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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사유

[빅터 프랭클] 죽음의 수용소에서

Baek Kyun Shin 2020. 11. 22. 23:02

이 책을 읽으며 나는 다음과 같은 물음에 대해 생각해봤다.

삶의 의미를 추구하는 것이 과연 행복을 위한 길일까?

개요

빅터 프랭클은 나치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정신의학자다. 그가 쓴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처음 읽었을 때는 군 시절 때였다. 당시 나는 나치, 히틀러, 홀로코스트, 유대인 학살, 아우슈비츠에 대해 단편적으로만 알고 있었다. 그런 나에게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은 적지 않은 충격을 주었다. 이번에 두 번째로 이 책을 읽었고 아우슈비츠 수감자들이 어떻게 생활했고, 어떤 생각을 했고, 어떻게 죽어갔는지 다시금 생생하게 알게 되었다.

빅터 프랭클은 아우슈비츠 수용소 경험을 바탕으로 '로고테라피'라는 심리치료 방법을 개발했다. 이 책은 크게 두 파트로 나뉘는데 앞부분은 아우슈비츠 수용소 체험에 대한 내용이고, 뒷부분은 '로고테라피'에 대한 내용이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체험

아우슈비츠 수감자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는 언론매체에서 많이 소개되었다. 모두가 생각하듯이 그곳은 끔찍했고, 상상 이상으로 잔인했다.

아래는 저자가 들려준 아우슈비츠 수용소 체험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이다.

당시 나는 막사 맞은편에 있었다. 바닥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작은 창문 옆에서 얼어붙은 손으로 뜨거운 수프가 담긴 그릇을 들고 맛있게 먹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창 밖을 봤다. 방금 전 밖으로 옮겨진 시체가 동태 같은 눈을 하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두 시간 전에 나와 이야기를 나누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나는 곧 다시 수프를 먹었다. 만약 그때 내가 정신과 의사로서 직업의식을 가지고 나의 감정 결핍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 이일을 기억해내지도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 그 일이 나에게 아무런 감정도 불러일으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방 안에서 수프를 먹고 있는데 창밖으로 죽은 사람과 눈이 마주친다고 생각해보자. 심한 충격을 받을 것이고, 아마 트라우마로 남아 평생 나를 괴롭힐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빅터 프랭클은 그 상황이 아무렇지도 않았다. 심지어 맛있게 수프를 먹었다. 그가 냉혈 하기 때문이 아니라 죽은 사람을 수도 없이 봤기 때문이다. 아우슈비츠는 그런 곳이었다.

로고테라피

이미 말했다시피 책 뒷부분에서는 빅터 프랭클이 개발한 '로고테라피'를 소개한다. '로고테라피'는 삶의 의미를 찾음으로써 현재의 고통에서 벗어나 행복을 느끼게 해주는 심리치료법이다. 

인간의 주된 관심이 쾌락을 얻거나 고통을 피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어떤 의미를 찾는 데 있다는 것은 로고테라피의 기본 신조 중 하나이다. 자기 시련이 어떤 의미를 갖는 상황에서 인간이 기꺼이 그 시련을 견디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확실하게 밝혀 두어야 할 것이 있다. 의미를 발견하는데 시련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나는 단지 시련 속에서도 그 시련이 피할 수 없는 시련일 경우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싶었을 뿐이다. 

빅터 프랭클은 아우슈비츠 수용소 체험 덕분에 이런 심리치료법을 개발할 수 있었다. 그는 아우슈비츠에서 끔찍한 고통과 노역에 시달렸음에도 삶의 의미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했다. 다른 수감자들이 삶을 포기할 때 그는 끝까지 삶의 의미를 떠올렸다. 삶의 의미가 그를 지탱해주었고 고통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날 수 있게 해 주었다.

로고테라피는 긴장을 빼는 삶이 아닌 어느 정도 긴장을 하는 삶이 더 건강하다고 본다. 즉, 목적과 의미를 지속적으로 추구하는 삶을 살라고 권장한다. 삶의 의미를 중시하는 만큼 실존적 허무주의를 부정적으로 본다. 빅터 프랭클은 실존적 허무주의와 공허의 폐해를 소개하고 이를 로고테라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인간에게 실제로 필요한 것은 긴장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가치 있는 목표, 자유 의지로 선택한 목표를 위해 노력하고 투쟁하는 것이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어떻게 해서든지 긴장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성취해야 할 삶의 잠재적인 의미를 밖으로 불러내는 것이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항상성이 아니라 정신적인 역동성이다. 말하자면 한쪽 극에는 실현되어야 할 의미가 다른 극에는 의미를 실현시킬 인간이 있는 자기장 안의 실존적 역동성이다.

