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귀퉁이 서재

[슈퇴리히] 세계 철학사 - 제2부 그리스 철학 본문

책과 사유

[슈퇴리히] 세계 철학사 - 제2부 그리스 철학

Baek Kyun Shin 2021. 11. 14. 22:13

제2부는 그리스 철학에 관한 내용이다. 그리스 철학은 크게 세 시대로 구분한다. 첫 번째 시대는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 시대. 기원전 600년경에서 기원전 4세기 초까지다. 인류 최초 철학자가 등장한 시기다. 두 번째 시대는 철학사에서 가장 중요한 때로, 기원전 5세기 중반부터 기원전 322년(아리스토텔레스가 죽은 때)까지다. 위대한 철학자인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가 활동한 시대다. 세 철학자는 서로 스승과 제자 관계였으며, 이 세 철학자 덕분에 그리스 철학은 전성기를 맞는다. 논리학, 형이상학, 윤리학, 자연철학, 사회철학, 미학, 교육학 등 우리가 아는 대부분 철학 분과가 이때 생겼다. 가장 오래 지속된 세 번째 시대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죽은 후부터 기원후 수 세기 동안 이어진다. 이 시기에는 스토아 학파, 에피쿠로스 학파, 신플라톤주의자가 생겼다. 이 시기 철학을 '아리스토텔레스 이후의 철학'으로 부르기도 한다.

종합하면, 그리스 철학은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아리스토텔레스 이후의 철학'으로 나뉜다. 그리스 철학에서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다. 그들을 기준으로 그리스 철학 시기가 나뉘기 때문에. 사실상 서양 철학의 뿌리가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다.

제1장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

아쉽게도 소크라테스 이전 시기에 철학자들이 쓴 글은 한 편도 온전히 남아 있지 않다. 토막글 형태로 남아 있을 뿐이다. 또는 후대 철학자들이 자신의 저작에서 선대 철학자들의 견해를 언급한 글에서 찾을 수 있다.

I. 밀레토스의 자연철학자들

밀레토스는 지금의 터키 서쪽 지역이다. 기원전 6세기에 밀레토스는 주요 무역항이었다. 아마 당시 그리스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였을 것이다. 여러 인종과 종교가 섞인 밀레토스는 과학과 철학이 생겨난 곳이다.

에게 해 주변 고대 그리스 도시

밀레토스의 대표 철학자로는 탈레스, 아낙시만드로스, 아낙시메네스가 있다.

1. 탈레스 - 인류 최초의 철학자

탈레스

탈레스를 인류 최초의 철학자라고 부른다. 기원전 6세기에 살았으며, 여행을 많이 다녀 세상 물정에 밝았다고 한다. 탈레스는 일식을 정확히 예측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또한 그림자 크기를 바탕으로 이집트 피라미드의 높이를 알아내기도 했다. 몇 가지 기초 수학 원리를 발견하기도 했다. 고대 전설에 따르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탈레스는 "자기 자신을 아는 것" 하고 답했고, 가장 쉬운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남에게 충고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탈레스는 만물의 근원은 물이라고 주장했다.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된다. 그런 탈레스가 인류 최초의 철학자로 불리는 까닭은 무엇일까? 탈레스 이전에는 모든 원리를 '신'에게 돌렸다. 가령, 당대 사람들은 나일강이 범람하는 이유를 포세이돈이 화났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탈레스는 다르게 생각했다. 그는 나일강이 범람하는 이유를 계절풍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물론 틀린 주장이긴 하지만, 원리를 '신'이 아니라 '자연현상'으로 설명하려 했다. '만물의 근원은 물이다'와 같이 엉터리 주장을 해도, 만물의 근원이 신이 아니라 어떤 물질이라고 설명한 최초 인물이다. 신화적 근거를 과학적 탐구로 옮긴 최초의 시도였다.

안타깝게도 그의 저작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2. 아낙시만드로스 - "만물의 근원은 무한자(아페이론)다."

아낙시만드로스

아낙시만드로스는 탈레스의 제자다. 기원전 611년경에 태어나 549년경에 죽었다. 탈레스는 만물의 근원이 물이라고 주장했지만, 아낙시만드로스는 만물의 근원은 규정할 수 없는 무한자라고 말했다. 이 무한자는 그리스어로 아페이론(apeiron)이라고 한다. 만물의 근원인 이 무한자에서 물과 불, 흙과 공기가 만들어진다고 보았다. 그에게 탈레스의 이론은 말이 안 됐다. 만물의 근원이 물이라면 물의 속성이 전혀 없는 불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그 외 물의 속성이 없는 물질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인지 설명할 길이 없다. 그래서 아낙시만드로스는 규정할 수 없는 무한자를 만물의 근원으로 여겼다.

3. 아낙시메네스 - "만물의 근원은 공기"

아낙시메네스

아낙시메네스는 아낙시만드로스의 친구이자 제자다. 아낙시메네스는 만물의 근원을 공기라고 봤다. 물론 그가 말한 공기는 말 그대로 공기가 아니었을 것이다. 생명력이 있는 기체로서 영혼이라고도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실 아낙시메네스는 서양철학사에서 그리 중요한 인물이 아니다. 밀레토스의 세 철학자 가운데 한 명이지만, 최초로 새로운 주장을 한 탈레스나 아낙시만드로스에 비해 특징이 없기 때문에. 밀레토스의 세 철학자들이 가진 공통점은 만물의 근원을 궁극적 원소나 물질로 여겼다는 점이다. 이들은 인류 최초로 아무런 선입견 없이 현상을 자연과학적 원칙으로 설명하려고 했다. 이를 환원주의라고 한다. 이러한 점이 밀레토스 철학자들이 서양철학사에서 중요한 까닭이다.

II. 피타고라스 - "만물은 수적 관계를 갖는다."

1. 생애와 학설

피타고라스는 밀레토스 근처에 있는 시모스 섬에서 기원전 580년에 태어났으며, 기원전 500년까지 살았다. 그는 이탈리아 남부에서 학파를 만들어 활동했다. 피타고라스 정리("직각 삼각형 빗변의 제곱은 다른 두 변의 제곱의 합과 같다")를 발견했으며, 삼각형 내각의 합이 180도라는 사실도 알아냈다. 피타고라스는 수학을 전문 과목으로 한정하려 하지 않았다. 철학의 핵심으로 삼았다. 다른 말이지만 철학을 뜻하는 'Philosophie'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사람도 피타고라스다. 또한 세계를 '코스모스(cosmos)'라고 부른 최초의 인물이기도 하다.

피타고라스는 만물이 수적 관계로 배열돼 있다고 보았다. 음악에서 더욱 그렇다. 듣기 좋은 협화음은 일정한 수적 관계를 갖기 때문이다.

2. 피타고라스 학파

당시 피타고라스는 철저히 종교적이고 신비로운 사람이었다. 많은 제자들이 그를 따랐다. 피타고라스 학파는 거의 종교 단체에 가까웠다. 엄격한 계율을 따라야 하고, 철저히 비밀을 지켜야 했다. 이 학파에 가입한 사람은 금욕적이고 검소한 삶을 살아야 하며, 살아 있는 걸 죽이면 안 되고, 매일 저녁 하루를 돌아보며 계율을 어겼는지 반성해야 했다. 또, 이들에게는 절대복종의 의무가 있다.

