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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사유

[게리 콕스] 실존주의자로 사는 법

Baek Kyun Shin 2020. 8. 17. 17:39

실존주의에 대해 제대로 정리하고 싶은 마음에, 3년 전 읽었던 게리 콕스의 [실존주의자로 사는 법]을 다시 한번 읽어봤다. 이 책은 실존주의에 대해 알기 쉽게 정리한 책이다. 너무 어렵지도 너무 얕지도 않은 딱 적당한 수준의 실존주의 입문서라고 생각한다. 표지에는 알베르 까뮈, 시몬 드 보부아르, 장 폴 사르트르, 프리드리히 니체의 얼굴이 실려 있다. 모두 실존주의의 대가들이다. 이 중 실존주의를 발전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한 장 폴 사르트르의 주장에 대해 집중적으로 조명하고 있다. 최대한 쉽게, 그러나 어느 정도 깊이도 있게 실존주의에 대해 정리해보고자 한다.

실존주의란 무엇인가?

우선 실존주의의 개념에 대해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실존주의란 무엇일까? 

실존주의는 '사랑이란...' 시리즈와 비슷하다. '실존주의란...'으로 시작되는 문장에 어울리는 답은 하나에 그치지 않는다. '실존주의란 인간 현실에 대한 이론', '실존주의란 소심한 사람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철학', '실존주의란 진중한 철학', '실존주의란 그렇게 진중하지는 않은 철학'.

실존주의를 한마디로 딱 정의하기는 어렵다. 그래도 굳이 한마디로 정의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쉽게 말하면 실존주의는 이 거칠고 미친 세상에 사는 일이 어떤 것인지 허튼소리나 조심스러운 배려 따위 집어치우고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철학이다.

실존주의에 따르면 인간은 필연성의 산물이 아니다. 하느님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인간을 만든 것도, 인간에게 어떤 운명이 정해진 것도 아니다. 수천 년 동안 많은 사람들이 인간에게 쓸데없는 운명과 목적을 부여해왔다. 실존주의는 이런 허튼소리를 집어치우라고 말한다. 다 집어치우고 인간에 대해 있는 그대로 보고 솔직하게 이야기하자는 것이다.

신, 국가, 사회, 우주가 인간의 가치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가치나 본질은 본인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 즉, 신이나 우주가 인간이 태어나기 전부터 인간의 본질을 미리 정해두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태어난 순간 그에게는 아무런 본질도 가치도 없다. 본질과 가치는 스스로가 만들어가는 것이다. 사르트르는 다음의 유명한 말로 관념론을 부정하는 실존주의적 관점을 분명히 한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이는 실존주의에서 가장 유명한 말이다. 즉 어떤 사물에 의미를 부여하는 이상적이고 내세적이고 천부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본질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관점이다. 인간은 아무런 목적 없이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다. 그 이후 자신에게 결여된 의미나 목적, 본질을 부여하기 위해 스스로 노력해야 한다. 지금까지의 관념론적 관점에서는 '본질이 실존에 앞섰다'. 인간의 본질은 태어나기 전(실존하기 전)에 이미 결정되었다. 하지만 사르트르는 실존 이전의 본질은 없다고 믿었다. 따라서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라고 표현했다. 또한 영원하고 고정된 본질이란 없다. 본질은 개개인마다 다르며, 끊임없이 발전하고 변하는 것이다.

실존주의의 목표

다소 과격한 표현이긴 하지만 실존주의의 목표는 다음과 같다.

실존주의의 목표는 과학자, 목사, 부모, 교사들이 떠들어대는 온갖 허튼소리를 전부 쓰레기통에 처넣었을 때 우리가 정말 어떤 존재인지 알려주는 것이다.

