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퉁이 서재
[슈퇴리히] 세계 철학사 - 제1부 동양의 지혜 본문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모든 학문의 근원이 철학이라는 점이다. '학문'이라는 게 없던 고대에 누군가가 이런 생각을 했다.
'만물의 근원은 무엇일까?'
이 질문의 답을 찾는 과정에서 다양한 주장이 제기됐다. 더불어 파생 질문도 뒤따랐다. 파생된 질문에 답하려고 또 다른 주장과 질문이 생겨났다. 이 과정을 반복하며 학문이 발전했다. 철학, 윤리학, 문학, 수학, 과학, 예술, 역사, 정치학은 그렇게 탄생했다.
철학사를 훑는 건 정신의 역사를 훑는 일과 같다. 동시에 학문의 역사를 고찰하는 작업이다. 그렇다면 철학의 대상은 무엇인가? 바로 '모든 것'이다. 철학의 여러 부문을 차례로 나열해보자. 그다음 각 부문 옆에 동일한 대상을 다루는 개별 과학을 표시해보자. 이럴 경우 우리는 대상 목록 최상단에 가장 포괄적인 대상인 '존재' 전체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런데 개별 과학 가운데 '존재' 전체를 다루는 학문은 없다. 오로지 철학만이 '모든 존재의 총체적 연관'이라는 걸 주제로 삼는다. 이처럼 전체적이고 포괄적인 것을 추구하는 경향이야말로 철학을 다른 개별 과학들과 구별 짓는 특징이다.
이 책에선 인간 정신의 발전 과정에서 대두한 특정 문제들과 해결의 시도들을 총괄해 철학이라고 부른다. 모든 문제와 해결 시도를 탐구하고 그로부터 어떤 표상을 얻으려면, 그것들의 역사를 파악해야 한다. 다시 말해, 철학 연구란 철학사 연구 없이는 불가능하다. 종합하자면 철학사를 공부하는 이유는 이렇다. '모든 것, 즉 존재 전체를 탐구하기 위해서'
철학사 공부가 어떤 의의를 갖는지 알았다. 그런데 철학사 공부에는 한계가 있다. 슈퇴리히는 철학사 공부의 한계에 관해 이렇게 말한다.
- 철학이란 우리의 외부 세계와 내면 세계가 제기하는 수수께끼를 생각으로 풀어 내려는 시도이다.
- 이러한 시도는 일정 범위의 시간(기원전 6세기부터 현재까지)에 국한해서 우리에게 알려져 있다.
- 더욱이 그런 시간 범위 내에서 우리가 접할 수 있는 철학 사상은 말이나 글로 표현된 것들로 제한된다.
- 따라서 과거를 이해하려는 시도는 언제나 장애에 부딪친다. 우리 생각으로 불완전하게 재구성할 뿐이다.
슈퇴리히에 따르면, 철학사는 중요하다. 하지만 완벽히 이해하는 덴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나에겐 이 말이 철학사 책을 여러 권 읽으라는 말로 들린다. 여러 권 읽어야지. 1년 전에 새뮤얼 스텀프의 서양 철학사 책을 읽고 정리했지만 이번에 다시 정리해본다. 이번에 읽은 책은 슈퇴리히의 <세계 철학사>다. 분량은 1200쪽으로 꽤 많지만 설명은 새뮤얼 책보다 쉽다. 더군다나 동양 철학도 짧게나마 소개한다.
현대철학 부분은 제외하고, 제1부 동양의 지혜부터 제6부 19세기 철학까지 정리해본다.
제1장 고대 인도 철학
서구와 다르게 인도에서는 역사 서술이 없다. 고대 인도인들은 정확한 일시를 기록하는 데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래서 인도 고대 철학 사상이 담긴 대부분 문헌은 몇 세기에 생성됐는지조차 확실하지 않다.
I. 베다 시대
베다 시대는 기원전 1,500년경에서 500년경까지의 기간이다. <베다>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힌두교 성전이다. 한 권의 책이 아니다. 다수의 문헌을 총칭하는 이름이다. <베다>는 시대를 거듭하며 여러 필자가 집필했지만, 모두 위 기간 동안 집필한 것만은 분명하다. '베다'라는 말은 '종교적이고 신학적인 지식'정도를 뜻하지만, 아주 오랜 옛날에는 기록할 가치가 있다고 여기는 지식 전체를 의미했다. <베다>는 성경의 여섯 배 분량에 달한다. 이런 <베다>는 고대 인도 승려들의 교과서와 같은 책이었다.