피타고라스 학파는 정치 권력도 행사했다. 하지만 지나치게 권위적인 경향을 추구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았다. 결국 누군가가 불을 질러 피타고라스 학파는 괴멸했다. 어떤 기록에 따르면 피타고라스도 이때 죽었다고 한다. 또 다른 기록에서는 그가 살아남아 장수를 누리다 메타폰트라는 곳에서 죽었다고 한다.

수학의 기틀을 마련했지만, 지나치게 종교적이고 폐쇄적인 성향으로 빛을 보지 못한 것 같다.

III. 엘레아 학파

엘레아는 오늘날 이탈리아 남쪽에 있는 도시다. 당시엔 그리스 식민지였다.

엘레아

피타고라스와 같은 시대에 이 도시에서도 철학 학파가 하나 있었다. 도시 이름을 따서 이 학파를 엘레아 학파라고 부른다. 엘레아 학파에서 대표적인 철학자는 크세노파네스, 파르메니데스, 제논이다. 이들은 서로 스승과 제자 관계다.

1. 크세노파네스 - 냉철한 논리로 그리스 종교를 비판한 철학자

크세노파네스

크세노파네스는 기원전 570년경 소아시아 서해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오랜 세월 떠돌아 다니다가 엘레아에 정착했다. 이때 철학 학파를 만들었는데, 그게 엘레아 학파다.

크세노파네스는 고대 그리스 종교를 비판했다. 그리스 신들이 너무나 인간과 같았기 때문이다. 절도와 사기, 간음을 저지를 정도다. 크세노파네스는 냉철한 논리로 그리스 종교와 미신을 힐난한 최초의 철학자인 것으로 추정한다.

2. 파르메니데스 -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 생성과 운동을 부정한 철학자

파르메니데스

파르메니데스는 기원전 525년경 엘레아에서 태어났다. 엘레아 학파에서 가장 중요한 철학자다.

파르메니데스는 생성이나 운동은 불가능하고, 오로지 불변의 존재만 있다고 주장했다. 존재만 있고, 비존재는 있을 수 없다고 보았다.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는 말이다. 이 무슨 개똥 같은 말인가? 존재자는 공간을 차지한다. 따라서 빈 공간은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존재만 있고 비존재는 있을 수 없는데, 존재하는 건 항상 공간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비존재는 있을 수 없으므로 빈 공간도 없다.

파르메니데스는 운동도 비존재를 전제한다고 믿었다. 물체가 움직이려면 이곳에서 저곳으로 이동해야 한다. 그러려면 저곳은 비어있어야 한다. 근데 빈 공간은 있을 수 없으므로 어떤 물체는 움직일 수 없다. 따라서 운동도 있을 수 없다. '생성'도 마찬가지다. 생성한다는 말은 비존재가 존재로 바뀐다는 말이다. 그런데 비존재는 있을 수 없으니까 생성도 있을 수 없다.

이런 이유로 파르메니데스는 생성이나 운동은 없고, 오직 불변하는 존재만 있다고 주장했다. 어떤 물체가 생성되고, 운동한다고 느끼는 이유는 감각의 허상 때문이라고 말했다. 감각이 모든 오류의 근원이라는 뜻이다. 물론 파르메니데스의 이러한 주장은 토막글로만 남은 그의 저작에서 유추한 것이다. 모든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파르메니데스를 향한 해석도 불확실하며 논쟁 여지가 남을 수밖에 없다.

3. 엘레아의 제논 - 명백한 주장에도 모순이 있다는 점을 깨닫게 해준 철학자

엘레아의 제논

파르메니데스는 변화와 운동을 부정했다. 이 주장은 당시 무수한 공격을 받았을 것이다. 제논은 파르메니데스의 제자로 기원전 490년경 출생했다. 제논은 스승의 주장을 비판에서 지켜내려고 노력했다. 제논의 글도 마찬가지로 토막글 형태로 조금만 남아 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에 대해 쓴 글 덕분에 우리는 제논에 관해 알 수 있을 뿐이다.
파르메니데스를 향한 비난의 논지는 변화와 운동을 부정하는 그의 주장이 모순을 낳는다는 점이다. 제논은 이런 비난에 맞섰다. 존재자가 변화하거나 운동한다는 점이 오히려 말이 안 된다고 주장했다. 존재자가 운동할 수 있다는 점을 반박하려고 그는 두 가지 논증을 예로 든다.

1. 아킬레스와 거북이가 경주한다고 가정하자. 만약 거북이가 아킬레스보다 조금만 더 앞서 출발하면, 아킬레스는 거북이를 절대 따라잡을 수 없다. 왜냐하면 방금 전까지 거북이가 있던 지점 A에 아킬레스가 다다른 순간, 거북이는 이미 지점 B로 더 나아가기 때문이다. 아킬레스가 지점 B에 도달하면 거북이는 이미 그 지점을 떠나 지점 C에 가 있다. 이런 과정을 계속 되풀이한다. 따라서 둘 사이 간격은 줄어들지만 결코 아킬레스가 거북이를 따라잡을 수 없다!

2. 날아가는 화살을 순간순간 떼어서 관찰하면, 매순간 화살은 공간의 특정 위치에 멈춰 있다. 그런데 화살이 매순간 정지해 있다면 날아가는 내내 멈춰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따라서 날아가는 화살은 움직이지 않는다. 곧, 운동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제논의 역설

물론 아킬레스가 거북이를 따라잡을 수 없다는 이 논증을 제논이 진지하게 믿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쨌든 후대 철학자들에게 제논의 논증은 의의가 있다. 명백하고 자명하다고 여기는 주장도 비판적으로 파고든다면 의심스럽고 허술하며 모순을 찾을 수 있다는 점이다. 제논의 논증은 이 점을 분명히 일깨워 주었다.

IV. 헤라클레이토스와 기원전 5세기 자연철학자들

헤라클레이토스 - 서양 최초의 아웃사이더, 변증법의 창시자

헤라클레이토스

헤라클레이토스는 그리스 철학자 가운데 가장 심오했다. 그는 기원전 540년경에 태어났다. 후대 사람들은 그를 '어두운 사람'이라는 별칭으로 불렀다. 대중을 무시했으며 외톨이 성향이 강했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아웃사이더였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독자적인 방향으로 생활하고 생각했다. 늙어서는 산에서 살았는데, 풀과 나뭇잎을 먹으며 연명했다고 한다. 아마 서양 최초의 은둔자였을 것이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지식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박식함은 정신 형성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이 이유로 그는 이전 철학자들을 비웃는다. 그에게 중요한 건 세계의 비밀을 밝혀낼 사상을 찾는 일이다.
헤라클레이토스에 따르면, 세계의 비밀을 밝혀낼 사상은 바로 '로고스(Logos)'다. 로고스를 한 단어로 번역하기는 쉽지 않다. 마치 노자가 주장한 '도'처럼 말이다. 겉으로는 '진술', '이성적인 말', '원리', '공식' 정도의 뜻이다. '세계 법칙'이라고 풀이하기도 한다. 노자의 '도'처럼 해석의 여지가 크다. 헤라클레이토스가 '로고스'를 구체적으로 정의하지 않아서 더욱 그렇다.

