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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자성] 채근담

Baek Kyun Shin 2022. 6. 25. 02:04

<채근담>은 명나라 말기(1610년 전후)에 홍자성이 쓴 잠언집이다. 채근담은 '풀뿌리 이야기', '풀뿌리를 씹는 이야기'라는 뜻이다. 풀뿌리를 씹는 마음가짐으로 산다면 결국엔 해낸다는 말이다. 이것이 <채근담>의 큰 주제다. 전집과 후집으로 나뉘는데, 전집 222칙과 후집 141칙의 잠언이 담겨 있다. 전집에서는 젊은 시절 사람과 교류할 때의 처세술을 말하고, 후집에서는 노후에 자연과 살아가는 즐거움에 대해 말한다. 불교, 유교, 도교 사상이 함께 깃들어 있다.

채근담

한문학자 안대회 교수가 평역한 민음사 버전을 읽었다. 번역도 괜찮고, 책 디자인도 마음에 들었다. 편집이 비교적 훌륭한 책이다. 역시 민음사!

매일 샤워한 뒤 책상에 앉아 10칙씩 읽었다. 그러니 다 읽는 데 약 한 달이 걸렸다. 그날 읽은 잠언 중 가장 마음에 드는 글귀를 1~2개씩 기록했다. 여기 적은 30개 남짓 잠언 가운데 몇 개나 실천하겠냐만. 아니, 하나도 기억 못할지 모른다. 어쩌면 내일 아침이 되면 깡그리 잊을 여지가 크다. '채근담 한번 읽어봤다'로 끝날 것이다. 그렇지만 읽는 동안에는 침잠하는 기분이 간혹 들었다. 그 기억 하나만으로도 좋다.


전집

4.

권세와 이익, 사치와 화려함을 가까이하지 않는 사람은 깨끗하다.
하지만 가까이하면서도 물들지 않는 사람은 그보다 더 깨끗하다.
잔재주와 간계, 권모와 술수를 모르는 사람은 고상하다.
하지만 알면서도 써먹지 않는 사람은 그보다 더 고상하다.

5.

귓속에는 언제나 귀에 거슬리는 말이 들리고
마음속에는 언제나 속을 뒤집어 놓는 일이 생긴다면
이야말로 덕으로 나아가고 행실을 닦게 하는 숫돌이다.
만약 들리는 말마다 귀를 즐겁게 하고
생기는 일마다 마음을 유쾌하게 한다면
이 인생을 짐새의 독에 파묻는 꼴이 되리라.

13.

좁아지는 길에서는 한 걸음 멈춰
다른 사람이 먼저 가도록 내주고
맛있는 음식은 얼마쯤 덜어서
다른 사람이 즐기도록 양보한다.
이것이 세상을 잘 헤쳐 가는
지극히 안락한 하나의 방법이다.

32.

낮은 곳에서 지낸 뒤에야
높은 곳에 오르는 것이 위태로움을 알아차리고
어두운 곳에 머문 뒤에야
밝은 곳에 있는 것이 너무 드러남을 알아차린다.
조용하게 지낸 뒤에야
많은 활동이 너무 힘든 일임을 알게 되고
침묵에 길든 뒤에야
많은 말이 조급한 짓임을 알게 된다.

43.

바람이 잔잔해지고 물결이 조용해지자 인생의 참다운 경지를 보았고
맛이 담박해지고 소리가 드물어지자 마음의 본디 모습을 알았다.

59.

마음이 괴로울 때 흔히 마음을 기쁘게 하는 멋을 얻고
뜻대로 풀리는 때 곧잘 뜻대로 안 풀리는 슬픔이 생겨난다.

72.

열 마디를 말해 아홉 마디를 맞춰도 기이하다고 칭찬하지 않더니
한 마디가 어긋나니 탓하고 허물하는 소리가 떼 지어 몰려든다.
열 가지를 기획해 아홉 가지를 성공해도 업적으로 인정하지 않더니
한 가지를 이루지 못하니 헐뜯고 따지는 소리가 무더기로 일어난다.
그래서 군자는 입을 다물지언정 나불대지 않으며
서툴지언정 재주 부리지 않는다.

88.

