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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퇴리히] 세계 철학사 - 제3부 중세 철학

Baek Kyun Shin 2021. 11. 18. 00:21

로마 사람들은 오랫동안 기독교를 거부했다. 로마 전통을 지켜야 한다는 이유로 로마 황제들도 기독교를 핍박했다. 이러한 박해는 기독교를 약하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강하게 만들었다. 그러다가 로마 중기 황제인 콘스탄티누스 대제(재위 306~337)는 313년에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를 정식 종교로 채택했다. 392년에는 기독교 외 다른 종교를 숭배하는 걸 전면 금지했다. 이때부터 기독교가 로마 제국 어느 도시에서나 우세를 점했다.

중세 철학 시대는 크게 두 시대로 나뉜다. 첫 번째 시기는 '교부철학' 시대, 사도가 활동할 때부터 800년경까지 시기를 말한다. 두 번째 시기는 '스콜라철학' 시대다. 800년경부터 중세 철학이 끝나는 1,500년경까지다.

다시 교부철학 시대는 두 시기로 나뉜다. 제1기와 제2기인데 제1기 때는 기독교와 그리스 철학이 처음으로 접해 대결을 벌이고 기독교 안에서도 다양한 논쟁이 일어났다. 그 결과 기독교 근본 교리가 만들어졌다. 제1기는 니케아 공의회가 열린 325년 끝난다. 제2기에는 기독교 철학과 교의가 통일된 체계로 발전한다.

스콜라철학 시대는 세 시기로 나뉜다. 초기 스콜라철학 시대는 9세기에서 12세기까지다. 초기 스콜라철학 시대에는 스콜라철학의 고유한 방법이 완성되고, 신학과 철학이 긴밀히 융합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참조하는 가운데 보편자 개념에 대한 논쟁, 이른바 보편 논쟁이 있었다. 전성기 스콜라철학 시대는 13세기인데, 이때는 중세 기독교 철학이 가장 완전해졌다. 주로 토마스 아퀴나스의 공적이다. 후기 스콜라철학 시대는 14세기에서 15세기까지다. 유명론이 언급되면서 중세 철학이 점차 해체되기에 이른다.

중세 철학 시대를 정리하면 이렇다.

  • 교부철학 시대 (사도 활동 시기 ~ 800년경)
    • 제1기 - 기독교와 그리스 철학이 최초로 접촉해 대결을 벌이고, 기독교 내부에서도 다양한 논쟁이 일어남
    • 제2기 - 기독교 철학과 교의가 통일된 체계로 발전함
  • 스콜라철학 시대 (800년경 ~ 1,500년경)
    • 초기(9~12세기)  - 스콜라철학의 고유한 방법이 완성되고, 신학과 철학이 융합됨, 보편 논쟁이 일어남
    • 중기(13세기) - 중세 기독교 철학이 가장 완전한 상태에 도달함 (feat. 토마스 아퀴나스)
    • 후기(14~15세기) - 유명론에 의해 중세 철학이 점차 해체됨

제1장 교부철학의 시대

I. 고대 사상과 기독교의 정신적 태도 차이

1. 신과 인간

그리스 철학에서는 신이 여러 모습으로 묘사됐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불이 신적 원소라고 했으며, 아리스토텔레스는 '원동자', 즉 자신 안에 자기 자신을 관찰하는 정신이 있다고 말했다. 스토아 학파는 만물이 곧 신이라는 범신론 입장이었고, 플로티노스는 신만이 현실적이며 만물은 신적 요소가 유출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반면, 기독교에선 신을 전능한 창조주라고 가르친다. 신과 만물 사이에는 간극이 있다. 기독교 신은 은총을 베풀고 구원하는 신이다. 사람은 본성상 죄악과 죽음에 내맡겨져 있다. 스스로 악에서 구원받지 못한다. 신만이 인간을 악에서 구원할 수 있다. 따라서 기독교 입장에서는, 사람이 스스로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이 오만하게 느껴졌다.

2. 인간과 세계

스토아 학파나 에피쿠로스 학파는 현세를 중요하게 여겼다. 삶의 의미를 현세가 아닌 다른 곳에서 찾겠다는 생각 따위를 한 적이 없다. 이들에게 철학 성찰의 목표는 현세에서 가능한 한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이다. 하지만 기독교는 다르다. 삶의 목표는 신의 구원을 받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세의 삶을 별로 중요히 생각하지 않았다.

