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퉁이 서재
[레프 톨스토이] 고백록 본문
"나는 정신병자였습니다."
톨스토이는 이렇게 고백했다. 그에게 무슨 일이?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 부활 등 많은 대작을 남겼다. 러시아 최고 문호로 당대 사람들에게 찬사를 받았다. 부와 명예도 모두 가졌다. 어느 날 그는 삶이 허무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더 이상 살아갈 희망이 없었다. 급기야 자살을 기도했다. 자살을 기도하던 톨스토이는 신앙을 탐구하게 됐는데, 그 과정을 서술한 책이 [고백록]이다.
이 책은 삶의 의미를 향한 한 인간의 솔직한 고백록이다. 톨스토이는 솔직했다. 욕망을 좇는 삶이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여전히 그 삶을 버리지 못했다고 시인했다. 대작 [안나 카레니나]가 오명을 입을 수도 있지만 그 책은 욕망의 산물이라고 시인했다. 오랫동안 신앙과 진리를 탐구했지만 결론을 내지 못했다고 시인했다. 스스로 정신병자라고 시인했다. 그는 솔직했다.
톨스토이마저 자기가 쓴 책을 비판적으로 봤는데, 우리가 걸작이라고 부르는 책 중에도 얼마나 많은 거짓이 있을까. 인정 욕구와 욕망의 소산을 맹목적으로 읽었을 수도 있겠다. 내 독서 편력을 다시 생각해봐야 할지도.
"이 책 뭐지?"
제2장까지 읽고 이렇게 생각했다. 평소 의문이었던 점을 톨스토이도 똑같이 궁리했기 때문이다. 나는 현실순응자라 생각이 발전할리 없다. 반면에 톨스토이는 진지하고 끈질기고 솔직하게 삶의 의미를 탐구했다. 고상한 척하거나 허영을 부리지 않았다. 어려운 말도 쓰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체계적이고 논리적이다.
이 책의 키워드는 삶의 의미와 신앙이다. 신앙에 대해 말하자면, 나는 신앙이 없다. 그렇지만 신이 존재할 수도,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정확히 말하면 신이 존재하는지 모른다. 신을 두 눈으로 봤다는 사람도 있고, 리처드 도킨스처럼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증명한 사람도 있지 않은가. 이성으로 비이성적 존재를 믿는 게 올바른 방법인지 모르겠다. 이성으로 비이성적 존재를 부정하는 것도 올바른 방법인지 모르겠다. 혹은 이성을 아예 부정하는 게 올바른지도 모르겠다. 나는 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톨스토이 고백록 요약
톨스토이는 일찌감치 신앙을 버리고 돈과 명성을 좇는 삶을 살았다. 그러던 와중 삶에 회의를 갖게 된다. 결국 죽어 없어질 텐데 뭣하러 이렇게 살아가는지 궁금해졌다. 삶의 의미가 진심으로 궁금했다. 학문, 현인, 당대 지식인에게서 해답을 얻으려 했지만 실패했다. 답은 대중에게서 얻었다. 대중은 삶이 의미 있다고 생각했다. 신앙 때문이다. 고심 끝에 톨스토이도 신앙을 갖기로 한다. 신앙이 아니라면 삶의 의미를 일깨워주는 존재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몇 년을 살았다. 그러나 신앙이 있는 사람조차도 종교 가르침대로 살지 않았다. 종교의 이름으로 온갖 악행도 저질렀다. 다른 종파도 비난했다. 어떤 종파가 진리인지 확증할 방법도 없었다. 결국 톨스토이는 종교에 다시 회의를 품게 됐다. 종교에는 진리와 거짓이 동시에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언젠가 무엇이 진리고, 무엇이 거짓인지 밝히겠다며 책을 마무리한다.
제1장 어린 시절에 대한 기억
톨스토이는 유년기부터 기독교 가르침을 받았다. 그러나 대학생 때부터 기독교를 믿지 않았다. 그전에도 사실 기독교 신앙을 진지하게 가진 적이 한 번도 없었다고 고백했다. 단지 교회에서 배운 걸 따라간 것뿐이었다. 믿음이 불안정했다. 그가 생각하기에 신앙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 간 행동이나 마음가짐 차이가 없었다. 다른 사람이 신앙에서 멀어져 가는 방식처럼 그도 신앙에서 멀어져 갔다.