베다 시대는 다음과 같이 구분한다.
- 고대 베다 시대 - 기원전 1,500년경~1,000년경
- 밀교 시대 - 기원전 1,000년경~700년경
- 우파니샤드 시대 - 기원전 750년경~500년경
밀교 시대인 기원전 1,000년경~700년경에 카스트 제도가 만들어졌다. 브라만(승려), 크샤트리아(국왕, 전사), 바이샤(상인), 수드라(불가촉천민)이다. 최하위 계층에 대한 차별은 현대까지도 이어졌고,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마하트마 간디가 각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베다 시대에 만들어진 계급 제도가 현대까지 이어진 것이다.
인도 북부 삼림 지대에 거주하던 수도자와 고행자들은 구도에 정진하는 가운데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이 탁월한 문헌인 <우파니샤드>를 창조했다. 쇼펜하우어는 <우파니샤드>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이것은 이 세상에서 찾아볼 수 있는 가장 훌륭하고 감명 깊은 글이다. 이 글은 내 삶의 위안이었으며 내가 죽어갈 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파니샤드> 역시 여러 사람의 생각과 가르침을 모은 책이라서 완결된 체계를 갖지 않는다. 전부 100편 이상의 우파니샤드가 있으며, 이것들 모두가 동등한 의미나 가치를 지니지는 않는다.
우파니샤드라는 말은 '가까운'이란 의미의 우파(upa)와 '앉는다'는 뜻의 사드(sad)에서 유래했다. 이 말은 '(스승) 가까이에 앉아 있는' 사람을 위한 가르침, 다시 말해 어떤 작은 집단의 충실한 일원에게만 전해지는 비밀스러운 가르침을 의미한다. <우파니샤드>의 기조는 염세적이어서 철저히 현세적이던 고대 베다 시대의 찬가들과는 대조된다.
아트만과 브라만
아트만과 브라만은 <우파니샤드>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이다. 아트만은 원래 '입김', '호흡'을 뜻했다. 이후 '본질', '본래의 자아', '자아 자체'를 의미하게 됐다. 하지만 이런 말은 모두가 아트만을 그저 근사치로 표현할 뿐이다.
우파니샤드 철학의 결정적 진전은 브라만과 아트만이 하나라는 인식에서 나타났다. '브라만=아트만'이라는 공식으로 표현된 이 인식에 따르면, 세계에는 오로지 하나의 참된 본질이 존재한다. 여기서 우리는 인도 종교관을 엿볼 수 있다. 이슬람교나 유대교에서는 신이 주인이고 인간은 종이다. 그러나 인도인은 신과 인간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고 생각했다. 인도 종교관의 특징이다.
아트만은 지성적인 학습으로 파악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연구나 독서, 천재적인 능력으로는 아트만을 인식할 수 없다. 브라만 승려는 학습을 단념하고 아이처럼 되어야 한다. 진리란 지성이 접근할 수 없는 것이며, 말이나 글로도 표현할 수 없고, 또 모든 사람이 터득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오랫동안 정진해야만 한다. 외부 세계를 향한 모든 관심과 의욕을 끊은 채 정진과 평온, 침묵, 정신 집중과 자기 단련을 해야 한다. 내면으로 침잠해야만 아트만을 인식할 수 있다. 요컨대 금욕 생활이 이처럼 큰 역할을 하는 경우는 인도인 이외 민족에게서 찾아보기 어렵다. 다른 민족과 다르게 인도인이 철저하게 고행을 하는 이유다.