II. 교회 통일의 확립

로마 교회는 모든 외부/내부 위협을 견뎌 냈다. 그러면서 기원초 수세기 동안 대외 권력과 내부 통일성을 키워 나갔다. 로마 교회를 지탱하는 두 가지 버팀목이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첫째로, 로마 교회는 교권제도(성직자 위계와 지배질서)를 확실히 다져 엄격한 위계질서를 갖추었다. 둘째로, 다른 종교를 미신으로 여기고 배척했다. 기독교만이 철저한 진리라고 고수해서 내외적 안정을 이룰 수 있었다. 또한, 교회에서는 장로와 주교가 큰 지위를 누렸다. 이들을 예수가 파견한 사도들의 후계자로 생각했다. 자연을 초월한 존재라도 되는 양 권위를 누렸다. 기독교 교단은 완벽하게 짜인 교회 질서를 갖추었기 때문에 당대 다른 모든 종교와 차이가 있었고, 또 이들보다 더 오래 지속될 수 있었다.

III. 아우구스티누스 - 자신의 치부를 솔직히 드러낸 중세 초기 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

1. 생애와 저작

아우구스티누스는 모든 교부 중 가장 심오한 사상가이며, 가장 큰 영향력을 지녔던 인물이다. 열세 권짜리 <고백록>을 집필해 자신의 생애를 기도 형식으로 기록했다. 실제로 그는 기독교로 종교를 바꾸기 전까지 불안한 삶을 살았다.

아우구스티누스는 354년 태어났다. 아버지는 이교도였고, 어머니는 기독교도였다. 방탕한 청년기를 보낸 그는 키케로의 글을 읽고 철학에 입문했다. 초창기 그는 10년 동안 마니교를 믿었다. 그러나 이 교단에 실망을 하고 밀라노로 떠났다. 밀라노에서 수사학 교사로 일을 했다. 이곳에서 처음엔 회의론에 빠졌으나 플로티노스의 신플라톤주의를 접하면서 회의론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여기서 만족할 순 없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밀라노의 위대한 주교의 설교에 감명을 받아 387년 기독교로 개종했다. 이때부터 아우구스티누스는 이탈리아와 북아프리카를 돌아다니며 연구와 성찰에 전념하면서 숨어 지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영향력은 5~6세기에 걸쳐 기독교 전체를 휩쓸었으며 중세 전체를 설명하는 정신 유산이 됐다. 아우구스티누스 이후의 교부철학(스콜라철학이 시작되기 전까지는)은 그다지 독창적인 성격을 갖지 못했다. 아우구스티누스 사상에 설명을 추가하고 주해를 다는 것에 불과했다.

아우구스티누스 사상의 지대한 영향으로 중세 초에는 오직 종교와 신만이 관심 대상이었다. 자연과학이나 예술은 중요히 여기지 않았다. 우리가 중세 시대를 '잃어버린 천년'이라고 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천년 동안 과학과 예술의 발전이 없었으니.

2. 아우구스티누스의 철학

영혼의 심층

고대 철학자들도 사람 심리를 연구했다. 하지만 아우구스티누스는 더 예리하게 심리를 통찰했다. <고백록>에서 자기 성찰과 자기 비판을 통해 내밀하고 개인적 치부를 파헤치기도 했다. 자신의 잘못을 공개적으로 고해했다는 점에서 그리스 철학자들과 구별된다. 그리스 철학자들은 자신의 치부를 대놓고 드러내지 않았다. 솔직하지 않았다. 이점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리스 철학자들보다 훨씬 솔직한 철학자였다. 마음을 부단히 고찰한 결과, 아우구스티누스는 후대 심리학이 무의식이라 부른 마음의 어두운 영역을 처음으로 발견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은 바깥으로 나가 높다란 산과 파도가 몰아치는 바다, 거세게 흘러가는 넓은 강물, 드넓은 대양 그리고 별들의 운행을 보며 경탄합니다. 하지만 정작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생각지도 않습니다."

삼위일체론

아우구스티누스는 삼위일체론을 주장했다. 삼위일체론이란 성부, 성자, 성령은 사실상 하나라는 사상이다.

창조와 시간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했다면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이 따른다. "그럼 하나님이 세계를 만들기 전에는 무엇을 하고 있었나?", "세계가 창조되기 전에는 어떤 상태였나?"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하나님이 세계와 동시에 '시간'도 창조했다. 이 세계는 무한한 시간 속에서 생겨난 게 아니라 시간과 동시에 창조된 것이다. 시간은 세계에 앞서 있을 수 없다. 왜냐면 세계가 없으면 만물이 없고, 만물이 없으면 이들의 상태 변화도 없기에 시간도 생겨나지 않기 때문이다. 시간과 더불어 운동, 즉 상태 변화도 시작되므로, 세계는 시간과 더불어 동시에 만들어진 것이다.