또한, 헤라클레이토스는 모든 발전은 대립하는 두 힘이 상호 작용하는 가운데 일어난다고 주장했다. 전쟁이 있어야 평화가 있고, 남자가 있어야 여자가 있고, 병이 있어야 건강이 있고, 선함이 있어야 악함이 있다. 모든 존재는 자신의 대립물이 필요하다. 서로 갈등과 투쟁을 하는 가운데 다시 조화를 이루며 발전한다는 말이다.

"사람들은 그것이 어떻게 자신과 불화하면서도 자신과 일치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것은 활과 현악기처럼 서로 갈등하면서 조화를 이룬다."

그는 대립하는 존재가 서로 짝을 이뤄 협력한다고 믿었다. 이러면서 세계가 발전한다고 본 것이다. 이런 헤라클레이토스의 주장은 변증법의 최초 모델이다. 이 이론은 2,000년 후 헤겔에게 부활했다.
오늘날까지 그의 영향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헤라클레이토스의 사상은 중요하다. 그가 처음 사용한 로고스 개념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의 말씀'이 되었다. 대립과 통일을 설명한 이론은 헤겔이 다시 발전시켰다. 스펜서의 진화론과도 비슷하다. 투쟁이 만물의 근원이라는 사상은 니체와 다윈에게서 다시 나타난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이름은 생소하지만 서양 철학사에서 큰 업적을 남긴 철학자다.

1. 엠페도클레스 - 신이 되고 싶었던 철학자

엠페도클레스

엠페도클레스는 기원전 490년경 시칠리아 섬에서 태어났다. 정치가이자 시인, 종교 교사, 예언자, 의사, 마술사, 철학자였다. 참 다양한 일을 했다.

엠페도클레스 이전의 철학자들은 만물의 근원이 단일 물질이라고 생각했다. 탈레스는 물, 아낙시메네스는 공기, 헤라클레이토스는 불을 만물의 근원이라고 여겼다. 엠페도클레스는 이 물질 모두, 곧 물, 공기, 불, 흙을 만물의 근원으로 여겼다. 엠페도클레스는 이전 철학자들의 사상을 합쳤다. 그래서 엠페도클레스를 절충주의자라고 부른다. 엠페도클레스에 따르면 모든 생성과 변화는 통합하는 힘과 분리하는 힘 때문에 생긴다. 여기서 통합하는 힘은 사랑, 분리하는 힘은 미움이다.

당시 사람들은 엠페도클레스를 신이라고 여겼고, 엠페도클레스 본인도 그렇게 확신했다. 그는 신적인 존재로 기억되고 싶어 화산 분화구에 몸을 던져 자살했다고 한다. 죽음의 흔적을 없애 자신이 초자연적으로 사라졌다는 전설을 만들려 했던 거다. 그런데 불행히도 엠페도클레스의 신발 한 짝이 다시 분출되었다. 그의 시도는 수포로 돌아갔다고 한다.

2. 레우키포스와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 - 원자론의 창시자

데모크리토스

레우키포스에 관해서는 알려진 게 별로 없다. 레우키포스는 인과율을 최초로 설명한 철학자다. 그는 이런 글을 남겼다.

  "어떤 것도 아무렇게나 생겨나지 않는다. 오히려 모든 것은 이치에 따라 필연적으로 생겨난다."  

레우키포스는 원자론을 최초로 주장했다.

데모크리토스는 레우키포스의 제자다. 데모크리토스는 기원전 470년에서 360년경까지 살았으니 100세 이상까지 생존했다. 데모크리토스는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았다. 이집트와 페르시아, 인도까지 여행을 다녔다고 한다. 여행을 마치고 고향에 돌아온 데모크리토스는 사람들을 피하고 학문과 사색에만 전념했다. 그는 항상 크게 웃고 다녔다고 한다. 그 이유로 후대 사람들은 그를 '웃음의 철학자'라고 불렀다. 그는 논쟁을 하지 않았고 학파도 만들지 않았다. 해박한 지식을 가져 수학, 물리학, 천문학, 항해술, 지리학, 해부학, 생리학, 심리학, 의학, 음악, 철학에 관한 수많은 저술을 남겼다.

데모크리토스는 파르메니데스의 주장을 거부했다. 파르메니데스는 '존재자만이 존재하고, 비존재자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비존재자는 존재하지 않으니 빈 공간도 존재하지 않는다. 운동과 변화, 생성은 빈 공간이 있어야 가능한데 빈 공간은 없으니 운동과 변화, 생성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데모크리토스는 이 주장에 반박했다. 그는 빈 공간이 존재한다고 받아들였다. 그리고 만물은 원자로 이루어졌다고 보았다. 원자들이 빈 공간으로 이동하면서 운동과 변화, 생성이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원자(Atom)는 '더 이상 나누지 못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모든 물질은 원자가 합쳐져 만들어진다. 또 모든 소멸은 원자가 분리되면서 발생한다. 원자 자체는 만들어지지도 없어지지도 않는다. 생성과 소멸에는 엠페도클레스가 말하는 사랑이나 미움 같은 힘이 필요한 게 아니다. 우연히 발생하지도 않는다. 데모크리토스에 따르면, 생성과 소멸, 변화는 존재자에 내재하는 불굴의 법칙에 따라 이루어진다.

3. 아낙사고라스 - 최초로 '정신'에 관심을 가진 철학자

아낙사고라스

아낙사고라스는 기원전 500년경에 태어났다. 철학을 아테네에 최초로 전해, 그가 죽은 뒤 아테네에서 철학이 크게 융성했다. 아낙사고라스가 살았을 때만 해도 아테네에서는 철학이 별로 발전하지 않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철학은 그리스 식민지에서만, 예를 들어 소아시아, 남부 이탈리아, 트라키아 지방 등에서만 생겨났다. 오히려 그리스 본토인 아테네에서는 철학이 발전하지 않았다. 뿌리 깊은 전통과 인습, 종교 때문이다. 반면, 인습이 없던 주변 그리스 식민지에서는 철학이 발전할 수 있었다.

아낙사고라스는 '누스(Nous)'라는 철학 원리를 생각해냈다. 누스는 이성적이고 전능하지만 비인격적인 정신이다. 이 정신은 아무것과도 섞이지 않은 채 철저히 혼자 존재한다. 모든 사물 가운데 가장 순수한 정신이다.

아낙사고라스 이전 철학자들은 만물의 근원에 관해서 고민했다. 주로 물질적이고 자연적인 것에 관심이 많았다. 하지만 아낙사고라스는 최초로 '정신'에 관심을 두었다. 훗날 아리스토텔레스는,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 중에서 아낙사고라스야말로 주정꾼 속에 끼여 있는 말짱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신이 물질을 만들고 지배한다는 사상을 가졌다. 그 이유로 세계에 질서를 부여하는 정신 개념을 도입한 아낙사고라스를 높이 평가했다.