과학자, 목사, 부모, 교사들은 '인생은 이러이러한 것이다', '너는 이렇게 해야만 한다', '네 인생이 그러한 것은 이러한 것들 때문이다'와 같은 말을 한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이런 말을 들으며 자라왔다. 이런 말들은 우리의 마음에 내재화되었다. 우리는 개인의 자유보다는 사회적 역할에 충실할 것을 강요받았다. 나 자신보다는 다른 무언가를 위한 삶을 살기를 강요받았다. 결국 우리는 선택의 자유가 없다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나는 '학생이기 때문에' 공부해야 한다고 믿고, '부모이기 때문에' 열심히 돈을 벌고,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한다고 믿고, '장애가 있기 때문에' 인생이 불행하다고 믿는다. 하지만 실존주의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단적인 예로 장애가 있더라도 우리의 삶이 불행하다고 믿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불행히 사는 삶을 스스로 '선택'한 것이다. 몸은 불편할 수 있다. 하지만 우울한 생각을 하고, 삶을 비관적으로 보는 것은 결국 그 개인의 선택이다. 수많은 선택지 중 불행할 것을 선택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 모두는 자유로운 존재다. 사르트르의 말에 따르면 '자유를 선고받은 존재'다. 삶을 비관적으로 볼지 긍정적으로 볼지는 순전히 개인의 자유다. 개인은 자신의 선택에 따른 책임만 지면 된다. 비관적으로 볼 것을 선택하면 그에 따른 대가를 치르면 된다. 즉 우울하고 힘든 삶에 대해 책임을 지면 된다. 실존주의는 우리가 '근본적으로 자유로운 존재'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그에 따라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실존주의와 의식

실존주의에서 '의식(consciousness)'은 그 어떤 것도 아니다. 사실상 의식은 아무것도 아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의식은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아니다. 과학자들은 의식을 '뇌의 전기적 신호의 산물'이라고 여긴다. 의식이 있기 위해서는 뇌가 있어야 하는 것은 맞다. 하지만 의식이 단지 뇌의 활동에 불과하다거나, 의식을 뇌의 활동으로 한정할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의식은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의식은 무엇인가? '의식은 무언가에 대한 의식이다.' 사르트르는 [존재와 무]에서 의식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의식이 무언가에 대한 의식이라는 말은 의식이 무언가를 드러내는 직관이라는 명백한 의무를 벗어나는 경우 의식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우리가 사는 이 다양한 세계는 의식에 기반을 두고 존재한다. 의식은 무언가를 지향하고 있다. 의식한다고 말할 때는 항상 '무언가에 대한' 의식을 뜻한다. 의식이 무언가를 지향한다는 뜻은 의식에 무언가가 결여, 결핍되었다는 뜻이다. 

결여와 결핍에 대해 더 알아보기 위해 도토리와 떡갈나무의 예를 살펴보자. 도토리는 그 자체로 아무것도 결여되지 않은 도토리일 뿐이다. 도토리는 자라 훗날 떡갈나무가 된다. 하지만 현재의 도토리에는 떡갈나무가 결여되어 있다. 현재의 도토리는 단지 도토리일 뿐이기 때문이다. 도토리가 떡갈나무가 결여된 존재가 되는 것은 오직 의식에 대해서다. 의식은 도토리를 넘어 미래의 떡갈나무를 내다볼 수 있다. 따라서 도토리는 의식에 대해서 떡갈나무로 존재할 수 있다. 

상황은 그 자체로 아무것도 결핍되지 않았다. 어떤 상황에서 무언가가 결핍되는 것은 오직 그 상황에 처한 의식의 관점에서다. 도토리는 그 자체로 아무것도 결핍되지 않은 도토리다. 하지만 의식이 개입되는 순간 도토리에게는 떡갈나무가 결핍되어 있다. 도토리는 과거와 미래를 볼 수 없지만, 의식은 과거와 미래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의식은 항상 결핍을 찾아내려 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의식이 있는 인간은 완전한 만족에 이를 수 없다. 무언가를 충족한 상황이라도 의식은 또 다른 결핍을 찾아내기 때문이다. 초등학생에게는 성숙한 고등학생이 결핍되어 있고, 고등학생에게는 자유로운 대학생이 결핍되어 있다. 대학생에게는 돈을 버는 직장인이 결핍되어 있고, 직장인에게는 한가한 노년이 결핍되어 있다. 노년에게는 평화롭고 평온한 임종이 결핍되어 있다. 

