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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뮤얼 스텀프] 서양 철학사 - 제4부 근대 후기와 19세기 철학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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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뮤얼 스텀프] 서양 철학사 - 제4부 근대 후기와 19세기 철학

데이터 파수꾼 Baek Kyun Shin 2020. 7. 25. 00:07

제12장 칸트

임마누엘 칸트(1724~1804)는 여든 평생을 독일의 쾨니히스베르크라는 작은 지방 도시에서 살았다. 그는 일생에서 주목할만한 사건의 기복이 없었다. 여행도 하지 않았고 정치적, 사회적 활동도 하지 않았다. 동네 사람들은 그가 산책하는 시간에 시계를 맞췄다고 할 정도로 그는 철저하고 엄격하고 계획적인 사람이었다. 그의 기념비적인 저서로는 [순수 이성 비판](1787), [실천 이성 비판](1788), [판단력 비판](1790)이 있다.

1. 칸트의 문제 형성

칸트는 근대 철학의 혁명을 이룩했다. 플라톤으로부터 시작된 서양 철학은 대륙의 이성론과 영국의 경험론으로 나뉘었고, 그것은 칸트에 의해 합치가 되었고, 칸트로부터 다시 분화되어 나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칸트에게는 <필연>과 <자유>의 문제를 어떻게 조화시키냐 하는 것이 문제였다. 모든 만물은 인과 관계가 있다는 사실, 즉 사건과 사물은 <필연>의 산물이라는 하나의 주장과 인간은 <자유>를 소유하고 있다는 주장은 서로 모순되는 해석이다. 만물이 <필연>의 산물이면 인간은 <자유>를 소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칸트는 이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칸트는 당시 뉴턴의 물리학에 큰 감명을 받았다. 당시의 철학의 두 축은 대륙 이성론과 영국 경험론이었는데, 뉴턴의 물리학은 이들 두 철학적 체계로부터 독립된 지위를 누리고 있었다. 대륙 이성론은 <관념들>의 상호작용을 강조하였으며 실제로 존재하는 사물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성론으로는 뉴턴의 물리학을 설명할 수 없었다. 이런 이유로 칸트는 경험을 초월한 실재에 대한 형이상학, 이성론을 독단적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이성론과 과학의 대립으로 인해 칸트는 형이상학이란 과학만큼 우리에게 뚜렷한 지식을 줄 수 있는가 의문을 갖게 되었다. 당시 과학이 많은 것들을 성공적으로 설명하자 신, 자유, 도덕적 진리에 대한 관심은 점점 소홀해졌다. 한편, 과학은 영국 경험론과도 상관없이 나아갔다. 흄의 가장 두드러진 철학적 논점은 인과성에 대한 공격이었다. 흄에 의하면 모든 지식은 경험으로부터 얻어진다. 우리는 인과 관계를 경험할 수 없기 때문에 인과 관계의 필연성이란 있을 수 없다. 결론적으로 흄은 인과성과 귀납적 추리를 부정했지만 과학은 인과성과 귀납적 추리에 기초하고 있다. 이성론, 경험론, 과학은 서로 다른 길을 걷고 있던 것이다. 칸트는 과학, 이성론, 경험론 사이에서 고민이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칸트는 과학적 지식이란 원리상 형이상학적 지식과 유사하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칸트는 <형이상학의 진정한 방법이란 뉴턴이 자연 과학에 도입했고 자연 과학에서 매유 유효했던 방법과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과학을 공격하지 않고도 형이상학을 구제할 수 있었다.

2. 칸트의 비판 철학과 코페르니쿠스적 혁명

칸트는 흄의 경험론을 접하는 순간 <독단의 잠>에서 깰 수 있었다. 흄은 모든 지식은 경험으로부터 비롯된다고 주장했다. 이는 이성론의 기초에 일격을 가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성론자들은 인간의 이성이 수학처럼 한 관념에서 다른 관념으로 이동하기만 하면 경험을 초월한 실재들에 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칸트는 결국 이성론적 형이상학을 <썩어 빠진 독단론>이라며 반대했다. 그렇다고 그가 흄의 주장을 전적으로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그가 흄의 주장은 거부한 이유는 흄은 올바른 길을 걷고 있었지만 지식이 어떻게 획득되는가를 완벽하게 설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칸트는 흄의 주장과 같이 경험을 초월한 대상에 대한 지식은 가질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신, 자유와 같은 문제에 무관심할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칸트는 이성론과 경험론 모두에게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확립하고 이 체계들 내에서 옹호될 수 없는 것들을 제거하고자 노력했다. 그는 이전 철학자들이 행한 통찰의 결과들을 단순하게 종합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는 진정으로 새로운 접근 방식인 이른바 <비판 철학>에 착수했다.

2. 1. 비판 철학의 방법

비판 철학은 이성의 구성요소들에 대한 분석으로 이뤄졌다. 비판 철학의 방법은 이성이 모든 경험과 별개로 무엇을 얼마나 알 수 있는가를 질문하는 것이다. 칸트에게 비판 철학은 형이상학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형이상학을 위한 하나의 준비였다. 형이상학이 경험 이전의, 즉 선천적 지식과 관계를 갖는다면 그 같은 선천적 지식이 어떻게 가능한가, 이성이 어떻게 선천적 지식을 파악할 수 있는가 하는 비판적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2. 2. 선천적 지식의 본성

칸트는 우리의 지식이 경험으로부터 출발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지식이 경험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라고 부언했다. 우리의 지식이 경험과 시작되더라도 경험에서 나오지 않는 종류의 지식이 분명히 있다는 것이다.

칸트는 흄의 생각과는 반대로 우리는 인과성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으며, 이 지식은 경험이 아니라 이성으로부터 획득되었다고 생각했다. 즉 인과성에 대한 지식은 선천적이라고 보았다. 칸트에 의하면 인과성은 경험으로부터 얻을 수 없는 지식이다. 인간이 모든 변화를 경험할 수도 없으며, 경험한다 해도 그 사건들 간의 인과 관계가 필연적임을 알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변화에 대한 경험은 인과 관계의 <필연성>이나 명제의 <보편성>을 제공하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인과성에 대한 선천적 지식을 가지고 있다. 7 더하기 5는 12가 된다고 우리는 선천적으로 알고 있다. 모든 7개의 사물과 5개의 사물을 더하면 12개의 사물이 된다는 사실을 경험하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다. 그 같은 선천적 지식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그렇다면 이런 선천적 지식이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이 문제는 선천적 지식이 어떻게 가능한가의 문제가 아니라 <선천적 종합 판단>이 어떻게 가능한가의 문제였다. 

2. 3. 선천적 종합 판단

판단에는 <분석 판단>과 <종합 판단>이 있다. <분석 판단>은 '총각은 남자다'와 같이 주어 속에 이미 술어의 개념이 내포되어 있는 판단을 뜻한다. 총각의 정의가 결혼하지 않은 남자다. '총각은 남자다'를 풀어쓰면 '결혼하지 않은 남자는 남자다'가 된다. 이는 동어 반복일 뿐이고 어떠한 새로운 지식도 제공하지 않는다. 또한 분석 판단을 부정하면 논리적으로 모순이 된다. <종합 판단>은 '그 사과는 붉다'와 같이 주어 속에 술어의 개념이 내포되어 있지 않는 판단이다. 그러므로 종합 판단에서 술어는 주어에 새로운 지식을 더해준다. 

더 나아가 칸트는 선천적(a priori) 판단과 후천적(a posteriori) 판단을 구별한다. 모든 분석 판단은 선천적이다. 분석 판단은 수학처럼 경험과 무관하다. <필연성과 보편성은 선천적 지식의 확실한 표시>이므로 칸트는 분석 판단이 선천적이라고 표명했다. 반면 종합 판단은 대부분 후천적이다. '그 사과가 붉은 지'는 관찰을 해봐야 알 수 있다. '철수는 남자다'라는 사실도 철수를 직접 관찰해야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 수 있다. 따라서 새로운 지식을 제공하는 종합 판단은 대부분 후천적이다. 그러나 선천적 분석 판단과 후천적 종합 판단 이외의 또 다른 종류의 판단이 있다. 그것은 <선천적 종합 판단>이다. 이것은 칸트가 가장 관심이 많았던 종류의 판단이다. 칸트는 우리가 <선천적 종합 판단>을 행하고 있다고 믿었지만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는 여전히 의문이었다. 종합 판단은 경험에서 비롯되는데 경험과 독립되어 있는 선천적 판단이 어떻게 가능할까 하는 것이 의문이었다. 그러나 칸트는 수학, 물리학, 형이상학에서 우리가 선천적 종합 판단을 하고 있음을 보여 주었다. <인간은 자유롭게 선택한다>는 판단을 보자. 이는 종합 판단이다. 왜냐하면 새로운 지식을 전해주기 때문이다. 또한 선천적 판단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모든 인간을 경험하지 않아도 인간에 관한 우리의 관념과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2. 4. 칸트의 코페르니쿠스적 혁명

흄은 정신이 대상들로부터 정보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인다고 믿었다. 그러나 정신은 모든 대상들, 심지어 아직 경험하지 못한 대상들에 대해서도 판단해야 한다. 우리가 대상에 대해 내렸던 판단은 미래에도 일치한다. 이런 과학적 지식은 대상의 본성에 대한 믿을만한 정보를 제공해 준다. 그러나 이 지식은 종합적이면서 선천적이다. 따라서 정신이 대상들로부터 정보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인다는 가정에 의해 설명될 수 없다. 선천적이라는 뜻은 경험으로부터 지식을 얻는다는 것이 아니며, 경험으로부터 지식을 얻지 않는다는 것은 정신이 대상으로부터 정보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칸트는 정신과 그 대상 사이의 관계에 관한 새로운 가정을 시도해야만 했다.