제2장 그리스 철학의 전성기

I. 소피스트

1. 일반적 특징

기원전 5~6세기에는 그리스 곳곳에서 철학이 크게 발전했다. 그만큼 기원전 5~6세기는 정신사에서 거의 유례가 없을 정도로 융성한 시기다. 산업혁명기에 생겨난 실존 철학을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의 철학이 이 시기에 시작되었다. 당시 학설과 학파가 점차 다양해졌다. 그럴수록 인간의 감각을 신뢰할 수 없다는 생각이 퍼지게 됐다. 학파는 많아지는데 무엇이 진리인지는 서로마다 다르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소피스트'가 생겼다.

기원전 500~449년 벌어진 페르시아 전쟁에서 그리스가 승리했다. 그리하여 그리스 중심지인 아테네는 전성기를 누린다. 특히 상류층은 사치스러운 생활을 즐겼다. 이런 상황에서 교양을 향한 욕구도 커졌다. 당시 그리스는 민주주의 체제였다. 변호사가 따로 없었기 때문에 논증과 설득에 능한 사람이 유리했다. 따라서 출세하려는 사람은 정치가와 연설가로서 철저한 훈련을 받아야 했다.

이러한 시대 상황에서 소피스트가 등장했다. 소피스트는 원래 '지혜의 스승'이라는 뜻이다. 그들은 여러 도시를 돌아다니며 돈을 받고 논변술을 가르쳤다. 이처럼 소피스트는 철학자가 아니라 실천가였다. 이론이나 진리에는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소피스트 입장에서는 절대 진리란 없다. 객관적인 인식이란 아예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누가 옳은가를 결정할 객관적 기준이 없어지면, 결국은 누가 옳은 듯한가, 다시 말해 누가 자신의 입장을 가장 능숙하게 관철하는가가 중요해진다. 소피스트들에겐 진리보다 입신양명이 중요했다.

2. 프로타고라스 - 절대적인 진리란 없다. 기준은 개인마다 다르다.

프로타고라스

소피스트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인물은 프로타고라스다. 프로타고라스는 기원전 480년경에 태어나 410년경까지 살았다. 그리스 곳곳을 돌아다니며 소송과 정치에서 설득력 있게 주장하는 기술을 가르쳤다. 이런 방법으로 특히 아테네에서 돈도 많이 벌고 인기도 끌었다. 그는 이런 말을 남겼다.

  "인간은 만물의 척도다."
  

이 말은 절대적 진리란 없다는 뜻이다. 오로지 상대적 진리, 인간을 위한 진리만 있다는 말이다. 모든 사람에게 해당하는 절대 진리가 있는 게 아니다. 개개의 사람이 저마다 척도를 갖는다. 같은 명제도 누가 어떤 상황에서 그것을 말하느냐에 따라 어떤 때는 참이고 어떤 때는 거짓일 수 있다.

프로타고라스의 이런 회의적 태도는 종교에도 적용됐다. 그에 따르면, 신이 있는지에 관해 우리는 알 수 없다. 신이 존재하는지 탐구하는 일은 무의미한 작업이다. 결국 프로타고라스는 신성모독으로 고발돼 아테네에서 추방당했다.

3. 고르기아스 -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극단적인 회의주의자

고르기아스

고르기아스는 프로타고라스만큼 유명한 소피스트다. 그는 극단적인 회의주의자로 이런 말을 했다.

  첫째,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둘째, 무엇인가 존재한다 해도 우리는 그것을 인식할 수 없다.
셋째, 무언가를 인식할 수 있다 해도 그런 인식을 전달할 수 없다.  

이런 회의적인 태도 때문에 그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파란만장한 삶이 도움이 됐던 걸까? 109세까지 왕성하게 살았으니 말이다.

II. 소크라테스 - "나는 내가 아무것도 알지 못함을 안다."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는 기원전 470년경 아테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석공이었고, 어머니는 산파였다. 소크라테스는 키가 작고 머리가 컸으며, 코는 납작하고 몸집도 전체적으로 투박했다고 한다. 그는 아버지에게 물려받는 일을 일찌감치 버렸고 가족에게도 소홀했다. 남을 가르치는 일이 천직이라 여겨 오직 그 일에만 몰두했다.

소크라테스는 간소하다 못해 남루한 옷차림으로 아테네 거리와 광장을 거닐었다. 많은 제자들이 그를 따랐다. 소크라테스는 무료로 수업을 했고, 제자나 친구가 베푸는 식사로 끼니를 이어갔다. 수업은 묻고 답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수업이라 할 것도 없다. 그냥 대화가 전부다. 제자뿐만 아니라 행인이나 모든 계층 사람들과 즐겨 대화했다. 먼저 사소한 질문을 던지고 끈질기게 물어 가면서 점점 일반적인 철학 문제로 대화를 이끌었다. 상대방을 궁지로 몰아넣어 결국 상대방이 자신의 무지를 고백하게 만들었다. 소크라테스는 스스로도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아는 점은 이 한 가지뿐이다. 그는 그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점을 알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들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점을 모른다. 이 점이 그가 다른 사람들보다 현명한 점이라고 생각했다.

소크라테스가 한창 활동할 땐 아테네가 전성기였다. 하지만 아테네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지자 아테네도 저물었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청년들을 타락시킨다는 까닭으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가 법정에서 용기 있게 펼친 변론은 플라톤의 <소크라테스의 변론>에 잘 나와있다. 아테네를 떠나자는 주변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소크라테스는 사약을 달게 받았다. 사약을 마신 소크라테스는 죽기 직전에 친구 크리톤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이보게, 크리톤! 우리는 아스클레피오스께 닭 한 마리를 빚지고 있네. 잊지 말고 꼭 갚게나."  

이어서 크리톤은 "그건 걱정 말게나. 그것 말고 더 할 말은 없는지 생각해보게."라고 말했다. 크리톤이 물었으나 소크라테스는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이것이 소크라테스의 최후다.

II. 플라톤 - 서양 철학의 아버지

플라톤

1. 생애

플라톤은 기원전 427년 아테네 상류 가정에서 태어났다. 스무 살 때 소크라테스를 만나, 그에게서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소크라테스의 영향으로 그때까지 전념하던 문학을 포기하고 철학으로 방향을 바꿨다. 플라톤은 8년간 소크라테스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플라톤도 젊었을 때는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정치에 참여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의 스승인 소크라테스가 억울하게 사형당한 일 때문에 플라톤은 정치를 단념했다. 소크라테스가 처형당한 뒤 큰 충격을 받은 플라톤은 아테네를 떠났다. 잠시 메가라에 머물렀고 이집트에도 다녀왔던 것으로 추정된다. 비교적 오랜 기간 이탈리아 남부 시칠리아 머물렀다고 한다. 기원전 387년 고향 아테네로 돌아와 학교를 세우고 공짜로 제자들에게 학문을 가르쳤다. 이 학교를 '아카데미'라고 부른다. 오늘날 아카데미(academy)는 여기서 기원한 말다. 플라톤이 죽은 뒤에도 아카데미는 수백 년간 존속했다. 플라톤은 만년까지 아카데미 일에 전념하다가 80세에 생을 마감했다.