의지의 자유와 예정론

의지의 자유는 철학과 종교가 씨름하는 어려운 문제 가운데 하나다. 아우구스티누스 시대에도 이를 둘러싼 논쟁이 있었다. 영국 수도사 펠라기우스는 사람은 아무런 죄를 짓지 않고 자유롭게 태어난다고 주장했다. 펠라기우스에 따르면, 인간은 자유 의지로 기독교 교리를 따르며 축복을 얻을 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펠라기우스의 주장에 반박했다. '예정론'을 주장한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예정론에 따르면, 사람의 시조인 아담만이 아무 죄 없이 자유롭게 태어났다. 아담은 신의 의지에 따라 죽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악마의 유혹에 빠져 죄를 지은 결과, 모든 사람도 죄를 지은 상태로 태어났다. 사람은 더 이상 자유롭지 못하다. 본성에 따라 죄와 죽음에 굴복할 수밖에 없다. 신의 은총만이 사람을 구원한다. 물론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건 아니다. 신은 이미 선택받은 일부만 구원한다. 다시 말해, 누가 구원을 받고 누가 저주를 받을지는 신이 정한다. 이게 바로 예정론이다.

예정론은 그 과격함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무력과 두려움을 심어주었다. 그리하여 아우구스티누스는 결국 자신의 예정론을 완화했다. 신은 처음부터 구원과 저주를 결정하지 않고 전지전능함으로 최후의 결과를 알고 있을 뿐이라고 했다. 그런데 아우구스티누스는 예정론에서 오로지 신의 의지만을 인정한 결과, 세상에 악이 왜 존재하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지 못했다. 결국 아우구스티누스는 악이란 선이 없는 상태일 뿐이라고 설명했다. 신이 선과 악을 모두 만든 게 아니라는 말이다. 신은 선만을 만들었는데, 선이 없는 곳에 부득이 악이 생겨났다는 이야기다. 마치 태양이 어둠을 만들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태양은 빛을 내리쬔다. 그러나 빛이 닿지 않는 곳에 어둠이 생겨난 것뿐이다.

IV. 후기 교부철학

아우구스티누스 활동 시기부터 교부철학 종말까지는 혼란한 시기였다. 야만족과 로마 제국의 싸움, 야만족들끼리의 싸움 때문이다. 결국 서로마는 게르만족에게 굴복했다. 동로마는 게르만족 이외에도 페르시아, 불가리아, 아랍인들의 공격에 시달렸다.

교부철학은 그리스 철학의 영향을 받았다. 플라톤주의, 더 정확히 말하면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은 아직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교부철학 말기에는 기독교의 교의가 완성되었다. 당시 완성된 교의로는 성부, 성자, 성령이 하나라는 삼위일체가 있다. 또한, 신과 만물 사이에는 넘지 못할 간격이 있다는 교의도 있다. 신플라톤주의에 따르면, 인간은 신의 세계에 도달할 수 있다. 하지만 기독교에 따르면 인간의 의지로는 신의 세계에 도달할 수 없다. 신의 은총만 받을 수 있을 뿐이다. 게다가 원죄설도 받아들였다. 아담이 지은 죄를 모든 후대 인간도 함께 진다는 뜻이다. 연좌제다. 이렇게 기독교 체계는 점차 굳건해졌다.

제2장 스콜라 철학 시대

그리스 로마 철학 시대의 중심부는 항상 지중해 연안이었다. 그리스와 이탈리아 근처를 뜻한다. 스콜라 철학 시대에 접어들면서 무대의 중심은 유럽 서쪽과 북쪽으로 옮겨 간다. 그리스 로마 시대에는 유럽 서쪽과 북쪽 사람들을 야만인으로 취급했다. 스콜라 철학 시대에 들어서야 과거 야만인들이 문화의 주역으로 탈바꿈했다. 비록 이 왕국은 오래 지속되진 못했다. 그러나 여기서 최초로 실현된 유럽의 정신적 통일은 그 후로도 지속되었다.

당시 철학은 범국가적이었다. 서유럽의 중심 국가인 독일과 프랑스, 이탈리아, 영국에서 정신 통일이 이루어졌다. 학문과 철학에서는 언어도 다 같이 라틴어를 사용했다. 모든 중요 저작은 라틴어로 써서 어느 지역에서나 쉽게 읽을 수 있었다. 학자들도 나라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활동했다.

이런 과정에서 철학은 성직자를 교육하는 학문이었다. 수도원 학교에서 성직자들에게 철학을 가르쳤다. 철학은 단지 성직자를 교육하는 데 사용될 뿐이었다. 교부철학이 그렇듯, 스콜라 철학도 목적 없이 탐구를 하지 않았다. 스콜라 철학의 목표는 신앙에 관한 진리를 터득하는 것이다. 스콜라 시대에 철학은 '신학의 시녀'였다.
스콜라 철학 초기만 해도 고대 그리스 철학에 관한 지식은 상당히 약한 수준이었다. 플라톤이나 신플라톤주의는 잘 알려졌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초기 기독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글을 번역하는 걸 막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 전집이 중역되어 보급되면서 스콜라 철학은 점차 발전했다.