칸트의 새로운 가정은 정신이 대상에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바로 정신의 작용에 순응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칸트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다. 코페르니쿠스 이전에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었다. 하지만 코페르니쿠스는 지구는 태양 주위를 공전한다고 주장했다. 마찬가지로 칸트도 대상이 정신에게 일방적으로 정보를 주는 것이 아니라, 정신이 자신만의 형식대로 그 대상을 인식한다고 주장했다.

지금까지 우리의 지식은 대상에 순응해야 한다고 가정하였다. 그러나 개념에 의해 선천적으로 대상에 관한 어떤 것들을 확립함으로써 대상에 관한 우리의 지식을 확장하고자 하는 우리의 모든 노력은 이 가정에서 결국 실패로 귀결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만일 대상이 우리의 지식에 순응해야 한다고 가정한다면 우리가 형이상학의 임무를 좀 더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시험해야 한다... 중략... 만일 직관이 대상의 구조에 순응해야 한다면, 나는 어떻게 우리가 대상의 어떤 것을 선천적으로 알 수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 그러나 만일 대상 - 감관의 대상과 같은 -이 우리의 직관 능력의 구조에 순응해야 한다면, 나는 아무런 곤란도 없이 그와 같은 가능성을 생각할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선천적 종합 판단이 가능하려면 경험 이전에 지식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 만일 우리의 정신이 대상에 순응한다면 대상을 경험하지 않고 지식을 얻을 수 없다. 하지만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를 해, 대상이 정신에 순응하는 구조라면 대상을 경험하지 않고도 지식을 얻을 수 있다. 즉, 선천적 종합 판단이 가능하다.

3. 이성적 사유의 구조

지식은 인식하는 자와 인식되는 사물의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물 자체는 알 수 없다. 물 자체란 감각으로 도달할 수 없는 본질적인 사물 또는 사건을 뜻한다. 반대되는 개념은 '현상'이라 한다. 플라톤의 철학에 비유하자면 물 자체는 이데아라고 볼 수 있다. 우리가 물 자체를 알 수 없는 이유는 내가 그것을 인식하는 순간, 나의 정신이 그것을 구조화해 허용하는 범위만큼만 인식하기 때문이다. 만일 선글라스를 끼고 세상을 본다면 세상이 어둡게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다.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 한(대상이 정신에 순응하는 한) 결코 밝은 세상(물 자체)을 볼 수 없다.

3. 1. 현상적 실재와 본체적 실체

현상적 실재는 우리가 경험하는 대로의 세계를 의미하고, 본체적 실체는 물 자체를 의미한다. 위에서 설명했듯이 우리는 물 자체를 경험할 수 없다. 우리가 인식하는 대상은 정신이 감각 기관으로 받아들인 대상이다. 

우리와 독립하여 존재하는 실재가 우리 외부에 있지만 우리는 그것이 우리에게 표상되고 우리에 의해 조직된 것으로만 그것에 대해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물 자체의 개념은 우리의 지식을 증가시켜 주지 않고 우리에게 인식의 한계를 상기시켜 줄 뿐이다.

3. 2. 이율배반과 이성의 한계

칸트는 자아, 우주, 신의 관념을 규제적 관념이라고 정의했다. 자아, 우주, 신은 경험에 의해 인식될 수 없으므로 <선험적>이다. 따라서 그것들은 직관(경험)이 아니라 순수 이성에 의해서만 만들어진다. 자아, 우주, 신에 대해 경험 대상인 것처럼 논의를 한다면 실패를 할 수밖에 없다. 이들에 대한 네 가지 이율배반적인 명제들로부터 그 실패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이들 네 가지 이율배반은 우리가 경험을 초월한 세계의 본성에 대해 논의할 때, 여러 명제들의 반대 측면에 대해서도 동일한 강도로 주장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즉 (1) 세계는 시간과 공간 속에 제한되어 있다. 또는 그것은 제한되어 있지 않다. (2) 세계 내의 모든 혼합물은 단순 부분들로 구성되어 있다. 또는 세계 어느 곳에서도 단순한 것이란 존재하지 않으므로 세계 내의 어떠한 혼합물도 단순한 부분들로 구성되어 있지 않다. (3) 자연법칙에 따르는 인과성 이외에 또 다른 인과성, 즉 자유의 인과성도 역시 있다. 또는 세계 내의 모든 것은 오직 자연의 법칙에 따라 발생하므로 자유란 없다. (4) 세계의 한 부분이나 그 원인으로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자가 존재한다. 또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자는 아무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이율배반들은 독단적 형이상학에 의해 야기된 불일치이므로 그것들은 <무의미>이다.

이런 규제적 관념(자아, 우주, 신)에 대해서 우리는 확정적으로 말할 수 없다. 인간은 자유롭다든지 신은 존재한다는 논증적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규제적 관념은 감각적 경험 너머에 존재하기 때문에 정신이 그 관념에 대해 활용할 자료가 없다.

칸트는 신의 존재한다는 논증을 할 수 없듯이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논증도 할 수 없다고 보았다. 우리는 순수 이성만으로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도 반증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4. 실천 이성

칸트를 경외로움에 빠지게 한 것은 <드높이 반짝이는 하늘> 이외에도 <내면의 도덕 법칙>이었다.

그는 우주, 세계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았지만 내면의 도덕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았다. 

<나는 인간 영혼에 대해서 그것의 의지는 자유롭다고, 그리고 또 그것은 자연적 필연성에 종속되어 있다고, 즉 자유롭지 않다고 동일한 것에 대해 명백하게 모순되게 말할 수밖에 없다>고 칸트는 말했다.

인간의 의지는 자유롭지만, 동시에 필연성에 종속되므로 자유롭지 않다는 것이다. 칸트는 이에 대해 물 자체로서의 자아는 자유롭지만 현상적 자아는 자연적 필연성과 인과성에 종속되어 있다고 말함으로써 이 모순을 피했다. 

칸트는 실재를 두 종류, 즉 현상적인 것과 본체적인 것(물 자체)으로 구분하고, 본체적인 것과 관련하여 실천 이성, 즉 도덕의 사용을 정당화했다. 

4. 1. 도덕적 지식의 기초

칸트에 의하면 도덕 철학의 임무는 모든 인간들을 결속시키는 행동 원리에 우리가 어떻게 도달할 수 있는가를 발견하는 일이다.

칸트는 도덕적 지식도 과학적 지식과 마찬가지로 선천적 판단에 기초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과 세계 속에서 도덕을 모색해서는 안 된다. 도덕은 오직 이성의 세계 속에서만 선천적으로 모색되어야 한다.

4. 2. 선의지로 정의되는 <선>

칸트는 선(善)의 결과보다 선을 행하려는 의지를 더 중요하게 여겼다. 선을 행하려는 의지를 선의지라고 하는데, 칸트는 선의지 그 자체를 선이라고 보았다. 그의 도덕 철학에서는 의지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도덕적 가치는 의지 안에 있으며 선의지도 의무감에서 행동하는 것이다.

이성적 존재로서 우리는 이러한 의무를 하나의 <명령>으로 여긴다. 이는 도덕적 명령이다. 도덕적 명령은 가언 명령과 다른 개념인데, 가언 명령은 "책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이렇게 해야 한다"나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기 위해서는 이렇게 해야 한다"와 같은 명령이다. 책상은 꼭 만들지 않아도 되고, 인기도 꼭 끌지 않아도 된다. 절대적으로 필요하지 않은 어떤 목적을 위한 명령을 가언 명령이라 한다.

4. 3. 정언 명령

가언 명령과 달리 도덕적 명령은 <정언 명령>이라 한다. 이 정언 명령은 모든 인간에게 적용된다. 그리고 이것은 <다른 목적과 관련 없이 그 자체로 필연적인 행위>를 명령한다. 가언 명령이 목적을 위한 명령이었다면 정언 명령은 그 자체가 필연인 명령이다. 칸트에 의하면 우리는 정언 명령에 따라 행동해야 하며, 그 행동이 자연법칙에 따르게끔 하라는 것이다. 칸트는 정언 명령을 아래와 같이 정의한다.

정언 명령이란 다른 목적과 관련 없이 그 자체로 필연적인, 즉 객관적으로 필연적인 행위이다. 너 자신의 경우나 또는 다른 사람의 경우나 모든 경우에 있어서 인간을 결코 한낱 수단으로만 대하지 말고 목적으로 대하도록 행동하라. 의지가 그것의 고유한 격률을 통해 동시에 보편적 법칙을 만들어 가는 것으로 자처할 수 있도록 항상 행동해야 한다.

4. 4. 도덕적 요청

칸트는 신이 존재한다거나 인간의 의지가 자유롭다는 점을 증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자유는 우리가 정언 명령을 따라야 할 의지를 가정할 필요가 있기에 상정되어야 한다. 만약 우리에게 자유가 없다면 우리는 정언 명령을 따라야 하겠다는 의지를 가질 수 없다. 칸트에게 정언 명령을 따르지 않는 인간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따라서 자유는 상정되어야 한다. 그렇기에 칸트에게 도덕의 첫 번째 요청은 '자유'다.

두 번째 도덕의 요청은 '불멸성'이다. 도덕 법칙은 우리가 행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옳게 행동하도록 명령한다. 즉 도덕은 우리의 '행복'보다 '덕'을 중요시한다. 하지만 우리는 최고선이란 행복과 덕의 융합이라 여긴다. 그러나 행복한 일이 항상 옳은 일은 아니고, 옳은 일이 항상 행복한 일이라고 볼 수 없다. 우리는 행복과 덕 사이의 필연적인 연관 관계를 찾을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최고선의 개념에서 행복과 덕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고 결론을 내린다. 행복과 덕의 완전한 조화를 위해 신의 존재가 필요하다. 이것은 종교 없는 도덕이란 있을 수 없다는 뜻이 아니다. 칸트에 따르면 인간은 신이 없어도 도덕적 의무를 준수한다. 

