되었다. 15세기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발명으로 인해 책은 만들기 더욱 쉬워졌다. 그로 인해 문화의 확산은 더욱 빨라졌다. 철학자들은 고대 철학에 주석을 달기보다는, 독창적인 저술에 정진하게 되었다. 또한 로마 가톨릭 교회에 저항하는 종교 개혁이 시작되었다. 과학자들은 중세 시대와 다르게 비종교적 관점에서 물질세계를 연구했다.

2. 인문주의와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르네상스는 이탈리아에서 처음에 예술 운동의 일환으로 시작되었다. 중세의 예술은 종교적 상징으로 가득했고, 사실적 이미지와는 동떨어졌다. 대표적인 르네상스 시대 예술가는 미켈란젤로(1475~1564)와 레오나르도 다빈치(1452~1519)가 있다. 

2. 1. 피코 델라 미란돌라

르네상스 인문주의의 대표적인 인물은 피코 델라 미란돌라(1463~1494)이다. 피코는 고대 그리스, 이슬람, 기독교, 심지어 유대교까지도 교육을 받았다. 그는 <인간은 특별한 존재다>라는 인문주의를 주장했다. 인간은 자신의 운명을 선택할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자신의 이성적 판단을 무시하거나 범죄를 저지를 수도 있다. 그러면서도 간디처럼 최고 수준의 이타심을 발휘할 수도 있다. 따라서 피코에 의하면 그 이전 중세 사상가들이 가정했던 것과는 달리 우리는 인간 존재에 대하여 사전에 정의된 개념 속에 갇히지 않는다. 

2. 2. 마키아벨리

니콜로 마키아벨리(1469~1527)는 엄밀히 말하면 인문주의자가 아니다. 그럼에도 그는 이탈리아 르네상스가 낳은 인물이다. 그가 20대 청년이었을 때 피렌체에는 위대한 설교가 사보나롤라가 있었다. 사보나롤라는 피렌체에 많은 영향을 주었고, 성공적으로 민주 정부를 수립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관료들과 마찰을 빚어 결국 처형되고 말았다. 그러한 영향력 있는 사람이 비참한 죽음을 당하자 마키아벨리는 사회 내 선악의 상대적 힘에 대한 교훈을 일찍이 깨달았다. 그는 정치적 활동의 규칙에 대해 깊이 연구하여, [로마사론]과 [군주론]을 썼다. 그는 도덕적 타락이 판을 치고 있는 당시 이탈리아에는 로마 공화정과 같은 모범적인 정부가 성공적으로 들어설 수 없다고 믿었다. 마키아벨리는 인간은 악하다고 생각했다. 또한 모든 정치와 종교에서 부패와 타락을 발견했다. 부패한 사회는 강력한 정권을 필요로 한다. 강력한 정권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군주 정치가 필요하다. [군주론]이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오는 이유는 마키아벨리가 통치자는 속임수를 계발하고, 정치적 생존을 위해서는 전통적 도덕에 반하는 일이라도 서슴지 않고 해야 한다고 권고하기 때문이다. 그는 도덕적 신념보다 교활한 기술을 더 높게 평가했다. 결국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을 통해 보편적인 메시지를 주었다. 어떤 행동은 그것이 가장 유용한 것인 한, 정당하다는 것이다. 

3. 종교 개혁

1517년 10월 31일, 독일의 마르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문에 항의 문서를 못질하면서 종교 개혁은 시작되었다. 루터는 중세 시대 주류를 이루었던 로마 가톨릭 교회의 정책들을 비판했다. 당시 교회는 돈을 모으기 위해 사람들에게 면죄부를 팔았다. 루터가 보기에 교황의 권위는 이미 실추되었다. 루터의 종교 개혁 운동은 유럽의 여러 나라로 퍼져 나갔고, 그로 인해 프로테스탄트 교회 즉, 개신교가 생기게 되었다. 프로테스탄트 철학자들은 기존의 가톨릭 교회를 포기할 뿐만 아니라 중세 사상의 모든 전통도 포기했다. 그 대신 고대 그리스 사상을 부활시켰고, 그들만의 새로운 철학을 주장하기도 했다.

3. 1. 루터

마르틴 루터(1483~1546)는 아우구스티누스와 오컴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 오컴은 자연 신학을 거부했고, 그 대신 지식에 관하여 경험적이며 회의적인 견해를 개진했다. 오컴은 <어떤 사물이 존재한다는 사실로부터 다른 사물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추론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오컴이 이로부터 도달한 결론은 <우리가 신에 대한 지식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신의 도움을 받지 못한 이성은 신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 대신 신에 대한 지식은 은총의 선물이며 이는 신앙의 행위로 확증된다.

루터는 이 주장을 받아들였다. 그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자연 신학을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체계도 모조리 거부했다. 또한, 루터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죄의 개념에 영향을 받았다. 그 개념에 의하면 인간은 무지 때문에 고통을 받는 것이 아니라 자유 의지 때문에 고통을 받게 된다. 그러므로 이성이나 지식의 습득이 아닌 신앙에 의해 인간은 고통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루터는 인간의 이성에는 한계가 있다고 보았다. 인간의 유한한 능력 때문에 제한된 만물을 시야로밖에 볼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성에게는 불가능하게 보이는 것이 신앙에게는 가능하다. 결국 마르틴 루터는 이성보다 신앙을 더 중시했고, 지상에서의 삶보다 영혼의 구원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

3. 2. 에라스무스

에라스무스(1466~1536)는 인문주의자로서 종교 개혁에 있어 중요한 인물이었다. 에라스무스는 고대 고전의 그리스어 판과 라틴어 판을 보급시켜 르네상스 정신 형성에 큰 기여를 하기도 했다. 그는 예수의 소박한 가르침과 당시 교황의 부유함 및 오만함은 서로 모순된다고 생각했다. 당시 가톨릭 교회는 면죄부를 팔아 돈을 벌었고, 종교의 중심 사상에서 벗어난 사소한 세목에 관심을 쏟았다. 그리하여 에라스무스는 [우신예찬]이라는 저서를 통해 이러한 성직자들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 책은 루터가 교회와 격론을 벌일 때 많이 사용하기도 했다. 

에라스무스와 루터는 16세기 가톨릭 교회에 대한 비판에서 여러 의견을 같이했지만 의견이 다른 부분도 있었다. 루터가 정열적인 종교 개혁가였던 반면 에라스무스는 단지 비판자에 머물렀다. 그리하여 루터는 에라스무스를 <수다쟁이>, <회의주의자>, <에피쿠로스 돼지우리 안에 있는 돼지>라며 비난하기도 했다. 또한 에라스무스는 고대 그리스, 로마 사상을 부활시켜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루터는 기독교의 본래 정신으로 되돌아 가야 한다고 말했다. 즉, 에라스무스는 고전적인 인문주의적 학문과 기독교 신앙을 균형 있게 조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루터는 인간의 이성으로는 속죄받을 수 없기 때문에 본질적인 신앙을 되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4. 회의주의와 신앙

르네상스 기간 동안 가장 중요한 철학적 발전 가운데 하나는 고대 그리스의 회의주의 전통의 부활이다. 특히 섹스투스 엠피리투스(기원전 200년경 활동)에 의해 체계화된 피론의 회의주의가 부활했다.

4. 1. 몽테뉴

몽테뉴(1533~1592)는 저서 [수상록]에서 고전 회의주의를 매혹적으로 재현시켰다. 그는 회의주의를 통해 일상생활을 새롭게 보는 방법을 발견했다. 회의주의하면 일반적으로 일상생활에 대한 회의적인 태도나 무관심을 뜻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는 회의주의의 주된 특징이 아니다. 오히려 회의주의는 모범적인 인간의 삶을 영위하고자 하는 열망과 관련 있다. 몽테뉴는 인간이 소유하고 있는 모든 힘을 발휘하는 삶의 방식에 매혹되었다. 이것이 바로 그가 생각한 회의주의였다. 

몽테뉴는 자신을 <편견이 없는 철학자>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자신의 사상과 삶을 표현하는 일련의 고정된 관념들에 지적으로 제한되지 않은 철학자를 의미한다. 그가 완전히 합리적으로 반론 제기가 가능한 교의에 빠졌다면 행복한 삶을 영위하고자 하는 그의 소망은 충족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대부분의 문제가 명석한 해답을 얻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중략... 몽테뉴는 <저것이 참일 가능이 없는 것처럼 이것이 참일 가능서도 없다>라고 주장한 회의주의들의 판단을 받아들였다.... 중략... 우리는 어떤 교의에도 영구적으로 빠지지 않는 대신 끊임없이 탐구의 태도를 취해야 한다. 몽테뉴에 의하면 만족은 정신의 평정이 있을 때만 가능하다. 우리가 일상 경험을 초월하여 사물의 내적 본질을 파악하려고 할 때 평정의 상태는 혼란에 빠진다. 가장 슬픈 모습은 인간이 난해하고 가변적인 문제들에 대해 완전한 답을 만들고자 하는 것이다. 완전하고 영구적인 진리를 포착하기 위해 애쓰는 이러한 바보스러운 부류가 광신론과 독단론의 입장이다.

