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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사유

[장 자크 루소] 인간 불평등 기원론

Baek Kyun Shin 2022. 10. 3. 22:17

장 자크 루소는 18세기 프랑스혁명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 계몽 철학자다. 그는 문명을 비판하며 자연주의로 돌아가기를 주장했다. 루소의 대표 책은 세 가지다. <인간 불평등 기원론>, <사회 계약론>, <에밀>이다. 세 책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된다. 어떻게 연결되는지 알아보자.

먼저 <인간 불평등 기원론>은 원래 평등하던 인간이 왜 불평등해졌는지를 탐구하는 책이다. 국가와 문명이 발전하며 인간이 타락하는 과정을 자세히 다룬다. 루소는 때 묻지 않은 고대 사회로 시선을 고정한다. 루소에 따르면 태초 인간은 자유로웠다. 게다가 착했다. 서로 싸울 일도 없었다. 이기심이나 수치심도 없었다. 내가 한 장소에서 사과를 먹는데 누군가 다가와 같이 사과를 먹는다면 어떻게 했을까?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같이 먹거나, 번거로우면 피해서 다른 곳으로 가서 사과를 먹으면 된다. 어떤 선택을 하든 싸울 일이 없다. 그런데 누군가가 울타리를 치기 시작했다. 울타리를 친 사람을 이렇게 외친다.

"울타리 안에 있는 사과는 다 내 것이야!"

처음으로 소유권을 주장한 것이다. 울타리를 친 사람은 편하게 사과를 먹을 수 있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도 따라 울타리를 친다. 그렇게 사유 재산이 생겨났다. 여기서 갈등이 발생한다. 내 울타리 안에 있는 사과가 부족해지면 다른 사람의 사과를 뺐어야 했다. 서로 싸워야 한다. 이렇게 싸움이 벌어진다. 싸우다 보니 혼자보다는 여러 명이 뭉쳐야 승산이 높았다. 같은 편을 모아 부족을 만든다. 점점 규모가 커져 국가로 발전했다.

정리하면 소유를 향한 욕심 때문에 국가와 문명이 탄생했다. 태초 인간은 자유롭고 행복했는데, 문명 때문에 인간은 불행해졌다. 여기까지가 자유로웠던 원시 인류가 왜 불평등해졌는지 설명하는 <인간 불평등 기원론>의 내용이다. 루소는 자연 상태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다음 책인 <사회 계약론>은 자연 상태로 돌아가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고찰하는 책이다. 루소가 말하는 자연 상태는 들판에 돌아다니는 사람, 원시인, 자연인 상태를 말하는 게 아니다. 바로 문명사회의 폐단이 없는 상태다. 그러려면 국가(사회)가 있어야 한다. 그냥 국가가 아니라 일반 의지로 만든 국가다. 루소에 따르면 사람에게는 세 가지 의지가 있다. 개별 의지, 전체 의지, 일반 의지. 개별 의지는 개인의 이기심을 뜻한다. 전체 의지는 개별 의지의 합이다. 즉, 이기심의 총합이다. 반면 일반 의지는 공동체를 위한 의지다. 루소가 바라는 국가는 일반 의지로 만든 헌법으로 이루어진 국가다. 하지만 대부분 국가는 전체 의지로 이루어져 있다. 개별 의지를 가진 사람에게 일반 의지를 갖게 하려면 제대로 교육해야 한다. 그래서 <사회 계약론>을 낸 그 해에 바로 교육에 관한 책을 낸다. 그 유명한 <에밀>이다. 유아기, 아동기, 소년기, 청년기, 성년기마다 아이들을 어떻게 교육해야 하는지 설명하는 책이다. 칸트는 평생 똑같은 시간에 산책을 했는데, 딱 한 번 그 시간을 놓쳤다고 한다. 바로 <에밀>을 여념 없이 읽느라 시간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 불평등 기원론>은 인간 불평등이 생긴 이유를 설명한 책이고, <사회 계약론>은 불평등이 없는 자연 상태로 돌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설명하는 책이며, <에밀>은 자연 상태로 돌아가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게 교육이니, 아이들을 어떻게 교육해야 하는지 설명하는 책이다. 세 가지 책이 서로 논리적으로 연결된다.

당시 볼테르는 학문과 과학 발전이 미덕을 가져온다고 말했다. 반대로 루소는 원시 시대를 칭송했다. 볼테르와 루소 모두 계몽 철학자다. 단지 문명을 향한 의견이 정반대였다. 볼테르는 문명을 찬성한 계몽주의자고, 루소는 문명을 반대한 계몽주의자다. 루소는 인간이 학문과 문명에 대한 과도한 욕심 때문에 그 황금시대에서 멀어졌다고 주장했다. 계몽사상을 주장하던 다른 사상가에 의하면 루소는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하는 사람이었다. 그들은 루소가 정치 종교 개혁의 대의를 저버리고 황량한 원시 상태로 되돌아가려 한다고 비난했다.

한편, <인간 불평등 기원론>은 '인간 사이의 불평등의 기원은 무엇이며 불평등은 허용되는가'라는 주제로 디종 아카데미가 기획한 공모에 기고하는 형태로 쓰였다. 루소는 공모에서 본인 글이 당선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실제로도 당선되지 않았다. 우선 심사위원은 200쪽 분량에 부담스러워했고 루소 주장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루소는 애초에 심사위원을 생각하며 논문을 쓰지 않았다. 인간 불평등의 기원을 심도 있게 파헤치려는 목적으로 글을 썼을 뿐이다.

루소는 훗날 이렇게 썼다.