윤회와 해탈
우파니샤드의 근본 사상 중 두 번째는 윤회와 해탈이다. 윤회는 많이 들어봤을 거다. 현세에서 지은 업보에 따라 내세에 새롭게 태어난다는 개념이다. 그런데 높은 단계에 있건, 낮은 단계에 있건 현재 삶에서 어떤 실적을 쌓는가에 따라 끊임없이 새롭게 태어난다는 약속은, 존재하는 모든 것에 괴로움이 있다고 믿는 사람에게는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다. 따라서 참된 구도는 선행을 실천해 높은 단계의 존재로 다시 태어나기를 지향하기보다는 죽음과 환생을 끊임없이 되풀이하는 순환에서 벗어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바로 이것이 해탈의 의미다. 즉, 해탈은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II. 인도 철학의 비정통 학파
베다 시대에는 비교적 통일된 기조를 보여 주었다. 어쨌든 브라만교가 모든 철학의 배경을 이루었다. 그 이후에는 브라만 사상을 넘어서는 새로운 종교들이 창시되었다. 베다 시대에는 <우파니샤드>의 저자들이 익명이거나 전설상 인물이었던 반면에, 베다 이후 시대의 저자들은 역사적으로 분명히 알려져 있고 뚜렷한 윤곽을 보이는 사상가들이었다. 게다가 철학과 종교는 더 이상 소수의 전유물이 아니다. 낮은 계층도 포섭했다.
베다 이후 생겨난 비정통 학파로는 대표적으로 로카야타 학파, 자이나교, 불교가 있다. 인도의 자이나교도는 현재 400만 명이며, 대다수가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사람들이다. 비정통 학파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은 단연 불교다.
석가의 가르침과 불교
인도 왕자로 태어난 석가는 어느 날 노인, 병자, 시체를 보고는 출가를 결심했다. 모든 재산과 지위를 포기하고 아내와 아들을 놓아둔 채 야반에 궁성을 떠났다. 출가 후 극한 고행을 했다. 하지만 그런 방식으로는 참된 각성에 이르지 못하리라는 걸 깨달았고 고행을 멈췄다. 석가는 보리수나무 아래서 바르게 앉고는 참된 앎을 얻기 전까지 그 자리를 떠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렇게 앉아 있던 석가는, 모든 존재가 태어났다 죽고 다시 태어나는 영겁회귀, 즉 윤회의 초자연적인 환영을 보게 되었다.
석가는 '네 가지 거룩한 진리'를 깨달았다. 소위 '사성제'라고 하는 공식이다.
- 고제: 모든 삶은 괴로움이다.
- 집제: 모든 괴로움은 욕망 내지 집착에서 비롯된다.
- 멸제: 이런 욕망을 없애면 괴로움이 사라지고 윤회의 사슬을 끊을 수 있다.
- 도제: 이런 해탈에 이르는 길에는 여덟 가지가 있는데, 이를 팔정도라고 한다. 팔정도란 올바른 믿음, 올바른 생각, 올바른 말, 올바른 행동, 올바른 생활, 올바른 노력, 올바른 기억, 그리고 올바른 마음 집중이다.
그리하여 싯다르타는 칠 년 간 구도 끝에 깨달은 자, 즉 석가가 되었으며, 이때부터 가르침을 전하고 다녔다.
그렇다면 해탈 상태에서 얻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열반이다. 문자 그대로 옮기면, 이 말은 '타던 불이 꺼진 상태'를 뜻한다. 다시 말해, 무(無)를 의미한다. 이것이 대단한 게 아닐지 몰라도, 석가에게는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유일한 상태였다.
불교 신자는 2억에서 5억 명에 이른다. 더 정확한 수치를 제시하기는 어려운데, 그 이유는 불교가 배타적 종교가 아니어서 신도가 동시에 다른 종교를 믿어도 되기 때문이다. 본래 불교는 무신론적 종교다. 기독교를 비롯한 다른 종교처럼 인간을 닮은 하나의 신을 믿는 소위 인격신론 종교가 아니기 때문이다.
불교의 전파 과정에서는 한 번도 유혈 사태가 없었으며, 이 점은 기독교 선교, 특히 중미 대륙에서의 선교와 현격한 대조를 이룬다. 이처럼 불교는 2,500년의 역사 동안 참된 평화의 가르침임을 입증하였다.
III. 인도 철학의 정통 학파
고대 인도의 정통 학파로는 니야야 학파, 바이셰시카 학파, 산키야 학파, 요가 학파, 푸르바 미만사 학파, 베단타 학파가 있다. 모두 생소한 학파다. 하나씩 간단히 알아보자.