이렇듯 인간에게는 미래가 결핍되어 있다. 그러나 이는 그리 나쁜 일이 아니다. 인간의 삶이란 원래 그렇게 생겨먹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이유로 우울해 하지만 전혀 우울해할 필요가 없다. 이 상황 속에서 최대한의 자유를 누리면 되는 것이다.

일시성

앞서 의식은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아니며, 무언가에 대한 의식이라고 했다. 이 의식은 근본적으로 일시적인 존재다. 의식은 끊임없이 과거를 지나 미래를 향하고 있다. 순간순간 움직이기 때문에 의식에는 현재라고 부를 수 있는 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의식은 일시적인 존재다. 의식은 결코 현재에 있지 않는다. 의식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존재로서 현재에 있을 뿐이다. 의식은 고정된 존재가 아니라는 뜻이다. 

실존주의자들은 또 다른 경악스러운 주장을 한다. 시간은 의식 없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시간이 존재하는 것은 의식 때문이라는 것이다. 컵을 깨뜨렸다고 생각해보자. 거기에는 깨지기 전의 컵과 동일한 물질이 존재한다. 하지만 컵 자체는 깨져서 없다. 깨진 컵의 파편이 컵이 '있었다'라고 기억하지 않는다. 컵이 있었다고 기억하는 건 오직 의식뿐이다. 과거의 온전한 컵은 오직 의식에 의해서 존재한다. 미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활활 타는 불의 미래는 한 줌의 잿더미다. 하지만 불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한다. 불의 미래가 잿더미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오직 의식뿐이다. 그러므로 불의 미래인 잿더미는 오직 의식에 대해서만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도토리와 떡갈나무의 예로 돌아가 보자. 도토리에게는 과거와 미래가 없다. 도토리는 그저 도토리일 뿐이다. 그 과거가 무엇이었는지 미래가 무엇일지 도토리는 알 길이 없다. 도토리는 단지 현재 존재할 뿐이다. 도토리의 과거와 미래가 있는 것은 오직 의식이 관여했을 때뿐이다. 미래에 떡갈나무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아는 의식을 통하지 않고는 도토리에게 미래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논리에 따르면 시간은 의식 없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이 일리 있을 것이다.

이런 논리를 적용할 때 의식을 떠나서 시간이 존재할 수 없다는 주장은 의식을 떠나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주장과 같다고 할 수 없다. 오히려 의식을 떠나서 세상은 있는 그대로, '지난'이나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 없이 그 자체로 존재한다는 뜻이다.

다시 한번 말하자면 의식 없이는 세상은 그저 존재한다. 과거와 미래 없이 존재한다. 세계에 과거와 미래가 있는 것은 오직 의식이 관여했을 때뿐이다. 

시간과 의식에 대한 고찰을 통해 '우리는 왜 항상 불만을 느끼며 살아갈까?'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다. 우리는 항상 무언가가 결핍되어있기 때문에 불만을 느끼는데, 그 무엇은 바로 '미래'다. 원하는 미래에 도달해도 그 미래는 즉시 과거가 되어 버린다. 우리는 여전히 또 다른 미래를 꿈꾼다. 항상 미래를 갈망한다. 여기서 인간의 불만과 불안이 생겨난다. 실존주의에서는 이렇듯 항상 미래를 갈망하는 것이 인간의 근원적인 속성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완전한 만족에 도달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완전한 만족을 누리고 사는 일이 현실에서는 용납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가 이 사실을 인정한다면 완전한 만족과 절대적 행복에 대한 욕심을 버릴 수 있다. 혹은 완전한 만족과 절대적 행복에 도달하지 못하더라도 실망하지 않을 수 있다. 인생을 더 차분하고 철학적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대타존재

실존주의에서 또 한 가지 중요한 개념은 '대타존재'다. 대타존재란 타자(다른 사람)에 의해 정의된 존재라는 뜻이다.