고요할 때는 생각을 맑게 가져 마음의 진정한 바탕을 보고
한가할 때는 심기를 차분히 가져 마음의 진정한 조화를 알며
담담할 때는 뜻을 평온하게 하여 마음의 진정한 맛을 터득한다.
마음을 살펴서 진리를 깨닫는 데는 이 세 가지 방법보다 나은 것이 없다.

110.

늙어서 생기는 질병은 모두 젊었을 때 불러들인 것이고
쇠락한 뒤 생기는 재앙은 모두 번성했을 때 만든 것이다.
그러니 세력이 극성하고 지위가 매우 높을 때일수록
특히 조심하여 몸을 움츠려야 한다.

120.

분노의 불길과 욕망의 물결이 한창 타오르고 끓을 때는
분명하게 그 잘못됨을 알면서도 또 분명하게 그 잘못을 범하게 된다.
알아차린 자는 누구이고, 범한 자는 또 누구란 말인가?
타오르고 끓어오르는 순간에 퍼뜩 정신을 차릴 수만 있다면
간사한 마귀도 문득 참다운 도인이 될 것이다.

122.

다른 사람의 단점은 완곡하게 가려 주고 채워 주어야 한다.
만약 들춰내 까발리고 널리 알린다면
이는 자기 단점으로 남의 단점을 공격하는 짓이다.
다른 사람이 완고하게 고집을 부리면 잘 타일러 깨우쳐야 한다.
만약 화를 내고 미워한다면
이는 자기 완고함으로 남의 완고함을 고치려는 짓이다.

136. 

처지에 따라 따뜻해지거나 냉담해지는 짓거리는
부귀한 자들이 빈천한 자들보다 더 심하고
잘 나가는 사람을 질투하고 시기하는 마음은
골육 사이의 친척이 잘 모르는 사람보다 더 매섭다.
그럴 때 만약 냉정한 태도로 맞상대하고
차분한 심경으로 제어하지 않으면
번뇌의 고통 속에 앉아 있지 않은 날이 하루도 없을 것이다.

149.

물고기를 잡으려고 그물을 쳐 놓았더니
큰 기러기가 그물 속에 걸려 있다.
사마귀가 매미를 탐내는 찰나에
참새는 또 그 뒤에서 사마귀를 노리고 있다.
속셈 안에 또 속셈이 숨어 있고
변고 밖에 또 변고가 일어나니
지략과 기교를 어찌 족히 믿으리오?

168.

은혜는 박하게 베풀다가 점차 후하게 베풀어야 한다.
처음에 후하다가 나중에 박하면 사람들은 은혜를 입었음을 잊는다.
위엄은 엄하게 세우다가 점차 너그러워야 한다.
처음에 너그럽다가 나중에 엄하면 사람들은 혹독하다고 원망한다.

170.

내가 귀할 때 남들이 나를 떠받드는 것은
이 높은 모자와 큰 허리띠를 떠받드는 것이요
내가 천할 때 남들이 나를 업신여기는 것은
이 베옷과 짚신을 업신여기는 것이다.
그렇다면 본래의 나를 떠받드는 것이 아니니 내 어찌 기뻐하며
본래의 나를 업신여기는 것이 아니니 내 어찌 화를 내랴?

176.

절의를 내세우는 사람은 반드시 절의 때문에 비방을 당하고
도학을 표방하는 사람은 항상 도학 때문에 허물을 불러들인다.
따라서 군자는 나쁜 일에 가까이 가지도 않고
좋은 이름을 표방하지도 않는다.
원만하여 온화한 기운만이 처신의 보배다.

192.

남으로부터 받은 은혜는 아무리 깊어도 갚지 않고
남으로부터 받은 원한은 아무리 얕아도 갚는다.
남의 나쁜 점을 들으면 아무리 모호해도 의심하지 않고
남의 좋은 점을 들으면 아무리 뚜렷해도 의심한다.
이야말로 냉혹함의 극치이고 각박함의 으뜸이니
절실하게 경계해야 마땅하다.

200.

뜻에 거슬린다고 걱정하지 말고
마음에 유쾌하다고 기뻐하지 말라.
오래도록 안정되었다고 믿지 말고
처음에 어렵다고 꺼려하지 말라.

215.