그러나 칸트는 <순수한 실천 이성의 대상이며 궁극적 목적으로서 최고선의 관념을 통해 도덕 법칙은 종교에 이르게 되고, 즉 신적 명령으로서 모든 의무에 대한 인식에 이르게 된다. 그런데 그 신적 명령이란 제재, 즉 하나의 외적 의지의 자의적 명령이 아니라 모든 자유 의지 자체의 본질적 법칙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궁극적 존재의 명령으로 간주되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최고선 - 도덕 법칙은 이것을 우리의 노력 대상으로 간주할 것을 의무로 삼게 한다 - 을 오직 도덕적으로 완전하면서 동시에 전능한 의지에서만 획득하기를 희망할 수 있기 때문이다.>

5. 미학

앞서 살펴봤듯이 칸트는 누구나 선하다고 판단할 수 있는 도덕 규칙을 개발했다. 이 규칙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며, 그렇기 때문에 그 규칙은 보편적이고 객관적이다. 마찬가지로 과학적 법칙도 모든 사람에게 타당하거나 참된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미학'에서 만큼은 누구나가 아름답다고 할 수 있게 하는 미학 규칙이란 있을 수 없다고 보았다. 

결국 칸트는 아름다운 것에 대한 우리의 판단이 주관적인 느낌에 기초한 것일지라도 아름다운 것은 <보편적으로 기분 좋게 하는 것>으로 정의된다는 사실을 보여 주려 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칸트가 정의한 미학은 아래와 같다.

2 곱하기 2는 모든 사람에게 반드시 4이다. 아름다운 것에 대한 판단도 필연성의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을까? 칸트에 의하면 나는 <주관적 원리와 느낌만으로 유쾌한 것이나 불쾌한 것을 결정하는, 그리고 개념을 통해서가 아니라 보편적 타당성을 가지고 그것을 결정하는 원리>를 소유해야 한다. 이러한 이유에서 심미적 판단은 상식의 존재를 전제하는 데 달려있다. 그와 같은 상식의 전제 하에서만 나는 심미적 판단을 내릴 수 있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나의 판단에 <동의할 것>이라는 사실을 의미한다기보다 오히려 모두가 그것에 <동의해야 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우리가 2 곱하기 2는 4라는 사실을 이야기할 경우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이러한 판단이 지닌 보편적 진리 - 설사 이 경우에 우리가 객관적 원리를 취급할지라도 - 를 이해할 수 있거나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가정할 수 있다. 이처럼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는 아름다운 것에 대한 주관적 판단을 이야기할 수 있는 상식이 존재한다고 추측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에서 생각해 보면 칸트는 아름다움에 대한 또 다른 정의로 다음을 제시한다. <아름다운 것은 개념과 무관하게 필연적인 기쁨의 대상으로 인식되는 것이다.>

제13장 독일 관념론

1. 독일 사상에 미친 칸트의 영향

칸트의 비판 철학에 바로 뒤이어 나타난 철학이 19세기 독일 관념론이다. 관념론은 일종의 형이상학으로서 우주란 오직 정신적인 대상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실제로 거기에는 어떠한 물질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독일 관념론의 출발은 칸트의 비판 철학이었다. 칸트는 물질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았다. 다만 물 자체는 우리의 감각으로 도달할 수 없다고 보았다. 우리의 감각과 경험으로는 도달할 수 없지만 경험 너머에는 물 자체의 영역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빨간 사과를 봤을 때, 우리는 현상만을 경험할 뿐이다. 그러나 빨간색 배후에는 빨간색과 관련된 물 자체가 존재해야만 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 물 자체를 지각할 수 없다. 왜냐하면 정신은 현상계만 인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피히테는 칸트의 논증 속에 드러난 명백한 모순을 제시한 최초의 독일 관념론자다. 어떤 것이 존재하지만 그것에 대해 어떻게 아무것도 알 수 없을 수가 있을까? 존재한다고 말할 때 우리는 이미 그것에 대해 일부는 알고 있다는 것을 내포하는 것이 아닌가? 어떤 것이 영원히 인식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은 모순이다. 우리가 어떤 것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그것의 일부는 어느 정도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칸트는 물 자체는 존재하지만 우리는 물 자체에 대해 어떤 것도 알 수 없다고 말했다. 따라서 피히테는 칸트의 주장이 모순적이라고 생각했다. 피히테는 칸트와 상반되게,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든 인식 가능하다는 명제를 제시한 바 있다. 피히테는 칸트가 철학적 진보를 이룩했다고 믿었고 그의 철학을 더욱 발전시켜 물 자체를 제거하여 형이상학적 관념론으로 변형시켰다.

다른 독일 관념론자들도 칸트의 비판 철학을 형이상학적 관념론으로 변형시키려 했다. 대표적인 철학자가 헤겔, 셸링, 그리고 쇼펜하우어였다. 그들은 칸트의 물 자체라는 개념은 있을 수 없다고 믿었고, 경험적 지식은 정신의 산물이라고 보았다.

2. 헤겔

2. 1. 생애

칸트는 형이상학이 불가능하다고, 즉 정신은 실재의 모든 것을 파악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반면 헤겔은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이고,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이다>라고 주장하며, 실재의 모든 것을 파악할 수 있다고 믿었다. 

헤겔(1770~1831)은 1770년 슈투트가르트에서 태어나 독일의 가장 찬란한 지적 시기를 살았다. 이 해는 베토벤이 태어난 해이기도 하며, 괴테가 20세가 되던 해다. 그리고 46세였던 칸트는 이때에는 아직 그의 주저인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을 쓰지 않았다. 

2. 2. 절대정신

독일 관념론자들은 지식의 원천이 정신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떤 종류의 <정신>이 지식을 만들어 내는가? 우리는 외부 세계를 경험한다. 그러나 외부 세계를 우리가 만들지는 않았으므로 그것은 우리와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외부 세계가 우리 개별적 정신과 독립되어 있다면 다른 어떤 정신의 산물이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외부 세계는 하나의 절대적 주체인 <절대정신>의 산물이다. 또한 헤겔에 의하면 실재 세계는 우리의 정신이 지닌 주관적 개념 이상의 것이다. 실재 세계는 곧 이성 또는 사유이다.

의자를 예로 들어 보자. 의자란 무엇인가? 또는 그것은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가? 헤겔에 의하면 우리가 인식 불가능한 물 자체란 있을 수 없다는 결론을 중시한다면 의자는 우리들이 그것에 관해 가질 수 있는 관념들의 총체로 구성되어야만 한다. 이러한 기초 위에서 의자는 우리가 그것을 경험할 때 그것에서 발견하는 모든 보편자들로 구성되어야 한다. 우리는 그 의자가 견고하고 갈색이며 둥글고 작다고 말한다. 이것들은 모두 보편적 관념들이며, 그것들이 이런 식으로 서로 관련될 때 그것들은 하나의 의자가 된다. 이 보편자들은 의자 내에 그들의 존재를 가진다. 즉 보편자들은 결코 단독으로 또는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의자에서 인식 불가능한 측면은 없다. 즉 우리가 경험하는 특질들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으므로 다음과 같은 의미가 된다. 의자는 우리가 그것에 관해 인식한 무엇이며, 우리가 그것에 관해 인식한 무엇이란 그것이 보편자들이나 관념들의 조합으로 구성된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보편자들이 객관적 상태를 갖는다는 말은 그것들이 인식 주체와 독립된 그들의 존재를 갖는다는 의미다. 동시에 의자의 예에서 보여 주듯이 헤겔은 사유의 대상이 결국 사유 그 자체 내에 존재한다고 봄으로써 인식 작용과 존재 사이의 동일성을 주장했다. 인식과 존재는 동일한 동전의 두 면에 불과하다. 그의 관념론의 본질은 우리 의식의 대상, 즉 우리가 경험하고 사유하는 <사물> 그 자체가 사유된다는 그의 생각에 있다. 결국 헤겔은 실재성이란 절대 관념에서 발견될 수 있다는 생각에 도달했다.

2. 3. 실재의 본성

플라톤은 실재와 현상을 엄격하게 구분했지만, 헤겔은 실재가 곧 현상이라고 말했다. 헤겔은 세계를 하나의 유기체적 과정으로 보았다. 앞서 말했듯 그는 참 실재는 절대자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에게 절대자는 하나의 역동적 과정, 즉 부분은 갖고 있으나 하나의 복잡한 체계로 통합된 유기체다. 그는 절대 관념이 인간의 정신뿐만 아니라 세계 전체에도 녹아 있으므로 인간의 이성이 절대자의 내적 본질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2. 3. 1. 논리학과 변증법적 과정

헤겔은 논리학을 강조했는데, 그는 논리학을 형이상학과 동일시했다. 인식과 존재는 일치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성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을 동일시했으므로 논리 역시 현실적인 것 안에서 발견되어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논리학은 우리가 그것에 의해 우리의 현실적인 것에 대한 경험으로부터 절대자를 묘사하는 범주들을 추론하는 과정이며, 이러한 추론 과정이 헤겔의 변증법적 철학의 핵심이었다.

변증법적 과정은 3단계 운동을 보여주는데, <정립>, <반정립>, <종합>의 구조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그 <종합>은 또다시 새로운 <정립>이 되어 이 과정은 그것이 절대 관념이 될 때까지 계속된다. 헤겔은 사유가 운동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모순>, <반정립>은 인간의 추론을 멈추게 하지 않고 오히려 가속화시킨다. 

사물에 대해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가장 일반적인 개념은 그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여러 사물들이 각기 다른 특성을 가졌다고 할지라도 그것들은 모두가 공통적인 것 하나, 즉 존재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존재는 정신이 일반화할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개념이다. 헤겔의 체계는 존재의 개념으로부터 시작된다. 이것이 곧 <정립>이다. 헤겔은 존재와 무가 동일하다고 보았다.