"지금까지 신앙이라고 생각해왔던 것들이 사실은 이미 오래전부터 아무런 실체가 없는 공허한 것이었고, 기도문을 외우고 십자가 성호를 그으며 기도하기 위해 무릎을 꿇은 것들이 너무나 무의미한 행위라는 것이 그대로 드러나버린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자 그런 것들을 더 이상 계속할 수 없었습니다. 나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고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톨스토이는 어려서부터 철학책을 많이 읽고 사색을 많이 했다. 그 덕분에 신앙을 버릴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의 나이 16살 때다.
"나는 15살 때부터 이미 철학책을 읽으며 생각을 많이 했기 때문에 상당히 어린 나이에 신앙과 종교적 가르침을 스스로 버릴 수 있었습니다. 기도문을 외우거나 교회에 나가거나 금식하는 것을 나 자신의 의지로 그만둔 것이 내 나이 16살 때였습니다."
그는 혼란스러웠다. 뭔가를 믿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나는 내가 어릴 때부터 가르침 받아왔던 것을 믿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것도 믿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믿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내가 무엇을 믿고 있었는지는 말로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나는 하느님을 믿고 있었습니다. 아니 하느님을 부정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이 더 맞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어떤 하느님을 믿고 있었는지는 내 자신도 잘 알 수 없었습니다."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톨스토이는 완벽해지고 싶었다. 결국 다른 사람에게 잘 보이려는 욕망, 다른 사람보다 유명하고 부유해지고 싶은 욕망이 싹텄다.
제2장 나의 청년 시절
청년 시절 톨스토이는 도덕적으로 선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선한 사람이 되고 싶다고 다른 사람에게 말하면 그들은 톨스토이를 비웃었다. 도리어 비열한 욕망을 좇을 때는 그를 칭찬하고 격려해줬다. 야망, 권력욕, 탐욕, 교만, 분노 같은 심성은 오히려 존중받았다.
톨스토이의 고모는 그가 황제 부관이 되거나 부호의 딸과 결혼하기를 바랐다. 그 시절만 떠올리면 소름이 끼치고 역겹다고 고백한다. 톨스토이는 전쟁에 나가서 사람을 죽였고, 노름으로 돈을 잃었고, 농부의 피와 땀을 갈취하면서도 그들에게 형벌을 내렸으며, 방탕하게 살며 음행을 저질렀고, 사람들을 속였다. 거짓말, 강도, 폭력, 살인 등 수많은 범죄를 저질렀다. 그러나 사람들을 그를 칭찬했다. 10년 동안 그렇게 살았다.
그는 동료 작가들과 함께 허영심, 이기심, 교만으로 글을 썼다. 글 쓰는 목적은 명성과 돈이었다. 선한 마음을 글에서는 최대한 숨기거나 오히려 조롱했다. 결국 사람들이 톨스토이 글에 박수갈채를 보냈다. 당시 톨스토이와 함께 글을 썼던 동료 작가들의 인생관도 모두 마찬가지다.
당시 예술인의 소명은 인류를 가르치는 것이었다. 예술인은 글로 사람들을 가르친다고 생각했다. 무엇을 가르치는지도 모르면서. 톨스토이도 마찬가지다. 무엇을 가르치는지 모르면서 글을 썼다.
그러던 와중 톨스토이는 종교에 회의를 품었다. 종교의 사제였던 작가들 사이에서 뜻이 서로 분열됐기 때문이다. 종교의 가르침보다 글을 써서 돈을 버는 데 혈안이 된 사람도 많았다. 이런 상황에서 종교에 믿음을 갖고 글을 쓰는 게 옳은 일인지 의심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작가의 신앙과 신조가 틀릴 수도 있다는 의심이 들었다. 그러자 대부분의 작가가 부도덕해 보였다. 작가가 역겨워졌고 본인 스스로에게도 역겨움을 느꼈다. 신앙이 사기극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강한 거부감이 들었다. 그런데 신앙이 자신에게 준 지위, 즉 시인이자 예술인이라는 지위는 거부하지 않았다. 그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가르치는지 몰랐지만, 여전히 사람들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고 있다고 순진하게 생각했다.
