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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트리크 쥐스킨트] 좀머 씨 이야기

Baek Kyun Shin 2020. 10. 17. 19:16

나는 1인칭 소설을 좋아한다. [호밀밭의 파수꾼], [위대한 개츠비], [상실의 시대], [이방인]과 같이 말이다. [좀머 씨 이야기]의 도입부를 읽었을 때, '이런 분위기의 소설을 읽는 게 얼마만인가?'하며 기뻐했다. 

좀머 씨 이야기의 줄거리는 이렇다.

주인공인 소년이 사는 마을에는 좀머 씨라는 신비로운 아저씨가 살고 있었다. 좀머 씨는 지팡이를 짚으며 언제나 길을 걸어 다닌다. 하루에 10시간 이상, 말 그대로 깨어있는 시간에는 항상 이리저리 걸어 다닌다. 주인공인 소년을 포함해서 마을 사람들은 좀머 씨의 정체가 무엇인지, 왜 그렇게 걸어 다니는지 알지도 못했고 관심도 없었다. 

주인공은 좀머 씨를 총 3번 봤다. 처음으로 좀머 씨를 본 때는 비가 억수같이 내리던 날이었다. 아버지와 함께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좀머 씨는 비를 흠뻑 맞으며 여느 때와 같이 걷고 있었다. 아버지는 창문을 열어 "이러다 죽겠어요"라며 차에 탈 것을 권유했다. 좀머 아저씨는 아버지를 쳐다보며 크고 분명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그러니 제발 나를 좀 그냥 놔두시오!"

그러면서 주인공과 아버지 곁을 떠났다.

그 후 시간이 흘렀다. 주인공은 짝사랑과의 약속이 무산되고, 피아노 선생님과의 코딱지 사건으로 세상 일에 대한 분노와 좌절을 경험한다. 결국 자살을 결심한다. 나무에 올라가 뛰어내리려던 찰나에 나무 아래에 있는 좀머 씨를 발견하게 된다. 좀머 씨는 크게 신음소리와 한숨을 내뱉고 허겁지겁 빵을 먹어치운 뒤 다시 길을 떠났다. 그 광경을 목격한 주인공은 자살할 마음이 사라졌다.

다시 시간이 꽤 흘러 주인공이 좀머 씨를 마지막으로 본 곳은 호숫가 앞이었다. 좀머 씨는 천천히 물속으로 들어갔다. 처음에는 수영을 하거나 호숫가를 건너려는 것 같이 보였다. 하지만 물이 좀머 씨의 턱끝까지 오고 나서야 좀머 씨가 자살하려는 걸 알게 되었다. 주인공은 비명을 지르지도 못하고 가만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2달 뒤 마을 사람들은 좀머 씨가 마을에서 사라졌다는 것을 발견했다. 폐쇄공포증으로 유럽이 좁아 캐나다나 호주로 떠났다거나 미쳐서 사라졌다는 온갖 추측만이 난무할 뿐이었다. 주인공은 침묵을 지켰다. 아무에게도 좀머 씨가 자살했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소설은 다음과 같이 마무리된다.

내가 어째서 그렇게 오랫동안 또 그렇게 철저하게 침묵을 지킬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나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은 두려움이나 죄책감 혹은 양심의 가책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나무 위에서 들었던 그 신음소리와 빗 속을 걸어갈 때 떨리는 입술과 간청하는 듯하던 아저씨의 말에 대한 기억 때문이었다. 

"그러니 제발 나를 좀 그냥 놔두시오!"

나를 침묵하게 만들었던 또 다른 기억은 좀머 아저씨가 물속에 가라앉던 모습이었다.

주인공은 자기를 제발 좀 놔두라는 아저씨의 간청에 대한 기억 때문에 침묵을 지킨 것이다. 주인공은 좀머 씨를 그냥 놔둔 것이다.

파트리크 쥐스킨트는 언론에 노출되기를 극도로 꺼려했다고 한다. 그래서 인터넷 상에 돌아다니는 그의 사진도 몇 장 없다. 또한 독자가 자신의 소설에 대해 해석하는 것도 싫어했다고 한다. 

이 소설의 분위기는 정말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쥐스킨트가 의도한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다. 좀머 아저씨는 왜 하루 종일 걸어 다녔는지, 무엇 때문에 자살했는지, 좀머 씨와 마을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무엇을 나타내려고 했는지, 그리고 이 소설에서 의도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읽는 사람마다 의견이 분분하다고 한다. 

다만 언론에 노출되기를 극도로 꺼려했던 쥐스킨트는 나를 좀 그냥 놔두라는 좀머 씨에게 자기를 투영하지 않았을까 싶다. 언론에 노출되지 않고 자신이 살고 싶은 대로 살아갈 테니 자신에 대해 이렇다 저렇게 해석하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뜻을 담은 자전적 소설일 것 같다.

주제와 의도는 모호한데 분위기는 마음에 드는 신비로운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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