1. 니야야 학파와 바이셰시카 학파
니야야는 '증명'이나 '규칙'을 의미한다. 이런 명칭 자체가 이미 학파의 특성을 나타낸다. 니야야 학파는 논리학과 변증법 영역에 주안점을 두었다. 이 학파 때문에 인도에서 논리학이 발전했다.
바이셰시카 학파는 형이상학과 자연철학에 주안점을 두었다. 바이셰시카는 '구별' 정도의 뜻이다. 이들은 매사 명확하게 인식하려고 했다. 바이셰시카 학파가 주장한 자연철학의 핵심은 원자론이다. 만물은 이 원자로 구성된 존재라고 보았다. 니야야와 바이셰시카는 서로를 보완했는데, 결국 후대에 이르러 이 두 학파는 하나로 융합되었다.
2. 산키야 학파와 요가 학파
산키야는 '수'나 '셈'을 뜻하는 단어에서 파생된 말이다. 산키야 학파는 총 25가지 원리(감각 능력, 정신, 감각 기관, 행동 기관, 에테르, 공기, 불과 빛, 물, 흙, 푸루샤 등)로 세상을 설명하려 했다.
요가는 '극기', '단련'이라는 의미이다. 현대에는 운동이나 명상 방법으로 사용된다. 고대 인도에서는 요가가 진리와 해탈에 이르는 길을 제시한 학문체계였다. 요가 학파는 금욕적인 수행이나 명상, 또는 정신 집중으로 가장 심오한 깨달음, 무아경, 해탈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다. 번뇌와 윤회에서 벗어나기 위해 요가 수행자는 장기간 고된 단련을 견뎌야 했다. 요가는 여덟 단계로 진행된다. 훈육, 극기, 바른 자세, 호흡조절, 감각기관 유리, 생각 집중, 명상, 삼매이다.
3. 미만사와 베단타
미만사는 산키야 학파를 공격하고 성스러운 전통으로 돌아가 전통적 종교 제의를 부활하게 만들려 했던 학파이다.
베단타는 '베다의 종결'이라는 뜻이다. 베단타 학파는 시간이 흐르면서 브라만과 아트만 내 전체적인 통일이라는 사상을 발전시켰다. 그래서 그런지 베단타 학파는 오늘날까지도 중요하게 이어지고 있다.
제2장 고대 중국 철학
26개 문자로 이루어진 알파벳에 비해 중국 문자는 배우기가 어렵다. 4만 개에 달하는 문자를 모두 익히려면 수십 년은 족히 걸릴 것이다. 이렇게 복잡한 언어를 사용한 중국은 서양과 다른 철학 체계를 구축할 수밖에 없다. 철학이나 문화는 언어와 긴밀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와 서양은 과학적 논리학이 발달했다. 서양에서는 명사와 형용사, 동사 등을 엄격히 구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국에선 언어 구조가 엄격히 구별되지 않는다(그래서 중국 문헌을 번역할 때도 여러 어려움이 따른다). 이런 이유로 중국에서는 과학적 논리학이 발전할 수 없었다.
I. 공자
1. 생애
공자는 중국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사상가다. 공자는 기원전 551년 노나라에서 태어났다. 귀족 혈통의 오랜 가문인 공 씨 집안 출신이었고, 이 가문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진다. 공자의 후예는 약 1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이미 젊었을 때 공자는 본인 집을 학교로 만들었다. 제자들에게 역사와 시문학, 예의범절을 가르쳤다. 수십 년 동안 공자의 학교를 거쳐 간 젊은이들이 3,000명이 넘었다. 그의 명성도 널리 퍼졌다. 공자에게 높은 공직 제의가 왔지만, 그는 자신의 도덕적 신념과 일치하지 않아 모두 거절했다.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직분이 없다고 근심하지 말고, 직분을 얻을 만한 자격이 있는지 근심하라.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다고 근심하지 말고, 이름을 얻을 만한 자격이 있는지를 근심하라."
결국 공자는 나이 50세에 노나라 관직을 얻었다. 자신의 통치 원칙을 실천할 기회를 갖게 된 것이다. 그러나 임금이 돈과 여자에 눈이 멀어 공자의 통치 원칙을 저버리고 말았다. 이에 실망한 공자는 관직을 버리고 고국을 떠났다. 13년간 유랑 생활을 끝내고 환대를 받으며 고국에 돌아온 공자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고문헌을 수집하고 고국의 연대기를 집필하면서 만년을 보냈다.