헤겔에 의하면 참으로 <존재와 무를 동일한 것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사유가 스스로 행하고자 하는 어려운 것들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헤겔이 주장하는 요지는 무가 존재로부터 추론된다는 점이다. 동시에 무의 개념은 정신을 존재의 개념으로 쉽게 회귀시킨다. 물론 여기서 우리가 특정한 사물에 대해서도 그것들이 동시에 무와 동일하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었다. 그의 논의는 순수 존재의 개념에 국한되어 있으므로 그 개념도 무의 관념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존재로부터 무로의 정신 운동은 <생성>으로 이어진다. 즉, 존재는 <정립>, 무는 <반정립>, 생성은 <종합>이다. 생성은 존재와 무의 통일이며, 하나의 관념이다. 이처럼 헤겔은 사물에 대해 알 수 있는 최저 수준의 지식에서 출발해서 지식의 영역을 끝없이 확장시켰다. 

2. 3. 2. 정신 철학

헤겔의 정신 철학에서도 변증법적 요소가 드러난다. 헤겔은 주관적 정신을 정립, 객관적 정신을 반정립, 절대정신을 종합으로 이해했다. 주관적 정신은 인간의 내적 작용이며, 객관적 정신은 사회 정치적 제도 속에서 외적으로 구현된 정신이며, 절대정신은 예술, 종교, 철학으로 드러난다. 

2. 4. 윤리학과 정치학

2. 4. 1. 정의의 개념

헤겔은 인간이 자유를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여기서 헤겔의 중심 문제는 개별적 인간들이 이성적으로 행동하는 한, 그들의 자유로운 행위는 우주의 이성에 합치된다는 점이다. 그들의 개별적 의지들은 보편적 의지와 조화된다.

헤겔은 선을 <자유의 실현, 즉 세계의 절대적 최종 목적>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헤겔에게 자유의 실현은 의무의 한계 내에서만 일어나야 했다. 이런 의미에서 가장 자유로운 사람은 그의 의무를 가장 완전하게 수행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불가피하게 헤겔은 한편으로 개인의 자유 및 정의와, 또 한편으로는 인류의 구체적 제도들, 특히 국가 내의 보편적 의지와의 종합을 발견해야 했다.

2. 4. 2. 국가

헤겔은 국가에서도 마찬가지로 변증법적 발전을 이룩한다고 보았다. 변증법적 단계에 의해 개인은 가족이 되고, 가족은 시민 사회가 되고 시민 사회는 최종적으로 국가로 통합된다. 헤겔에 의하면 국가는 절대적인 이성적 의지며, 또한 윤리적 이념의 현실태이다. 

법률이 필요한 이유는 인간이 자유로운 선택의 능력을 갖고 있으므로 다른 사람들에게 해가 되는 결정을 선택할 수 있다는 데 있다. 그들의 행위가 타인에게 해가 되는 한 그들의 행동은 비이성적이다. 그러므로 법률의 기능은 행위를 이성적으로 하게 하는 것이다. 어떤 행위를 이성적이게 하는 것은 그것이 한 개인의 사적 선뿐만 아니라 공적 선도 성취한다는 데 있다. 이성적으로 행위를 하는 사람만이 자유로울 수 있다. 왜냐하면 오직 이성적 행위만이 사회에서 허용되며 사회적 해약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국가의 기능은 임의적이며 비합리적인 명령을 공포함으로써 개인의 피해나 불행을 조성하는 것이 아니라 법률을 통해 이성적 행동의 총계를 증가시키는 것이다. 이와 같이 국가는 자유의 이념을 최대한으로 발전시키고, 오직 각 구성원들이 그 자유를 성취함에 따라서 객관적 자유를 성취하고자 추구하는 하나의 유기체다. 이런 점에서 국가의 법률은 임의적인 것이 아니라 개인들이 이성적으로 행위를 한다면 스스로가 선택하게 되는 행동의 이성적 규칙들이다.

다시 말해 최고의 자유는 개인이 전체 사회의 보편적, 이성적 의지에 따라 행동할 때 발생한다.

3. 쇼펜하우어

헤겔과 동시대 철학자인 쇼펜하우어는 "헤겔의 모든 철학 저서에서 배울 수 있는 것보다도 흄의 한 페이지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이 훨씬 더 많다"라고 말하며 헤겔을 비판했다.

3. 1. 쇼펜하우어의 생애

쇼펜하우어(1788~1860)는 1788년 폴란드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부유한 상인이었는데 쇼펜하우어도 자신의 뒤를 따라 상인이 되기를 바랐다. 그래서 쇼펜하우어는 초기에 상인이 되기 위한 교육을 주로 받았다. 하지만 곧 철학에 강한 관심을 보였다. 그가 17세가 되던 해 아버지가 죽자 그는 어머니로부터 어떤 도움도 받지 못하고 자립을 해야 했다. 그와 어머니의 성격을 정반대였다. 어머니는 천성이 낙천적이고 쾌활한 사람이었지만 쇼펜하우어는 어려서부터 염세적이었다. 그는 괴팅겐 대학교 의학부에 입학했지만 이듬해 "대단한 존재"인 플라톤과 "경이로운 존재"인 칸트를 접하고 나서 전공을 의학에서 철학으로 바꾸었다. 

쇼펜하우어의 걸작은 [의자와 표상으로서의 세계](1819)였다. 그는 이 책을 1814년부터 1819년까지 독일의 드레스덴에서 저술했다. 출판 당시 이 책은 별로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쇼펜하우어의 철학 체계를 온전히 담고 있는 책이다.

이후 쇼펜하우어는 베를린 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했다. 하지만 자신의 강의 시간을 거장인 헤겔의 강의와 정확히 같은 시간에 지정했기 때문에 수강생이 굉장히 적었다고 한다. 헤겔을 포함하여 많은 희생자를 낸 콜레라의 유행으로 그는 1831년 베를린을 떠나 프랑크푸르트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다른 저서들을 저술했다.

3. 2. 충족 이유율

쇼펜하우어는 25세에 박사 학위 논문으로 [충족 이유율의 네 가지 근거에 관하여]를 저술했다. 이 논문에는 충족 이유율에 대한 그의 주장이 담겨있다. 충족 이유율이란 '이유(reason)가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다. 충족 이유율은 특히 과학에서 발견된다. 과학은 대부분 인과관계에 의해 설명되기 때문이다. 그는 물리적 대상, 추상적 개념, 수학적 대상, 자아에도 모두 필연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그는 사람들이 이런 필연성에 의해 행동한다고 믿었다. 그가 주장한 필연성의 편재성은 심각한 염세주의를 자아냈다. 

3. 3.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쇼펜하우어의 저서 중 가장 유명한 저서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다. 이 책은 <세계는 나의 표상이다>라는 놀라운 문장으로 시작한다. 

3. 3. 1. 세계

세계는 인간, 동물, 식물, 물건, 별, 달 등 우주 전체를 포함한다. 그러나 인간, 동물, 식물, 우주 등이 왜 <나의 표상>일까? 

쇼펜하우어가 주장하길, 세계에 대한 자신의 경험에 관하여 주의 깊게 반성하는 사람은 <그가 알고 있는 것이 태양과 대지가 아니라 태양을 보고 있는 눈, 대지를 느끼는 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를 에워싸고 있는 세계도 단지 하나의 표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에 의하면 이것은 <만물이 인식을 위해 존재하므로 전 세계도 주관, 지각하는 사람의 지각, 한마디로 말해 표상과 관계된 객관일 뿐이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3. 3. 2. 표상으로서의 세계

표상이라는 단어는 문자 그대로 "앞에 놓인" 또는 "앞에 위치한 것", 또는 "제시(presentation)된 것"을 의미한다. <표상으로서의 세계> 또는 <나의 표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는 것, 즉 지각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는 우리가 지각하는 것 이외에 어떤 다른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현실적인 세계는 우리가 지각하는 대로 존재할 뿐 우리의 지각이나 오성과 분리되어서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주체고 세계는 객체다. 주체인 우리가 단지 지각하는 대로 객체인 세계를 인식한다. 따라서 객체는 온전히 주체에 의해 결정된다. 

하지만 세계에 대한 어떠한 표상도 완전하지는 않을 것이다. 따라서 나의 표상과 당신의 표상은 서로 다를 수 있다. 하지만 나의 표상과 다른 표상은 내가 인식할 수 없으므로 세계는 <나의 표상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지각하는 세계보다 더 실재적인 세계를 인식할 수는 없다. 지각은 인식의 기초이기 때문이다. 

결국 세계는 하나의 오성적 주체인 나에게 객관적 또는 경험적으로 제시된 것이기 때문에 나의 표상인 것이다.

3. 3. 3. 의지로써의 세계

의지에 대한 쇼펜하우어의 정의는 칸트의 물 자체 이론에 대한 그의 견해 차이를 보여 준다. 칸트는 우리가 어떤 물체의 본질을 결코 인지할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쇼펜하우어는 우리들 자신이 물 자체이며, 물 자체는 <의지적이다>라고 말한다. 