몽테뉴는 우주나 진리에 대해 씨름하기보다는 일상적인 문제들에 대해 고찰하며, 일반 사람들도 생활 철학을 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는 장황하고 어려운 글귀들은 염두에도 두지 않았다. 자연스럽고 인간적인 일상 문제들에 집중을 했다. 

그렇다고 몽테뉴의 회의주의는 무정부주의적이거나 혁명적인 행동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그는 사회적 변화는 급격하게 진행되어서는 안 되며, 절대적인 진리란 없으므로 사회를 어떤 방향으로 몰고 가야 한다는 특정한 목표도 있을 수 없다고 했다. 

지혜는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며, 무언가를 확실하게 안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깨닫는 데 있다.

4. 2. 파스칼

파스칼(1623~1662)은 당시 회의주의의 부활에 큰 영향을 받는 또 다른 사상가였다. 그는 공식적으로 회의주의 학파와 거리를 두고 있었지만 인간의 이성이 삶의 진리를 획득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수학과 과학에 관심이 많았다. 미적분학의 기초를 확립했고, 원뿔 곡선에 관한 논문을 썼으며, 기계식 컴퓨터인 계산기를 발명하기도 했다. 30살이 되었을 때, 그는 신앙에 좀 더 관심을 두었다. 그는 <마음은 이성이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를 알고 있다>는 유명한 말을 했다. 이처럼 파스칼에게 진리의 안내자는 마음이었다. 

파스칼은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다고 보았다. 하지만 그는 네 가지 가능성을 제시하며 신을 믿는 것이 더 유리하다고 생각했다. (1) 만일 신이 존재하고 우리가 신을 믿는다면 우리는 커다란 보상을 받을 것이다. (2) 만일 신이 존재하고 우리가 신을 믿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보상을 잃어버릴 것이다. (3) 만일 신이 존재하지 않는데 우리가 신을 믿는다면 우리는 얻을 것도 잃을 것도 없다. 기껏해야 신을 믿는데 소비한 시간과 노력 정도다. (4) 만일 신이 존재하지 않는데 우리가 신을 믿지 않는다면 우리는 얻을 것도 잃을 것도 없다. 이 4가지 경우를 살펴본다면 신을 믿는 쪽이 더 유리하다. 파스칼은 이런 이유로 신을 믿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에는 여러 비판이 있지만 그는 이 계산이 적어도 신앙의 길로 들어서게 재촉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5. 프랜시스 베이컨

프랜시스 베이컨(1561~1626)은 당시의 철학과 과학을 개혁하고자 했다. 당시의 과학은 학문과 동일시되었고, 학문도 고대 문헌의 해석을 의미했다. 그때까지 철학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독무대였다. 그는 아직도 고대 학문에 목을 매는 상황이 못마땅해했고, 이런 상황을 타파하고자 했다. 베이컨은 중세 철학자들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을 세밀하게 분석하여 정렬해놓았지만, 이는 아무런 실질적 성과나 이득을 가져다주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그는 기존 재래 학문의 굴레에서 벗어나 과학을 신학과 분리하여 새로운 방법과 새로운 해석을 통해 철학을 새롭게 체계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베이컨은 <과학, 예술 등 모든 인간의 지식을 전체적으로 재구성>하는 것이 목표였다. 그는 이것을 <위대한 구상>이라고 불렀다.

5. 1. 정신의 우상

베이컨은 인간의 정신이 네 가지 우상에 의해 타락한다고 보았다. 네 가지 우상으로는 종족 우상, 동굴 우상, 시장 우상, 극장 우상이 있다. 이들 우상이 인간의 정신을 왜곡시켜 사물과 현상을 올바르게 인식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종족 우상은 인간의 감각 기관이 사물의 척도라고 하는 거짓된 주장을 따르는 데서 생기는 속견이다. 인간은 인간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본다. 개는 개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볼 것이다. 개미도 개미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볼 것이다. 인간의 입장에서만 세상을 바라보고 그것이 진리라고 믿게 하는 것이 바로 종족 우상이다. 동굴 우상은 플라톤의 동굴 비유를 본뜬 것이다. 그것은 교육을 받지 못한 정신의 한계를 지적한다. 사람들은 그들이 읽은 책이나 그들이 습득한 관습, 그리고 그들이 따르는 권위에 갇혀서 진리를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이다. 시장 우상은 인간의 언어에서 비롯한 우상이다. 우리가 흔히 쓰는 단어는 세심하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유용하긴 하지만 지식을 약화시킨다. 그로 인해 우리의 언어로는 세상을 완벽히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극장  우상은 전통이나 권위에 대한 맹목적 믿음으로 인한 우상이다. 베이컨은 이런 우상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이 관찰과 실험, 즉 귀납적인 방법뿐이라 생각했다.

5. 2. 귀납적인 방법

베이컨은 위에서 설명한 4가지 정신의 우상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으로 귀납적인 방법을 제시했다. 귀납법이란 개별적 사실로부터 일반적인 법칙을 이끌어내는 방법이다. 이 방법을 택하려면 우선 편견에서 벗어나 사물의 본질을 보아야 한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연역 논증을 강하게 비판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연역 논증의 예는 (1) 모든 사람은 죽는다. (2)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 (3)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는 죽는다. 가 있다. 베이컨은 이런 전개 방식은 전제에 포함되어 있는 오류를 영속화시킬 뿐이라고 하였다. (1)과 (2)가 참이어야 (3)이 참이 되는데, (1)과 (2)에 오류가 있다면 이와 연결된 모든 명제는 다 틀린 명제가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존의 결론을 통해 새로운 결론을 얻기보다는 새로운 정보를 통해 새로운 결론에 도달해야 한다. 

6. 토머스 홉스

토머스 홉스(1588~1679)는 프랜시스 베이컨과 가까운 사이였다. 베이컨이 대법관이었을 때 그와 대화를 즐기기도 하고 베이컨의 사상을 자주 받아쓰기도 했다. 그는 40대 초에 유클리드 기하학을 접했는데, 그 뒤로 그의 관심은 수학과 분석으로 옮겨 갔다. 그 후 남은 생의 거의 전부를 바쳐 훌륭한 철학 논문들은 출판했다. 여기에는 그 유명한 <리바이어던>도 포함된다. 

6. 1. 기하학이 홉스의 사상에 끼친 영향

홉스는 유클리드 기하학을 우연히 접한 뒤 그 후로 수학에 매료되었다. 또한 그는 관찰과 관찰로 형성된 공리로부터의 연역적 추론에 의해 정확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결국 정치철학으로 명성을 얻었는데, 그의 정치철학은 엄밀한 논리와 과학적 방법을 적용하여 새로운 결과를 제시했기 때문이다. 그의 정치철학은 인간과 사회에 대한 새로운 이론을 제시했는데, 사회가 물체와 운동이 주된 요소인 기계적인 모형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6. 2. 운동 중의 물체: 사유의 대상

홉스의 주된 관심사는 물체의 원인과 특성을 파악하는 것이었다. 물체는 세 가지 종류로 나뉘는데, 그것은 물질적인 물체, 인간의 신체, 정치적 집단이다. 그리고 모든 물체는 <운동>한다는 특성이 있다. 홉스는 이 <운동>의 개념을 통해 물체가 어떻게 존재하는지, 무슨 행동을 하는지 이해할 수 있다고 보았다. <운동>은 홉스 사상의 중심 개념이다. 운동은 어떤 한 장소를 떠나 다른 장소로 이동하는 계속적인 과정을 의미한다.

운동은 두 가지 종류로 나뉜다고 홉스는 주장했다. 첫 번째는 생명적 운동, 두 번째는 의지적 운동이다. 생명적 운동은 개인의 의지와 관계없이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계속되는 운동을 말한다. 맥박, 영양, 배설, 혈액순환, 호흡 등과 같은 것이 이에 해당한다. 반면 의식적 운동은 걷고, 말하고, 행동하는 따위의 운동을 말한다. 이런 의지적 운동의 최초 선행 동기는 <상상>이다. 곧 상상은 의지적 행위의 원인이다.

홉스는 신에 대해서도 유물론적 관점을 지녔다. 영혼이나 신이 형체가 없는 존재를 지칭한다면, 그것들은 존재할 수 없을 것이라고 홉스는 말했다. 형체가 없는 존재는 있을 수 없으므로 홉스는 신도 어떤 형체를 가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홉스는 신이 존재한다는 데에는 동의했지만, 인간은 신의 본질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고 주장했다. 