로고테라피 치료법 중 실생활에 적용할 수 있을만한 것이 하나 있다.

무언가를 할 때 너무 잘하려고 과잉 주의하면 오히려 그 일을 그르친다고 한다. 이런 불안증을 예기불안이라고 한다. 해결책은 역설 의도 기법을 활용하는 것이다. 자신의 의도와 오히려 반대로 하겠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생각으로 일에 임하면 그 일이 더 잘된다는 개념이다. 예를 들어 잠이 안 올 때 잠을 자려고 애를 쓰면 오히려 잠이 더 안 온다. 그때 잠을 최대한 안 자고 버텨야지라고 생각하면 더 잠이 잘 온다는 것이다. 이는 강박이나 공포를 치료하기에도 좋다고 한다.

삶의 의미를 추구하는 것이 과연 행복을 위한 길일까?

로고테라피는 무언가를 끊임없이 추구하라고 한다. 그 무언가는 삶의 의미이다. 삶의 의미를 끊임없이 추구하는 삶이야 말로 실존적 허무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로고테라피의 핵심이다. 그러나 무언가를 끊임없이 추구하는 삶이 과연 행복한 삶일까? 그것이 삶의 의미일지라도 말이다.

로마의 황제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명상록에서 '너는 얼마 지나지 않아 죽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머지않아 죽을 운명이니 삶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말고 현재를 즐기라는 메시지가 담긴 말이다. 물론 현재를 즐기라는 말이 쾌락과 향락에 빠지라는 뜻은 아니다. 너무 앞만 보고 살지 말라는 뜻이다. 

로고테라피에서 추구하는 삶과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추구하는 삶은 다소 상반된다고 생각한다. 아주 단순화해서 로고테라피는 미래지향적 삶을 추구하고 아우렐리우스는 현재 지향적인 삶을 추구한다. 물론 로고테라피가 미래지향적 삶을 추구한다는 것은 지나친 일반화이자 단순화다. 로고테라피는 삶의 의미를 추구하며 현재를 행복하게 사는 삶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삶의 의미를 추구하는 것 자체가 아우렐리우스가 말하는 삶보다는 상대적으로 미래지향적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다시 생각해보자. 미래지향적 삶과 현재 지향적 삶 중 무엇이 더 행복한 삶일까? 행복의 기준은 주관적이기 때문에 모두에게 통용되는 정답은 없다. 그렇다면 본인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미래지향적 삶과 현재지향적 삶 중 어떤 삶이 나를 더 행복하게 하는가? 

내가 내린 결론은 이렇다.

극한의 상황에서는 미래지향적 삶이 지금의 고통으로부터 나를 지탱한다. 그러나 극한의 상황이 아닌 경우 현재지향적 삶이 나를 더 행복하게 한다.

빅터 프랭클은 아우슈비츠라는 극한의 상황에 놓였었다. 그런 극한의 상황에서 현재지향적 삶을 추구하면 자신의 삶을 포기하기 쉬울 것이다. 그래서 많은 수감자들이 자살을 택하거나 삶을 포기하고 되는대로 살아갔다. 하지만 빅터 프랭클은 삶의 의미를 추구하며 미래를 주시했다. 이런 태도를 간직하여 삶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현재 삶이 그리 고통스럽지 않다면? 미래지향적 삶은 현재의 불안을 더 야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현대인들이 앞만 보며 살고 있고, 그 때문에 매사 걱정과 불안을 느낀다. 5년 후, 10년 후, 20년 후, 30년 후에 멋진 삶을 살고 싶어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생에 정답은 없다. 100년을 산 백발의 노인도 인생의 정답을 알지는 못할 것이다. 그 역시 스스로 선택한 삶을 살았을 뿐이지 정답은 모른다. 정답이 없다는 말은 틀린 답도 없다는 말이다. 결국 스스로 가치있다고 여기는 삶을 살아가면 되지 않을까. 나는 미래지향적 삶보다는 현재지향적 삶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빅터 프랭클의 생각과 다르다. 나는 삶의 의미를 크게 중시하지 않는다. 삶의 의미가 나에게 가져다주는 행복보다 부과하는 짐이 더 크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가 실존주의자에 가까운 사람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상기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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