당시 작가들은 서로 욕하고 싸우면서도 많은 글을 써 사람들을 가르치려고 했다.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답하지도 못하면서 글을 썼다. 작가들은 본인 말만 쏟아냈다. 사람들이 그들에게 돈을 지불했고 찬사를 보냈다. 작가들은 스스로가 옳다고 생각해버렸다. 당시 상황은 정신병동 같았다고 톨스토이는 회상한다.
제3장 진보에 대한 미신적 믿음
이후 톨스토이는 농촌 학교에서 농민을 가르쳤다. 여전히 무엇을 가르치는지 알지도 못했다. 그러면서 사람들을 가르치려고 교묘히 잔재주를 부려야 했다. 결국 정신적 중병에 걸렸다. 중병 때문에 잠시 휴식을 가졌는데, 그때 결혼을 했다. 결혼 생활 덕분에 삶의 의미를 찾는 일에서 잠시 벗어나게 되었다.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생각에 바쁜 생활을 했다. 그렇게 15년이 흘렀다. 그는 여전히 글 쓰는 일이 하찮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돈과 명예 때문에 멈출 수 없었다.
시간은 그렇게 흘러갔다. 어느 날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절망에 빠졌다. 혼란스러운 순간은 점점 더 빈번하게 찾아왔다. 인생은 무엇이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궁금했다. 의문은 더 반복해서 생겨났고 더 끈질기게 대답을 요구했다. 그러자 마음의 병이 생겼다. 고통은 점점 심해졌다. 삶의 염증 정도로 여겼던 고통이 이제는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됐다. 다시 말해 죽음과 관련한 문제가 되었다.
이제는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의문에 대답해야 했다. 의문에 대답하려고 하자 두 가지를 알게 됐다. 첫 번째는 삶에 관한 의문이 유치하고 시시한 게 아니라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이라는 점이다. 두 번째는 아무리 오랫동안 생각해도 톨스토이 본인 능력으로는 삶에 관한 의문에 대답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래 좋다. 나에게는 넓은 땅과 300마리의 말이 있다. 그런데 그것이 뭐 어쨌다는 것이냐?... 중략... 나의 자녀를 어떤 식으로 교육시켜야 할지 계획을 세우고자 하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해야 하는데?'라는 의문이 내 안에서 불쑥 올라왔고, 어떻게 하면 농부들이 더 잘 살게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다 보면 '그런데 그 일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데?'라는 의문이 갑자기 올라오기도 했습니다."
... 중략...
"내가 쓴 글이 나에게 가져다준 명성에 대해 생각할 때는 이런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래 좋다. 내가 셰익스피어보다 더 유명해질 거라고 하자. 그런데 그게 뭐 어쨌다는 것이냐?' 그리고 나는 이 의문들에 대해 그 어떤 대답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이 의문에 대답하지 못하면 더 이상 살아가는 게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대답할 수 없었다.
제4장 정지되어 버린 나의 삶
톨스토이의 삶은 어느 순간 정지돼 버렸다. 꼭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진정으로 이루고 싶은 것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원하는 일이 있어도 그것을 이루든 이루지 못하든 결과는 무의미했다. 심지어 진리를 알고자 하는 마음도 없어졌다. 사실 진리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인생은 무의미하다는 사실이다. 그는 누구보다 건강했고 운도 좋았다. 하지만 이런 마음으로 살아가는 게 더 이상 불가능했다.
이전에는 어떻게 하면 나은 삶을 살 수 있을지 고민했다면, 이제는 어떻게 하면 삶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생각했다. 자연스럽게 자살을 생각했다. 그러나 당장 자살하지는 않았다. 어떻게 해서든 삶의 의미에 관한 해답을 얻고 싶었기 때문이다. 우선 시도해보고, 그래도 해답을 얻지 못할 때 자살해도 늦지 않았다. 그의 나이는 채 50살도 되지 않았다.
그는 무엇을 원하는지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가 있었고, 별 노력을 하지 않아도 재산을 불려주는 부동산이 있었고, 그의 이름은 꽤 유명했으며 사람들에게 칭송도 받았다. 건강한 몸과 마음도 지녔다. 모든 환경이 완벽했다. 주변 환경이 완벽한 상황에서 톨스토이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다. 그는 더 이상 살아가는 게 불가능했다.