스콜라 철학에서 진리를 발견하는 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진리는 이미 알고 있다. 진리는 신의 구원이다. 따라서 스콜라 철학에서는, 신의 구원을 철학을 통해 올바로 해석하는 게 중요하다. 다시 말해, 진리가 무엇인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진리를 어떻게 해석하는지가 중요하다. 왜냐하면 진리는 이미 신의 구원이라는 점을 알고 있으니까.

I. 초기 스콜라 철학 (보편 논쟁)

1. 쟁점

초기 스콜라 철학 시대에는 보편 논쟁이 주요한 쟁점거리였다. 보편 논쟁이란 보편자가 실제로 있는가 하는 논쟁이다. 예를 들어, 나도 사람이고 너도 사람이고 홍길동도 사람이다. 나, 너, 홍길동은 개별 사람이다. 그렇다면 '사람'이라는 보편 실체가 존재하는가? 나, 너, 홍길동은 개별자고, 사람은 보편자다. 개별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알겠다. 그러면 보편자는 실재하는가, 아니면 단지 관념일 뿐인가. 이게 바로 보편 논쟁이다.

보편 논쟁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1. 보편자는 실재하는가, 아니면 오직 관념에서만 존재하는가?
  2. 보편자가 실재한다면 물질적인 것인가, 아니면 비물질적인 것인가?
  3. 보편자는 감각적 사물과 분리된 것인가, 아니면 감각적 사물들 속에 존재하는 것인가?

보편 논쟁은 수백 년 동안 이어졌다. 보편 논쟁에 관해 크게 두 가지 입장이 있다. 첫째로, 보편자가 실재한다는 '실재론'이다. 이와 반대로 보편자는 실재하지 않고 오직 개별자만 존재한다는 '유명론'이 있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실재론'이 오늘날 사용하는 개념과 다르다는 점이다. 오늘날에는 실재론자(현실주의자)라 하면 실제 사물과 현실만 믿는 사람을 뜻한다. 반면, 관념론자(이상주의자)라 하면 이 세계를 한갓 현상으로 여기고 그 배후에 참된 현실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을 뜻한다. 즉 관념, 이념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스콜라 철학에서 뜻하는 실재론은 오늘날 관념론에 가깝다. 스콜라 철학에서는 실재론이 개별 사물보다 보편자에 더 높은 지위와 현실성을 주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도 보편자와 개별자에 관해 분명한 입장을 정하지 못했다. 크게 본다면 실재론자는 플라톤과 신플라톤주의를, 유명론자는 아리스토텔레스를 논거로 삼는다.

2. 실재론자

에리우게나 - 스콜라 철학의 시조

에리우게나

에리우게나라는 별칭을 가진 요하네스 스코투스는 810~877년에 살았고 파리에서 교수였다. 에리우게나는 스콜라 철학의 시조라 불린다. 스콜라 철학의 근본 명제 '참된 종교는 참된 철학이며, 동시에 참된 철학은 참된 종교'라는 말을 처음 제시했다.

에리우게나는 실재론자였다. 그런데도 에리우게나는 신성모독으로 지탄을 받았다. 신보다는 이성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에리우게나는 신플라톤주의에 가까웠는데, 이 때문에 더욱 비난받았다.

캔터베리의 안셀무스 - "이해하기 위해 나는 믿는다."

안셀무스

실재론자였던 안셀무스(1033~1109)는 프랑스 여러 수도원에서 중년기를 보냈고, 여생 마지막 20년은 영국 캔터베리에서 대주교로 지냈다. 안셀무스 역시 에리우게나와 마찬가지로 이성과 신앙을 합쳤다. 그러나 안셀무스는 에리우게나보다 더욱 정통 신앙의 입장이었다. 무엇보다 그는 신앙과 이성을 조건 없는 종속관계로 봤다. 이성이 신앙에 종속된다는 말이다. 안셀무스에 따르면, 신앙이 우선이어야 하며, 신앙이 없다면 올바른 인식도 없다. 그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이해하기 위해 나는 믿는다."  

안셀무스는 신앙이 우선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신앙을 가졌다 해도 인식하려 하지 않는다면 태만이라고 여겼다. 따라서 안셀무스는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고 이성을 사용했다.

샹포의 기욤

기욤은 1070년에서 1121년까지 살았다. 기욤은 극단적인 실재론자였다. 기욤에 따르면, 이 세상에 개별 사람이 다 사라져도 '사람'이라는 보편자는 존재한다. 또 이 세상에 모든 하얀 사물이 사라져도 '하얀색'이라는 보편자는 존재한다.

3. 유명론: 로스켈리누스 - 유명론의 대표주자

로스켈리누스

요하네스 로스켈리누스(1050~1120년경)는 대표적인 유명론자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현실은 오로지 단순한 개별 사물로만 이루어져 있다. 보편자란 사람이 생각해 낸 이름이다. 비슷한 개별 사물의 공통점에 따라 구분한 명칭일 뿐이다. 보편자로서 '하얀색'은 없다. 마찬가지로 '사람'이라는 보편자도 없다. 존재하는 건 개별 사람들뿐이다. 로스켈리누스에게 실재론은 의미 없는 이론이다.

