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퉁이 서재
[유발 하라리] 호모 데우스 본문
사피엔스에 큰 감명을 받고 후속작인 호모 데우스를 펼쳐봤다. 사피엔스가 과거부터 지금까지 인류사의 전반을 설명한 책이라면 호모 데우스는 인류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해보게 하는 책이다. 과거 인류를 호모 네안데르탈렌시스, 호모 에렉투스 등으로 칭했고, 현생인류를 호모 사피엔스라 칭한다. 이와 유사하게 미래의 인류는 호모 데우스가 될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호모 데우스가 정확히 어떤 모습일지는 예상할 수 없지만, 인류의 구분이 달라질 정도로 호모 사피엔스와는 크게 다를 것이다라고 말한다. 앞서 사피엔스에서도 말했듯이 허구를 믿는 능력이야 말로 인간이 다른 종과 구분되는 특별한 점이다. 허구를 믿는 능력덕분에 협력 네트워크를 형성할 수 있었고, 인간은 다른 모든 종을 지배한 유일한 존재가 됐다. 이런 무시무시한 사피엔스가 앞으로 100년 후에는 어떻게 될 것인가? 아래는 별 것 아닌 저자의 어렸을 적 일화다. 정말 별 것 아닌 일화인데 기술 발전 속도의 무서움을 보여주고 있다.
인터넷을 처음 접한 날이 아직도 생생하다. 1993년이었고 당시 나는 고등학생이었다. 두 명의 단짝과 함께 '이도'라는 친구 집에 놀러 갔다.(지금 그는 컴퓨터 과학자이다.) 우리는 탁구를 치고 싶었다. 하지만 이미 엄청난 컴퓨터광이던 이도는 탁구대를 펼치기 전에 먼저 깜짝 놀랄 만한 최신 발명품을 보여주겠다고 우겼다. 그는 자신의 컴퓨터에 전화선을 연결하고 몇 개의 키를 눌렀다. 1분간 우리가 들을 수 있었던 것은 고작 끽끽, 빽빽, 윙윙 하는 소리였고, 그런 다음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실패였다. 우리는 투덜거리며 불평했지만 이도는 다시 시도했다. 그래도 실패하자 계속 다시 시도했다. 마침내 그가 기쁨의 환성을 지르며, 자신의 컴퓨터를 근처 대학의 중앙 컴퓨터와 연결하는 데 성공했다고 선언했다. “그래서 중앙 컴퓨터에 뭐가 있는데?” 우리가 물었다. “그게, 아직은 아무것도 없어. 하지만 온갖 것을 입력할 수 있어.” 그가 대답했다. “예를 들면 어떤 거?" 우리가 물었다. “나도 몰라. 그냥 온갖 것들.” 당시 그의 말은 그다지 유망하게 들리지 않았다. 우리는 탁구를 치러 갔고, 그 후 몇 주 동안 심심할 때 마다 이도의 터무니없는 생각을 놀렸다. 불과 25년도 안 된 일이다. (이 글을 쓰는 시점을 기준으로.) 그렇다면 지금으로부터 25년 뒤에 무슨 일이 닥칠지 누가 알겠는가?
컴퓨터와 컴퓨터가 잘 연결되는 것만도 신기해 했던 시절이 있었다. 불과 25년 전이다. 앞으로 25년 후라고 해도 내가 아직 정년퇴직하기 전이다. (정년퇴직이라는 개념이 그때까지 있으려나 모르겠다.) 컴퓨터 기술은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있고, 내가 정년퇴직하기 전에 이미 무서운 세상이 되어있을 것 같다.
중세 시대는 종교가 항상 우선이었다. 종교의 억압으로 인해 잃어버린 천년도 생겼다. 진리나 자유보다 종교의 교리가 우선시되는 시대였다. 그래도 사람들은 종교를 믿었다. 종교는 사람들에게 삶의 의미를 부여했기 때문이다. 살아가면서 포기하고 희생해야 하는 것도 많았지만 삶의 의미를 심어줬다는 측면에서 긍정적인 면이 있다. 중세와 근대를 나누는 기준은 대략 18세기이다.
사실 근대는 놀랍도록 간단한 계약이다. 계약 전체를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을 정도이다. 즉 인간은 힘을 가지는 대가로 의미를 포기하는 데 동의한다는 것이다.
중세 시대에는 개인의 힘은 없었지만 의미는 있었다. 근대는 힘을 얻었지만 의미는 포기했다. 이것이 바로 근대의 계약이다.
그러므로 근대의 핵심인 종교혁명은 신에 대한 믿음을 잃은 것이 아니라, 인류에 대한 믿음을 얻는 것이었다.