6. 3. 인간의 사유에 대한 기계론적인 견해

홉스는 인간의 사유도 감각의 변형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우리가 나무를 보면 "나무가 있네"라고 사유한다. 외부의 나무가 우리 내부에 운동을 일으킨 경우다. 나무가 시야에서 사라진 후에도 나무의 이미지를 계속 기억할 수 있다. 직접 볼 때보다는 희미해지겠지만, 나무가 사라진 후에도 그 이미지가 우리 내부에 남아있는 상태를 홉스는 <상상>이라고 했다. 시간이 조금 더 흐른 후 나무에 대한 이미지가 시들해졌을 때 우리는 <기억>이라는 용어를 쓴다. 그러므로 홉스에게 사유 작용은 감각의 변형에 불과하다. 나무를 감각하는 행위로부터 사유, 상상, 기억을 했기 때문이다. 

<경험은 보편적인 어떤 결론도 내려 주지 못하지만 경험 위에 기반을 둔 과학은 보편적인 결론을 내려 준다.> 이것이 홉스의 유명론이다. 그는 인간과 같은 보편 개념은 단지 단어일 뿐이며 어떠한 일반적인 실재도 나타내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것은 또한 그의 경험론이기도 하며,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즉 우리가 몇몇 사람에 대한 경험에서 얻은 지식을 토대로 모든 사람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6. 4. 정치 철학과 도덕

앞서 말했듯 홉스는 운동의 이론과 논리를 통해 정치 철학을 설명했다. 그는 움직이는 물체의 측면에서 국가의 구조와 본질을 분석했다. 또한 그는 역사적 관점에서 <시민 사회는 언제 출현했는가>보다는 논리와 분석의 관점에서 <당신은 어떻게 사회의 출현을 설명하겠는가>라고 묻는다. 물체의 운동을 통해 시민 사회 출현의 원인을 설명하고자 했다. 그는 공리적인 전제로부터 모든 정치 이론을 설명하려 했기 때문에 그의 정치 철학은 다분히 기하학의 방법과 유사하다.

6. 5. 자연 상태

홉스는 인간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국가나 시민 사회가 존재하기 이전에 인간은 <자연 상태>로 출현했다. 자연 상태 안에서는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 여기서 평등이 의미하는 바는 모든 사람이 스스로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취할 수 있고, 남을 해칠 수도 있다는 뜻이다. 결국 자연 상태에서는 모든 사람이 마음껏 행동할 수 있고 서로를 죽일 수도 있다. 무정부 상태가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은 선이라 하고, 싫어하는 것은 악이라 한다. 선과 악은 개인의 선호도에 달라지므로 절대적인 선도 절대적인 악도 없다. 자신의 욕구를 선과 동일시한다는 점에서 인간은 근본적으로 이기적이다. 그러므로 자연 상태 안에서는 인간은 다른 사람을 존경할 의무도 없고 도덕도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의 본성을 이처럼 이기적으로 본다면 인간은 질서 있고 평화로운 사회를 창출할 능력을 가지지 못한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홉스의 주장에 따르면 인간은 자신의 생존에 대해 관심이 있으며, 이로부터 자연법이 도출되었다고 한다. 자연법이란 <무슨 일을 해야 되는지 아닌지를 분별해 주는, 이성에 의해 발견된 규율>이다. 인간은 자연 상태 안에서조차 자신의 안전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갖기 때문에 자연법이 생겨난 것이다.

제1의 자연법은 모든 인간은 평화를 추구하고 그것을 따라야만 한다는 것이다. 제2의 자연법은 사람이 평화와 자기 방어를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면, 그리고 타인 역시 그렇게 생각하는 한 자진해서 모든 일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포기해야 하며, 자신과 다른 사람들 서로에게 제약되는 만큼의 자유를 가지는 데 만족해야 한다. 쉽게 말해 타인이 나를 해칠 권리를 포기하게 만들려면 나도 타인을 해칠 권리를 포기해야만 한다. 제1의 자연법을 통해 나의 평화는 추구된다. 제2의 자연법에 의해 타인의 평화도 추구되고, 그를 위해 나의 권리를 포기해야 한다. 자연 상태에서 나는 모든 자유와 권리를 가졌지만, 자연법의 테두리 안에서 나는 타인의 위해 나의 자유와 권리를 제약적으로만 가질 수 있다. 나의 자유와 권리를 일부 포기함으로써 모든 사회를 평화롭게 할 수 있다.

6. 6. 자연 상태에서의 의무

자연 상태에서 인간이 이런 자연법을 알고 있다면 그 규율을 따라야 할 의무가 있을까? 홉스는 국가에서뿐만 아니라 자연 상태에서도 자연법은 구속력이 있다고 대답했다.

홉스는 다음의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다. 이기적인 개인들 각자가 생존하기에 가장 좋은 방법을 알아서 선택하는 상황의 논리적인 결과는 무정부 상태일 것이라고. 그 상태에서는 <어떠한 예술도 문학도 사회도 없으며, 더욱 나쁜 것은 계속적인 공포와 잔인한 죽음에 대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고, 또한 인간의 삶은 고독하고 가난하며 소름 끼치고 잔혹하며 단명한다>. 권리에 대한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판단들 간의 갈등에서 비롯되는 이러한 무정부 상태를 피하기 위해 자연법의 계율을 따르고 평화를 추구하는 인간들은 자신의 권리나 자유의 일부를 포기하고 사회 계약을 하여 인위적인 인간, 즉 공화국이나 국가라 불리는 거대한 <리바이어던>을 창출하기에 이른다.

6. 7. 사회 계약

인간이 자연 상태를 피하기 위해 시민 사회의 일원이 되고자 하는 계약은 개인들 간의 합의이며, 그것은 마치 만인이 만인에게 다음과 같이 고하는 것과 같다. <나는 그대들이 자신의 지배권을 이 인간이나 이 집단의 인간에게 양도하고 그의 모든 행동을 승인한다는 조건에서 나 역시 자신의 지배권을 이 사람에게 양도하고 위탁하는 바이다.>

자연 상태의 귀결은 무정부 상태라고 했다. 무정부 상태에서는 평화가 보장되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인간은 평화를 원하므로 결국 사회 계약을 하게 된다. 사회 계약이란 개인의 권리를 사회에게 양도함에 동의한다는 것이다. 나도 사회에 내 권리를 양도할테니 타인도 양도하라는 것이다. 모든 개인의 권리를 양도받은 사회는 단일한 의지와 판단으로 집단을 하나로 통합한다. 홉스는 사회와 시민의 의지가 동일하다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그러므로 시민이 사회에 저항하는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 불합리하다. 첫째, 사회에 저항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저항이기도 하며, 둘째, 저항한다는 것은 곧 무정부 상태로 되돌아감을 원하는 것과 같은 의미이기 때문이다. 

6. 8 시민법 대 자연법

법은 사회가 만든다. 자연 상태에서조차 자연법은 존재하며 구속력을 가지고 있지만, 진정한 법은 사회가 있은 후에야 존재할 수 있다. 왜냐하면 사회가 있어야만 법은 강제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법과 사회의 주권자의 명령을 동일시했으며 불공정한 법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불공정한 법은 있을 수 없다는 말은 그의 <냉혹한 권위주의>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불공정한 법이 있을 수 없으므로 어떠한 경우에라도 모든 인간은 사회의 법에 따라야 한다고 홉스는 주장했다. 사회에 복종하고 합의한 계약을 준수하는 것이 홉스가 말하는 정의의 본질이었다. 악법을 제정하더라도 시민은 그것에 대해 어떠한 판단도 내릴 수 없고, 악법이라는 이유로 복종을 거부해서도 안 된다. 결국 그는 통치권에 대한 강력한 권위주의적 개념에 도달하게 되었다. 홉스는 비록 당대에는 폭넓게 인정받지는 못했고, 그의 철학에는 비판할 점도 많지만 철학의 문제를 체계화할 때 보여준 엄밀함 때문에 지속적인 영향을 주었다.

제10장 대륙 이성론

데카르트는 17세기 대륙 이성론의 창시자였으며, 이는 <근대 철학>의 출발점이었다.

과학과 수학의 진보와 성공에 영향을 받은 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등의 새로운 계획은 철학에 수학의 정확성을 도입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세계에 대한 정확한 지식이 연역 가능한 진리 체계를 가질 수 있는 분명한 이성적 원리들을 구성하고자 했다. 그들이 강조하는 주요 논점은 인간 본성과 세계에 관한 진리의 원천이라고 생각되는 인간 정신의 이성적인 능력에 관한 것이었다. 그들이 종교의 주장을 거부한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철학적인 추론을 초자연적인 계시와는 무관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중략... 이성론자들은 그들의 정신으로 분명하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실제로 정신의 외부 세계에 존재한다고 가정했다.

1. 데카르트

1. 1. 생애

흔히 근대 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르네 데카르트는 1596년 투렌(프랑스 중부에 있던 옛 주)에서 태어났다. 데카르트는 어려서부터 전통적인 철학보다 확실성과 정확성을 지닌 수학을 좋아했다. 그는 유럽 전역을 여행한 뒤 1628년 네덜란드에 정착했으며, 여기에서 그의 주저인 [방법 서설], [제1철학을 위한 성찰], [정념론]을 집필했다. 그의 주된 관심은 지적 확실성이었다. 그는 확실성을 가진 진리에 도달하는 방법을 신학에서는 발견하지 못했다. 전통적인 철학도 쓸모가 없었다. 지적 확실성을 추구하기 위해 지금까지 관습에 의해 사실이라고 믿었던 것도 더 이상 믿지 않기로 했다. 그는 확실성에 대한 탐구를 계속하기로 결심했다.