유명론은 기독교 사상과 모순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유명론은 관념을 믿지 않지만, 기독교 사상은 관념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유명론자 가운데 기독교를 독실하게 믿는 사람도 있었다. 어쨌든 일반적으로 유명론은 기독교의 비판 대상이었다. 결국 로스켈리누스는 이단자로 낙인찍혀 자신의 주장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 로스켈리누스의 패배 때문에 유명론은 오랫동안 공개적으로 표출되지 않았다.

4. 잠정적 해결: 아벨라르 - 실재론과 유명론을 결합한 철학자, 비극적인 중세 사랑 이야기의 주인공

아벨라르와 엘로이즈

아벨라르에 따르면, 이성은 신앙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는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제일 먼저 나는 신앙의 기초를 이성적 근거로 파악할 수 있게 하는 문제와 씨름했다. 내 제자들에 따르면, 아무 사유도 자극하지 않는 장광설은 헛되다. 개념으로 파악할 수 없는 것을 믿을 수는 없다. 자기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도 이해하지 못할 내용을 설교하는 행위는 어처구니없다. 그런 사람이야말로 주님이 말씀하신 '눈먼 자들을 이끄는 눈먼 지도자'라고 내 제자들은 생각한다."  

아벨라르는 안셀무스의 신조와 정반대라고 볼 수 있다. 안셀무스는 '이해하기 위해 나는 믿는다.'라고 말했다. 아벨라르는 '믿기 위해 나는 이해한다' 하는 입장이다.

아벨라르가 유명한 이유는 보편 논쟁에 관한 그의 견해 때문이다. 아벨라르는 학창 시절 실재론자인 기욤과 유명론자인 로스켈리누스의 수업을 모두 들었다. 두 입장을 모두 숙지한 것이다. 아벨라르는 보편 논쟁에 대해 중립 입장이었다.
실재론자는 보편자가 개별자보다 앞서 존재한다고 믿었다. 유명론자는 개별자가 보편자보다 앞서 존재한다고 믿었다. 아벨라르는 보편자가 개별자 속에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개별자 안에 보편자도 함께 존재한다는 말이다. 실재론자는 개별자 밖에 보편자가 따로 존재한다고 봤지만, 아벨라르는 개별자와 함께 보편자도 존재한다고 본 것이다.

다른 얘기지만, 아벨라르는 엘로이즈와의 스캔들로 더 유명하다. 풀베르라는 사람은 당시 유명한 수도자였던 아벨라르에게 조카 엘로이즈의 교육을 맡긴다. 아벨라르와 엘로이즈는 20살 이상 차이가 났다. 아벨라르는 엘로이즈와 사랑에 빠졌고 엘로이즈는 아벨라르의 갈망에 화답했다. 그들의 거침없는 애정 행각은 결국 삼촌인 풀베르에게 들켰다. 그들은 도망쳤고 비밀리에 결혼식을 올렸다. 당시 수도자였던 아벨라르는 자신의 명성에 해가 갈까봐 결혼한 사실을 비밀로 했다. 화가 난 풀베르는 하인을 시켜 아벨라르를 거세했다. 아벨라르는 참회를 하며 엘로이즈를 놓아주었다. 둘은 평생 편지만 주고 받았다. 훗날 아벨라르와 엘로이즈가 죽자, 사람들은 둘을 같은 장소에 묻어주었다. 중세의 이 사랑 이야기는 문학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괴테도 아벨라르와 엘로이즈의 사랑 이야기에 감명을 받아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썼다고 한다.

II. 전성기 스콜라 철학

스콜라 철학은 13세기에 들어서면서 전성기를 맞는다. 이때 유럽은 이슬람 사상과 고대 그리스 철학을 모두 만났다. 그리스 철학 대부분을 서양인들이 처음 접하게 된 때는 12세기였다. 이 시대에 라틴어 번역서가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서양에도 아리스토텔레스가 알려지게 되었다. 12세기 이전까지만 해도 그리스, 로마를 제외한 유럽 국가는 아리스토텔레스 저작을 몰랐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전해지자 서양인들은 이후 몇 세기에 걸쳐 아리스토텔레스 저작을 연구하게 되었다. 이외에도 스콜라 철학이 전성기를 맞게 된 이유는 경제, 사회 상황이 좋아졌기 때문이다. 장거리 무역을 포함해 다양한 무역이 활성화됐고, 농업 생산성도 늘었다. 전성기 스콜라 철학의 대표 인물은 알베르투스 마그누스와 토마스 아퀴나스다. 두 인물을 살펴보기 전에 이 시대의 몇 가지 특징을 짚어 보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세계 지배

초기 교회는 아리스토텔레스를 반대했다. 신성모독이라는 이유로. 그러나 13세기에 교회는 입장을 바꿨다. 조건부로 허용하더니 곧이어 아리스토텔레스를 공인했다. 더욱이 다음 세기에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읽지 않는 사람은 교사가 될 수 없다는 규정을 만들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명성은 굉장히 높아졌다. 아리스토텔레스는 16세기까지 세계정신을 지배했다. 한 서양 사상가가 이처럼 완전하게 세계를 지배한 경우는 드물다.

