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퉁이 서재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본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스토아학파의 대표적인 철학자이자 로마의 제16대 황제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그리스 철학을 좋아했으며 사색하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그는 황제로서 로마를 통치하던 중 수많은 전쟁을 치러야 했다. 전쟁 상황 속에서 그가 쓴 일지를 모아둔 것이 바로 [명상록]이다.
이 책의 원제는 명상록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이다. 책에 '네가', '너는'이라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이는 자기 계발서처럼 타인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바로 자기 자신을 지칭하는 것이다. 그는 현인이 되기 위해 스스로를 다그치며 끊임없이 사색했다. 로마의 황제로서 모든 권력과 명예를 가졌음에도 철인이 되기 위해 노력 정진을 멈추지 않았다.
[명상록]에는 세 가지 단어가 자주 등장하는데, 바로 '공동체의 선', '이성', '죽음'이 그것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스토아 철학자였기 때문에 공동체의 선을 우선시했고, 이성을 중시했다. 그리고 끊임없이 죽음에 대해 생각했다. 이 책의 '공동체의 선'이나 '이성'에 대한 내용보다는 '죽음'에 대한 내용이 가슴에 와 닿았다. 가슴에 와 닿은 많은 글귀들을 옮겨 적어 보겠다.
아우렐리우스는 철학의 유용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요컨대 육신에 속한 모든 것은 강물처럼 흘러가 버리고 호흡에 속한 모든 것은 꿈이고 신기루다. 인생은 전쟁이고 낯선 땅에 머무는 것이다. 우리 인생에서 마지막으로 남는 것은 망각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우리를 호위해서 우리가 갈 길을 안내해줄 수 있는가? 오직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철학이다.
철학은 우리 안에 있는 신성이 침해를 당하거나 해악을 입지 않게 지켜주고, 쾌락과 고통을 이기게 해 주며, 목적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않게 해 주고, 거짓과 위선으로 행하지 않게 해 주며, 남들이 무슨 짓을 해도 그런 것들에 흔들리지 않게 해 주고, 우리에게 일어나거나 안배된 모든 것들을 우리 자신이 기원한 바로 그곳에서 온 것으로 알고 받아들이게 해 주며, 그리고 무엇보다도 죽음은 모든 살아있는 피조물들을 구성하고 있는 원소들이 해체되는 것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서 기쁜 마음으로 기다릴 수 있게 해 준다.
원소들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 원소들 자체에게 두려운 일이 아닌데 우리가 원소들의 변화와 해체를 두려워해야 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그것은 자연과 본성에 따라 일어나는 일이고 자연에 따라 일어나는 것은 나쁜 일일 수 없기 때문이다.
철학은 고통을 이기게 해 주고, 양심을 따르게 해 주며, 남의 말에 흔들리지 않는 주체성을 심어주고, 우리들의 기원을 알게 해 주며, 우리가 죽어 어디로 갈지 알게 해 준다.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이다. 철학은 할 일 없는 사람이나 하는 고상한 학문이 아니다. 삶 그 자체와 연관된 학문이다.
예컨대 데스파시아누스 시대를 생각해보라. 너는 그때에도 다음과 같은 일들이 똑같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결혼해서 자녀들을 양육하는 것, 병든 것, 죽는 것, 전쟁하는 것, 축제를 열어 즐기는 것, 장사하는 것, 농사짓는 것, 아부하는 것, 잘난 체하는 것, 의심하는 것, 음모를 꾸미는 것, 자기가 미워하는 어떤 사람들이 죽게 해달라고 신에게 기원하는 것, 자신의 운명에 대해 불평불만을 늘어놓는 것, 사랑하는 것, 재물을 긁어모으는 것, 집정관이 되기를 탐하는 것, 왕이 되려고 하는 것. 하지만 지금은 그런 삶을 살았던 자들의 흔적은 다 사라지고 그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다.
트라야누스 시대로 옮겨 가보자. 이번에도 모든 것이 동일하고 그런 삶을 살았던 자들도 다 죽어 사라지고 없다. 마찬가지로 과거의 모든 나라들에 대한 다른 기록들도 살펴보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혼신의 힘을 다해 온갖 일들을 도모하다가 이내 죽어서 원소들로 해체되고 말았는지를 보라. 무엇보다도 너 자신이 잘 알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라. 그들은 헛된 일들을 도모하느라 모든 힘을 쏟아붓다가 그들 자신의 본성에 맞는 일들을 찾아서 충실히 행하며 살아가고 그런 삶에 만족하는데 실패한 사람들이 아니었더냐.