데카르트는 과거를 청산하고 철학을 새롭게 시작했다. 그는 전통 철학으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이성만으로 진리 체계를 구축하려 했다. 자신의 이성 속에서 지적 확실성의 기초를 발견하고자 했던 것이다.

1. 2. 데카르트의 방법

1. 2. 1. 수학의 예

데카르트는 확실하고 명확한 학문인 수학을 좋아했다. 사실상 그는 모든 지식이 일종의 <보편 수학>이 되기를 바랐다. 그는 인간 사유의 근본을 수학에서 찾으려 했다. 수학적 추론처럼 인간이 알고 있는 사실을 질서 정연하게 나아감으로써 모르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또한 관념이 경험으로부터 생긴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인간의 정신을 통해 어떤 관념을 명석판명하게 알 수 있다고 믿었다. 인간의 정신을 통해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관념(직관)과 수학적 추론(연역)을 더하면 진리 체계를 구축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1. 2. 2. 직관과 연역

데카르트는 직관과 연역의 기초 위에 지식의 거대한 체계를 세웠다. 그에 의하면 직관과 연역이 지식에 이르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그 이외의 방법은 철저히 거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직관은 우리에게 근본적인 개념을 제공하고, 연역은 직관으로부터 우리에게 더 많은 지식을 제공한다. 데카르트는 경험을 통해 얻은 지식은 불확실하다고 보았다. 그에 의하면 직관은 일말의 의심의 여지도 없을 정도로 확실성을 지닌 지적 활동이나 통찰력을 의미한다. 그는 직관을 통해 얻은 지식만 확실하다고 생각했다.

데카르트에 의하면 연역은 확실하게 알려진 사실로부터 얻을 수 있는 필연적인 모든 추론이다. 직관과 연역은 모두 진리를 포함하고 있다. 데카르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삼단 논법을 연역으로 보지 않았다. 삼단 논법과 연역은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삼단 논법은 하나의 <전제>에서 결론에 이르는 것이고, 연역은 하나의 <진리>에서 다른 <진리>를 얻어내는 것이다. 삼단 논법은 전제가 참이냐 거짓이냐에 따라 결론의 진실 여부도 달라진다. 하지만 연역은 진리들 간의 상호 관계를 나타내므로 연역을 통해 얻어진 지식은 참일 수밖에 없다. 그가 이전의 철학자나 신학자를 비판했던 이유도 그들이 삼단 논법으로 결론을 이끌어 냈기 때문이다. 단지 권위에 기반을 둔 전제들에 삼단 논법을 적용한 것이다. 전제가 절대적 진리가 아니므로 그들이 삼단 논법으로 얻게 된 개념도 절대적 진리가 될 수 없다.

데카르트는 지식이 개인 자신의 정신 속에 절대적인 확실성을 가진 출발점 위에서 이루어지기를 원했다. 그러므로 지식은 직관과 연역의 사용을 필요로 하는데 <제1원리들이 직관에 의해서만 주어진다면 직접 얻어지지 않는 결론들은 단지 연역에 의해서 얻어진다>. 이것이 바로 데카르트의 방법이 지닌 핵심적인 구성 요소다.

1. 2. 3. 방법의 규칙들

데카르트는 [정신 지도를 위한 규칙들]에서 21가지 규칙을 제시했는데, 그중 가장 중요한 규칙은 다음과 같다.

규칙 3: 우리가 하나의 주제를 탐구하고자 할 때 <우리의 탐구의 방향은 다른 사람들이 생각해 놓은 것이나 우리 스스로가 억측하는 것으로 가 아니라 우리가 명석하고 판명하게 알 수 있고 확실히 연역할 수 있는 것으로 향해야 한다>.

규칙 4: 이것은 다른 규칙들이 엄격하게 지켜지기를 요구하는 규칙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것들을 정확히 관찰한다면 우리는 거짓인 것을 참이라고 결코 생각하지 않을 것이며 헛되이 정신의 노력을 허비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규칙 5: <우리가 복잡하고 애매한 명제들을 점차 더욱 단순한 것들로 줄여 나간 다음, 가장 단순한 것들에 대한 직관적인 이해로부터 시작하여 이와 똑같은 단계에 의해 다른 모든 명제들의 지식을 얻으려고> 한다면 우리는 정확히 그 방법에 따르게 된다.

규칙 8: <탐구해야 할 문제들 속에서 우리의 오성이 충분히 직관적인 인식을 할 수 없는 단계에 이르면 우리는 거기에서 잠시 멈추어야 한다>.

마찬가지 방식으로 데카르트는 [방법 서설]에서도 네 가지 규칙을 정했다.

첫째, 내가 참인 줄 분명하게 알지 못했던 어떠한 것도 결코 참이라고 받아들이지 말라. 추호의 의심도 없이 명석판명하게 나의 정신에 제시되는 것 외에 나의 판단 속에 어떤 다른 것도 포함시키지 말라.

둘째, 검토 중인 어려운 문제들을 각각 가능한 한, 그리고 타당한 해답을 얻는 데 필요한 만큼 작은 부분으로 나누어라.

셋째, 가장 단순하고 쉬운 대상들에서 시작해서 마치 계단을 올라가듯 조금씩 올라가 점차 더욱 복잡한 대상으로 나의 사유를 진행하라.

넷째, 모든 경우에 빠진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확신할 수 있도록 완벽하게 열거하고 전체적으로 재검토하라.

베이컨과 홉스와 비교해 볼 때 데카르트는 지식을 얻는데 경험을 전혀 강조하지 않았다. 데카르트는 단지 이성적인 힘만으로도 철학의 체계를 구축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1. 3. 방법적 회의

데카르트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모든 것에 회의를 품었다.

나는 전적으로 진리를 탐구하려고 하기 때문에 나에게 조금이라도 의심이 가는 모든 것을 절대적으로 거짓이라고 거부해야만 한다.

그는 이전에 참이라고 믿었던 모든 것을 거짓이라고 거부했다. 그러나 딱 한 가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 존재했다. 그것은 <나는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데카르트는 철학사에서 가장 유명한 문장 가운데 하나를 들어 자신의 주장을 전개한다.

그러나 나는 이 세상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하늘도 땅도 정신도, 어떤 물체도 없다고 스스로 확신했다. 그렇다면 나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확신했는가? 그것은 분명히 아니다. 내가 확신할 때, 또는 내가 어떤 것을 생각했을 때 나는 틀림없이 있었다. 그러나 나도 모를 어떤 위력을 가진 매우 간교한 기만자가 있어서 그는 나를 속이는데 항상 그의 계교를 부린다. 그가 나를 속인다 하더라도 내가 존재한다는 것은 조금도 의심할 수 없다. 내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는 한, 그가 원하는 대로 나를 속인다 해도 그는 내가 아무것도 아니게 할 수는 결코 없다.

나의 생각이 진실이건 거짓이건 생각하는 나는 존재한다. 생각을 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도출할 수 있다. 결국 데카르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cogito ergo sum)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사실은 모든 것 중에서 제1이고 가장 확실한 것이다.

1. 4. 신의 존재와 영원한 사물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가 참인 이유는 나의 정신이 그것을 명석판명하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떻게 나의 정신이 어떤 명제를 참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고 보았을까? 나의 정신이 기만을 당하여 거짓인 것을 참으로 잘못 판단할 수도 있지 않은가? 우리의 명석판명한 관념들이 참됨을 보장하기 위해 데카르트는 신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우리를 거짓 명제가 참이라고 생각하도록 기만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해야만 했다.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유한한 실체인 내가 어떻게 무한한 실체인 관념을 낳았을까? 완전의 관념은 매우 명석판명하므로 불완전하고 유한한 나로부터 생겨날 수 없다. 따라서 완전하고 무한한 존재가 완전하고 무한한 관념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 완전하고 무한한 존재가 바로 신이다. 완전한 관념은 불완전한 나로부터 생겨난 것이 아니라 신으로부터 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거짓과 기만은 결점에서 비롯되는데 신은 완전하므로, 우리에게 거짓 명제가 참이라고 생각하도록 기만하지 않는다. 결국 그는 신이 존재한다는 사실도 증명했고, 우리가 거짓 명제를 참이라 생각하도록 하지 않는다는 것도 증명했다. 

또한 데카르트는 정신과 육체는 서로 독립적으로 분리되어 있다고 보았다. 사유하는 정신은 육체 없이도 존재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렇다면 육체나 사물이 존재한다는 것은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우리는 모두 시각, 청각, 촉각을 통해 사물을 인식한다. 즉, 사물과 육체에 대한 명석판명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신은 기만적이지 않기 때문에 결국 우리는 사물과 육체의 존재를 인정해야 한다. 