2. 저작

플라톤의 스승 소크라테스는 단 한 줄의 글도 남기지 않았다. 오로지 상대방과 대화를 할 뿐이었다. 우리가 소크라테스의 철학을 알 수 있는 이유는 플라톤이 스승의 말과 행동을 글로 남겼기 때문이다.

  • 초기 저작
    • <변론> - 법정에서 소크라테스가 펼친 자기 변론
    • <크리톤> - 법의 준수(심지어 그것이 악법이더라도)에 관한 소크라테스와 크리톤의 대화
    • <프로타고라스> - 덕에 관한 소피스트와의 논쟁
  • 과도기 저작
    • <고르기아스> - 여기서도 덕에 관한 소피스트와의 논쟁을 다룸
    • <메논> - 인식의 본질인 '회상'과 수학의 의의
    • <크라틸로스> - 언어에 관한 논의
  • 원숙기 저작
    • <향연> - 에로스에 관한 논의. 여기서 말하는 에로스란 미와 선에 대해 철학적으로 추구하는 힘을 말함.
    • <파이돈> - 영혼불멸에 관한 논의. 여기서 플라톤의 이데아론이 뚜렷하게 나타남.
    • <국가> - 가장 방대하고 내용이 풍부한 문헌으로, 플라톤 철학의 전 영역을 포괄함.
    • <파이드로스> - 이데아론과 '영혼 삼분설'과 관련한 대화
    • <테아이테토스> - 앎의 본질에 관한 인식론적 논의
  • 노년기 저작
    • <티마이오스> - 플라톤의 자연철학. 천체에서 생명체까지 모든 자연존재의 생성을 논의함.
    • <크리타아스> - 미완성 저작. 아틀란티스의 침몰 과정이 묘사돼 있음.
    • <폴리티코스> - <정치가>라고도 불림. 노년기 플라톤의 정치관을 담고 있음.
    • <법률> - 노년기 플라톤의 마지막 저작. 플라톤이 완성하지 못해 사후 제자들이 완성함. 국가의 윤리적 기초와 시민 교육에 관한 대화.

3. 이데아론

플라톤은 프로타고라스의 견해에 반대했다. 프로타고라스는 인간이 만물의 척도라고 주장했다. 보편 척도는 없고, 사람마다 상대적인 척도만 있을 뿐이라고 보았다. 소피스트는 생각과 행동에서 기준이 되는 척도란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플라톤에게 철학의 과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곧, 철학의 과제는 그런 보편적 기준을 제시하는 것이다. 플라톤에 따르면, 생각과 행동의 보편 척도는 '이데아(idea)' 안에 있다. 우리는 철학적 생각으로 이 이데아를 알아낼 수 있다.

어떤 철학적 충동을 가진 사람만이 이데아를 인식할 수 있는데, 플라톤은 그러한 충동을 '에로스'라고 부른다. 사랑을 뜻하는 말에 큰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에로스란 감성적인 것에서 정신적인 것으로 나아가려는 충동이다. 이게 바로 철학의 원동력이자 철학을 하는 이유다.

보통 이데아는 실재가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데아는 철저히 실재성을 갖고 있다. 동굴의 비유가 말하듯, 오히려 이데아만이 유일하게 (형이상학적으로) 실재한다. 개별 사물은 없어지지만, 이데아는 사라지지 않는다. 보편적인 것이 개별적인 것보다 실재성이 더 큰지, 아니면 반대로 개별적인 것만이 현실적이고 보편적 이데아란 그저 우리 머릿속의 상상인지는 철학의 근본 문제 가운데 하나다. 어쨌거나 플라톤에게는 이데아만이 실재성을 지닌다.
하지만 플라톤은 이데아가 어떻게 실제 물질을 만드는지 그 원리를 설명하진 못했다. 플라톤은 어쩔 수 없이 신화적인 힘으로 설명하려 했다. 플라톤은 논리로 설명하기 곤란한 부분에서는 신화적으로 설명한다. 플라톤도 이데아와 현상계 사이의 차이를 메우진 못했다.

4. 인간학과 윤리학

플라톤에 따르면, 배움은 다시 떠올리는 일(회상)일 뿐이다. 영혼이 우리의 과거 상태나 모습을 이미 알고 있는데, 학습을 통해 그 상태를 다시 일깨운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영혼은 죽지 않으니까. 영혼은 불멸이라서 모든 걸 이미 알고 있다. 우리는 영혼이 아는 걸 학습으로 단지 상기할 뿐이다. 이게 바로 플라톤이 말한 '상기설'이다.

인간의 목표는 감성을 초월한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다. 몸과 감성은 우리가 그러한 상태에 다다르는 데 방해가 되는 족쇄다. 플라톤의 표현을 빌리자면 '육체는 무덤'이다.

5. 국가

플라톤은 <국가>에서 이상적인 국가를 묘사했다. 이상 국가는 세 가지가 잘 갖춰진 국가다. 그 세 가지는 양식과 생업, 군사력, 이성을 통한 지도다. 각각 생업 종사자, 전사, 지배자가 하는 일이다. 세 가지 요소가 조화를 이뤄야 좋은 국가다.
플라톤에 따르면, 이런 국가를 다스릴 사람은 선별해서 뽑아야 한다. 가장 먼저 국가는 신분에 관계없이 아이들에게 똑같은 교육 기회를 줘야 한다. 체육과 음악은 기초다. 체육은 몸을 강하게 하고 음악은 유연한 성품을 갖게 하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수학과 변증법 교육을 받는다. 이밖에도 지구력과 인내심을 시험하려고 갖은 유혹을 뿌리치는 훈련을 받는다. 20세가 될 때까지 이런 요건을 채우지 못한 사람은 고위직에 오를 자격을 잃는다. 다시 10년간 교육을 받고 또 한 번 시험을 거친다. 여기서 통과한 사람은 5년간 철학 공부를 하며 지적 소양을 쌓는다. 35세가 될 때까지 이 모든 과정을 통과해도 여전히 지도자로서 자격이 부족하다. 실생활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보완하려고 다시 15년 동안 냉혹한 현실 문제와 씨름하게 된다. 혹독하고 냉정한 생존 투쟁을 견디고 50세가 되면 이론과 실천을 겸비한 지도자 역할을 맡게 된다. 이들이야말로 플라톤이 원한 철학자 왕이다. 비록 지도자가 되더라도 권력을 무제한으로 갖는 건 아니다. 지도자는 사유재산을 가질 수 없다. 금전, 아내, 가족 모두 가질 수 없다.