"오늘이나 내일 질병과 죽음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나 내게 닥쳐올 것이고, 부패로 인한 악취나 구더기 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될 것이다. 그리고 조만간 내가 한 일들은 무엇이든 간에 잊혀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런데 왜 나는 계속해서 어떤 일들을 해야 하는가? 사람들은 분명히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을 텐데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게 계속해서 살아가고 있는가? 이것은 내게 정말 이상하고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그에게 삶은 사기극이었다. 인생에 즐거움이나 지혜로움은 전혀 없었다. 오직 잔인함과 어리석음만 있을 뿐이다.
그가 삶이 의미 있다고 생각했을 때는 글 쓰는 일이 재미있었다. 예술이라는 거울로 삶을 바라보는 일이 즐거웠다. 그러나 인생이 무의하고 끔찍하다는 진리를 알게 되자 생각이 달라졌다. 삶의 끝이 무엇인지 아는 상황에서 그 끝을 마냥 기다릴 수 없었다. 어둠의 공포는 너무나 컸다. 노끈이나 총알로 가능한 한 빨리 공포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톨스토이는 자살 직전까지 이르렀다.
제5장 학문과 나의 삶에 대한 의문
삶은 무의미하기 때문에 가능한 빨리 삶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이 오해는 아닐지 톨스토이는 생각했다. 학문에서 해답을 찾아보기로 했다. 해답을 찾는 여정은 고통스럽고 길게 이어졌다. 한가롭게 대충 찾아본 게 아니다. 집요하고 끈질기게 탐색했다. 하지만 그는 해답을 얻지 못했다.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속 시원하게 대답해주는 학문이 없었다.
"모든 학문을 샅샅이 뒤져서 찾아봤지만 내가 원하는 것을 발견하기는커녕 도리어 나와 같은 처지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과거에도 삶의 의미에 대한 해답을 지식 속에서 찾다가 결국에는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으리라는 것. 그리고 그들은 단지 아무것도 찾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나를 절망에 빠뜨린 바로 그것, 즉 삶의 무의미함이야 말로 인간이 알 수 있는 유일하게 확실한 것임을 분명하게 알고 인정했으리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톨스토이에게 삶의 의미에 대한 물음은 소일거리가 아니라 생사를 건 문제였다. 나이 50살에 그를 자살 직전으로 몰고 간 의문은 어린아이부터 나이 든 현자까지 모든 사람 마음에 자리 잡은 간단한 것이었다. 사람이라면 이 의문에 답을 구하지 않고는 살아가기 힘들다고 생각했다. 그 의문은 이런 것이다.
"내가 오늘 하고 있는 일이나 내일 하게 될 일의 결국은 무엇인가? 내 인생 전체의 결국은 무엇인가?"
'나는 왜 살아가는가?', '나는 왜 무엇을 원하거나 행하는가?'와 같은 질문이다. '내 삶에는 앞으로 찾아올 죽음에도 무너지지 않을 어떤 의미가 존재하는가?'와도 같은 질문이다.
해답을 학문에서 찾아봤지만 실패했다. 삶과 관련 없는 학문일수록 지식 체계가 더 명확했고, 삶과 관련 있는 학문일수록 체계가 모호했다. 예를 들어 수학, 과학 같은 실험 학문은 사물의 인과관계는 명확하게 설명하지만 삶의 의미는 설명하지 못한다. 철학과 같은 추상 학문은 삶의 의미에 대해 설명하지만 명확하지 않다. 철학이 삶의 의미에 관해 할 수 있는 말은 '아무것도 모른다'뿐이었다. 삶의 의미를 탐색하던 톨스토이에게 학문은 도무지 도움되지 않았다.
제6장 현인들의 인생관
톨스토이는 삶의 의문에 관한 해답을 학문에서 얻지 못했다. 그래서 현인에게서 찾아보기로 했지만 역시나 현인들에게서도 답을 얻을 수 없었다.
"나는 내 삶의 의미를 알고 싶고 알아야 하는데, 내 삶이 무한한 것의 한 부분이라는 대답은 내 삶에 그 어떤 의미를 부여해 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내 삶에 어떤 의미가 있다는 것조차도 부정해 버리기까지 합니다."