1. 5. 정신과 육체

데카르트는 정신과 사물, 그리고 신이 존재한다고 확신했다. 데카르트는 <이원론>의 사상을 취하고 있다. 그가 말한 이원론의 두 가지는 정신과 육체다. 정신은 <사유 thought>라는 속성을 가지고 있고, 육체는 <연장성 extension>이라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데카르트에 의하면 정신과 육체는 서로 완전하게 독립적이다. 정신과 육체가 서로 독립적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생각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을까? 우리는 밥을 먹어야겠다고 생각하면 손으로 수저를 들어 밥을 뜬 뒤 입에 넣는다. 이는 정신이 육체에 영향을 준 것 같이 보인다. 정신과 육체는 서로 독립적인데 어떻게 영향을 줄 수 있을까? 그의 주장에 따르면 정신이 직접 육체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송과선(뇌 속에서 정신과 육체를 연결시켜주는 부분)을 통해 정신과 육체가 상호 작용한다. 이는 지금으로써는 말도 안 되는 주장이다. 이처럼 데카르트는 훗날 많은 철학자들에게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그가 세운 근대 철학의 기반은 철학사에 큰 영향을 주었다.

2. 스피노자

스피노자(1632~1677)는 네덜란드 암스트레담에서 태어난 유대인 철학자이다. 그는 독창적인 철학 사상을 가졌기 때문에 훗날 유대 교회로부터 제명을 당했다. 제명당한 후 암스트레담을 떠나 1663년 헤이그로 갔으며 그곳에서 [에티카]라는 불후의 명작을 저술했다. 그는 렌즈 깎는 일을 하며 가난하게 생계를 유지했지만 사상가로서의 명성은 해외까지 널리 퍼져 존경과 비난을 함께 받았다. 렌즈 깎는 일을 하며 유리가루를 많이 마셔 1677년 45세의 나이에 폐병으로 죽었다.

2. 1. 방법

데카르트와 마찬가지로 스피노자는 기하학적 방법을 통해 실재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데카르트는 제1원리로 출발해서 이것으로부터 지식 전체를 연역하려 했다. 스피노자는 이러한 데카르트의 방법에 공리에 대한 체계적인 방법을 더 추가했다. 데카르트의 방법은 단순했던 반면 스피노자의 방법은 말 그대로 철학의 기하학 수준이었다. 그는 실재의 전 체계를 설명하는 250개 정도의 공리를 세웠다. 스피노자는 결론을 증명할 수 있는 기하학처럼 실재의 본질 역시 증명할 수 있다고 보았다. 

2. 2. 신: 실체와 속성

스피노자는 신을 우주나 자연과 동일시하는 매우 독창적인 개념을 제시했다. 이를 소위 <범신론>이라고 부른다. 그는 <신>과 <자연>을 동일하게 보았다. 즉, 모든 우주, 모든 자연 안에 신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자연이 곧 신이고, 신이 곧 자연이라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복잡한 논증을 거쳐 실재의 궁극적인 본질이 단일 실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 실체는 무한하고 영원하며 완전하다고 보았다. 실체에 대한 관념은 실체에 대한 존재를 함축한다. 왜냐하면 <존재는 실체에 속하므로 단순히 실체의 정의로부터 그 존재를 단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안셀무스의 <존재론적 논증>과 유사하다. 

스피노자는 <자신이 실체에 대해 명석판명한 참된 관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러한 실체가 존재하는가에 대해 회의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자신이 참된 관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거짓일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자와 마찬가지다>라고 말함으로써 우리는 이 완전한 실체의 관념으로부터 그 존재로 확실하게 이행 가능하다고 믿고 있다.

결론적으로 무한한 속성을 가진 유일한 실체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2. 3. 신의 속성의 양태로서의 세계

스피노자는 자연과 신을 같은 개념으로 보았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그는 <능산적 자연>과 <소산적 자연>이라는 두 가지 표현을 사용해 자연을 구분했다. 능산적 자연은 신의 실체와 그 속성을 의미하며, 소산적 자연은 신에 의해 비롯된 일체를 의미한다. 쉽게 말하면 능산적 자연은 신 그 자체이며, 소산적 자연은 신의 양태들 즉, 세계이다. 세계는 신의 양태이므로 만물은 필연성에 따라 행동한다. 만물은 이미 결정지어져 있다는 뜻이다. 신의 양태인 만물에 우연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으므로 세계는 꽉 짜인 방식으로 진행된다. 인간 역시 신의 양태이므로 인간에게 자유란 없다. 인간이 존재하고 행동하는 방식은 이미 결정지어져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행동이든 세계의 사건이든 모두 정해져 있는 방식대로 진행된다. 어떠한 목적도 없다. 그러나 인간은 어떠한 사건이나 행동이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우주도 마치 어떤 목적이 있는 것처럼 생각된다. 이것은 우주와 만물에 대한 잘못된 견해이다. 우주도 인간도 목적을 추구하지 않는다. 대신에 그것들은 단지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는 것뿐이다.

2. 4. 지식, 정신, 신체

그렇다면 인간은 어떻게 실재의 본질을 인식할 수 있을까? 스피노자는 지식을 세 단계로 구분한 다음 우리가 어떻게 최하의 지식에서 최상의 지식으로 옮겨 가는지 설명했다. 그가 말하는 세 단계의 지식은 (1) 상상, (2) 이성, (3) 직관이다. 

<상상 imagination>의 단계에서 우리의 관념은 감각에서 비롯된다. 이때의 관념은 매우 구체적이고 정신은 수동적이다. 이 단계에서의 관념은 구체적일지라도 모호하고 부적합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는 사물이 우리의 감각기관에 영향을 미칠 때만 그것을 인식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나무를 <본다>고 하더라도 나무의 본질을 파악할 수는 없다. 

그다음 단계의 지식은 <이성 reason>이다. 이 관념은 과학적이며 모든 사람이 소유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성은 인간이 실체의 속성을 공유하고 신이 사유와 연장을 공유함으로써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최상의 단계의 지식은 <직관 intuition>이다. 직관을 통해 우리는 자연 전체를 파악할 수 있다. 이 단계가 되어서야 비로소 신을 더 잘 인식하게 되며 완전에 가까워지고 축복받게 된다. 자연 전체를 파악하고, 우리 자신에 대해 완벽하게 알게 되며 우주와 자연의 질서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데카르트는 정신과 육체가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 설명하기 어려운 문제에 직면했지만 스피노자는 정신과 육체가 유일한 실체의 속성이라 설명하며 이 문제를 해결했다. 정신과 육체는 동일한 사물(자연 혹은 신)의 각 측면이므로 둘을 분리할 수 없었다. 

2. 5. 윤리학

스피노자는 인간의 행위도 다른 자연현상과 마찬가지로 이미 정해진 원인과 결과로 이루어진다고 말했다. 자유 의지를 가지고 행동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지의 결과라고 믿었다. 자연도 이미 짜인 원인과 결과로 구성되어 있듯이 인간의 행위도 원인과 결과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았다. 이것을 자연주의적 윤리학이라고 한다.

우리의 행위가 외부의 힘에 의해 이미 결정되어 있다면 어떻게 도덕이 존재할 수 있는가? 여기서 스피노자는 스토아학파의 주장과 비슷한 점을 보인다. 스토아학파는 우리가 사건을 조정할 수는 없지만 우리의 태도는 조정할 수 있기 때문에 세계에 대한 순종을 요구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스피노자는 신에 대한 지식을 통하여 정신적 순종을 할 수 있다고 보았다. 세계가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순간, 감정에 대한 제어력이 더욱 증가하며 사건의 지배를 덜 받게 되기 때문이다. 

3. 라이프니츠

라이프니츠(1646~1716)는 어릴 때부터 천재적이었다. 열세 살 때 학구적인 논문을 편안하게 읽었다. 그는 미적분학을 발견하기도 했으며, 철학자, 신학자 및 당대 문인들과 광범위한 서신을 교류했다.

3. 1. 실체

라이프니츠는 실체의 본질에 대한 데카르트와 스피노자의 주장을 거부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인간의 본성과 자유, 신의 본성을 왜곡시켰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데카르트의 말처럼 사유와 연장성이라는 두 가지 독립된 실체가 존재한다면, 그 두 실체는 인간에게서나 신에게서나 육체와 정신으로서 어떻게 상호 작용하는지에 대한 진퇴양난의 난점에 빠지게 된다. 스피노자는 단일의 실체가 두 가지의 인식할 수 있는 속성인 사유와 연장성을 소유한다고 말함으로써 이 난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그러나 모든 실재를 단일의 실체로 환원한다면 자연의 여러 가지 원소들을 구별할 수가 없게 된다. 분명히 스피노자는 세계가 사유와 연장성의 속성이 표출되는 여러 가지 양태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했다. 스피노자의 일원론은 범신론으로서, 신은 곧 만물이므로 그는 만물이 만물의 부분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라이프니츠는 이러한 실체의 개념이 부적당하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 자신은 신과 인간 그리고 자연 각각이 분리되어 있기를 바라는 반면 스피노자에게는 그러한 세 가지 구별이 거의 사라지기 때문이었다.

