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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사유

[프리드리히 니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Baek Kyun Shin 2019. 4. 26. 00:07
모든 이를 위한, 그러나 그 누구의 것도 아닌 책

프로이트, 마르크스, 니체는 20세기를 뒤흔든 3대 혁명적 사상가로 꼽힌다. 니체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철학자 중 한 명이고,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책 중 하나다. 이 책은 지금까지 총 3번 읽었다. 읽을수록 새로운 내용이 눈에 들어오는 매력적인 책이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기존의 도덕과 가치, 철학적 사상을 한 번에 무너뜨린 파괴적인 철학자다. 그는 플라톤부터 굳건하게 이어진 기존 서양철학에 과감하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기존의 틀을 모두 무너뜨리고 혁명적인 철학을 구축했다는 점에서 그는 철학사의 빼놓을 수 없는 거물이 되었다. 

이 책을 3번 읽다보니 밑줄 친 곳이 굉장히 많았다. 거의 매 장마다 잠언들로 가득하다. 추리고 추려 일부만 옮겨 해제해보고자 한다.

형제들이여, 간곡히 바라노니 대지에 충실하라.

니체는 플라톤의 이성주의를 강력히 비판했다. 이상과 영혼은 인간이 꾸며낸 허구의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대지와 몸에 더 충실할 것. 디오니소스적인 예술을 사랑할 것을 강조했다. 

인간은 짐승과 위버멘쉬 사이에 놓인 밧줄이다. ...중략... 인간의 위대함은 그가 다리일 뿐 목적이 아니라는 데 있다. 인간이 사랑스러울 수 있는 것은 그가 건너가는 존재이며 몰락하는 존재라는 데 있다.

인간 중 가장 차원 높은 인간조차 위버멘쉬에 가까운 사람은 없다. 다만, 스스로를 파괴하고, 몰락해야 한다고 말한다. 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니체의 분신이자 대변인인 짜라투스트라의 여정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아이는 순진무구함이며 망각이고, 새로운 출발, 놀이, 스스로 도는 수레바퀴, 최초의 움직임이며, 성스러운 긍정이 아닌가. 그렇다. 창조라는 유희를 위해서는, 형제들이여, 성스러운 긍정이 필요하다. 이제 정신은 자신의 의지를 원하고 세계를 상실한 자는 이제 자신의 세계를 되찾는다.

니체는 세 가지 변화에 대해 말한다. 낙타, 사자, 그리고 아이다. 낙타는 순종하는 존재다. 낙타는 기존의 가치를 그대로 받아들인다. 낙타가 자각을 하게 되면 사자가 된다. 사자는 '너는 해야한다'에 대항하여 '나는 원한다'라고 말한다. 새로운 창조를 위한 자유의 획득. 이것은 사자의 힘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사자는 기존의 가치를 파괴했지만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지는 못했다. 사자도 하지 못한 것을 아이는 할 수 있다. 아이는 순진무구하며 기존의 가치를 모두 잊은 존재다. 새로운 출발이며 놀이이다. '너는 해야 한다'로부터 자유롭고, '나는 하고 싶다'로부터 가치를 창조하는 존재다. 세계를 잃고 자신을 원하는 자는 스스로 도는 수레바퀴 안에서 자신의 세계를 얻는다. 그런 존재가 바로 아이다.

이 땅에서의 덕, 이것이 내가 사랑하는 바다. 그 덕은 별로 영리하지 않으며,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이성도 아주 조금만 지니고 있을 뿐이다.

짜라투스트라에게 덕은 신의 율법이나 인간의 규범을 위한 필수품이 아니다. 천국으로 가는 이정표도 아니다. 이 땅에 존재하는 단 하나의 덕. 짜라투스트라는 그 덕을 사랑한다. 하나 이상의 덕을 갖는 것은 멋진 일이긴 하나 고통스럽고 그로 인해 가볍게 다리를 건널 수 없다. 짜라투스트라는 덕을 사랑한다. 그 덕 때문에 파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생각과 행위 그리고 그 행위의 표상(表像)은 서로 별개의 것이다. 그것들 사이에는 인과의 수레바퀴가 돌지 않는다. 어떤 표상이 이 창백한 인간을 창백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가 행위를 했을 때 그는 자신의 행위를 감당할 만한 자가 되었다. 그러나 행위를 하고 난 후에는 그 행위의 표상을 감당하지 못했다.

여기서 '표상'은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 나오는 '표상'을 의미하는 듯하다. 내가 생각한 것과 행한 것, 그리고 그 행위의 표상 사이에는 인과 관계가 없다. 나의 행위는 감당할 수 있어도 행위의 표상을 감당할 수 없다. 망각을 해야하는 이유이다.

삶을 기꺼이 맞아들이는 내게도 나비와 비눗방울, 그리고 인간들 가운데서 나비와 비눗방울 같은 자들이 행복에 대해 가장 많이 알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경쾌하고 단순하고 우아하고 활동적인 작은 영혼들이 날아다니는 것을 보노라면, 짜라투스트라는 눈물을 흘리고 노래 부르지 않을 수 없다. 

짜라투스트라는 대지와 육체, 그리고 디오니소스적인 것에 충실한다. 이성과 신, 낡은 것과 기존 가치를 철저히 배척한다. 그런 그에게 나비와 비눗방울은 가볍고 행복하며 경쾌한 존재들이다.  