전사 계급도 엄격한 규율을 지켜야 한다. 공동식사, 공동생활을 해야 한다. 모든 여자와 모든 남자를 공유해야 한다. 어떤 여자도 남자와 개인적으로 살지 못한다. 모든 아이들도 공유한다. 어떤 아버지도 자기 자식을 알지 못하며, 어떤 아이도 자기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우수한 남자들은 우수한 여자들과 가능한 한 자주 성관계를 가져야 하며, 변변치 않은 남자들은 변변치 않은 여자들과만 가능한 한 드물게 성관계를 가져야 한다. 생업 종사자에 해당하는 대다수 민중은 재산을 소유하고 가족을 거느릴 수 있지만 아무런 정치적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와 마찬가지로 귀족주의 국가를 이상으로 여겼다. 하지만 동시에 민주주의 모습을 보이기도 하다. 특권은 모두에게 열려있고 상속도 인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6. 플라톤과 후세

플라톤 철학이 후세에 남긴 영향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크다.

  "예나 지금이나 플라톤은 관념론 철학의 창시자이자 생에서 정신의 지배를 주장하는 이론의 선구자이고 인간 행위에 대한 무제약적 도덕규범의 제창자인바, 이 모든 점에서 인류의 가장 위대한 스승이기도 하다."  

IV. 아리스토텔레스 - 거의 모든 주제를 수집, 기록, 정리, 해석, 원리화한 인류의 스승

아리스토텔레스

1. 생애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가장 위대한 제자다. 기원전 384년, 그리스 북부 트라키아 지방에서 태어났다. 젊은 나이에 아테네로 온 그는 20년간 아카데미 학생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은 마흔 살 이상 차이가 났다.

플라톤이 죽은 뒤 아리스토텔레스는 마케도니아로 떠났다. 마케도니아 필립 왕의 아들 알렉산더의 가정교사가 된 것이다. 후일 알렉산더 대왕이 즉위한 후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테네로 다시 돌아갔다. 리케이온이라는 학교를 세워 폭넓은 연구와 교육 활동을 펼쳤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거대한 도서관도 세웠고, 세계 각종 동식물을 포함해서 자연과학 자료를 모았다. 알렉산더 대왕은 자신의 정원사와 사냥꾼, 어부에게 가능한 한 모든 종류의 동식물 표본을 모아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보내도록 지시했다.

리케이온을 세운지 12년째 되던 해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적 압박에 시달렸다. 한편으로는 알렉산더 대왕과 관계도 틀어졌다. 다른 한편으로는 아테네인들이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적의를 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를 알렉산더의 친구이자 아테네의 자유를 앗아간 마케도니아 정부의 옹호자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결국 아리스토텔레스는 소크라테스처럼 신성모독으로 고발당한다. 소크라테스와 다르게 아리스토텔레스는 도주했다. 자신의 도피는 아테네인들이 철학에 두 번씩 죄를 짓게 하지 않기 위한 행동이라는 말을 남기면서. 그다음 해인 기원전 322년, 망명지에서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국가가 최고 두뇌들을 추방하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2. 저작

아리스토텔레스는 수많은 문헌을 남겼다. 논리학, 형이상학, 자연학, 윤리학, 정치학, 문학, 수사학 등 거의 모든 주제에 관해 책을 썼다. 존재하는 모든 주제를 수집, 분류하고 엄격한 증명에 열중했다. 이런 아리스토텔레스의 냉철한 정신은 아름다움과 이상을 추구하는 플라톤의 상상력과 큰 차이를 보인다. 차이는 두 사람의 글을 비교해 봐도 금방 알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본래 과학자다. 이때 과학자라는 말은 넓은 뜻을 아우른다. 그의 탐구욕은 학문 모든 분야로 향했다. 구체적 사물과 사실을 모으고 기록하는 데 그치지 않고, 존재하는 모든 것을 통일하고 정리하는 철학적 인식/지식을 완성하려고 했다.

3. 논리학

아리스토텔레스는 논리학을 창시했다. 논리학은 로고스(logos)에서 파생한 말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논리학(logik)이라는 용어를 쓰지 않고, 분석론(analytik)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논리학은 올바른 생각에 관한 이론이다. 정확히 말하면 올바른 생각의 형식과 (내용이 아닌) 방법에 관한 이론이다. 즉, 우리가 어떤 생각을 해야 하는가는 논리학의 영역이 아니다. 논리학은 내용에 관한 학문이 아니기 때문에. 논리학은 우리가 어떻게 생각해야 올바른 결과에 도달하는가를 보여줄 뿐이다.

논리학 요소로는 개념, 범주, 판단, 추론, 증명, 귀납법이 있다.

  • 개념 - 개념은 대상의 일반적인 특징을 정의한 것이다.
  • 범주 - 공통된 상위 개념을 더 이상 갖지 않는 개념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열 가지 범주는 실체, 양(집합), 질(성질), 관계, 장소, 시간, 위치, 소유, 능동, 수동 등이다. 나중에 이 가운데 몇 가지를 범주에서 제외했다. 더불어 실체, 양, 질, 관계를 가장 중요한 범주로 보았다.
  • 판단 - 개념을 결합해서 명제나 판단을 만든다. 모든 판단에는 최소 두 개의 개념이 있다. 주어와 술어다. 주어는 대상에 관한 개념, 술어는 행위에 관한 개념이다.
  • 추론 - 여러 가지 판단을 합치면 추론이 된다. 추론은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의 핵심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추론 때문에 생각이 발전한다. 추론이란 '일정한 전제들에서 새로운 무엇이 생겨나게 하는 말'이다. 즉, 새로운 판단을 다른 판단들에서 도출하는 방식이다. 대표적인 추론 방식으로는 삼단논법이 있다.
  • 증명 - 추론을 결합하면 증명이 된다. 추론은 다른 명제들로부터 하나의 명제를 도출하는 방법이다.
  • 귀납법 - 귀납법은 개별 사례를 바탕으로 명제가 옳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방법이다. 물론 반례가 없다는 사실을 증명하지 못하는 이상 귀납법이 언제나 올바른 방법은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귀납법의 불완전함을 알았다. 하지만 현재 상황에선 효과있는 방법이다. 플라톤과 다르게 아리스토텔레스는 감각 능력으로 올바른 인식에 다다를 수 있다고 믿었다. 그렇기 때문에 논리학을 중요하게 여긴 것이다.

4. 형이상학

개별자와 보편자

개별자는 개별 사물을 말하고, 보편자는 플라톤이 말한 이데아와 비슷한 말이다. 개별자와 보편자 가운데 무엇이 실제로 존재하는가? 플라톤에 따르면, 보편 이데아만이 존재하고, 개별 사물은 이데아에서 도출한 모사일 뿐이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주장에 반대했다. 물론 훗날 나타난 유명론자처럼 전적으로 반박하지는 않았다. 유명론자들은 보편자란 오로지 머릿속에만 존재한다고 믿었다. 개별 사물에서 추상적으로 생각해낸 존재라는 것이다. 그에 비해 아리스토텔레스는, 보편자에서 존재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런 점에서 스승인 플라톤과 뜻이 같다.