여기에서 네가 꼭 기억해 두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모든 일에서 각각의 일이 지닌 합당한 가치에 비례해서 일의 경중에 따라 너의 관심과 힘을 쏟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한다면 하찮은 일들에 많은 시간을 들여 몰두했다가 네가 원하는 성과가 나오지 않는 것을 보고서 낙심하는 일이 없게 될 것이다.
대부분의 인간은 얼마나 어리석은가? 왜 그리 하찮은 일에 열중하는가? 2,000년 전에도 사람들은 서로를 미워했고 의심했으며 음모를 꾸몄다. 잘난 체하기를 참지 못했으며 안위를 위해 아부를 했으며 자신의 환경과 삶에 불평불만을 했다. 재물을 탐닉했으며 명예와 높은 자리를 갈망했다. 그런 자들은 결국 죽었다. 그리고 또 새로운 자들이 태어나 어리석은 삶을 반복했다. 2,0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반복한다. 이런 사실을 깨달은 아우렐리우스도 2,000년 전에 죽었다.
머지않은 날에 죽는다는 걸 생각하면 느껴지는 게 많다. 사실 나는 사사로운 것에 큰 관심이 없다. 매일 같이 떠들어대는 뉴스 기사에 큰 관심이 없다. 정치가 어떻게 되고 있고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고 연예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내가 알아서 무엇하랴. 재물에도 큰 욕심이 없다. 만 원짜리 옷을 입든 백만 원짜리 옷을 입든 무엇이 다르고 나에게 무슨 영향을 미친단 말인가. 백만 원짜리 옷을 입어서 남들이 나를 부러워하든 말든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랴.
그럼에도 여전히 부족하다. 더 내려놓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전히 나는 어떻게 자기 계발을 하여 조금이라도 나를 발전시킬지 고민한다.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에게 욕을 먹지 않을까, 칭찬을 받을까 생각한다. 어떻게 하면 남들이 나를 똑똑하게 볼까 고심한다. 어떻게 하면 하루를 알차게 보낼까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을까 계획한다. 몸이 피곤하거나 본성이 원하지 않아도 나는 강박적으로 건설적인 무언가를 한다. 그런 의미로 나는 진짜 어리석다. 진정 무엇이 가치 있고 무가치한지 알면서도 가치 있는 것을 행하지 못하고 있다. 모르고 못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알면서도 못하고 있다. 나는 이렇게 헛된 일을 하다가 죽어 원소로 해체될 것이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라는 유명한 말이 있다. 바로 '죽음을 기억하라!'라는 뜻이다. 우리 모두는 죽을 운명이다. 죽음을 슬픈 것, 무서운 것, 나에게는 오랫동안 일어나지 않을 것, 피해야 할 것으로 여기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죽음을 피해야 할 것으로 여기는 태도는 오히려 죽음을 더 두렵고 슬프고 무섭게 만든다. 내일이라도 당장 죽을 수 있다는 걸 기억하는 순간, 나는 온전한 삶을 살 수 있다. 내일이라도 당장 죽을 수 있다는 걸 기억하는 순간, 창 밖의 바람 소리가 새롭게 느껴진다. 내 몸이 아프더라도 내 몸이 건강하지 않더라도 살아 있음을 고마워하게 된다.
머지않아 너는 죽게 될 것이다. 그런데도 너는 아직도 단순하지 않고 초연하지 않으며 외적인 것들에 의해서 해악을 입게 될 것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모든 사람과 화목하지 못하며 정의롭게 행하는 것만이 지혜라는 확신도 갖고 있지 못한다.
아우렐리우스는 마음속에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를 항상 생각하고 있었나 보다. 명상록에는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그는 죽음 덕분에 가치 있는 것에 집중할 수 있었다.
아래는 아우렐리우스의 메멘토 모리 정신을 담은 글이다.
이마에 주름이 생길 정도로 혼신의 힘을 다해 다 죽어가는 많은 환자들을 살린 의사들도 결국에는 죽었고, 다른 사람들이 언제 죽을지를 기가 막히게 알아맞히는 많은 예언들을 한 점성술사들도 결국에는 죽었으며, 죽음과 불멸에 대해 무수히 연구하고 논쟁을 벌이는 철학자들도 결국에는 죽었고, 전쟁터에서 수많은 적군을 도륙한 위대한 장군들도 결국에는 죽었으며, 마치 자기는 영원히 살 것처럼 생각하고서 안하무인이 되어 자신의 권력을 마음대로 휘둘러 수많은 사람들을 죽인 폭군들도 결국에는 죽었고, 헬리케와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을 비롯한 무수히 많은 도시들 전체가 죽었다는 것을 너는 늘 명심하라.