기독교 사상과 이슬람 및 유대 사상의 접촉

십자군 전쟁 시대(1095~1270년경)에는 서양과 동양 문화가 융합됐다. 서양과 동양이 만나면서 서양은 항해술, 도시와 무역, 건축술, 지리학 및 다양한 학문이 크게 발전했다. 철학에서는 기독교 사상이 비기독교, 반기독교와 접촉하게 되었다.

집성

이 시대에는 다양한 학문이 융합되었다. 십자군 원정 때문에 사회, 지리, 정신 지평이 커졌고,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아랍 사상에 관한 지식이 늘었으며, 스콜라 철학도 꾸준히 발전했다. 자연스럽게 이런 다양한 학문을 집대성하려는 욕구가 생겨났다.

1. 알베르투스 마그누스 - 토마스 아퀴나스의 스승

알베르투스 마그누스

알베르투스 마그누스는 알베르트 폰 볼슈테트의 별칭이다. 알베르투스 마그누스는 '위대한 사람'을 뜻한다. 같은 시대 사람들이 붙인 별칭이다. 마그누스는 1193년 혹은 1207년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방대한 책을 썼는데, 그의 책은 1651년에야 전집으로 출간되었다. 21권의 전집 가운데 상당 부분은 아리스토텔레스 글을 설명한 주석이다. 마그누스는 아리스토텔레스 저작을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결함이 있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나름대로 보완했다. 특히 자연과학 분야에서도 본인의 관찰 결과를 활용하며 글을 썼다. 이런 막대한 연구를 하면서 산더미 같은 자료를 모으고 정리했다.
마그누스는 상당한 자연과학 지식이 있었기에, 그가 초자연적인 지식을 가졌다는 소문도 돌았다. 마그누스는 방대한 자료를 비판적으로 활용하고 체계있게 통일하려 했다. <신학대전>을 만들고자 한 것이다. 하지만 마그누스는 끝내 <신학대전>을 완성하지 못했고, 그의 제자인 토마스 아퀴나스가 비로소 완성했다. 마그누스가 없었다면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도 없었을 것이다.

2. 토마스 아퀴나스 - 기독교 신학에 관한 저술을 집대성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

토마스 아퀴나스

생애와 저작

1224년 태어난 토마스 아퀴나스는 마그누스의 제자다. 파리에서 마그누스를 만나 그의 제자가 되었다. 평생 동안 토마스는 마그누스를 존경했다. 토마스 아퀴나스도 마그누스처럼 방대한 저작을 남겼다. 아리스토텔레스에 관한 주석, 철학 소논문, 신학에 관한 저술들(여기에 <신학대전>이 포함된다.), 신학 논쟁에 관한 자유토론집, 기독교 교의에 대한 저술, 기독교 신앙을 옹호하는 저술, 법철학/국가철학/사회철학에 관한 저술, 수도회 제도와 회칙에 관한 논문, 성서 해석에 관한 저술 등이 있다. 정말 방대하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대중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단순하고 명료하게 책을 썼다.

지식과 신앙

토마스 아퀴나스에 따르면, 신의 계시는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으므로 그저 믿어야 한다. 에리우게나나 안셀무스와 반대 입장이다. 그들은 기독교 교의를 이성으로 통찰하려고 애썼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진리는 오직 하나, 신의 계시인데 신의 계시는 이성으로 도달할 수 없다고 보았다. 하지만 기독교 진리가 초이성적이긴 하지만 반이성적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렇게 말한다.

  "그대가 특히 주의해야 할 점은, 신앙이 없는 자와 논쟁을 할 때는 설득력을 지닌 이성근거에 의해 신앙 진리를 증명하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 시도는 신앙의 존엄성을 해친다. 신앙은 이성을 초월하므로 설득력 있는 이성근거로 증명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은 참되며, 따라서 반이성적인 것이 아니기에 설득력 있는 이성근거로 반박할 수도 없다. 기독교를 옹호하는 사람은 신앙 진리를 철학으로 증명하려 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반론을 무력하게 만들어 기독교 신앙이 틀리지 않았다는 점을 드러내는 데 힘써야 한다."  