질료와 형상

플라톤과 마찬가지로 아리스토텔레스는 개별 '나무'는 없어지지만 보편자로서 '나무'는 소멸하지 않는다고 봤다. 우리가 어떤 존재에 대해 알려면 개별자가 아니라 보편자를 파악해야 한다. 이런 보편자를 형상이라고 한다. 그러나 플라톤과 다르게,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상이 존재하려면 먼저 '물질' 또는 '질료'가 있어야 한다고 봤다. 질료는 개별자를 말한다. 그런데 이 부분이 참 모순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비판받는 지점이다. 이데아가 존재한다는 플라톤의 견해에는 반대했지만, 결국 형상은 이데아와 너무 비슷하기 때문이다.

신학

질료와 형상은 서로에게 힘을 가한다. 이 관계 속에서 운동이 일어난다. 어떤 사물을 움직이게 하려면 힘이 필요하다. 즉, 운동하려면 대상(운동하는 것)과 힘(운동하게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결국 힘은 원인이 된다. 원인(힘) 때문에 결과(움직임)가 뒤따른다. 원인의 원인의 원인을 계속 따라 올라가면, 그 자체는 운동하지 않는 최초의 충격이 있어야만 한다. 그것은 질료를 갖지 않는 순수한 형식일 수밖에 없다. 단 하나의 완전하고 순수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를 '신성'이라고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은 이해하기가 어렵다고 한다. 첫 번째 이유는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이 수십 년에 걸쳐 발전했고 많이 변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이유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쓴 용어 때문이다. 그리스 용어를 올바로 번역하고 해석하는 게 쉽지 않다. 이중적인 뜻이 많고, 명확하지 않아서다.

5. 평가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과 달리 대담한 사상을 주장하진 않았다. 그렇지만 냉철한 방식으로 모든 주제를 정리하고 통일했다. 그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풍부한 자료를 수집해서 정리한 최초의 인물이다. 자연과학에 관한 저술에는 많은 오류가 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당시 자연을 관찰한 수단은 옹색한 수준이었다. 시계도 없이 시간을 기록했고, 온도계도 없이 온도를 쟀으며, 망원경도 없이 천체를 보고, 기압계도 없이 기상을 관측해야 했다. 이런 여건을 감안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업적은 더 대단하다.

제3장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그리스와 로마의 철학

헬레니즘

알렉산더 대왕 제국은 그가 죽자 곧 와해되었다. 알렉산더 대왕이 죽은 뒤부터 기원을 전후한 시기까지 이어진 문화를 '헬레니즘'이라고 부른다. 당시엔 로마가 큰 제국을 만들었다. 그리스는 로마의 식민지지만 문화에서는 오히려 로마를 지배했다. 그리스 양식의 사원이 로마를 장식했으며, 그리스 비극과 희극을 라틴어로 번역해 로마 문학에 신선한 자극을 주었다.

철학은 더 이상 그리스 민족만의 특색을 나타내지 않았다. 여기서는 로마 정신과 그리스 정신이 합쳐지면서 제 나름의 특색을 드러냈다. 헬레니즘 시대에는 고대 그리스 시대처럼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천재적인 철학자가 등장하진 않았다. 그렇지만 영향력 측면에서는 더 크게 발전했다. 기독교가 등장해 헬레니즘 시대를 해체할 때까지 지위를 유지했다.

I. 스토아 학파 - 아파테이아로 정신승리한 학파

1. 창시자와 대표적 인물

세네카

스토아 철학을 처음 만든 사람은 제논이다. 엘리아 학파의 제논과 이름이 같지만 서로 다른 사람이다. 그래서 흔히 엘레아의 제논, 스토아의 제논이라고 구분한다. 스토아 학파 제논은 기원전 340년경에 태어나 250년경에 죽었다.
후기 스토아 사상가들은 꽤 유명하다. 대표적으로 세네카,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노예 출신인 에픽테토스가 있다.
세네카는 재능 많은 문필가였으나 네로 황제의 명을 받고 자살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오랫동안 전쟁터에서 밤을 지새우며 <명상록>을 썼다. 에픽테토스는 노예 출신이었다. <도덕적 어록>이라는 책을 썼다.

황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12살에 스토아 철학에 입문했다. 그는 개인생활 뿐 아니라 정치활동에서도 스토아 사상을 실천했고 이런 말을 남겼다.

  "아시아와 유럽은 우주의 구석이고, 세상의 모든 바다는 우주의 한 점 물방울이다! 아토스 산은 우주의 한 줌 흙덩이에 불과하고, 모든 현재 시간은 영원 속의 한 순간일 뿐이다!"  

이렇게 외친 통치자라면 중책을 능히 감당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우렐리우스는 생애 대부분을 전쟁터에서 간소한 군복 차림으로 지냈고, 제국을 걱정하는 마음으로 충실히 의무를 다했다.

2. 스토아 철학의 성격과 분야

스토아 철학은 견유학파와 헤라클레이토스의 영향을 받았다. 고대 견유학파의 극단적인 점들을 완화하며 헤라클레이토스의 학설과 결합했다. 스토아 학파는 유물론, 일원론, 우주 전체를 지배하는 엄격한 법칙, 범신론을 주장했다. 그들은 만물은 오직 물질이라고 여겼다(유물론). 게다가 궁극적인 원리는 오직 하나뿐이라고 주장했다(일원론). 우주 전체에 내재하는 엄격한 법칙을 주장했고, 만물의 근원이 불이라는 헤라클레이토스의 학설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들 생각에는 신적인 것이 세계 전체와 일치한다(범신론).

스토아 철학에 따르면 우리는 올바른 가치를 인식하고, 인식된 가치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충동이 방해한다. 충동은 올바른 가치를 인식하는 데 방해가 된다. 인간이 해야할 일은 이런 충동과 계속해서 맞서 싸우는 것이다. 충동을 완전히 극복한 후에야 올바른 가치에 도달할 수 있으니까. 이런 평화로운 상태를 스토아 사상가들은 '아파테이아'라고 부른다. 아파테이아에 도달한 사람은 현자이며, 현자만이 자유롭다.

스토아 철학은 로마를 넘어 유럽 철학에 영향을 줬다. 스토아 철학은 기독교와도 비슷하다. 몇 가지 공통점을 알아보자. 스토아 사상가들은 욕망과 재물을 경시했다. 그리고 이들은 민족과 계층을 넘어 보편적 인간애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이런 스토아 사상은 기독교에 기반을 마련해주었다. 그렇기 때문에 중세 사람들은 세네카가 최초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II. 에피쿠로스 학파 - 아직까지 쾌락주의로 오해받는 사상

에피쿠로스

에피쿠로스(기원전 314년~270년)에 관한 흔한 오해가 있다. 바로 에피쿠로스가 향락스러운 쾌락만 지나치게 추구했다는 오해다. 그는 쾌락을 무제한 탐닉하는 걸 가르치지 않았다. 인간의 유일한 목표는 행복이고, 행복을 추구하려면 쾌락이 있어야 한다고 여겼다. 그러나 쾌락을 지나치게 추구하면 고통이 뒤따른다는 점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이성에 따라 행복을 추구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성이 가르치는 바에 따르면, 진정한 행복은 밝은 마음, 정신의 평온이다. 그리스어로 '아타락시아'라고 한다. 어떤 면에서 보면 스토아 학파의 '아파테이아'와 크게 다르지 않다. 실제로 에피쿠로스는 자신의 생활을 모범이라 할 만큼 절제했다고 한다.