타자의 세계에서 객체로 격하되는 것, 타자를 위해 존재하는 것, 타자에 의해 격하될 위험 속에 존재하는 것이 '대타존재'의 의미다.

사람 한 명 없는 산속을 거닌다고 상상해보자. 내 주위엔 흙, 나무, 풀, 새소리, 푸른 하늘뿐이다. 모든 세상이 내 세상이다. 내 마음대로 세상을 간직할 수 있다. 나 또한 자연의 일부라 여기며 혼연일체가 된다. 그 순간 저 멀리서 다른 사람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걸 발견한다고 해보자. 자신이 다른 사람의 시선에 노출되었다는 사실을 의식한 나는 마음이 불편해진다. 더 이상 이 숲 속은 내 것이 아니다. 나는 타인에 의해 객체로 전락한다. 나의 옷차림과 매무새, 걸음걸이, 얼굴의 표정을 가다듬는다. 내가 대타존재로 전락하는 순간이다. 타자 역시 마찬가지로 행동한다.

우리는 항상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쓴다.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걱정한다. 결국 우리는 스스로를 위한 존재보다 타인을 위한 존재가 되고야 만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깊은 인상을 주고 싶어 하며, 다른 사람의 사랑과 존중과 두려움을 얻기 위해 웬만한 일은 서슴없이 해치운다. 우리는 만족한다고 자부하고 '개인적인' 목표를 세웠다고 떠들면서 정작 소리 높여 외칠뿐이다. "나를 좀 봐줘! 나는 정말 아름다워, 정말 똑똑해, 참으로 부지런해, 참으로 멋지기도 하지. 나는 존재해, 나는 존재한다고!"

우리는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주체로 존재하기를 중단하고, 자유를 잃은 타자의 객체로서 존재한다.

자유와 책임

실존주의에서 말하는 자유란 우리가 흔히 쓰는 자유와 다른 의미를 가진다. 실존주의에서 말하는 자유는 각자 처한 상황에서 하는 일 혹은 하지 않은 일에 따른 '책임'에 대한 것이다. 책임을 떠난 자유는 자유가 아니다. 자유란 선택해야 하는 것, 그러므로 책임져야 하는 것이다.

기계적으로 돌아가는 세계 속에서도 우리는 자유로울 수 있다. 우리는 언제나 미래를 지향하고 있기 때문에 자유롭다. 스스로 선택함으로써 미래를 결정할 수 있다. 그 선택에 대해 책임만 지면 되는 것이다. 도둑질을 하기로 결정했으면 그 결정에 대한 책임을 지면 된다. 벌금을 내고, 투옥이 되는 등 그에 합당한 책임을 지는 것이다. 마약을 하기로 결정했으면 그에 대한 책임, 피폐한 삶을 살고 합당한 처벌을 받으면 된다.

실존주의에서 자유란 끊임없이 선택해야 하는 책임이다. 자신이 처한 상황의 역경과 저항에 어떻게 대처하는지, 이 상황에서 자신을 어떻게 만들어가는지를 자신이 선택한 행동으로 결정하는 데 따르는 책임이다.

자유와 불안 그리고 자기기만

끊임없는 자유는 불안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엿을 날릴 수도 있고, 조용한 도서관에서 크게 소리를 칠 수도 있으며, 창문으로 뛰어내릴 수도 있다. 물론 그렇게 행동하라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이런 행동도 선택의 여러 가능성 중 하나라는 것이다. 이렇듯 우리는 항상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그래서 불안하다. 불안을 잠식시키기 위해 우리는 자기기만을 한다. 자기기만이란 불안을 피하기 위한 방책으로 자유와 선택의 현실을 부인하는 태도를 말한다. '내가 이렇게 행동한 것은 내 스스로의 선택에 의한 것이 아니라 타인에 의해, 사회에 의해, 상황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것'이라는 태도다. 인간은 자유롭다. 그렇기 때문에 불안하다. 이 불안을 피하기 위해 자기기만을 한다. 자기기만은 진정한 실존주의자가 되기 위해 반드시 버려야 하는 태도이다. 자기기만을 버리고 모든 것은 나의 책임이고 나의 선택이라는 주체적인 자세를 가져야 한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실존주의적 자세다.