쇼펜하우어의 말대로 <의지의 행위는 물 자체와 가장 근접하고 가장 분명한 명시다.> 그러므로 이것이야말로 진리로 통하는 유일한 좁은 문, 즉 의지가 각 개인의 본질이라는 사실을 발견한 셈이다. 우리가 영원히 모든 사물의 외부에 존재하는 동안 우리 자신은 인식될 수 있는 내적 본질에 속해 있다. 이러한 사실로 쇼펜하우어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르렀다. 즉 <우리의 내부에서 비롯된 이러한 길은 물 자체에 속해 있는 내적 본질에 대하여 우리를 개방시키며,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의지가 만물의 내적 본질이라는 사실을 가르친다.> <만물>이 곧 세계를 구성하는 것이므로 쇼펜하우어가 생각하기에 그것은 우리가 세계를 의지로써 간주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쇼펜하우어에게 의지는 사람에게만 속해 있는 것이 아니다. 의지는 동물이나 심지어 무생물에게서도 발견될 수 있다. 각각의 사물은 그 의지의 특정한 발현이다. 또한 쇼펜하우어는 의지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의지는 모든 내적, 무의식적인 물질적 기능 속에 있는 대행자, 즉 오직 의지뿐인 유기체 자체다. 모든 자연의 힘들 속에 있는 활동적인 충동은 의지와 동일시된다. 우리가 어떤 자발적인 운동이나 근원적인 힘들을 발견하는 모든 경우에 우리는 가장 내적인 본질을 의지로 간주하지 않으면 안 된다.>

3. 4. 염세주의의 근거

쇼펜하우어에 의하면 모든 사물은 그 내부의 의지에 의해 움직인다. 따라서 모든 사물은 내부의 시계 장치로 동작하는 인형과 같다. 가장 하등한 아메바나 가장 고등한 인간 모두 동일한 힘인 의지에 의해 움직인다. 모든 개체는 의지에 의해 강제적으로 움직인다. 심지어 자는 동안 육체에서 일어나는 유기적 기능도 모두 의지의 발현이다. 따라서 쇼펜하우어는 인간이 동물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의 지능이나 동물의 본능은 동일한 수준인 것이다. 

모든 자연 속에 있는 의지의 무한한 힘이 인간에게는 비관적 의미를 지닌다. 쇼펜하우어에 의하면 <인간은 오직 겉보기에만 앞으로부터 이끌린다. 그들은 실제로 뒤로부터 떠 밀린다. 그들을 유혹하는 것은 삶이 아니라 그들을 앞으로 몰아내는 필연성이다.>

삶의 의지는 생명을 지속하는 것 이외에 다른 목적은 없다. 그에 의하면 인간의 삶은 결코 즐기기 위함이 아니라 일종의 임무다. 즉, 수행해야 하는 단조롭고 고된 일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는 정치를 하고 싸우고 무역을 하며 평화를 협정하고 거래를 하고 발명을 하고 기적도 이루어 낸다. 그러나 쇼펜하우어에게 이러한 모든 노력의 목표가 무엇인가를 묻는다면 그는 대답은 이렇다.

<짧은 시간 동안 덧없고 고통스러운 개체를 지탱하기 위해서다.>

3. 5. <의지>로부터의 도피

그렇다면 모든 개체에 내재되어 있는 의지의 압도적인 힘으로부터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쇼펜하우어는 두 가지 해결책, 즉 윤리학과 미학을 제시한다. 도덕적 관점에서 우리는 정념과 욕망을 부정할 수 있고, 미학적 관점에서 예술적 아름다움을 관조할 수 있다. 물론 이마저도 의지로부터의 일시적 도피일 수 있다는 문제점은 안고 있다.

그는 윤리학과 미학을 통해 보편적 의지가 지닌 제한적이고 직접적인 힘으로부터 도피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에도 불구하고 그는 인간에게서 진정 자유로운 개인의 의지를 발견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제14장 공리주의와 실증주의

칸트, 헤겔, 쇼펜하우어는 관념론을 제시한 바 있다. 그러나 19세기 동안 이러한 관념론적 경로를 밟지 않는 또 다른 철학적 접근 방법이 있었다. 몇몇 철학자들은 경험론자들의 주장이 대체로 옳았으므로 경험론적 방법론을 더욱 다듬는 것이 철학적 임무라 생각했다. 그러한 생각을 한 대표적인 철학자는 바로 제러미 벤담(1748~1832)과 존 스튜어트 밀(1806~1832)이다. 벤담과 밀은 이성적 직관의 역할을 거부했다. 대신 감각적 경험을 우선시했다. 그들이 가장 공헌한 분야는 공리주의 이론이다. 이 이론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가져오는 것이 도덕적 행위라고 정의 내린다. 

1. 벤담

벤담과 밀의 공리주의는 당시 사람들을 매혹시켰다. 그 이유는 공리주의가 굉장히 단순하고 대부분 사람들이 믿었던 방식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쾌락과 행복을 욕망한다는 사실이다. 이 단순한 사실로부터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달성하는 것이 도덕적 선이라고 주장했다. 

종전의 윤리학은 신, 이성, 인간의 목적, 정언 명령 등으로 규정했다. 그렇지만 공리주의는 이 모든 것을 거부했다. 공리주의는 단순하다.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하나의 기준, 즉 쾌락으로 선을 측정한다. 그런 이유로 우리에게 쾌락을 주고 고통을 최소화시켜주는 행위가 도덕적인 행위로 간주된다. 

1. 1. 벤담의 생애

1748년 런던에서 태어난 벤담은 어렸을 때부터 지적 능력이 뛰어났다. 네 살 때 라틴어를 공부했으며 열두 살에 옥스퍼드 퀸스 칼리지에 입학했다. 그의 철학은 주로 영국 경험론에 근거하고 있다. 그는 흄의 [인성론]을 읽고 <눈에서 비늘 막이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았다>고 말했을 정도다. 

1. 2. 공리성의 원리

벤담은 그의 저서 [도덕 및 입법 원리 입문]을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한다. 

자연은 인류를 두 개의 주권적 주인, 즉 고통과 쾌락의 지배하에 위치시켜 두었다. 그것들만이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지를 결정해주는 동시에 우리가 마땅히 행하여야 할 바를 지적해 준다.

공리성의 원리란 행복을 증가시키느냐 아니면 감소시키느냐에 따라 어떤 행위를 용인하거나 부인하는 원리다. 벤담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인간이 원하는 것과 그래야만 한다는 것 사이의 괴리를 벤담이 충분히 해결하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어떤 것을 원한다고 꼭 그것을 해야 하는 의무가 생기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1. 2. 1. 제재

사람들로 하여금 행복을 증가시켜주고 고통은 감소시켜주는 행동을 하게 하기 위해서는 제재를 가해야 한다. 이는 규칙이나 법에 결속력을 제공해 주는 것이다. 이들 제재는 종교적, 정치적, 물리적, 도덕적 제재로 명명된다. 제재는 고통의 협박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민이 어떤 행동을 거역한다면 고통을 주는 것이다. 개인에게 고통을 가하면 행복이 줄어든다. 하지만 그 개인에게 고통을 줬을 때 사회 전체의 행복이 증가한다면 그 제재는 가해야 한다. 

1. 2. 2. 쾌락과 고통의 계산

벤담은 쾌락과 고통의 양적 측면에 주로 관심을 가졌다. 만일 어떤 행위가 고통도 야기하고 행복도 야기한다면 그 행위는 선일까 악일까? 벤담은 이를 수학적 계산으로 해결했다. 고통의 총량과 행복의 총량을 더해 행복 쪽이 크다면 그 행위는 선한 행위이고, 고통 쪽이 더 크다면 악한 행위가 된다. 

1. 3. 법률과 처벌

벤담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모든 처벌은 본래 악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괴로움과 고통을 가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모든 법률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목적은 공동 사회 전체에 행복을 증대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처벌을 공리주의적 관점에서 정당화시킬 수 있다면 처벌에 의해 가해진 고통이 어떠한 방식으로든 더욱 큰 고통을 억제한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한다. 그러므로 처벌은 쾌락의 더 큰 총합을 이루는 데 <유용>한 것이 틀림없었으며, 만일 처벌 결과가 공동 사회에 고통의 단위나 총량을 더 증가시킬 뿐이라면 결코 정당화되지 않는다.

벤담에 의하면 다음과 같을 때 처벌이 가해져서는 안 된다. (1) 처벌의 효력이 없을 때, (2) 처벌이 근거가 없을 때, (3) 처벌이 무익하거나 오히려 전체 고통을 더 증가시킬 때, (4) 처벌이 불필요할 때가 그 경우다.

1. 4. 벤담의 급진주의

앞서 말했듯 벤담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했다. 만약 정치 권력자가 소수라면 그들은 자신들의 행복 증대를 위해서만 법을 만들 것이다. 따라서 공리주의의 실현을 위해서는 국민이 주권을 가져야 한다.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일치한다면 사회 전체의 공리성을 달성할 수 있다. 이런 형태가 바로 민주주의다. 그리하여 벤담은 군주제를 거부했으며 민주주의를 건설하려 했다.

2. 밀

존 스튜어트 밀은 1806년에 태어났다. 그는 공리주의 원리를 옹호한 가장 유능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다. 그에게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벤담의 최대 다수 최대 행복이 자연법, 이성, 도덕의식, 선천적 정직 등과 같은 개념으로부터 도덕을 추론해내려는 시도를 불필요한 것으로 만들었다는 점이다. 밀은 벤담의 저서를 읽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종전의 모든 도덕론자들이 교체되었으며, 여기에서 실로 새로운 사상의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느낌이 나를 엄습해 왔다

2. 1. 밀의 공리주의 해석

밀은 벤담의 공리주의를 비판적으로 수용했다. 밀의 공리주의에 대한 정의는 벤담과 완전히 일치했다. 그렇지만 접근 방법에 있어서는 벤담과 달랐다.

2. 1. 1. 양적 접근 대 질적 접근

벤담은 쾌락과 행복을 양으로 측정했다. 그러나 밀은 쾌락에 대한 질적 접근 방식을 택했다. 밀은 <만족한 바보가 되느니 차라리 불만족한 소크라테스가 되겠다>라고 말했다. 밀에게 지성은 단순한 감각적 쾌락보다 높은 가치를 갖는다. 밀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동물적 쾌락을 완전히 보장해 준다 하더라도 하등 동물로 변하게 되는 데 동의할 인간은 거의 없을 것이다. 즉 비록 바보, 무식한 사람, 불량배들이 지성적인 인간, 교육받은 사람, 정서적이고 양심적인 사람들보다도 자신들의 운명에 훨씬 더 만족하고 있다고 설득당한다 할지라도 후자의 인간들은 바보가 된다거나 무식한 사람이 된다거나 이기적이고 비천한 사람이 되는 데 결코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밀에 따르면 쾌락은 양이 아니라 질로 등급을 매겨야 한다.