소크라테스, 쇼펜하우어, 솔로몬, 석가모니도 삶 자체를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현인들은 톨스토이를 절망에서 꺼내 주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절망을 증폭시켰다. 죽음이 삶보다 더 나았다. 삶에서 빨리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제7장 인생에 대한 네 가지 접근 방법
톨스토이는 학문과 현인에게서 삶에 관한 해답을 얻지 못했다. 다른 방법을 찾아보기로 했다. 그래서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놓인 사람들에게 눈을 돌렸다. 그들이 이 끔찍한 상황에서 어떻게 빠져나왔는지 살펴보기로 했다. 그들은 네 가지 방법을 취했다.
첫 번째 방법은 '무지'다. 무지란 삶이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다. 무지한 사람들은 삶이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에게 배울 점은 없다고 생각했다.
두 번째 방법은 '쾌락주의'다. 쾌락주의는 삶에 희망이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눈앞의 즐거움을 최대한 누리는 것이다. 톨스토이 같은 부류의 작가들 중 대다수가 이렇게 살고 있었다. 현재의 욕망과 쾌락을 탐닉하는 행동이 머지않아 그들을 파괴한다는 사실을 모른다. 첫 번째 부류의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두 번째 부류의 사람들에게서도 배울 점이 없었다.
세 번째 방법은 '힘'으로 해결하는 것이다. 삶의 무의미를 깨닫고서는 인위적으로 삶을 없애 버리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스스로 삶을 끝내버리는 방법이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이 방법을 택했다. 톨스토이도 한때 이 방법이 가장 가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자살을 하려고 마음먹은 적이 있었다.
네 번째 방법은 '약함'에서 온다. 삶이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나약하게 삶에 매달리는 방법이다. 이 방법을 선택한 사람들은 삶을 끝내려는 결단력이 부족하다. 삶에는 그래도 뭔가가 있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기대감을 갖는다. 시간을 질질 끌며 기다린다.
톨스토이는 마지막 부류에 속해 있었다.
"네 번째 방법을 따르는 사람들은 솔로몬이나 쇼펜하우어처럼 삶은 우리를 희롱하고 우롱하는 부조리하고 터무니없는 것임을 알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수하고 옷 입고 음식을 먹고 말하고 심지어 책을 쓰기까지 하면서 계속해서 살아갑니다. 나는 그렇게 하고 있는 내 자신이 역겹고 고통스러웠지만, 그래도 그런 상태로 계속해서 살아갔습니다."
톨스토이는 결국 자살하지 않았다. 자신이 뭔가 잘못 생각했을 수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여전히 의문이 가시지 않았다.
"삶은 무의미한 악이고, 그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나는 살아왔고 지금도 여전히 살고 있으며, 인류도 살아왔고 지금도 여전히 살고 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것인가? 살아가는 것이 무의미해서 살아갈 이유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인가?"
제8장 대중들로부터 깨달은 것
톨스토이는 학문, 현인, 지식인 부류에게서 원하는 답을 얻지 못했다. 삶은 무의미할 뿐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는 결론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이렇게 살아가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 추측할 뿐이었다. 무엇인가 잘못 생각하지 않았을까 싶었다. 그는 대중의 말은 아직 들어보지 않았다. 학자나 부유한 계층만이 인류를 대표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외 사람들은 인간이 아니라 소나 말 같은 가축의 일종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삶의 진정한 의미는 대중에게서 찾아야 한다고 느꼈다. 그들이 삶의 무게를 짊어지고 살기 때문이다. 톨스토이는 대중을 찾아갔다. 대중은 학자들과는 판이하게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그들은 자살을 가장 큰 악이라고 생각했다. 뿐만 아니라 신앙을 진실하게 믿었다.
"지식인들과 현자들이 이성에 기초해서 제시한 지식은 삶의 의미를 부정했지만, 무수히 많은 사람들로 이루어진 인류 전체는 삶의 의미는 이성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지식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이성에 기초하지 않은 지식은 내가 거부할 수 없었던 그것, 즉 신앙이었습니다."
톨스토이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처지가 되어 버렸다. 이성을 따르면 삶이 허무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하지만 신앙을 따르려면 이성을 부정해야만 했다. 이것은 삶을 부정하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이었다.