3. 1. 1. 연장 대 힘

라이프니츠는 만물의 원소를 <단자 monad>라고 했다. 단자는 원자와는 다르다. 단자는 힘 또는 에너지다. 라이프니츠는 이러한 힘의 요소를 갖춘 단자가 사물들의 근본 실체를 구성한다고 믿었다.

3. 1. 2. 단자

라이프니츠는 실체가 힘이나 에너지를 소유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데모크리토스의 원자가 움직이기 위해서 외부의 힘이 필요하지만, 단자는 스스로 움직일 수 있다. 단자의 성질이 힘 또는 에너지이기 때문이다. 또한 복합 실체는 단자들의 집합체이다. 따라서 정신, 생명, 영혼을 포함한 전 자연은 생명으로 가득 차 있다.

단자는 모양도 크기도 없다. 즉 물질적인 실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라이프니츠는 단자를 형이상학적으로 현존하는 점이라고 보았다. 단자끼리는 서로 독립적이며 상호 간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모양도 크기도 없는 형이상학적 <점>이라는 것이 상상하기 어렵지만 라이프니츠가 의도하고자 했던 바는 단자를 물질적인 원자와 구별하고 싶었던 것이다.

라이프니츠는 단자는 어떠한 물질에 대해서도 선행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참된 실체는 단자이며, 이것을 <정신>이라고 보았다. 그는 정신의 비물질적 본질을 강조하고자 했다. 

3. 1. 3 예정 조화 (preestablished harmony)

라이프니츠는 단자가 <창이 없다>고 말함으로써 세계의 다른 물질이 단자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 <창 없는> 단자는 자신의 목적에 따라 행동한다. 단자는 서로 독립적일지라도 각자의 목적에 따라 대규모 조화를 이룬다. 이는 오케스트라에 비유할 수 있다.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를 제각기 연주하지만 모두가 조화를 이루어 화음을 완성한다. 마찬가지로 모든 단자는 서로 독립적이지만 제각기 목적에 따라 행동하며 질서 정연한 세계가 완성된다.

3. 2. 신의 존재

모든 사물이 조화를 이룬다는 것은 신의 존재에 대한 반증이다. 서로 어떠한 교류도 갖지 않는 그 많은 단자가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는 것은 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3. 2. 1. 충족 이유의 원리

만물은 원인과 결과의 산물이다. 원인이 있어야 결과가 있듯이 어떤 사물이나 사건이 있으려면 그에 선행하는 사물이나 사건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 선행 원인도 더 앞의 선행 원인에 의해 설명되어야 한다. 이렇게 무한히 소급하다 보면 어떤 사건의 궁극적인 원인을 찾아낼 것이다. 그 궁극적인 원인은 선행 원인이 없는 실체여야 한다. 즉 그 실체는 어떤 원인도 필요하지 않으며 그 자체가 필연적이어야 한다. 이 존재가 곧 신이다.

3. 2. 2. 악과 최선의 세계

라이프니츠는 이렇게 조화로운 세계는 모든 가능한 세계 중 최선이라고 보았다. 그 세계에는 악과 무질서도 존재하지만 이는 신의 의도라 믿었다. 모든 것을 완벽하게 만들면 그것은 신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일부 불완전성을 둔 것이다. 신이 악 자체를 창조한 것은 아니다. 악의 원천은 신이 창조한 사물들의 본성 자체다. 사물이 불완전하기 때문에 결여에 의해 악이 발생한 것이다. 악은 곧 결핍의 산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존하는 세계는 신이 만들 수 있는 최선의 세계이다. 자체적으로 악인 것처럼 보이는 몇몇 사물들은 선을 위한 필요조건임이 밝혀진다. 우리가 예술품의 부분만 본다면 아름다움을 인식하지 못하지만, 예술품 전체를 본다면 그 위대함과 아름다움을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생활 속에서 악으로 여겨지는 사건 자체만 볼 때는 그것이 선을 위한 필요조건임을 알 수 없다. 조화로운 세계 전체를 조망한다면 그제야 악도 필요함을 알 수 있게 된다.

제11장 영국 경험론

경험론은 지식이 경험과 관찰을 통해 얻어진다는 주장이다. 대표적인 영국 경험론 철학자는 로크, 버클리, 흄이 있다. 사실 그 이전에 베이컨과 홉스도 경험론자라 불릴 수 있지만 그들은 인간의 지적 능력에 대해 어떠한 비판적 문제도 제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로크는 인간의 정신이 세계의 본질을 파악할 능력이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흄은 이런 주장을 더욱 밀고 나가, 확실한 지식이란 존재하는가에 대해 의문을 품었다. 

1. 로크

존 로크(1632~1704)는 청교도 가정에서 자라났으며 엄한 규율 속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는 처음에 아리스토텔레스에 관심이 많아 논리학과 형이상학을 계속 연구했지만 점차 실험과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의 과학적 관심은 의학으로까지 발전했고 결국 1674년 의학 학위를 받고 개업의 면허도 취득했다. 그가 직업의 갈림길에서 고민하던 중 외교관이라는 새로운 기회가 생겼다. 실제로 그는 여러 분야에서 종사했으며 런던의 정치가의 주치의 겸 고문이 되기도 했다. 57세가 되던 해인 1690년 그는 두 권의 책을 저술하며 일약 철학자이자 정치 이론가로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 두 편의 책은 [인간 오성론]과 [시민 정부론]이다. [인간 오성론]은 영국 경험론의 초석이 되었으며, [시민 정부론]은 미국 독립 선언문의 기초를 마련해 주고 미국의 헌법을 구체화하는데 영향을 끼쳤다.

1. 1. 로크의 인식론

그가 도달한 결론은 지식이란 관념들(ideas), 즉 이성론자들의 생득 관념(본유 관념)이 아닌 우리가 경험하는 대상들에 의해 생성되는 관념들에 국한되어 있다는 것이다. 관념의 기원은 <경험>이며, 또한 경험은 두 가지의 형태를 띠는데 그것은 <감각 sensation>과 <반성 reflection>이다. 로크에 의하면 예외 없이 우리의 모든 관념은 어떤 종류의 경험을 통해 우리에게 들어온다. 이것은 곧 각 개인의 정신이 처음에는 빈 종이와 같아서 경험만이 그 위에 지식을 써넣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1. 1. 1. 생득 관념의 원인

로크는 모든 관념은 경험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생득 관념은 거부해야 했다. 생득 관념이란 태어나자마자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는 관념을 뜻한다. 로크는 과연 우리가 가지고 있는 관념이 생득적인가 의심을 품었다. 생득 관념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어린아이들 조차 원리나 본질에 대한 생득 관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러한 원리나 본질들은 정신이 성숙한 후에야 파악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그것들은 <생득적>이라고 할 수 없다. 따라서 로크는 생득 관념은 허황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가 관념의 기원에 대해 경험적인 설명에 의해 해명할 수 없었던 점이 생득 이론에서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1. 1. 2. 단순 관념과 복합 관념

맨 처음 정신이 백지상태라면 그것은 어떻게 채워지고 언제 채워지는가? 로크는 <경험>이라는 한 단어로 이 물음에 대답할 것이다. 경험은 우리에게 관념에 대한 두 가지 출처, 즉 감각(sensation)과 반성(reflection)을 제공한다. 감각은 우리가 사물을 감각 기관을 통해 지각할 때 수용하게 된다. 사물의 색깔, 온도, 굳기, 맛, 그 밖의 모든 감각 가능한 성질들이 감각을 통해 습득된다. 감각은 관념의 대부분을 이루는 중요한 출처다. 경험의 또 다른 측면은 반성이다. 그것은 감각을 통해 먼저 습득된 관념을 재생산하는 정신활동이다. 사유, 회의, 믿음, 추론, 인식, 의지 등이 이에 포함된다. 다시 말해 관념의 출처는 감각이거나 반성이다. 또한 이들 관념은 단순하거나 복합적이다.

단순 관념(simple idea)은 지식의 주요 출처이다. 이 관념은 정신이 감각 기관을 통해 얻게 된다. 예를 들어 우리가 백합을 경험할 때, 정신은 <흰색>이라는 단순 관념과 <향기로움>이라는 단순 관념을 따로 받아들인다. 정신은 이렇게 감각 기관을 통해 받아들인 단순 관념을 다른 관념으로 전개시킬 수도 있다. 반면, 복합 관념(complex ideas)은 단순 관념의 복합체이다. 흰색, 딱딱함, 달콤함이라는 세 가지 단순 관념이 결합하면 설탕이라는 복합 관념이 된다.