III. 회의주의 학파 - "우리는 진리가 무엇인지 모른다. 그래서 판단을 멈춰야 한다."

피론

회의주의는 참된 인식이 불가능하다고 여긴다. 소피스트에서 몽테뉴와 데이비드 흄을 거쳐 알베르 까뮈에 이르기까지 회의주의는 어느 시대에나 나타났으며 앞으로도 언제든 나타날 수 있다. 헬레니즘 시대에 회의주의 학파가 생긴 이유는 소피스트 사상이 생겼을 때와 비슷하다. 당시 여러 철학 학파가 나타나면서 온갖 학설이 등장했다. 게다가 이들의 논리적 근거가 빈약하다는 점도 회의주의가 생긴 계기가 됐다.

피론(기원전 360~270년경)은 회의주의 학파의 창시자다. 피론의 회의주의를 피론주의라고도 한다. 회의주의의 대표 철학자로는 아르케실라오스, 카르네아데스, 아이네시데모스, 섹스투스 엠피리쿠스가 있다. 물론 모두가 같은 시대에 살진 않았다. 회의주의는 시대를 거듭해 계속 명맥을 이어갔기 때문이다.
회의주의 학파의 특색을 이루는 것은 '트로푸스'다. 트로푸스란 '진리는 인식할 수 없다'라고 보는 관점이다. 한 예로 아이네시데모스는 다음과 같이 트로푸스 열 개를 제시했다.

  1. 생물의 상이성
  2. 인간의 상이성
  3. 감각기관의 상이한 구조
  4. 주관적 상태(기분 등)의 상이성
  5. 객체의 위치와 거리와 주변 환경의 상이성
  6. 다른 종과의 혼합
  7. 그때그때의 양과 구성(혼합)에 따른 객체의 상이한 작용
  8. 모든 현상과 지각의 상대성
  9. 인상이 나타나는 빈도의 높고 낮음
  10. 교육, 습관, 풍속, 종교관 및 철학관의 상이성

회의주의에 따르면, 이런 트로푸스 때문에 우리는 진리를 인식하지 못한다. 우리는 아직 진리를 모른다. 그래서 '판단을 중지'해야 한다. '판단중지'야 말로 현명한 길이다. 프로타고라스는 '인간이 만물의 척도'라고 주장하며 진리의 상대성을 말했다. 고르기아스는 진리는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런 소피스트들의 회의주의도 결국은 독단론이다. '진리는 상대적이다', '진리는 없다'는 주장도 역시 그들만의 판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피론의 회의주의 학파는 우리는 진리를 아직 파악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러니 판단을 멈추고 계속 탐구해보자는 식이다. 여기엔 독단론이 없지 않은가.

IV. 절충주의 학파 - 그리스, 로마, 동방 사상을 합친 학파

키케로

당시 로마 제국은 로마, 그리스, 동방 국가의 문화, 철학 등을 융합했다. 이런 상황에서 로마 철학은 절충주의 경향을 보였다. 즉, 여러 학파를 융합한 것이다. 그리스 사람은 사변 철학을 했지만 로마 사람은 실천 철학을 좋아했다. 철학도 실제 생활에 도움되는 철학을 고수했다.

로마 절충주의 학파의 대표 인물은 키케로(기원전 106~43년)다. 연설가이자 정치가, 문필가였다. 키케로는 회의주의를 기초로 다양한 학파의 사상을 결합했다. 특히 스토아 철학을 좋아했다. 키케로는 로마 사람답게 철학을 실생활에서 사용할 방법을 대중에게 전달했다.

V. 신플라톤주의 - 플라톤 철학과 기독교의 징검다리

신플라톤주의는 기원후 2세기부터 6세기까지 이어졌다. 신플라톤주의를 만든 사람은 사카스(175~242)다. 그러나 사카스에 관해 알려진 바는 거의 없다. 사카스의 제자인 플로티노스가 사실상 신플라톤주의의 중심 인물이다.

1. 플로티노스

플로티노스

플로티노스는 205년 이집트에서 태어났다. 다방면에서 연구를 하고, 로마로 건너와 학교를 세웠다. 플로티노스는 270년 세상을 뜰 때까지 이 학교를 운영했다. 그는 황제의 총애를 받았고, 대중에게도 거의 신적으로 숭배를 받았다.

플로티노스는 신플라톤주의의 중심 인물이다. 하지만 다른 학파와 다르게 새로운 학파의 창시자라 자처하지 않았다. 그저 플라톤의 충실한 제자이자 해석자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사실상 신플라톤주의는 독자적인 학설이다. 플라톤과 밀접히 관련있지만 다른 점도 있다.

플라톤은 이데아와 현실계를 나눠서 생각했다. 이데아는 사람이 도달할 수 없는 영적인 세계를 말하고, 현실계는 사람이 사는 실제 세계를 말한다. 이원론이다. 반면 플로티노스는 다원론자다. 그는 이데아를 일자(The one)라고 불렀다. 모든 사물은 일자에서 차례로 도출된다고 주장했다. 게다가 사람은 일자에 다다를 수 있다고도 봤다. 플라톤은 이데아가 어떻게 현실계를 만들었는지 그 방법을 설명하진 않았다. 반면 플로티노스는 방법도 설명했다. 일자가 넘쳐흘러서 정신이 되고, 다시 정신은 세계혼이 되고, 세계혼은 다시 만물이 된다고 설명한다. 이른바 유출설이다. 물이 넘쳐흐르듯 일자가 넘쳐흘러 단계적으로 정신-세계혼-만물이 된다는 뜻이다. 일자와 가까울수록 완전하고, 일자에서 멀어질수록 불완전하다. 플로티노스에 따르면, 인간의 목표는 일자와 같아지는 것이다.

플로티노스의 이러한 사상에서 우리는, 신과 융합할 수 있게 하는 몰아의 경지를 만나게 된다. 신비주의 이론이다. 이러한 신비주의는 과거 그리스 철학에서는 없었다. 이런 신비주의는 훗날 기독교 사상과도 관련이 있다.

2. 신플라톤주의의 퇴조와 고대 철학의 종말

보이티우스

신플라톤주의는 기독교와 비슷한 점이 많다. 방식은 다르지만, 둘 다 종교 욕구에 부응한다는 사실이 그렇다. 이런 비슷한 점이 있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서로를 공격했다. 결국 로마제국은 아테네의 아카데미를 없앴고 그리스 철학 강의도 전면 금지했다.

480년에 태어난 보이티우스는 정치적인 이유로 525년 처형당했다. 보이티우스는 겉으로는 기독교를 믿는 척했지만 실제로는 스토아 철학, 신플라톤주의를 따랐다. 보이티우스가 감옥에서 집필한 <철학의 위안>에선 신플라톤주의가 마지막으로 빛을 발했다. 보이티우스는 '최후의 로마인'으로 기록된 사람이다.

0 Comments
댓글쓰기 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