네가 알고 지냈던 사람들 중에서 이미 죽은 사람들을 하나하나 떠올려보라. 한 사람은 자신의 친구의 눈을 감겨준 후에 얼마 안 있어 자기도 눈을 감았고, 다른 사람은 그 사람을 묻어주고서 얼마 후에 자기도 묻혔다. 이 모든 일이 짧은 시간 안에 일어났다. 한 마디로 말해서 너는 인생이라는 것이 얼마나 짧고 덧없는 것인지를 늘 유념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제는 진흙이었다가 내일은 미라나 재로 변한다. 그러므로 올리브 열매가 다 익으면 자기를 낳아준 대지를 찬양하고 자기를 길러준 나무에 감사하며 떨어지는 것처럼 너도 이 짧은 인생을 본성에 따라 살아가다가 인생 여정을 끝낸 후에는 기쁜 마음으로 떠나는 것이 마땅하다.
잠시 후면 너는 다 타버린 재나 몇 개의 마른 뼈로 변해버리고 이름만 남거나 심지어 이름조차도 남지 않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름이 남는다고 해도 이름이라는 것은 단지 소리와 메아리에 불과하다. 우리가 살아있을 때 그토록 소중히 여기고 중시했던 모든 것들은 곧 썩어져 버릴 허망하고 하찮은 것들이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차지하려고 서로 물어뜯는 우리는 서로 싸우며 물어뜯는 강아지들이나 웃다가도 서로 티격태격하고는 금세 울음을 터뜨리는 어린아이들과 같다.
사티론이나 에우티케스나 휘멘을 보거든 소크라테스를 떠올려 보고, 에우티케온이나 실바누스를 보거든 에우프라테스를 떠올려보고, 트로파이오포로스를 보거든 알키프론을 떠올려 보고, 세베로스를 보거든 크리톤이나 크세노폰을 떠올려 보고, 너 자신을 보거든 다른 황제들 중 한 명을 떠올려 보라.
매사에 이런 식으로 비슷한 예를 떠올려 보라. 그러면 네게는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오르게 될 것이다.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나?"
그들은 지금 이 세상 어디에도 없거나 어디에 있는지를 아무도 모른다.
이것이 습관이 되면 네게는 인간사들이 금방 사라질 연기같이 느껴지거나 무(無)로 보이게 될 것이다. 한번 변화되어서 사라져버리면 영원토록 다시는 그 모습으로 존재할 수 없게 된다는 생각이 들게 된다면 더욱 그렇게 느껴질 것이다. 그렇다면 왜 고민하고 괴로워하고 고민하는가 왜 네게 주어진 짧은 인생을 복을 따라 살아가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는가?
이 외에도 죽음에 대해 언급하는 내용은 많았다.
대부분의 인간은 중요치 않은 것을 중시하고, 정말 중요한 것은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 아우렐리우스는 끊임없이 죽음을 생각하며 삶을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자신이 얼마나 미미한 존재인지,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하는 그 무엇이든 중요한 것은 없다는 것을 끊임없이 상기했다. 불안해하고 초조해할 필요도 없다.
네 힘이 미치지 못하는 외부의 원인으로 인해 일어나는 일은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네 자신으로 말미암은 원인으로 일어나는 모든 일은 바르게 하라.
이 비참한 삶 속에서 원숭이 짓을 하며 불만이 가득하며 살아가는 것이 지겹지도 않은가? 너는 왜 불안해하고 초조해하는 것인가 이 삶 속에 무슨 새로운 것이라고 있느냐?
각 사람에게 배정된 시간은 저 무한히 뻗어있는 시간 중에서 얼마나 작은 부분인가. 한 순간에 영원 속으로 사라져버리고 마는구나 또한 각 사람에게 배정된 실재는 우주의 실재 중에서 얼마나 작은 부분이고 각 사람에게 배정된 혼은 우주의 혼 중에서 얼마나 작은 부분인가. 그리고 네가 기어 다니고 있는 땅은 대지 전체 중에서 얼마나 작은 부분인가
'네가 언젠간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메멘토 모리 정신을 실천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도 결국 2,000년 전에 죽었다. 머지않아 나도 죽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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