이 거대한 주제를 마음대로 생각하기 위해 7~8일 간 파리 생제르망으로 여행을 떠났다. 숲 속에 들어박혀 집필을 했다. 인간의 왜소한 거짓을 분쇄하며, 그들의 본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냈으며 그 본성을 변질시킨 시간의 진전과 사물을 따라가 보았다. 인간의 인간을 자연의 인간과 비교하면서 나는 인간의 진보 속에 인간 비참의 진정한 원천이 있음을 증명해 보였다.

<인간 불평등 기원론> 제1부

제1부는 인간이 자연을 떠나고 문명이 발전하며 행복을 잃어가는 상태를 논리적으로 서술한다. 태초 사람들은 모두 평등했다. 일도 힘들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과 말다툼을 할 필요도 없다. 고독해 보일지 몰라도 스스로 만족하며 살았다. 즐거운 일만 하고 아름다운 것만 보며 행복한 생각만 했다. 루소가 생각한 자연 상태의 인간은 고독하고 무사태평하고 평화로우며 건강하고 생각도 정열도 없는 동물이었다. '자연의 인간은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이라는 홉스의 주장을 반박했다. 원시 인간은 착함이 무엇이고 나쁨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누구를 구속하지도 구속받지도 않으며 자유롭게 살았다. 루소에 따르면 인간은 자유로워져야 건강하다.

원시인들은 서로 교류하며 살지 않았다. 그래서 허영심도 신중함도 존경심도, 경멸도 모르고 살았다. 게다가 남의 것과 자기 것에 관한 관념도 없었고 정의가 무언지도 몰랐다. 누군가가 해를 가하면 동물적으로 반응할 뿐 보복을 생각하지도 못했다. 먹을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아닌 이상 피를 흘리는 일도 드물었을 것이다. 원시 인류는 일도 언어도 집도 싸움도 교제도 없으며, 타인을 해칠 욕구가 없듯이 타인을 필요로 하지도 않고 그저 숲 속을 떠돌아다녔을 것이다. 지능은 그들의 허영심과 마찬가지로 발달하지 못했다. 교육은 당연히 없었다. 그렇게 세월이 흐를 뿐이다.

그런데 사람이 늘어나며 서로 먹이 다툼을 하면서 공동체가 나타났다. 이때부터 좋고 나쁨이라는 개념이 생겼다. 힘이 있고 말 잘하는 사람이 유리해졌다. 소유물을 남보다 많이 얻을 수 있으니. 약한 사람은 점점 더 박탈감을 느꼈다. 사유 재산이야말로 인간 불평등의 뿌리이며 불행의 씨앗이다. 신분 제도와 사유 재산을 당연하게 생각하던 당시 사람들에게 루소의 주장은 충격이었다. 비슷한 계몽주의자였던 볼테르조차도 루소의 사유 재산 비판은 이해하지 못할 주장이었다. 볼테르와 루소는 서로 등을 돌렸다.

인간 불평등은 문명과 국가가 생기면서 더 심해졌다. 너무 굳건해져서 이제는 더 이상 불평등을 없애지 못할 지경이다. 하지만 루소에 따르면 인간 불평등은 순리에 어긋나므로 없앨 수 있다. 그리하여 루소 사상은 프랑스혁명의 밑거름이 됐다.

<인간 불평등 기원론> 제2부

땅에 울타리를 두르고 '이 땅은 내 것이다!' 하고 말하리라 생각하고, 다른 사람이 그 말을 믿을 만큼 단순하다는 생각을 한 사람이 문명사회의 실질적인 창시자다. 누군가가 '땅은 모두의 소유이고 사유 재산은 없다'라고 반대했다면 문명사회는 발전하지 않았을 테다. 시간이 좀 흐르자 그러기엔 이미 늦었다. 문명이 발전하면서 관계에 대한 지각이 생겼다. 크다/작다, 강하다/약하다, 빠르다/느리다, 소심하다/대담하다 따위와 같은 말이다. 유대가 강화되면서 사람들은 남들에게 주목받고 싶어졌다. 이 과정에서 노래를 잘 부르고 춤을 잘 추는 사람, 말을 잘하는 사람, 힘이 센 사람이 다른 사람의 존경을 받았다. 불평등을 향한 첫걸음이자 악덕을 향한 첫걸음이다. 결국에는 다른 사람들을 죽이는 지경까지 갔다. 사람들은 최초 자연 상태에서 얼마나 멀어졌는지 알아차리지 못한다. 사람은 원래 악하므로 이를 완화하기 위해 규제가 필요하다고 성급하게 결론을 내리게 됐다. 루소에 따르면 원시 상태 사람들만큼 온순한 자들은 없는데 말이다. 학문과 예술은 판도라 상자와 같이 사치를 낳고 그 사치가 타락을 낳았다. 그리하여 더 이상 건전한 시민은 없어졌다.


루소의 <에밀> 편역본을 읽어봤는데, 지금 시대에 받아들이기 힘든 주장이 꽤 있다. 인간 불평등 기원을 탐구하며 모든 사람이 평등하던 자연 상태로 돌아가자는 주장을 한 사람치고는 적잖이 불평등한 주장이 있었다. 게다가 아이의 교육을 논하는 <에밀>을 썼으면서 정작 본인은 아이를 시설에 보내 직접 키우지 않았다. 이 점 때문에 루소는 비판을 피하지 못했다. 그런데도 여전히 루소가 읽히는 까닭은 1) 당시 주류 사상을 당당하게 맞서 자신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펼쳤고, 2) 프랑스혁명에 직접 영향을 주었으며, 3) 당연한 걸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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