인간과 영혼

토마스 아퀴나스는 영혼에 관심이 많았다. 영혼은 모든 생명이 갖는 형이상학 원리다. 다시 말해, 사람 몸의 근본 형상이 영혼이다. 토마스에 따르면, 영혼은 비육체적인 순수형상이자 정신의 실체다. 이로부터 영혼은 죽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영혼은 육체와 관련 없는 실체라서 육체가 없어진다고 영혼도 없어지는 게 아니다. 순수형상이기 때문에 스스로 없어질 수도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인식'하는 걸까? 토마스는 여기서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의견을 빌려 온다. 인식은 오직 경험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고 봤다. 경험은 개별 사물만 인지한다. 경험이 인지한 걸 지성이 다시 가공해야 '인식'이 된다. 지성이 있어야 본질을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감성으로 받아들인 경험을 지성(상상력)을 통해 본질적인 형상으로 바꾼다. 그래야 비로소 '인식'하는 것이다.

정치학

마그누스와 토마스 아퀴나스는 모두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였다. 둘 다 현상 세계에 관심을 두었다. 하지만 조금 달랐는데, 마그누스는 자연과학에 관심을 두었다면 토마스는 국가에 더 관심을 두었다. 토마스에 따르면, 사람은 철저히 국가에 종속된 존재다. 토마스의 국가론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국가론에 크게 의지한다. 아리스토텔레스와 마찬가지로 토마스는 사람은 정치적 동물, 사회적 동물이라고 보았다. 그런 이유로 사람에게 국가는 꼭 필요하다. 국가가 사람을 지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국가의 과제를 평화와 복리로 보았다. 그런데 평화와 복리가 인간의 궁극 목적은 아니다. 평화와 복리는 국가가 제공하는 이점일 뿐이다. 인간의 궁극 목적은 신의 축복을 얻는 일이다. 신의 축복은 국가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교회의 역할이다. 그래서 토마스는 국가보다 교회의 역할을 더 우선시했다. 국왕이 교회에 복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랑스럽지 못한 역사 - 마녀사냥

마녀사냥

거의 모든 중세 사상가들은 한 가지 큰 잘못을 저질렀다. 토마스 아퀴나스도 마찬가지다. 바로 악령이나 악마, 마녀에 대한 믿음이다. 그들은 마녀가 악마와 계약을 맺고 악을 퍼뜨린다고 믿었다. 이런 믿음에 따르면, 악마와 계약을 맺은 마녀는 교회에 반기를 든다. 이렇게 해서 마녀 색출 작업이 시작됐다. 바로 마녀사냥이다. 250년 동안 마녀사냥이 자행됐다. 기록에 따르면 10만 명 정도가 마녀사냥으로 불에 타 죽었다. 희생자는 주로 여성이다. 한 사람만 고발해도 마녀재판이 열렸다. 혹독한 고문이 자행됐고, 거의 모든 사람들이 고문에 못 이겨 범행을 했다고 자백했다. 계몽주의가 시작되며 마녀사냥은 점차 없어졌다. 독일에서는 1755년에야 비로소 마녀화형이 중단되었다.

III. 후기 스콜라 철학

1. 로저 베이컨 - 스콜라 철학의 뿌리를 자르려 한 철학자

로저 베이컨

전성기 스콜라 철학과 후기 스콜라 철학을 시기로 정확히 나누는 건 쉽지 않다. 전성기 스콜라 철학의 거장이 살아 있던 시기에 로저 베이컨도 활동했다. 로저 베이컨은 토마스 아퀴나스를 공격했으며 스콜라 철학의 원리 자체도 비판했다. 이런 점에서 중세 말기에 시작할 유럽 정신의 전환에 기여했다.

로저 베이컨이 스콜라 철학을 비판한 이유는 세 가지다.

첫 번째 이유는, 스콜라 철학자들은 그리스어와 아랍어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를 원어도 모르면서 아리스토텔레스에 관한 책을 써낸 철학자라고 조롱했다. 베이컨에 따르면, 성경을 포함해 기존 철학책들은 잘못된 번역 투성이다. 그래서 기존 번역물들을 불태워버리는 게 상책이라고 주장했다.

두 번째 이유는 스콜라 철학자들이 모든 학문의 기초인 수학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로저 베이컨은 수학과 과학을 중요하게 여겼다.

마지막 이유는 스콜라 철학은 교회 권위에 너무 의지하기 때문이다. 성경이나 아리스토텔레스, 교부를 근거로 논리를 만들어낸다. 그에 반해 베이컨은 경험, 즉 자연을 관찰하거나 탐구하는 걸 중시했다. 그에 따르면, 경험에 근거하지 않으면 그 무엇도 인식할 수 없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베이컨이 일상생활 경험과 신적 영감 모두를 경험으로 이해했다는 것이다.

로저 베이컨은 자연과학, 수학을 중시했다. 실제로 그는 이런 예언을 했다고 한다. 노 없이 나아가는 배를 만들 수 있다거나, 짐승을 끌지 않고 달리는 차량을 만들 수 있다고 말이다. 이 모든 점에서 로저 베이컨은 중세 시대의 끝을 선포한 사람이다. 근대 자연 과학 시대를 알리는 서양 사상의 전환기를 앞당긴 철학자다.