2. 사서오경
공자는 아주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중국 문헌들을 수집하고 정리한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그렇게 다섯 가지 경전, 즉 '오경'이 만들었다. 오경은 이렇다. 기원전 3,000년경에 어느 임금이 쓴 글에 공자가 새롭게 주해를 덧붙인 <역경>, 수백 편의 고대 시가를 정리한 <시경>, 중국 역사 초창기부터 공자 시대까지의 다양한 문서를 집대성한 <서경>, 공자가 직접 쓴 노나라 연대기 <춘추>, 예의범절에 관한 경전 <예기>.
오경에 버금가게 중요한 문헌 네 가지도 남겼는데, 이를 '사서'라고 한다. '사서'는 공자가 직접 쓰진 않았지만 공자나 그의 수제자들의 가르침을 담고 있다. 공자의 언행을 수록한 <논어>, 위대한 학문을 뜻하는 <대학>, 절제를 가르친 <중용>(공자의 손자가 지음), 공자의 제자였던 맹자가 지은 <맹자>가 있다.
이렇게 네 가지 문헌과 다섯 가지 경전을 '사서오경'이라고 부른다. <춘추>와 <예기>를 제외하고 '사서삼경'이라고도 부른다.
3. 유교 철학의 특징
공자 철학의 특징은 '인간과 실천 생활'에 주안점을 둔다는 것이다. 사실상 모든 중국 철학의 특징이기도 하다. 공자 철학은 논리학이나 형이상학으로 이루어진 완결한 체계가 아니다. 공자 사상은 인본주의다. 인본주의에 부합하는 인간이 되는 게 공자가 생각하는 이상향이다. 공자가 생각하는 현자는 세상을 등진 금욕주의자가 아니라, 세상과 인간을 이해하고 매사 절도를 지키는 완숙한 사람이다.
II. 노자
1. 생애
그리스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렇듯, 중국에서도 한 세대 정도 차이를 두고 거의 같은 시대에 살던 두 사상가가 이후 전체 사상적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와는 다르게 공자와 노자는 사제지간이 아니었다. 사실 노자가 실존 인물인가에 대해서도 논란이 많다.
노자는 초나라에서 태어났으며 성은 '이', 이름도 '이'였다. 어른이 되고 나서는 이름이 백양이었으며, 죽고 난 뒤 받은 이름은 백양이었다. '노자'는 후에 사람들이 붙인 이름으로 '나이 많은 스승'을 일컫는다. (믿거나 말거나지만) 중국에서 전해 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공자와 노자가 한 번 만난 적이 있었다. 공자는 노자를 '용에 비길 만한 사람인 것 같다'라고 찬양했다고 한다.
노자는 도와 덕을 닦으며 세상의 이목을 받지 않고 무명으로 머물려 애썼다. 어느 날 '윤희'라는 국경 관리인이 노자에게 간청했다. '어르신의 생각을 부디 글로 지어 주십시오.' 노자는 도와 덕에 관해 상권, 하권으로 나누어 5,000여 자를 써준 뒤에 다시 무명의 삶을 살았다. 그 글이 바로 <도덕경>이다. 그의 여생에 관해서는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윤희가 노자에게 글을 써달라고 청하지 않았다면 <도덕경>은 없었을 것이다. 위대한 현자들 중 한 사람인 노자의 사상이 사라져 버렸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이외에도 많은 현자들의 사상이 전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2. 도의 가르침
도는 노자 철학의 핵심 키워드다. <도덕경>의 첫 구절은 '도가도 비상도', 즉 '도라고 말할 수 있는 도는 도가 아니다'라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노자 사상대로라면 '도'를 정의할 수 없다. 굳이 정의하자면 '길', '이성', '하늘의 법' 정도로 막연히 이해하는 게 좋겠다.
노자는 행하되 행하지 말고, 사물을 다루되 소유하지 말며, 일을 완수하되 자랑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도덕경>의 핵심어는 '소박한 자연스러움'이다. 소박한 삶은 이익과 잔꾀, 부자연스러움과 기교, 이기심, 헛된 소망을 부끄럽게 여긴다.
