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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시화 엮음] 시로 납치하다

Baek Kyun Shin 2019. 4. 5. 23:46

‘사랑하라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에 이어 벌써 류시화 시인이 엮은 시집만 3번째 읽는다. 이 시집은 2018년 1월에 나온 책이다. 앞으로 류시화 시인이 엮은 새 시집을 보려면 몇 년은 더 기다려야 할 것 같다. 1번째, 2번째 시집만큼은 아니었지만 류시화 시인만의 느낌은 여전했다. 시는 나로 하여금 앞만 보고 뛰어가다가도 잠시 멈춰서 숨도 고르고 주변도 돌아보게 한다. 아래는 본 시집에서 내가 꼽은 세 개의 시다.

그렇게 못할 수도
건강한 다리로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못할 수도 있었다.
시리얼과 달콤한 우유와
흠 없이 잘 익은 복숭아를 먹었다.
그렇게 못할 수도 있었다.
개를 데리고 언덕 위 자작나무 숲으로 산책을 갔다.
오전 내내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오후에는 사랑하는 이와 함께 누웠다.
그렇게 못할 수도 있었다.
우리는 은촛대가 놓인 식탁에서
함께 저녁을 먹었다.
그렇게 못할 수도 있었다.
벽에 그림이 걸린 방에서 잠을 자고
오늘과 같은 내일을 기약했다.
그러나 나는 안다, 어느 날인가는
그렇게 못하게 되리라는 걸.
- 제인 케니언

서서히 죽어 가는 사람
습관의 노예가 된 사람
매일 똑 같은 길로만 다니는 사람
결코 일상을 바꾸지 않는 사람
위험을 무릅쓰고 옷 색깔을 바꾸지 않는 사람
모르는 이에게 말을 걸지 않는 사람은
서서히 죽어 가는 사람이다.

열정을 피하는 사람
흑백의 구분을 좋아하는 사람
눈을 반짝이게 하고
하품을 미소로 바꾸고
실수와 슬픔 앞에서도 심장을 뛰게 하는
감정의 소용돌이보다
분명히 구분하는 걸 더 좋아하는 사람은
서서히 죽어 가는 사람이다.

자신의 일과 사랑에 행복하지 않을 때
상황을 역전시키지 않는 사람
꿈을 따르기 위해 확실성을 불확실성과 바꾸지 않는 사람
일생에 적어도 한 번은 합리적인 조언으로부터 달아나지 않는 사람은
서서히 죽어 가는 사람이다.

여행을 하지 않는 사람, 책을 읽지 않는 사람
삶의 음악을 듣지 않는 사람
자기 안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지 않는 사람은
서서히 죽어 가는 사람이다.

자신의 자존감을 파괴하고 그곳을 에고로 채운 사람
타인의 도움을 거부하는 사람
자신의 나쁜 운과 그치지 않고 내리는 비에 대해
불평하면서 하루를 보내는 사람은
서서히 죽어 가는 사람이다.

시작도 하기 전에 포기하는 사람
알지 못하는 주제에 대해 묻지도 않고
아는 것에 대해 물어도 대답하지 않는 사람은
서서히 죽어 가는 사람이다.

우리, 서서히 죽는 죽음을 경계하자.
살아 있다는 것은
단지 숨을 쉬는 행위보다 훨씬 더 큰 노력을
필요로 함을 기억하면서.
- 마샤 메데이로스

너무 많은 것들
너무 많은 공장들
너무 많은 음식
너무 많은 맥주
너무 많은 담배

너무 많은 철학
너무 많은 주장
그러나 너무 부족한 공간
너무 부족한 나무

너무 많은 경찰
너무 많은 컴퓨터
너무 많은 가전제품
너무 많은 돼지고기

회색 슬레이트 지붕들 아래
너무 많은 커피
너무 많은 흡연
너무 많은 복종

너무 많은 불룩한 배
너무 많은 양복
너무 많은 서류
너무 많은 잡지

지하철에 탄 너무 많은
피곤한 얼굴들
그러나 너무 부족한 사과나무
너무 부족한 잣나무

너무 많은 살인
너무 많은 학생 폭력
너무 많은 돈
너무 많은 가난

너무 많은 금속 물질
너무 많은 비만
너무 많은 헛소리
그러나 너무 부족한 명상

너무 많은 분노
너무 많은 설탕
너무 많은 방사능
너무 적게 내리는 눈
- 앨런 긴즈버그

2019. 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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