정신도 덕도 지금까지 수백 번 시도하고 수백 번 길을 잃었다. 그렇다. 인간은 하나의 시도였다. 아, 그 많은 무지와 오류가 우리의 몸이 되었다! 수천 년 이어온 이성뿐만 아니라 수천 년 된 망상도 우리들 속에서 갑자기 폭발한다. 그러므로 상속자가 된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중략... 진실로 바라노니, 그대들은 나를 떠나라. 그리고 짜라투스트라에 대항하라! 그리고 더 바람직한 것은 짜라투스트라라는 존재를 부끄러워하는 일이다! 그가 그대들을 속였을지도 모르지 않는가. ...중략... 나를 버리고 그대들 자신을 찾도록 하라. 그리하여 그대들 모두가 나를 부정하게 된다면, 그때 내가 다시 그대들에게 돌아오리라. ...중략... "모든 신은 죽었다. 이제 우리는 위버멘쉬가 등장하기를 바란다."

민음사 판본에는 '위버멘쉬'가 '초인'으로 번역되어있다. '초인'이라고 하면 슈퍼맨과 같은 초인을 생각하기 쉽기 때문에 독일어 그대로 '위버멘쉬'라고 적었다. '위버멘쉬'는 기존의 가치를 모두 잊어버린 존재, 새로운 가치를 갖고 살아가는 존재, 몰락하는 존재, 다리를 건너는 존재, 자신을 부정하는 존재, 창조하는 존재이다. 니체는 '모든 신은 죽었다' 저 한 문장으로 지난 2천 년간의 서양사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수백, 수천 년간 이어져온 가치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건 위험한 일이다. 짜라투스트라는 자신의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에게 짜라투스트라에 대항하고 부끄러워하고 의심하라고 말한다. 그것이야 말로 자신을 찾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내가 더 좋은 일을 했다고 생각되는 것은 언제나 내가 더 잘 즐길 수 있을 때 였다. 이 세상에 존재한 이후로 인간은 너무도 즐길 줄을 몰랐다. 형제들이여, 이것만이 우리의 원죄다. 우리가 더 잘 즐길 수만 있게 된다면,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주거나 고통을 꾸며내려는 생각도 가장 잘 버릴 수가 있는 법이다.

이성의 세계, 영혼의 세계를 위해 현재를 즐기지 못하고 인내하는 것 그것이 원죄라고 한다. 짜라투스트라는 아이들의 나라를 사랑한다. 아이들은 항상 웃고 현재만 생각한다. 아이들이야말로 가장 디오니소스적이고 현재를 즐길 줄 아는 존재들이다.

선과 악은 언제나 자기 자신으로부터 다시 극복되어야만 한다. 가치를 평가하는 자들이여, 그대들은 선과 악에 대한 그대들의 평가와 말로써 폭력을 행사한다. 이것이 그대들의 숨겨진 사랑이며 그대들의 영혼의 빛남이며 전율이자 흘러 넘침이 아닌가. ...중략... 선과 악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려는 자는 참으로, 우선 파괴자가 되어 가치들을 파괴해야 하는 것이다. 

니체는 [도덕의 계보학]에서 선과 악에 대해 자세히 피력했다. 선과 악, 옳고 그름, 도덕과 비도덕 이것은 누가 만든 것이며, 우리는 왜 그것을 따르고 있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자신이 만들지 않은 도덕 규칙을 따른다는 것이 선함의 기준인지, 자신만의 선과 악을 창조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하고 있다.

그대 현대인들이여, 그대들은 얼굴과 온몸의 오십 군데에 알록달록하게 색칠을 하고, 여기 이렇게 앉아서 나를 놀라게 하는구나! 게다가 오십 개의 거울이 그대들을 둘러싼 채, 그대들의 색채 유희에 아첨하고 흉내를 내고 있구나! ...중략... 온몸에 과거의 기호들이 가득 적혀 있으며, 또 이 기호들 위로 새로운 기호들이 덧칠해져 있다. 이와 같이 그대들은 모든 기호 해독자들로부터 자신을 잘도 숨겨놓았다!

나를 포함한 현대인들은 교양이라는 허울을 둘러싸고 남들에게 자랑하기 바쁘다. 수많은 기호들을 사용해 내가 아닌 나로 포장을 한다. 다른 사람들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나에게 관심이 없다. 즉,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실제로 자신에게 관심을 주는 것보다 자신에게 더 많은 관심을 준다고 느낀다. 그리하여 수많은 거울을 둘러싼 채, 다른 사람들이 나를 이렇게 볼 것이다라는 착각에 교양과 기호와 색채로 자신을 포장한다. 그리고 그것을 실제 자신이라 생각한다.  

"이것이 지금 나의 길이다. 그대들의 길은 어디 있는가?"라고 나는 나에게 길을 물은 자들에게 대답했다. 말하자면 모두가 가야 할 그런 길은 존재하지 않는다.
가장 적은 것, 가장 조용한 것, 가장 가벼운 것, 도마뱀의 바스락거림, 한 번의 숨결, 한 번의 스침, 순간의 눈길. 바로 이처럼 작은 것이 최고의 행복을 만든다. 조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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