제9장 이성에 기초하지 않은 지식
톨스토이는 모순에 직면했다. 이성을 따라야 할지 신앙을 따라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모순에서 빠져나올 방법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이성이 사실 그렇게 이성적이지 않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비이성이 사실 그렇게 비이성적이지 않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톨스토이는 이성에 기초해서 삶의 의미를 추론했다. "삶에서 시간과 공간, 인과관계를 초월한 어떤 의미가 존재하는가?"라고 물어 놓고는, 시간과 공간, 인과관계 속에서 추론을 했다. 유한한 존재를 활용해 무한한 존재를 찾으려 했다. 유한한 존재는 이성에 기초한 지식, 무한한 존재는 이성에 기초하지 않은 지식을 말한다. 결국 톨스토이는 이성에 기초한 지식 외에도, 이성에 기초하지 않은 지식도 있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삶의 의미를 알려주는 신앙이다.
"신앙은 내게 이전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비이성적인 것이었지만, 나는 오직 신앙만이 인류에게 삶의 의문에 대한 대답들을 제공해 주어서 살아갈 수 있게 해 준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 신앙이야 말로 삶의 의미에 대한 해답을 준다고 인정했다. 상실이나 죽음으로 없어지지 않는 의미 말이다. 그는 삶이 허무하다는 사실을 이미 깨달았다. 그러니 무한한 것, 즉 신앙을 믿지 않을 수 없었다. 신앙을 믿지 않는 이상 자살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유한한 것과 무한한 것을 비교해서, 인간의 삶, 하느님, 자유, 선 등에 대한 이해에 도달하기 위해 사용하는 모든 개념들을 이성의 논리 앞에서 세워서 시험에 부치는 경우에는, 그 개념들은 이성의 비판을 이겨내고 통과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이렇게 톨스토이는 신앙을 다시 믿게 됐다.
제10장 새로운 삶에 대한 발견과 의문
톨스토이는 신앙을 받아들일 준비가 됐다. 먼저 주변 기독교인들을 찾아갔다. 어떻게 신앙을 갖게 됐으며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그들에게 물어봤다. 하지만 대화를 하면 할수록 오류가 많다는 점을 알게 됐다. 그들은 신앙의 가르침에 따라 살지 않았다. 그들은 스스로를 속이고 있었다. 톨스토이 자신의 삶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만일 그들이 삶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면, 그것이 상실과 고통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 주어서, 그들은 그런 것들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겠지만, 실제로는 나와 같은 부류의 계층에 속한 자들 중에서 신앙을 가진 사람들도 나와 마찬가지로 부유하고 풍족한 삶을 살면서 그런 삶을 유지하고 재산을 더 많이 늘리려고 애썼고, 상실과 고통과 죽음을 두려워하였으며, 나 같이 신앙을 갖지 않은 모든 사람들처럼 그들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살았고, 신앙을 갖지 않은 사람들보다 더 악한 삶은 아닐지라도 적어도 별반 다름없는 악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톨스토이는 그들의 신앙이 참되다고 확신하지 않았다. 신앙을 가진 자와 신앙이 없는 자가 살아가는 방식이 조금도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톨스토이는 학자 계층이 아니라 가난하고 단순하며 배우지 못한 사람들과 접촉했다. 그들의 신앙은 참되고, 삶의 의미를 알게 해 준다고 확신했다.
"나와 같은 계층에 속한 사람들은 그들의 삶 전체를 나태와 향락과 삶에 대한 불만족으로 허비하고 있었던 반면에, 노동자 계층의 사람들은 일생 동안 힘든 노동을 하며 살아갔지만 부자들과는 달리 자신의 삶에 비교적 만족하고 있다는 것도 나는 보았습니다."
다행히 노동자 계층은 진정한 신앙을 가졌다. 동시에 신앙의 가르침대로 살았다. 톨스토이는 그런 사람들을 사랑했다. 톨스토이는 그렇게 2년을 살았다. 그동안 마음속에서 큰 변화가 일어났다. 지금까지 돈과 명예를 위해 했던 일들이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은 부자이자 지식인들이었던 나와 같은 부류의 계층에 속한 사람들의 삶이 단지 싫어진 것만이 아니라 내게서 모든 의미를 상실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모든 활동들, 우리의 토론들, 우리의 학문, 우리의 예술이 내게 새롭게 비쳤습니다. 나는 그 모든 것들이 단지 자아도취에 지나지 않고, 그런 것들 속에서는 그 어떤 의미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제11장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톨스토이는 신앙의 가르침대로 사는 사람들에게 매료되었다. 그리고 신앙도 진실되게 받아들였다.