1. 1. 3 제1성질과 제2성질

제1성질은 물체 그 자체에 존재하는 실제 성질이다. 눈덩이는 둥글다. 이 둥글다는 성질은 눈덩이 자체의 성질이므로 제1성질이다. 눈덩이가 굴러간다고 했을 때 '구른다'는 성질도 제1성질이다. 반면, 눈덩이의 냉기나 흰색이라는 관념은 눈덩이 자체의 절대적인 성질이 아니다. 불을 끄면 눈덩이가 더 이상 흰색으로 보이지 않고, 눈덩이를 차다고 느끼지 않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따라서 이런 냉기나 흰색과 같은 성질을 제2성질이라고 한다. 정리하자면 고체성, 모양, 운동, 수와 같이 물체 자체에 속하는 성질을 제1성질이라 하고, 색이나 소리, 맛, 향기와 같이 물체에 속하지 않는 성질을 제2성질이라고 한다. 로크는 제1성질과 제2성질을 소유할 수 있는 존재를 <실체>라고 불렀다.

1. 1. 4. 실체

로크는 실체를 경험함으로써 관념을 얻게 된다고 말한다. 또한, 실체의 관념과 마찬가지로 신의 관념은 다른 단순 관념들로부터 추론되며 직접적인 관찰이 아닌 논증의 산물이라고 믿었다.

1. 2. 로크의 도덕 및 정치 이론

로크는 도덕 역시 수학처럼 논증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선>이라는 단어를 살펴보자. 우리가 선이라고 부르는 것은 쾌락을 증진시켜주고 고통을 감소시켜준다. 어떤 것은 우리에게 쾌락을 가져다주고, 또 어떤 것은 고통을 가져다준다. 따라서 도덕은 선한 행위를 선택하는 일과 관련이 있다. 도덕에 대한 또 다른 정의로 로크는 <선과 악이란 우리의 행위와 법칙 사이의 일치와 불일치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세 가지 종류의 법, 즉 사법, 시민법, 신성법이 있다고 했다. 사법은 모두가 행복해지기 위해 공동체가 만든 규율이다. 시민법은 국가에 의해 제정되며 법원에 의해 시행된다. 신성법은 인간의 이성에 의해 자연히 발견되는 도덕적 규율이다. 그러므로 사법과 시민법은 <도덕적 공정성의 표준>인 신성법에 부합하도록 만들어져야 한다. 결국 로크가 말한 도덕은 인간의 행위가 '신성법'과 일치하는가 그렇지 않은가를 나타내는 것일 뿐이다.

1. 2. 1. 자연 상태

로크는 [시민 정부론]에서 자연 상태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이전에 홉스는 자연 상태를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이라고 보았다. 즉 무정부 상태와 같은 부정적인 개념으로 본 것이다. 하지만 로크는 자연 상태를 홉스와 다르게 보았다. 모든 인간이 자연 도덕법, 즉 신성법을 인식하고 준수한다고 보았다. 이는 자기 자신의 안위를 보호하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자연과 타인의 가치를 고려한 긍정적인 인식이기도 하다.

1. 2. 2. 사유 재산

홉스는 자연 상태를 무정부 상태라고 보았다. 따라서 법적인 절차가 마련된 뒤에야 사유 재산에 대한 권리가 인정된다. 하지만 로크는 사유 재산권은 자연 도덕법에 근거하므로 법에 선행한다고 주장했다. 법이 마련되지 않고도 사유 재산이 인정된다는 뜻이다.

1. 2. 3. 시민 정부

인간은 자연 상태에서 서로 해치지도 않고, 그들의 사유재산권도 인정이 되는데 왜 자연 상태를 벗어나려 하는가? 로크는 이에 대해 <인간은 그들의 재산을 보호하려고 하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여기서 재산은 생명, 자유, 소유물 모두를 통칭한다. 인간이 자연 상태에서 도덕법을 안다는 것은 사실이며, 서로의 평화를 위해 노력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무관심과 소홀로 인해 항상 도덕법을 따르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다툼이 발생하기도 하고, 그럴 때는 이기적으로 판단을 하기도 한다. 이럴 때 사회가 재판을 해주어야 한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 인간은 사회를 구성한다.

1. 2. 4. 통치권

홉스에게서 통치권은 절대적이다. 로크는 <절대적인 힘>이 있어야 한다는 데에는 동의하지만 그것을 입법부의 관할로 옮겨 놓는다. 그리고 그는 삼권분립을 강조했으며, 최고의 권력은 국민들에게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홉스가 주권자를 신의 심판에 맡긴 것과는 달리 로크는 <국민들이 심판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2. 버클리

조지 버클리(1685~1753)는 1685년에 아일랜드에서 태어났다. 버클리의 철학은 상식과 상당히 상반되므로 많은 비판을 받았었다. 버클리는 시작부터 물질의 존재를 부정했다. 그의 도발적인 명제는 <존재하는 것은 지각되는 것이다>이다. 이 명제는 지각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버클리는 한 사물은 그것의 지각된 성질들의 총체라고 보았다. 우리가 사과를 지각한다고 할 때, 둥글고 빨갛고 달콤하고 매끄러운 성질을 지각한다. 사과는 물질, 실체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사과를 지각하는 게 아니라 사과의 성질(둥글고 빨갛고 달콤하고 매끄러운 성질)을 지각하는 것이다. 그 감각들의 복합체를 사과라 지칭하는 것뿐이다. 따라서 버클리는 존재하는 것은 지각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실체나 물질은 결코 지각되거나 감각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은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다. 물질은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감각된 성질들만이 실재할 뿐이다. 

2. 1. 물질은 무의미한 용어

버클리는 감각에 의해 인식되는 물질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다. 다만, 물질은 그것들이 지각되는 한에서만 존재한다는 뜻이다. 이전의 철학자들이 감각되는 물질 이외에 또 다른 실재가 있다고 한 그 물체를 부정한 것이다.

무용한 물질의 개념을 제거하기 위해 버클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우리가 감각이나 반성에 의해 파악할 수 있는 어떠한 사물의 존재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부정하는 존재를 가진 유일한 사물은 바로 철학자들이 물질이나 물질적인 실체라 부르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함으로써 그러한 물질이 없다고 결코 서운해하지 않을 나머지 인류에게 어떠한 손해도 미치지 않으리라고 나는 감히 말할 수 있다.>

2. 2. 과학과 추상 관념

버클리는 과학자들이 추상적인 용어를 사용하며 마치 물질적인 실체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을 비판했다. 과학자들이 '사과'라는 보편적이거나 추상적인 용어를 사용한다. 그러면서 마치 '사과'가 실제 존재하는 실재, 근본적인 물질적 실체를 나타낸다고 믿는다. 하지만 버클리는 그렇지 않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빨갛고, 달콤하고, 둥그런 성질을 동시에 지각한다면 그것들을 '사과'라는 명사로 표현할 뿐이다. 버클리에게는 '사과'라는 물질적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빨갛고, 달콤하고, 둥그런 성질이 동시에 감각되는 것일 뿐이다. '사과'라는 실체가 존재한다는 증거를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우리는 단지 추상적인 용어, 즉 명사를 사용하여 관념들의 집합을 표현한 것이다. 과학자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힘>이나 <중력>이라는 추상 용어를 사용하며 마치 그것들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

버클리가 뜻한 바는 과학을 사멸시키려는 것이 아니고 <사물의 본질>이라는 존재를 부인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가 행하고자 했던 것은 과학적 언어가 도대체 무엇에 관한 것인가를 분명히 하려 했던 점이다. <힘>이나 <중력> 그리고 <인과율>과 같은 용어들은 우리의 정신이 감각에서 얻어낸 관념들의 모음 이상의 것을 나타내지 않는다. 우리는 열이 초를 녹인다는 사실을 경험하지만 이러한 경험에서 우리가 아는 것이라고는 우리가 <녹는 초>라고 부르는 것이 항상 <열>이라고 불리는 것에 수반된다는 점뿐이다. 

2. 3. 신과 사물의 존재

버클리는 <존재하는 것은 지각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우리가 방 안에 있는 책상은 본다고 가정해보자. 책상을 보고 있기 때문에 책상은 존재한다. 하지만 우리가 방을 나오면 책상은 어떻게 되는가? 우리가 지각하지 않으므로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 하지만 책상은 계속 존재한다. 이때 버클리는 우리 말고 또 다른 누군가가 책상을 지각하고 있으므로 책상은 계속 존재한다고 말했다. 또 다른 누군가가 바로 신이다. 아무도 보지 않는 아마존 속 나무도 신이 보고 있기 때문에 존재한다. 따라서 우리가 대상을 지각하고 있지 않더라도 대상이 계속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신의 계속적인 지각 때문이다. 신은 곧 자연에 있는 사물의 질서를 유지시켜 준다.

버클리는 철학적인 유물론과 종교적인 회의주의를 붕괴시켰다고 확신했다.... 중략... 로크의 경험론을 발판으로 일어선 버클리는 인간의 정신이 언제나 특별한 감각적 경험을 추론해내며, 추상 관념은 그에 대응하는 어떤 실재를 지칭하지 않는다는 대담한 견해를 내놓았다.