2. 1. 2. 벤담으로부터 밀의 출발

밀은 그의 논의를 추구해 가면 갈수록 점점 덜 공리주의적이 된다. 그가 강조한 대로 중요한 것은 단순히 쾌락의 양이 아니라 그 질이다. 그리고 더구나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나의 쾌락이 아니라 <전체 선>이다. 게다가 그는 행복이 도덕적 삶의 중심이라고, 즉 행복이 인간 행위의 가장 바람직한 목표라고 말하기를 원한다.... 중략... 그러므로 행복이 바람직한 것이라는 말은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우리의 도덕적 의무라는 말이 된다. 옳다와 선하다는 말들도 여기에 포함된다. 공리주의 원리에 따르면 행위가 행복을 산출하는 한 그것은 선하거나 옳은 것이다.

우리가 왜 쾌락을 추구해야만 하는가 묻는다면 밀은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우리가 이미 그것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에" 이는 그에 대한 비판의 초석이 된다. 왜냐하면 인간이 행해야 할 것의 체계를 사실상 인간이 이미 하고 있는 것 위에 구축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또한 밀은 '어떤 것이 바람직하다'라고 내세울 수 있는 유일한 증거는 '우리가 그것을 원한다'라는 사실뿐이라고 주장한다. 이 또한 오류다. 원한다는 것과 바람직하다는 것 사이에는 어떠한 관계도 없기 때문이다.

2. 2. 자유

벤담은 공리주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민주주의를 추구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밀은 민주주의가 훌륭한 정부 형식이라는 데에는 동의했지만 민주주의를 전적으로 신뢰하지는 않았다. 민주주의는 다수가 소수를 억압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러므로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행위에 제한을 가해야 한다. 이로써 개인의 자유는 보존된다. 밀에 의하면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 정당화되는 유일한 때는 그것이 자기 방어를 목적으로 할 때뿐이다. 

제15장 키르케고르, 마르크스, 니체

칸트와 헤겔을 거치며 독일 관념론자들은 철학, 종교, 미학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정교한 철학 사상을 고안했으며, 복잡한 용어들을 새로 창안했다. 많은 철학자들이 그들의 사상을 받아들이는 동안 다음의 세 철학자는 이런 경향에 매우 비판적이었다. 키르케고르(1813~1855), 카를 마르크스(1818~1883), 프리드리히 니체(1844~1900)가 그들이었다. 

키르케고르는 헤겔의 철학 체계를 거부하며, 진리 탐구는 종교적 신앙에 기초한 개인적 선택의 문제라고 주장했다. 마르크스는 당시 독일의 관념론 철학과 자본주의 경제를 거부했다. 대신 그는 세계를 지배하는 법칙이 자본주의를 공산주의로 변화시킬 것이라고 주장했다. 니체는 종교적, 이성적 가치 체계를 모두 전복시켰다. 이들은 모두 기존의 문화, 신념, 사상을 거부한 혁명적인 철학자다. 

1. 키르케고르

키르케고르는 1813년 코펜하겐에서 태어났고 1855년 42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코펜하겐 대학에서 헤겔 철학을 배웠으나 별로 깊은 인상을 받지 못했다. 키르케고르는 헤겔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만일 헤겔이 그의 논리학을 모두 완성한 뒤에 그것이 단지 하나의 사상적 실험에 불과하다고 말했었다면, 그는 확실히 가장 위대한 사상가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그러니 그는 희극 배우일 수밖에...

키르케고르가 헤겔에 대해 이렇게 말한 이유는 가장 중요한 요소인 <실존>을 헤겔이 간과했기 때문이다. 키르케고르에 의하면 실존한다는 것은 어떤 종류의 개체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1. 1. 인간의 실존

키르케고르에게 <실존 속에서 사유한다>는 것은 인간이 개인적 선택에 직면해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했다. 인간은 항상 하나의 <실존적 상황> 속에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이러한 이유에서 인간의 사유 작용은 자신의 개인적 상황과 우리가 반드시 내려야 하는 중대한 결정들을 다루어야 한다. 헤겔의 철학은 실재에 대한 인간의 이해를 망쳐 놓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의 관심을 구체적인 개체들로부터 보편자들의 개념으로 옮겨 놓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에게 존재하기보다 사유할 것을 요구한다. 

키르케고르에게 <실존>은 순전히 개인의 상황과 관련지어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헤겔은 개인적 상황은 무시하고 보편만을 언급했다.

키르케고르에 따르면 의지와 선택의 의식적 행위에 참여한 사람만이 실존한다. 플라톤은 선을 인식하는 것이 곧 행하는 것이라 말했다. 즉, 선을 인식하면 그 사람은 반드시 그것을 행할 것이라 말했다. 하지만 키르케고르는 이를 부인했다. 인간이 어떤 지식을 소유해도 그에게는 여전히 선택의 문제가 남아 있다. 플라톤부터 헤겔까지 이어져온 기나긴 철학 역사에서 수많은 철학자들이 방대한 철학 체계를 형성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키르케고르에 의하면 그 노력은 개인에 대한 관심으로 환원되지 못했기에 수포로 돌아갔다. 보편적인 문제들 너머에는 개인의 삶과 개별적인 문제들이 존재한다. 추상적이고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사유는 이 문제들을 결코 해결할 수 없다. 

1. 2. 주체성으로서의 진리

키르케고르에 의하면 진리는 주체성이다. 그가 강조했던 바는 선택의 기로에 놓인 사람들을 위해 <바깥 어딘가>에 이미 준비된 진리란 없다는 사실이다. 진리는 개인의 의지에 의해 만들어진다. 바깥 어딘가에 존재하는 것은 객관적인 불확실성뿐이다. 

인간은 자신의 유한성과 불안전성 때문에 이를 극복하려고 <어떤 것을 행하려> 한다. 그러나 그가 행하는 것들은 불안만 더 키울 뿐이다. 우리가 군중 속에 있을 때도 소외감은 해소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군중 속에 존재한다는 것은 자아를 희석시킴으로써 한 개체로서 인간의 본성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키르케고르에게 있어서 실질적인 해결책은 군중보다 우리 자신을 신과 관계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지 않을 때 우리의 삶은 불안으로 가득 찰 것이다. 우리의 관심을 신으로 돌리는 과정은 까다롭지만 인간의 불안과 소외감을 없애줄 수 있는 중요한 요소다. 키르케고르는 이에 대한 삶의 방식 3단계를 주장한다.

1. 3. 미적 단계

삶의 방식 3단계에 대한 키르케고르의 분석은 헤겔의 이론과 대조된다. 헤겔의 변증법이 보편적인 것에 대한 인식을 지향했다면, 키르케고르의 변증법은 개별적인 것의 현실화를 지향했다. 그에 의하면 이 변증법적 과정의 1단계는 <미적 단계>다. 이 단계에서 인간은 충동과 감정에 따라 행동하고 감각적인 것에 의해 거의 지배된다. 이런 이유로 미적인 인간은 보편적 도덕 기준을 인식하지 못하고 종교적 믿음도 갖지 않는다. 그는 감각적 쾌락에 대한 갈망을 갖는다. 따라서 이 단계에서는 실존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해도 그것은 실존의 빈곤한 성질일 것이다. 인간은 미적 단계를 넘어 다음 단계로 나아갈 것인가 아니면 이 단계에 머물 것인가의 기로에 놓인다. 다음 단계로의 전환은 사유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없다. 그것은 오히려 의지적 행위인 기투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1. 4. 윤리적 단계

두 번째 단계는 <윤리적 단계>다. 자신의 취향 이외에 어떠한 보편적 기준도 갖지 않는 미적 인간과 달리, 윤리적 인간은 행위의 규율을 인식하고 수용한다. 미적 인간은 자신의 성적 충동에 굴복하지만, 윤리적 인간은 결혼의 의무를 준수한다. 돈 후안이 미적 인간을 대표한다면, 소크라테스는 윤리적 인간을 대표한다. 윤리적 인간은 도덕적인 자기 충족감을 갖는다. 그러나 윤리적 인간도 죄책감이라는 반정립에 의해 새로운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그는 신으로부터의 소외를 자각하고 다음 단계로의 전환을 위해 스스로를 기투해야 한다. 

1. 5. 종교적 단계

세 번재 단계는 <종교적 단계>다. 

개인은 신을 <객관적인 방식>으로 추구할 수 없으며, 또한 신을 <객관적으로 규명>할 수 없다. 키르케고르에 의하면 <이는 영원히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신은 주체적이며 따라서 단지 내향적인 주체성으로서만 실존하기 때문이다.>

절망감과 죄책감으로 인간이 어떤 한계점에 봉착했을 때 그는 결국 신앙을 택하게 된다.

키르케고르의 철학은 다음과 같은 문구로 요약될 수 있다.

<모든 인간은 인간이기 위해 그가 소유하는 것을 본질적으로 소유하고 있다고 가정해야 한다.> 그러므로 <주관적인 사유자의 임무는 본질적으로 인간적인 것은 무엇이든지 명석판명하게 실존 속에 표현해주는 하나의 수단으로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각각의 개인은 하나의 본질적인 자아를 소유하며 따라서 그것을 현실화해야 한다. 이 본질적 자아는 인간이 불가피하게 신과 관련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의해 고정된다. 

2. 마르크스

마르크스는 20세기 후반 전 세계 사람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준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거의 대중들과 접촉하지 않았다. 또한 그의 많은 저서들은 그가 살던 시대에는 폭넓게 읽히지 않았다. 당대 저명한 학자였던 밀도 사회와 정치문제를 다룬 저서에서 마르크스를 언급하지 않았다는 사실만 봐도 알 수 있다. 

2. 1. 마르크스의 생애와 영향

카를 마르크스는 1818년 독일에서 한 유대인 변호사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1835년 본 대학교에 입학하여 17세의 나이로 법률학을 공부했다. 이듬해 베를린 대학교로 옮겨간 그는 법률학을 포기하고 철학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다. 1841년 23살의 나이에 예나 대학교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베를린 대학교 시절에 마르크스는 헤겔의 철학에 깊은 감명을 받아 헤겔의 변증법에 심취했다.