글을 잘 읽으려는 사람은
손이 춤추고 발이 절로 뛰는 경지에 이르도록 읽어야 하니
그래야 글자에만 얽매이지 않는다.
사물을 잘 관찰하려는 사람은
마음이 무르녹고 정신이 흡족한 지경에 이르도록 관찰해야 하니
그래야 외형에 붙들리지 않는다.


후집

15.

일을 내려놓고 쉬고자 하면 당장 일을 내려놓아야 한다.
만약 쉬어야 할 시간을 따로 찾으려 하면
자식 혼사까지 마쳤다 해도 남은 할 일이 적지 않다.
승려나 도사는 사정이 나으나
그들 마음 역시 일이 끝날 때가 없다.
"지금 쉬고 싶으면 당장 쉬어라!
일이 끝날 때를 기다린들 일이 끝날 때는 없으리라."
옛사람이 그렇게 말했거니와 식견이 탁월하다.

18.

남들이 명예를 다투고 이익을 좇으며 살도록 내버려 두고
그런 삶에 도취했다며 남들을 싸잡아 미워하지 않는다.
편안하고 담박하게 내 취향대로 살되
나 혼자 깨어 있다고 으스대지 않는다.
이것이 현상에 속박당하지도 않고 허무함에 빠지지도 않아
몸과 마음 둘 다 자유롭다는 석가모니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다.

37.

산림은 빼어난 장소이지만
조금이라도 얽매이면 시장 바닥으로 변하고
글씨와 그림은 운치 있는 취향이지만
조금이라도 탐내고 미치면 장사꾼이 되고 만다.
대개 마음이 물들어 집착하지 않으면 욕망의 세계도 선경이 되고
마음이 얽매여 빠지게 되면 즐거움의 세상도 고해로 변한다.

57.

노인의 눈으로 젊은이를 보면
바쁘게 뛰며 이기려고 다투는 마음을 줄일 수 있다.
쇠락한 사람의 눈으로 영화를 누리는 사람을 보면
화려하게 살며 호사를 부리는 생각을 끊을 수 있다.

60.

한 가지 즐거운 일이 생기면
한 가지 즐겁지 않은 일이 생겨나
서로 맞서서 짝을 이룬다.
한 가지 좋은 광경이 나타나면
한 가지 나쁜 광경이 나타나
서로 넣고 빼서 비긴다.
다만 늘 먹는 끼니와 지금 살고 있는 형편만이
그야말로 편안하고 즐거운 내 보금자리다.

78.

나무는 잎이 져 뿌리로 돌아간 뒤에야
꽃과 꽃받침, 가지와 잎사귀가 헛된 영화였음을 알게 된다.
인생사는 관 뚜껑을 덮고 난 뒤에야
아들과 딸, 보석과 비단이 다 쓸데없는 것임을 알게 된다.

81.

세상맛을 실컷 맛보고 나니
이렇게 뒤집든 저렇게 잦히든 저들에게 맡겨 버리고
눈을 떠서 보고 싶은 생각이 조금도 없다.
세상인심 두루 다 겪고 나니
소라고 부르든 말이라 부르든 내버려 두고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이다.

87.

하늘과 땅 사이에는 온갖 사물이 있고
사람 사이에는 온갖 감정이 있으며
세계에는 온갖 사건이 일어난다.
속인의 눈으로 보면 뒤죽박죽 제각각 별다르지만
도인의 눈으로 보면 어느 것이든 정상이다.
무엇하러 귀찮게 구별하고
어떤 것은 취하고 어떤 것은 버리랴!

98.

태어나기 이전에는 어떤 생김새였을지 한번 생각해 보고
죽은 뒤에는 어떤 꼴을 하고 있을지 또 생각해 보라.
그러면 온갖 생각은 타 버린 재처럼 식고
본성 하나만이 고요히 남아
자연스레 물외로 벗어나 태초의 세계에 노닐리라.

132.

인생에서 한 푼을 줄이고 덜어 내면
그만큼 한 푼을 넘어서고 벗어난다.
예를 들어 보리라.
교유를 줄이면 그만큼 분란에서 벗어나고
말을 줄이면 그만큼 허물이 줄어들며
생각을 줄이면 그만큼 정신을 소모하지 않고
총명함을 줄이면 원기를 보전할 수 있다.
저 사람들은 하루하루 줄이기는커녕 하루하루 보태려 하다니
참으로 자신의 삶을 형틀에 묶어 두고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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