3. 흄

데이비드 흄(1711~1776)은 로크, 버클리와 더불어 경험론을 주장한 철학자다. 그는 1711년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문학에 관심이 많았다. 흄의 부모는 그를 법률가로 키우고 싶었지만, 문학에 대한 고집이 너무 완강해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일찍이 알아차렸다. 그는 성격이 온순했지만 <철학과 보편적 학문을 추구하는 것 외에는 모든 것을 극렬히 혐오>했다.

흄은 인간의 사유가 얼마나 제한적인지 발견하고는 회의주의에 빠지게 되었다. 로크와 버클리도 이와 비슷한 생각을 했지만 그들은 여전히 사람들이 <상식>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그들은 관념은 경험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했지만 경험에서 비롯된 지식은 확실성을 가져다준다고 확신했다. 

3. 1. 흄의 인식론

3. 1. 1. 정신의 내용

흄은 지각(perceptions)에는 두 가지 형태, 즉 인상(impression)과 관념(ideas)이 있다고 보았다. 인상과 관념은 정신의 모든 내용을 구성한다. 사유의 원재료가 인상이라면, 관념은 인상의 모사에 불과하다. 따라서 인상과 관념의 차이는 생생함의 정도이다. 우리가 고통을 느끼는 순간, 우리의 지각은 인상이다. 인상을 받아들일 때는 고통이 생생하며 선명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그 고통을 회상할 때, 우리는 관념을 갖게 된다. 관념은 인상보다는 덜 생생한 영상에 불과하다. 즉, 우리가 사물이나 느낌을 지각하는 순간은 인상을 갖게 되고, 추후에 그 기억을 다시 떠올릴 땐 관념을 갖게 된다. 흄은 관념은 인상의 모사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관념은 인상 없이 존재할 수 없다. 우리가 관념을 갖기 위해서는 필히 경험을 통해 인상을 얻어야 한다. 하지만 데카르트는 생득 관념(본유 관념)이 있다고 믿었다. 아무 경험 없이 태어날 때부터 갖고 있는 관념이 있다는 것이다. 흄은 데카르트의 생득 관념을 부정했다. 관념이란 필히 경험에서 비롯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3. 1. 2. 관념의 연합

우리의 관념이 서로 관련되어 있는 것은 단지 우연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흄의 말을 빌리면 <하나의 관념은 본래 또 다른 관념을 도입하려는 어떤 연합시키는 성질, 즉 어떤 결합의 끈>이 있어야만 한다. 흄은 그것을 <보통 보편화되어 있어서 최적의 상태로 결합되어 복합 관념을 이루도록 단순 관념들을 지적해 주는 친절한 힘(gentle force)이라고 불렀다.

3. 1. 3. 인과율

흄의 가장 독창적인 사상은 인과성의 문제다. 관념은 인상의 모사라고 했다. 인과율에 대한 관념이 있기 위해서는 인과율에 대한 인상이 우선 있어야 한다. 어떤 인상이 우리에게 인과율의 관념을 주는 것인가? 흄은 인과율의 관념에 대응하는 인상은 없다고 말한다. A 당구공이 B 당구공을 치면 B 당구공이 앞으로 나아간다. 이로부터 우리는 A 당구공의 운동이 B 당구공의 운동의 원인이라고 받아들인다. <A가 B의 원인이다>라고 말할 때 A와 B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첫째, <근접의 관계>다. 왜냐하면 A와 B는 항상 가까이 붙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시간의 선행성>이다. 원인인 A는 결과인 B를 선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인과율의 관념이 제시하는 또 다른 관계가 있는데 그것은 A와 B 사이의 <필연적 관계>다. 근접성, 선행성, 필연성이 모두 충족되어야 인과율을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근접의 관계>와 <시간의 선행성>은 <필연적 관계>를 내포하지 않는다. 흄은 어떤 존재가 또 다른 대상의 존재를 내포하지 않는다고 했다. 따라서 <근접의 관계>와 <시간의 선행성>은 <필연적 관계>를 내포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근접성과 선행성에 대한 인상은 갖지만 필연성에 대한 인상을 갖지 못한다. 두 당구공이 공간적으로 붙어있는 것은 눈으로 볼 수 있어 근접성에 대한 인상을 가질 수 있다. A 당구공이 B 당구공보다 먼저 운동하고 있다는 사실도 눈으로 볼 수 있어 시간의 선행성에 대한 인상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필연성에 대한 인상은 지각할 수 없다. 근접성 선행성에 대한 인상을 가질 수 있지만 필연성에 대한 인상을 가질 수 없어 우리는 인과율에 대한 인상도 가질 수 없다. 사람들이 인과율을 믿는 것은 단지 A와 B의 예들의 반복에 의해서 생겨난 정신의 <연상 습관>때문이다.

흄은 인과율이 모든 지식의 중심이라고 가정했기 때문에, 인과율을 공격한다는 것은 모든 지식의 타당성을 말살하는 것이었다. 그는 인과율을 증명할 방법이 없다고 믿었기에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든 그 원인을 가져야 한다>는 원리를 받아들일 이유가 없었다. 

3. 2. 우리의 외부에는 무엇이 존재하는가?

흄의 극단적인 경험론에 따르면 외부에 물질이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증거가 없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인상뿐이다. 인상은 인간 정신에 의한 주관적인 성질이므로 인상은 외부 물질이 실제로 존재하는지에 대한 증명이 될 수 없다.

3. 2. 3. 실체

흄은 어떠한 형태로든 실체의 존재를 부정했다.

그것이 눈에 의해 지각된다면 그것은 색이어야 한다. 귀에 의한 것이라면 그것은 소리고 입에 의해서라면 맛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특별한 성질들의 집합의 관념과 구별되는 실체의 관념은 가지지 않는다.

3. 2. 4. 신

흄은 관념이 경험을 넘어서지 못한다고 했다. 따라서 경험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관념은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신은 우리가 경험할 수 없다. 그리하여 신에 대한 관념을 가질 수 없다고 그는 주장한다. 그는 신의 존재에 대해 회의적인 생각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가 공식적으로 무신론자라고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의 사상으로 미루어보아 거의 무신론에 가까운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주는 시험 모델인가 아니면 최종적인 설계인가? 이러한 일련의 탐구에 의해 흄은 우주의 질서가 단순히 경험적인 사실이며 그것으로부터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다고 강조하고자 했다. 이것은 그를 필연적으로 무신론에 이르게 하지는 않는다. 설사 그 자신이 무신론자였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그는 단순히 그의 경험론의 엄격한 원리에 의해 자아와 실체의 관념들을 고찰해 온 방식대로 신의 관념을 고찰해 보고자 했을 뿐이다. 그는 확실히 회의적으로 끝을 맺지만, 마침내 그는 <어떤 사람이든 자신의 회의주의의 사변적인 원리들을 얼마나 오랫동안 밀고 나가든 그는 다른 사람들처럼 행동하고, 살아가며, 대화해야만 한다.... 중략... 완전한 회의주의에 빠진다든가 생활 속에서 몇 시간 동안이라도 회의주의자로 살아 보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라고 끝맺는다.

그는 회의주의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일상생활에서까지 그것을 드러내지는 않았던 것 같다. 성격도 좋고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었다는데 그가 일상생활에서까지 회의주의를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 아닐까 싶다.

3. 3. 윤리학

흄은 윤리학에도 매우 관심이 많았다. 그는 도덕적 판단이 이성이 아닌 감정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도덕적 판단은 참과 거짓에 대한 판단이 아니라 순전히 정서적인 반응이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주는 상황을 생각해보자. 그 상황을 바라보는 사람은 고통을 받는 사람에 대해 안타까움과 연민을 느낄 것이고, 고통을 주는 사람에게는 비판적인 정서가 생길 것이다. 이렇듯 도덕적 판단은 개인감정의 영역이라고 흄은 믿었다. 

유클리드의 기하학은 명백히 이성의 영역이다. 하지만 유클리드 기하학 그 어디에서 원의 아름다움에 대한 내용은 없다. 원의 아름다움은 이성으로 논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니다. 그것은 감정의 영역이다. 도덕 역시 이성의 잣대로 판단할 수 없다. 흄은 도덕적 판단의 분명한 기준이 있다고 말한다. 어떤 사람의 행동에 영향받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거나 마음에 드는 것이 곧 도덕적이고 고결한 행동이라는 점이다.

도덕적 판단에 대한 흄의 접근 방식은 많은 비판의 목소리를 불러왔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도덕이란 절대적이고 영구적인 기준에 의해 확립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흄은 도덕을 불완전한 인간의 정서와 감정의 영역으로 보았고, 더군다나 흄의 설명에서 신은 완전히 빠져 있었다.

그러나 흄은 후대 많은 철학자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쇼펜하우어는 헤겔의 저작 전체보다 흄이 쓴 한 페이지에서 더 배울 게 많다고 했고, 칸트는 흄을 읽고 비로소 <독단의 잠에서 깨어났다>고 말했으며, 제러미 벤담은 <눈에서 비늘이 떨어졌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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