헤겔 철학의 세 가지 구성 요소가 마르크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1) 하나의 유일한 실재가 존재하며 이 실재는 세계 내 이성의 체현으로 생각될 수 있다는 사고방식
(2) 역사는 물질적 자연과 사회, 정치 활동과 인간의 사유를 포함하는 모든 실재에 있어서 보다 낮은 단계에서 좀 더 완전한 형태에 이르기까지 발전과 변화의 과정이라는 인식
(3) 어떤 일정한 시대와 장소에서 인간의 사상과 행동은 일체화된 영혼이나 마음, 즉 특정한 시간이나 시대의 영혼이 작용함으로써 생겨난다는 가정이었다.

헤겔 철학이 마르크스에게 큰 영향을 주었지만 "영혼(신)만이 실재다"라고 주장한 헤겔과 달리 마르크스는 철학적 무신론의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 

마르크스는 이렇게 선언한다.

<지금까지 모든 철학자들은 단지 세계를 서로 다르게 해석해 왔을 뿐이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는 사회에 대한 해석보다 엄격하고 실천적인 행동을 중시했다. 그는 훗날 엥겔스를 만나 국제 공산주의자 연맹을 결성했다. 그리고 1848년 그 유명한 [공산당 선언]을 발표했다. [공산당 선언]은 그가 결성한 국제 공산주의자 연맹의 강령을 담은 책이다. 그는 영국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여생을 보냈다. 9시부터 7시까지 도서실에서 공부를 했고 두 칸짜리 싸구려 아파트에 돌아와서도 연구를 이어갔다. 그는 가난했지만 저술 계획을 실현하는 데에만 전념했다. 가족들을 풍요롭게 하기 위해 자신의 신념을 버릴 수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그는 간장병과 부스럼으로 괴로워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여섯 살 난 아들이 죽고, 부인마저 건강이 악화되었다. 이런 비참한 상황에서도 그는 위대한 저작들을 계속 발간했다. [정치경제학비판], [자본론]이 이 시기에 출판되었다. 비록 마르크스는 공산주의 운동에 이론을 제시했지만 그가 주장했던 실천적인 활동에 직접 참여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는 결국 부인과 사별하고 2년 뒤에 그의 딸도 죽었고, 그의 딸이 죽은 지 2달 만에 늑막염으로 본인도 사망했다. 1883년, 이때 그의 나이는 65세였다.

2. 2. 역사의 여러 시대: 마르크스의 변증법

2. 2. 1. 다섯 단계의 시대 구분

마르크스는 역사를 다섯 단계의 시대로 구분했다. (1) 원시 공동 사회, (2) 고대 노예 사회, (3) 중세 봉건 사회, (4) 근대 자본주의 사회, (5) 미래에 다가올 사회주의적, 공산주의적 사회가 그것이다. 그는 각 시대를 사회 계급 간의 갈등의 결과로 간주했다. 따라서 그는 역사를 갈등의 산물로 여기며, 여기서 헤겔의 변증법 개념에 크게 신세진 바 있다. 이러한 이유로 그의 역사관은 변증법적 유물론이라고 할 수 있다. 

2. 2. 2. 양적 변화와 질적 변화

마르크스는 변증법적 유물론을 견지했으므로 만물은 변화의 변증법적 과정 속에 있다고 간주했다. 

마르크스의 유물론에 따르면 우리가 지각하는 세계가 존재하는 모든 것이며, 따라서 유물론적 세계관은 <존재하는 그대로의 자연에 대한 개념이며 여기에는 어떠한 유보도 없다.> 그는 자연 내의 만물이 <가장 작은 것에서 가장 큰 것에 이르기까지, 한 알의 모래에서 태양, 인간에 이르기까지 끊임없는 운동과 변화의 상태 속에 있다>고 주장했다. 역사란 엄격하고 냉혹한 역사의 운동 법칙에 따라 한 시대에서 다른 시대로 변화하는 과정이다. 

여기서 말하는 변화란 어린아이가 어른이 되는 성장과는 다른 의미다. 어린아이가 어른이 되는 과정은 단순히 양적으로 변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양적 변화는 질적 변화를 야기한다. 물의 온도가 높아지면 어느 시점에서 액체가 기체로 변하게 된다. 물의 온도가 서서히 올라가는 것을 양적 변화, 100도에 이르러 물이 기화되는 것을 질적 변화라 한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사회 질서의 양적 변화도 결국 사회 전체의 질적 변화를 야기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1) 원시 공동 사회, (2) 고대 노예 사회, (3) 중세 봉건 사회, (4) 근대 자본주의 사회로 변화해 왔다.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자본가 부호들의 수효가 점차 감소해 가는 반면, 상대적으로 대중에게는 빈곤화, 노예화, 퇴화, 착취가 점차 증가하게 된다. 그러나 동시에 노동 계급의 역할은 점차 강화된다. 그렇게 되면 생산 수단의 집중화와 노동력의 사회화는 극점에 도달해서 결국 그것들의 자본주의적 외피와 양립할 수 없게 된다. 외피는 산산 조각난다. 사유 재산의 종말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온다. 재산을 몰수해 갔던 자들은 이제 그들의 재산이 몰수당한다.> 마르크스는 사회적인 수준에서 이러한 현상을 가리켜 <양적인 도약>이라고 묘사한다. 그 도약은 <하나의 새로운 집산 국가로의 도약이며, 그곳에서 결국 양적인 것은 질적인 것으로 변환된다.>

2. 2. 3. 결정론

마르크스는 만물이 인과적인 규칙성과 예측 가능성의 원리에 따라 운동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물리학의 법칙과 다르게 역사는 기계적인 결정론을 따르지 않는다. 하나의 당구공이 다른 당구공을 운동하게 하는 것은 기계적인 결정론의 전형적인 실례다. 이러한 기계적인 결정론은 사회 질서와 같은 복합 현상에는 거의 적용될 수 없다. 왜냐하면 사회 질서는 시간과 공간상 동일한 위치를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도 사회 질서는 필연적인 인과성과 결정론의 산물이며, 따라서 새로운 사회 형태를 예측할 수 있다. 이런 근거에서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몰락을 예견했다. 그는 미래에 자본주의가 몰락하고 사회주의, 공산주의가 새로운 사회 형태가 될 것임을 확신했다.

2. 2. 4. 역사의 종말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갈등과 투쟁을 불가피하다고 믿었다. 이러한 계급 간 투쟁으로 인해 역사의 변증법 과정을 거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생겨난 사회가 사회주의, 공산주의다. 이 사회는 계급이 없는 사회다. 계급 없는 사회는 모든 세력과 이익이 완전히 균형을 이루기 때문에 어떠한 갈등도 없다. 갈등이 없는 사회에서는 더 이상 역사의 변증법 과정을 거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공산주의가 최종적인 사회 형태라고 마르크스는 믿었다.

2. 3. 하부 구조: 물질적 질서

마르크스에 의하면 물질 세계는 자연적 환경의 총체다. 따라서 물질세계는 비유기적 자연, 유기적 세계, 사회 활동, 인간의 의식 모두를 포함한다. 그는 물질을 <인간 정신의 외부에 존재하는 객관적 실체>라 정의한다. 또한 데모크리토스가 원자를 만물의 근원으로 생각했던 반면에, 마르크스의 유물론은 물질세계를 단일한 형태의 물질로 환원하지 않고 물질세계의 다양성을 그대로 인정한다. 그는 물질적 질서는 (1) 생산 요인과 (2) 생산관계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했다.

2. 3. 1. 생산 요인

모든 사회에는 자원, 도구, 노동 기술과 같은 생산 요인들이 존재하며 이것들에 의해 삶을 유지할 수 있는 물건이 생산된다. 생산 요인은 생산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인간의 상호 관계에 영향을 줄 수 있다. 그러므로 마르크스의 물질적 질서에 대한 분석은 인간이 생산 활동에 참여하는 방식, 즉 <생산 관계>에 집중했다.

2. 3. 2. 생산 관계

마르크스는 생산관계에 대한 분석이 사회 분석의 핵심이라고 믿었다. 한편 생산관계의 핵심은 재산의 상태나 재산의 소유였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자본주의에서 노동자는 노예나 농노와 비교할 때 자유롭다. 그러나 그들은 생산 수단을 소유하지 못하며 단지 생존을 위해 자신들의 노동력을 자본가들에게 팔아야 한다. 노예제에서 봉건제를 거쳐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로의 변화는 이성적 계획의 산물이 아니라 물질적 질서의 내적 운동과 논리의 산물이다.... 중략... 비록 모든 시대마다 계급 간의 투쟁이 존재해 왔지만, 특히 자본주의의 계급투쟁은 가장 격렬하다. 자본주의에서 계급투쟁은 최소한 세 가지 특징을 갖는다. 첫째, 여러 계급은 소유 계급, 즉 부르주아지와, 노동자 계급, 즉 프롤레타리아로 양분된다. 둘째, 두 계급의 관계는 근본적인 모순으로 이루어진다. 즉 두 계급은 생산 행위에 공동으로 참여하지만 생산 결과들의 분배 양상은 각 계급의 기여도에 상응하지 않는다. 이러한 모순의 이유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노동의 가격이 수요와 공급에 의해 결정되는데, 노동자들의 과잉 공급이 그들의 임금을 최저 생계 수준으로 하락시킨다는 사실에 있다. 그러나 노동에 의해 창조된 상품은 노동력에 대해 지불된 임금보다 비싸게 판매된다. 마르크스의 분석은 상품의 가치란 상품에 투입된 노동의 양에 의해 결정된다는 노동 가치설을 전제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노동 상품은 노동 비용보다 비싸게 판매되기 때문에 자본가들은 그 차액을 착취할 수 있을 것이다. 마르크스는 이 차액을 <잉여 가치>라고 명명했다. 이러한 잉여 가치의 존재야말로 자본주의 체제의 내적 모순을 구성한다. 이러한 이유에서 마르크스에 의하면 자본주의 체제에서 착취란 단순히 일시적이며 국부적인 현상이 아니라 냉혹한 임금의 법칙이 작용하는 모든 지역과 모든 시간에 발생하는 현상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를 도덕적으로 비난하지 않았다. 또한 그는 자본주의가 사악한 것이거나 인간의 어리석음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말하지도 않았다. 자본주의는 <사회의 변증법적 운동 법칙>에 의해 발생되어있을 뿐이다. 결국 마르크스는 자신이 과학자로서의 분석을 행했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사유를 객관적 실재로 제한하며 실재로부터 운동의 법칙을 추론했던 것이다.