이렇듯 근대는 곧 인본주의의 시작이었다. 인본주의는 신을 밀어내고 인간을 세상의 중심에 두었다. 더 이상 신을 믿지 않는다고 사형을 당하지 않는다. 신을 믿는 것과 믿지 않는 것에는 옳고 그름이 있는 것이 아니다. 온전히 개인의 자유에 맡겼다. 이것이 인본주의이다. 인간을 위해 기술이 발전했고, 인간에 의해 기술이 발전했다. 잃어버린 천년이라는 암흑의 터널을 지나 인본주의가 시작되었고, 그로인해 기술이 날로 발전했다. 3~4세기가 지난 21세기 혹은 22세기에는 인간을 밀어내고 데이터와 알고리즘이 세상의 중심이 될 것이라고 저자는 예측한다.
인류의 미래는 한 마디로 ‘데이터교’라고 압축할 수 있다. 사람들이 종교를 믿듯 데이터를 신뢰할것이다. 수 많은 데이터와 알고리즘의 산물로 개개인은 완벽하게 통제되어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개개인의 식습관, 수면시간, 행로, 구매이력, 감정상태, 생화학적 신호 등이 모두 트레킹될 수 있다면 (물론, 이는 법적 규제 완화와 개인의 동의가 필요하겠지만) 인간은 완벽한 삶의 질을 보장받을 것이다. 공부를 잘해야 한다는 부모의 간섭도 없어질 것이다. 개인의 머릿속에 지식이 얼마나 많이 들어있느냐가 그 사람의 가치를 높여주지는 못할 것이다. 어느 누구의 지능도 컴퓨터 한 대의 지능을 따라가지 못할 것이다. 지금까지는 의식과 지능이 형제였다. 의식이 있는 곳에 지능이 있었다. 하지만 알고리즘을 탑재한 컴퓨터는 지능은 뛰어나지만 의식이 없다. 반면 인간은 의식은 있지만 지능은 (컴퓨터에 비하면) 보잘 것 없을 정도로 낮다. 인간은 의식만 지닌 존재가 될 수도 있겠다. 그러면 인간의 가치는 없어지는 것일까?
우리는 물을 마시고 싶으면 컵에 물을 따라 마실 수 있다. 물이 마시고 싶어 따라 마시는 것을 우리는 개인의 의지라고 한다. 히지만 뇌의 생화학적 기제가 물을 따라 마시라고 명령했고 우리는 이를 그대로 수행한 것이다. 즉, 내 자유에 의한 능동적 행동이 아니라 생화학적 기제의 명령에 의한 수동적인 행동이다. (‘나’를 무엇으로 정의할 것인가라는 철학적 질문이 있겠지만) 그렇다면 인간이라는 유기체도 알고리즘의 산물이고, 생명도 알고리즘을 처리하는 과정일 수 있다. 결국 인간도 로봇도 알고리즘의 산물이다. 단지 의식이 있는지 없는지의 여부로 인간과 로봇을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는 인간만이 의식과 지능을 가지고, 협력 네트워크를 구성할 수 있어 피라미드의 맨 꼭대기에 위치해있었다. 향후 로봇이 의식을 가질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 정치, 사회, 경제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식을 가지고 있고, 인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지능을 지닌다면 인간은 멸종하게 될까. 사피엔스는 모두 없어지고 호모 데우스라는 새로운 인류가 탄생할까. 25년 전, 컴퓨터에 연결되는 것만해도 신기해하는 세상이었다. 지금은 25년 전에 상상도 못할 일을 하고 있다. 25년 후에는 지금의 우리가 상상도 못할 일을 하고 있을 것이다.
호모 데우스는 데이터와 알고리즘의 힘을 역설하며 인류의 가치, 미래의 세상 등을 조명한다. 또한 데이터와 알고리즘의 힘을 신성시 할만큼 중시한다. ‘인간은 아직도 인간의 뇌와 몸에 대해 모르는 것이 너무나 많은데, 인간을 능가하는 컴퓨터를 만들기는 힘들지 않을까’라는 의문점이 남기는 한다. 또 이 책에서 조금 아쉬운 부분이 있다면 사피엔스와 겹치는 부분이 많고, 책의 내용이 다소 중구난방이라는 점이다. 다양한 주제로 인류의 역사와 미래를 조명하려면 어쩔 수 없긴 하겠지만 말이다.
이 책에는 재밌는 사례와 통찰이 많이 담겨있었지만 신기하게도 유발 하라리의 25년 전 일화가 가장 크게 기억에 남는다.
2019. 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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