예전에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삶은 악이고 무의미하다고. 그 생각은 전적으로 옳았다. 단지 자신에게만 삶이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삶이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인류 전체에 적용할 수는 없었다. 톨스토이는 모든 조건을 다 갖춰 놓고서 욕망을 추구하며 살았다. 욕망을 좇는 삶은 무의미하고 악한 삶이 맞았다. 결론적으로 그의 생각이 틀린 게 아니라 그의 삶이 잘못됐다.
사형 집행인, 주정뱅이, 정신병자를 생각해보자. 그들에게 "삶이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할까? "삶은 악이고 무의미하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들 삶의 관점에서 지극히 옳은 대답이다.
"그렇다면 나도 그런 정신병자인 것인가요? 부자에다 지식인인 나 같은 부류에 속한 사람들은 모두 그런 정신병자인가요? 나는 우리가 정말 그런 정신병자들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아니,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어쨌든 적어도 나는 정신병자였습니다."
톨스토이는 다른 사람을 위한 삶을 살지도, 자기 자신을 위한 삶을 살지도 않았다. 지금까지 살아온 삶이 주정뱅이나 정신병자의 삶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걸 알게 됐다.
제12장 하느님을 찾는 과정
톨스토이는 이성에 오류가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됐다. 모든 것을 이성으로 판단하는 게 얼마나 헛된지도 알았다. 소박하게 일하며 사는 사람만이 참된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하느님을 믿었다. 그들과 마찬가지로 톨스토이도 하느님을 믿게 되었다.
만물에는 원인이 있어야 한다. 그 원인에도 원인이 있다. 원인의 원인의 원인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끝까지 가다 보면 궁극의 원인이 있다. 궁극의 원인이 바로 하느님이라고 믿었다. 그는 하느님을 믿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삶이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믿으면 살아갈 희망을 갖게 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자살충동에서 벗어났다.
제14장 종교의식에 대한 의문들
그러나 톨스토이는 교회의 온갖 통상적인 종교의식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도무지 형식적인 종교의식들이 이해가지 않았다. 그렇다고 신앙을 포기할 수도 없었다.
제15장 참된 신앙
당시 다른 종파를 가진 사람들은 서로를 비난했다. 가톨릭교도, 정교회 신자, 개신교도들은 서로 적대적이었다. 오직 자기만이 옳다고 주장했다.
"나는 처음에는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서 혼란스럽고 당혹스러웠습니다."
톨스토이는 종파가 다른 사람끼리 비난하는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무엇이 진리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내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것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일 리가 없어. 두 가지 가르침이 서로 모순되는 경우에는, 어느 쪽도 신앙을 구성하는 유일한 진리를 소유한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사람들이 모를 리가 없지 않은가. 여기에는 무엇인가 다른 것이 있어. 따라서 반드시 설명이 필요해.'
그리고 당시 종교와 신앙의 이름으로 부조리한 짓, 가령 화형이나 감금 등이 자행됐다. 종교의 횡포 때문에 톨스토이는 신앙에 질려서 오만정이 다 떨어졌다.
제16장 진리를 추구하며
톨스토이는 혼란스러웠다. 그는 신앙만이 삶의 의미에 대답해줄 거라 확신했다. 다시 말해, 신앙만이 진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동시에 신앙은 거짓을 품고 있었다. 진리라는 이름으로 악행을 서슴지 않았기 때문이다. 톨스토이는 이렇게 말한다.
"진리와 거짓은 둘 다 교회라고 불리는 존재에 의해서 대대로 전해져 내려온 것들입니다."
종교적 가르침 속에 진리가 있다는 것이 확실하지만, 그 가르침에는 거짓도 포함돼 있었다. 결국 톨스토이는 결론을 내지 못했다. 글만 쓰고 사색만 하는 그도 진리를 발견하지 못했다.
나는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거짓인지를 밝혀내 둘을 구분해야 했습니다. 이것이 내가 착수하려던 일입니다. 내가 그 가르침 속에서 어떤 거짓을 발견해냈고, 어떤 진리를 발견해내었으며, 어떠한 결론에 도달했는지는, 언젠가 이 글의 후속편으로 어딘가에서 출간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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