3. 니체

3. 1. 니체의 생애

프리드리히 니체는 1844년에 독일에서 태어났다. 그가 네 살 때 아버지가 사망하여 그는 어머니, 누이동생, 할머니, 두 명의 미혼 숙모로 구성된 집안에서 성장했다. 열네 살 때 기숙학교에 들어가 6년간 고전학, 종교, 독일 문학에 대한 교육을 받았다. 1864년 본 대학교에 입학했으나 동료 학생들의 자질에 그다지 큰 인상을 받지 못해 라이프치히 대학의 고전학, 문헌학을 연구하던 리츨 교수에게서 학문을 배우기로 했다. 라이프치히에서 그는 쇼펜하우어를 접했으며 바그너의 음악에 심취했다. 이 둘은 니체의 사상에 큰 영향을 준 인물이다. 아직 박사 학위가 없었지만 그는 24세에 바젤대학 교수로 임명되었다. 교수로 임명된 이후 라이프치히 대학교도 니체에게 시험을 치르지 않은 채 박사 학위를 수여했다. 그는 건강 악화로 1879년 34세의 나이로 교수직을 사퇴했다. 그 후 10년간 그는 이탈리아, 스위스, 독일 각지를 방랑하며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했다. 건강이 좋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6년간 [아침놀], [즐거운 학문],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선악의 저편], [도덕의 계보] 등 여러 책을 저술했다. 1888년 44세가 된 니체는 오랜 투병 생활에서 잠시 벗어날 수 있었다. 그 짧은 6개월 동안 그는 [바그너의 경우], [우상의 황혼], [안티그리스도], [이 사람을 보라], [니체 대 바그너]를 썼다. 얼마 뒤 1889년 1월 니체는 거리에서 발작을 일으켰다. 그는 바젤의 정신 병원으로 송환되어 예나의 수용소로 보내졌다가 그의 어머니와 누이동생의 간호를 받았다. 그는 마지막 11년 동안을 회복 불능의 정신 착란 속에서 살았다. 

3. 2. 신은 죽었다

그는 기독교 신에 대한 믿음이 극적으로 붕괴되었다고 생각하며 <신은 죽었다>고 말했다. 

그에 의하면 <마침내 바다, 우리의 바다가 우리 앞에 열린다. 바다가 그토록 열려 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신의 죽음의 허무주의적 결과들에 대한 이중적인 반동은 니체의 정신을 인간의 가치에 대한 중심 문제로 돌아서게 했다. 신이 더 이상 인간 행위의 목적이자 제약일 수 없게 된 시대의 새로운 가치 체계를 추구하면서 니체는 미학이 종교에 대한 가장 훌륭한 대안이라고 생각했다. 

3. 3. 아폴론적인 것 대 디오니소스적인 것

니체는 다음과 같은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쇼펜하우어의 허무주의 관점에서 비관론자가 되어 삶을 포기해야 하는가 아니면 니체의 우상이었던 괴테처럼 삶을 긍정하며 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였다. 그의 대답은 심미적 가치를 추구하라는 것이다. 니체가 믿기에 미적 가치는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결합에서 비롯된다. 니체에게 디오니소스는 역동적 삶의 상징이었기에 어떠한 구속이나 제약도 거부했다. 디오니소스는 거대한 삶의 바닷속에서 주체성을 찾는다. 반면 아폴론은 질서와 구속과 형식의 상징이다. 그의 생각은 그리스적 공식, 즉 디오니소스적인 요소와 아폴론 적인 요소의 결합으로 기울어졌다. 왜냐하면 인간의 삶은 그 결합을 통해서만 심미적 현상으로 변형될 수 있기 때문이다. 

3. 4. 주인의 도덕 대 노예의 도덕

모든 인간 존재들의 성격을 규정해 주는 한 가지 사실이 존재한다. 환경을 지배하려는 충동이 바로 그것이다. 인간 본성의 중핵인 이 충동은 힘에의 의지다. 힘에의 의지는 단순히 살아남으려는 의지 이상의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인간의 모든 권력들에 대한 강한 긍정을 의미한다.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가장 강하고 지고한 삶에의 의지는 실존을 위한 비참한 투쟁 속에서는 그 표현을 찾을 수 없다. 그것은 투쟁에의 의지, 힘에의 의지, 절대 권력에의 의지에서 발견된다!>

니체에 의하면 유대적-기독교적 윤리는 인간의 본성과 상치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인간은 이런 비본성적인 도덕 체계를 구축했을까? 니체는 두 가지 도덕 형태를 주장한다. 하나는 주인의 도덕, 다른 하나는 노예의 도덕이다. 주인의 도덕을 가진 인간은 가치의 창조자며 가치의 결정자다. 그들은 외부에서 자신의 행위에 대한 지지를 구하지 않는다. 스스로 자신에게 판결을 내릴 뿐이다. 반면 노예의 도덕은 사회의 최하 성원들, 피고용자, 피압박자, 노예, 확신에 차지 못한 자들에게서 유래했다. 노예에게 <선>은 고통을 경감해 줄 수 있는 모든 것이다. 동정, 자비, 온전, 인내, 근면, 박애, 친절 등이 노예의 도덕을 구성하는데, 니체는 이것을 본질적으로 실리의 도덕이라 주장한다. 왜냐하면 여기서의 선은 약자에게 이익이 되는 것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노예의 도덕은 공포를 조장하는 자가 악한 사람인 데 반해 주인의 도덕에서는 공포를 조장할 수 있는 자가 선한 사람이다. 니체에 의하면 노예의 도덕은 일종의 상상적인 보복의 산물이다. 현실에서 노예는 주인을 정복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선악의 체계를 뒤바꿈으로써 상상의 보복을 하는 것이다. 니체에 의하면 이러한 노예의 도덕은 삶의 부정에 대한 의지이며 쇠망의 원리다. 

그러나 우매한 대중의 원한과 강자에 대한 복수심을 심리적으로 잘 분석해 보면 인간이 마땅히 해야 할 것들이 나타날 것이다. 즉 인간은 <모든 감상적인 유약함에 저항해야 한다. 삶은 본질적으로 자기 것이며 무례이며 낯설고 약한 것에 대한 정복, 압박이며, 엄격성이며 특수한 형식에 대한 무리한 강요며 착취다>

3. 5. 힘에의 의지

니체에 의하면 착취는 본래 타락한 인간 행위가 아니다. 그 대신 그것은 인간의 원초적인 본성에 속하며, 그것은 곧 삶에의 의지다. 이것은 단지 생존하려는 의지 이상의 것이다. 오히려 모든 개인적 힘을 정력적으로 확인하려는 내적 충동이다. 유럽의 도덕은 힘에의 의지를 부정함으로써 근본적으로 부정직해졌다. 니체는 이 부정직에 대한 책임을 기독교의 노예의 도덕에 돌렸다. 그는 기독교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나는 기독교를 지금까지 존재했던 어떤 거짓말보다도 가장 치명적이며 유혹적인 거짓말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가장 위대하며 가장 불경스러운 거짓말이다.

기독교는 지상의 것에 대한, 그리고 지상의 우월성에 대한 모든 사랑을 지상에 대한 증오로 전도시키는 데 성공했다. 

니체는 하나의 새로운 시대를 전망했는데 그 시대에는 완성된 인간이 다시 새로운 수준의 창조적인 활동을 재개할 것이며, 그럼으로써 좀 더 특출한 유형의 인간, 즉 위버멘쉬(Ubermensch)가 될 것이다. 위버멘쉬는 도덕 그 자체를 거부하지는 않는다. 그는 단지 우매한 대중의 부정직한 도덕을 거부할 뿐이다. 

3. 6. 모든 도덕의 재평가

새로운 가치를 정립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기존의 가치를 재평가할 필요가 있다. 

니체의 재평가 프로그램은 본질적으로 현대인의 이상에 대한 비판적 분석이었다. 그가 보여 주려 했던 것은 이른바 현대인의 <선>은 전혀 미덕이 아니라는 사실과 현대인이 말하는 진리란 이기심과 허약함이 가장된 모습에 불과하다는 사실, 현대인의 종교는 교활한 심리적 무기며 도덕적인 난쟁이가 그 무기로 자연적인 거인을 교화해 왔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일단 그 가식이 현대의 도덕에서 제거되면 참된 가치가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도덕적 가치들은 인간의 참된 본성과 환경 위에 정립되어야 한다. <이 세계는 힘에의 의지일 뿐 다른 어떤 것도 아니다.>

3. 7. 위버멘쉬

니체는 평등의 개념을 거부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도덕은 각 등급의 인간에게 적합한 것이어야 한다. 인간의 최고 등급이라고 볼 수 있는 위버멘쉬는 드물게 나타난다. 그러나 그는 인간의 진화의 다음 단계다.

위버멘쉬는 기계적인 진화 과정의 산물이 아니다. 초인적인 개인들이 모든 가치를 재평가하려는 용기를 가지고 내면의 힘에의 의지에 자유롭게 응답할 때에만 다음 단계로 도달할 수 있다. <인간은 초월되어야 할 어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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