진정한 실존주의자가 되기 위해서 우리는 자신의 행동 방식에 대해 이리저리 변명을 늘어놓고 자신의 모습을 후회하는 대신, 행동을 선택하는 방식으로 만든 자신의 모습을 진심으로 원해야 한다.

우연성

우연성은 우연적인 상태를 의미한다. 실존주의의 입장에서 인간은 우연성의 속성을 가졌다. 목수는 어떤 목적을 가지고 의자나 책상을 만든다. 그러므로 의자나 책상에는 필연성이라는 속성이 있다. 의자나 책상이 존재하는 이유는 인간이 그곳에서 책을 읽거나 컴퓨터를 하거나 작업을 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인간은 다르다. 실존주의에서는 인간이 창조되었다고 보지 않는다. 인간의 존재는 필연성의 산물이 아니다. 인간은 그저 세상에 태어난 것이다. 우연히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다. 그러므로 인간에게는 우연성의 속성이 있다. 

사르트르 철학의 두드러진 특징은 인생의 우연성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특히 부르주아에게 변함없는 증오와 경멸을 보인다는 점이다. 사르트르 철학에서는 삶의 우연성을 힐끗 본 뒤 겁먹고 도망치는 사람들을 경멸한다. 이런 사람들의 근본적인 기투는 자기기만으로 몸을 피해 자신의 우연성과 세계의 우연성에서 도망치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기만에 빠진다.

그러므로 실존주의자가 되기 위해서는 존재의 우연성을 받아들여야 한다. 인간은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았다. 스스로 목적을 부여하기 전까지는 인간에게 어떠한 목적도 없다. 이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진정성

진정성은 자기기만과 정반대의 개념이다.

진정성이란 인간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현실에 발맞추어 살아가는 일이다.

진정성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자기 행동에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즉 자기기만을 버려야 한다. 자기기만은 자기 행동에 대해 변명을 하는 태도다. 자기 의지가 아니라 타인이나 상황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선택했다는 태도가 바로 자기기만이다. 우리가 살아가며 하는 어떠한 선택도 스스로의 의지가 아닌 것이 없다.

친일파가 되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고 고문을 한다 해도 친일파가 되기로 선택한 주체는 자기 자신이지 고문이나 일본인들이 아니다. 고문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친일을 택했다고 하는 것은 자기기만이다. 실존주의자라면 이 상황에서 죽기를 택하거나 친일을 했다고 깔끔하게 인정할 것이다. 고문에 의해 부득이하게 선택을 강요받았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친일이라는 정신적 고통보다 고문으로 인한 육체적 고통을 더 피하고 싶어 스스로 선택한 것이라고 인정하고, 더 이상의 변명을 하지 않을 것이다. 친일을 한 사실에 대해 외부환경 탓을 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진정성이다. 모든 선택의 책임은 자신에게 있고, 자신의 의지로 결정했다고 인정하는 행동이 진정성 있는 행동이다. 변명을 해서는 안 된다.

요약

지금까지 실존주의의 주요 개념인 의식, 일시성, 대타존재, 자유와 책임, 불안과 자기기만, 우연성, 진정성에 대해 알아봤다. 실존주의는 이 세상에 사는 일이 어떤 것인지 관념론적 형이상학적 고찰을 버리고, 인간과 삶에 대해 솔직하고 진정성 있게 이야기하는 철학이다. 인간이 태어난 순간 그에게는 아무런 본질도 목적도 가치도 없다. 본질과 가치는 사회나 국가 혹은 신이 만들어준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만들어가는 것이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이 한마디로 실존주의를 압축할 수 있다. 실존주의는 아늑하고 편안하지만 이리저리 움직이는 모래 같은 환상이 아닌, 냉혹하고 불편하지만 단단한 진실의 토대 위에 인생을 지으라고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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