2. 둔스 스코투스 - 철학의 내용이 아니라 철학하는 방법에 관심을 둔 철학자

둔스 스코투스

둔스 스코투스는 1270년경 태어나 1308년 숨을 거두었다. 둔스 스코투스는 중세 철학자 중 몇 안 되는 위대한 인물이다. 20세기 철학자 C.S. 퍼스는 둔스 스코투스야말로 '중세의 가장 중요한 철학자'라고 평가했을 정도다.

둔스 역시 토마스 아퀴나스를 비판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스스로를 철학과 신학을 융합시켰다고 믿었다. 하지만 둔스 스코투스는 철학과 신학을 너무 긴밀하게 엮어버린 토마스 아퀴나스를 비난했다. 둔스의 입장에서는 철학에서 참인 명제가 신학에서는 거짓일 수 있고, 반대로 신학에서 참인 명제가 철학에서는 거짓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둔스는 기독교 신앙을 비기독교적 철학으로 대체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다. 그는 충실한 교회 신자였다. 하지만 둔스는 토마스 아퀴나스와 달리 보편자보다 개별자를 더 가치 있게 여겼다. 개별자가 더 완전하며 참되다고 보았다. 이런 둔스 스코투스의 사상은 유명론과 르네상스의 초석을 만든 셈이다.

또한, 둔스는 철학 '방법'에 대해 고찰한 철학자다. 철학 '내용'이 아니라 철학 '방법'말이다. 다른 철학자들이 어떤 내용이나 대상에 대해 사유했다면, 둔스는 어떻게 사유해야 하는지 고민했다. 스콜라 철학 내용이 아니라 철학적 증명 방법을 비판과 관심 대상으로 삼았다. 그렇게 해서 철학이 결정적으로 바뀌었다. 둔스는 로마 교회의 충직한 아들이었지만, 로마를 거부하게 되는 지점까지 철학을 몰고 갔다.

3. 윌리엄 오컴 - 신학과 철학의 고리를 끊어 버린 철학자. "간단히 설명할 수 있는 원리를 복잡하게 설명하지 마라."

윌리엄 오컴

윌리엄 오컴은 로저 베이컨과 둔스 스코투스보다 더 스콜라 철학을 비판했다. 여러 논쟁에서 보여 준 노련함 때문에 그는 '무적의 인물'이란 별칭까지 얻었다. 윌리엄 오컴은 '오컴의 면도날'로 유명하다.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는 원리를 복잡하게 설명하지 말라는 개념이다. 간단한 설명과 복잡한 설명이 있으면 간단한 설명이 맞다는 주장이다. 면도날로 불필요한 가정, 논거, 설명을 제거한다는 뜻에서 '오컴의 면도날'이다.

스콜라 철학자들은 대부분 실재론자였다. 개별자보다 보편자를 우위에 뒀다. 그러나 윌리엄 오컴은 이에 반대했다. 개별자야말로 현실적이라고 주장했다. 보편자를 한갓 기호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오컴에 따르면, 보편자는 전혀 현실적이지 않다. 따라서 오컴은 유명론자였다. 오컴의 유명론은 기독교 교리에 상충될 수 있다. 이런 위험을 피하려고 오컴은 유명론과 신학을 분리했다. 신학은 이성의 영역이 아니라는 이유에서다. 신의 존재를 이성으로 증명할 수 없다. 신을 제외한 모든 지식은 개별자에서 터득할 수 있지만 신에 대한 교리는 다르다. 그래서 오컴은 신을 제외한 영역에서는 유명론이 맞지만, 오직 한 영역 신학에서는 유명론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신학과 세속 학문 사이에 선을 그은 것이다. 실제로 오컴은 교회와 국가의 관계도 분리되기를 바랐다. 당시 교회는 종교 영역을 넘어서 국왕의 영역까지 넘봤다. 세속 권력을 탐냈다. 오컴은 그런 교회를 비판했다.

  "교황은 그 어떤 인간에게서도 자연권을 앗아갈 권한이 없다."  

이런 언행으로 교황은 오컴을 감금했다. 그러나 오컴은 탈출했고, 교황과 알력 싸움을 하던 황제에게 갔다. 황제는 오컴을 보호해주었다. 그리고 황제에게 이런 말을 했다.

"당신이 나를 칼로 지켜 준다면, 나는 당신을 펜으로 지켜 주겠소."

오컴의 유명론은 스콜라 철학에 의해 수백 년 동안 유지된 신학과 철학의 연대를 끊어 버렸다. 윌리엄 오컴 이후로 신앙과 지식, 신학과 철학, 학문과 종교는 분리되었다. 드디어 스콜라 철학에서 벗어나 철학사에서 획기적인 변화를 이룩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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