"현자는 욕심을 없애려는 욕심만 있고, 귀하다고들 하는 것을 귀히 여기지 않는다. 현자는 온갖 것의 본래적 자연스러움을 도와줄 뿐, 억지로 무슨 일을 하지 않는다."
III. 묵가와 법가, 맹자와 순자
1. 묵자
고대 중국 사상에서 세 번째로 중요한 사상은 묵가이다. 이 사상은 기원전 480년~390년에 활동한 묵자가 창시했다. '공공복지를 촉진하고 악을 제압하라.' 이것이 묵가의 신조다. 묵가는 철저한 실용주의 철학이다. 그런 이유로 묵가는 유교가 높이 평가한 음악과 예술을 중시하지 않았다.
묵자에 따르면, 모든 철학 이론은 세 가지 요건을 갖춰야 한다. 1) 튼튼한 기초를 가져야 하며, 2) 비판적 검증을 거쳐야 하고, 3) 실생활에서 응용할 수 있어야 한다. 철저히 실천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2. 법가
법가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세세한 항목까지 면밀하게 짜인 법을 제정하는 통치 원리를 추구했다. 법을 통해 올바른 원리를 준수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법가 학파는 일시적으로나마 지배층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당시 진시황의 명령으로 공공도서관의 모든 유교 경전을 불태웠다. 유교 경전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도 중형을 내렸다. 다행히 용기 있는 많은 학자들이 목숨을 걸고 유교 경전을 지켰다. 지금 우리가 유교 경전을 볼 수 있는 이유도 그들 덕분이다.
3. 맹자
맹자는 공자의 제자 가운데 가장 큰 명성을 누린 학자다. 맹자는 스승의 가르침을 더 보완하고 발전시켰다. 첫째, 맹자는 인성에 대한 독특한 이론을 전개해서 유교에 심리학적 기초를 마련해 주었다. 둘째, 그는 정치 사상가로서 '제후들의 조언자'로 중요한 활동을 했다.
인간에 관한 맹자의 견해는 아주 간단하다. '인간은 선하다.', '물이 항상 아래로 흐르듯, 인간의 천성은 오로지 선을 따른다.'
맹자는 노자의 견해와 달랐다. 노자는 자연을 관조하고 현자를 모범으로 삼았지만, 맹자에게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인간 본성을 따라가기만 하면 그것이 바로 올바른 길이기 때문이다. 현자도 똑같은 인간이니까. 성선설을 주장한 것이다. 맹자에 따르면 인간 천성을 근본적으로 선하다. 혹여 악한 행위를 했다면 그건 본성의 잘못이 아니라 환경이나 사회 탓이라는 것이다.
4. 순자
순자는 맹자와 같은 시대 사람이다. 순자는 인간 천성에 대해 맹자와 정반대 입장이었다. 성악설, 즉 인간의 천성이 악하다고 주장했다. 인간은 본래 악하지만 교육과 법으로 선해진다고 믿었다. 맹자는 외부 환경은 고려할 필요가 없고 오로지 인간 내면에 귀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순자는 인간이 자연을 능동적으로 지배할 것을 주장했다.
VI. 중국 철학의 특징
중국 철학은 조화와 중용을 강조한다.
조화와 중용을 강조하기 때문에 모든 종류의 편향성과 극단성을 지양한다. 중국인은 '이것이냐 저것이냐' 양자택일보다 '이것도 저것도'의 양자합일을 선호한다. 중국 철학은 대립하는 주장을 상호 배타적으로 방치하지 않고 종합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관용성과도 결부되는 점이다. 중국에서 가장 중요한 철학 내지 종교는 유교, 도교, 불교였다. 이 세 학파가 논쟁을 벌인 적은 자주 있지만 폭력적인 수단으로 상대방을 개종하거나 핍박한 적은 거의 없다. 유럽과 달리 중국은 종교에 대해서도 관용적이었다. 이런 특성은 중국 철학의 인본주의 정신과도 관련이 있다. 중국 사상 가운데 인간을 중심에 놓지 않는 학설은 없다.
중국 철학에서 순수 인식에 관한 논의는 찾아볼 수 없다. 중국 철학의 목적은 올바른 태도와 행동 지침을 수립하는 데 있다. 그렇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중국 철학은 윤리학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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