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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퇴리히] 세계 철학사 - 제4부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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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퇴리히] 세계 철학사 - 제4부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

Baek Kyun Shin 2021. 11. 24. 22:30

드디어 '잃어버린 천 년'을 지나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에 다다랐다.

제1장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시대의 철학

I. 중세에서 근세로 정신적 전환

이미 후기 스콜라 철학 시대에 신학이 점차 무너지고 이성의 가치가 커졌다. 그러면서 철학은 인습의 속박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거대한 정신적 전환의 전조를 보였다.

1. 발명과 발견

콜럼버스

15~16세기에 유럽을 뒤바꿔 놓은 세 가지 발명이 있다. 나침반, 화약, 인쇄술이다. 나침반을 발명해 바다를 항해할 수 있게 되었고, 화약을 발명해 기사 계급의 지위를 약하게 만들어 사회를 변하게 했고, 인쇄술을 발명해 지식을 쉽게 전달할 수 있었다. 이런 발명 못지않게 유럽에 큰 영향을 미친 발견이 있다. 바로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바스코 다 가마의 인도 항로 발견, 마젤란의 세계 일주다.

2. 새로운 자연 지식

요하네스 케플러

코페르니쿠스는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혁명적인 주장을 했다. 우주의 중심이 지구라고 믿던 당시 기독교 세계관에서는 믿기지 않는 주장이었다. 코페르니쿠스가 혁명적인 주장을 했다면, 요하네스 케플러는 행성운동을 수학 공식으로 표현했다. 자연 현상에서 규칙과 법칙을 발견한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물질이 있는 곳에 수학이 있다."

언뜻 보면 피타고라스의 주장과 비슷하다. 그러나 피타고라스는 사이비 성격이 있던 반면, 케플러는 자연 현상을 있는 그대로 수학으로 표현했다.

또 한 명의 과학자, 갈릴레이도 있다. 갈릴레이도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옹호했다. 그 이유로 종교재판소에서 모진 고문을 당한다. 고문에 못 이겨 결국 자신의 주장을 굽힌다. 20세기에 이르러서야 가톨릭교회는 갈릴레이가 정당하다고 인정했다.

코페르니쿠스, 케플러, 갈릴레이는 자연 현상에 어떤 '목적'이나 '본질'이 있다고 설명하지 않았다. 당시 교회에서는 모든 자연현상에는 목적이 있다고 말했다. 그 목적은 신의 의지다. 인간을 비롯한 만물은 신의 의지대로 잘 짜여 있다는 거다. 다시 말해, 어떤 현상에는 반드시 목적이나 본질이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코페르니쿠스, 케플러, 갈릴레이는 이에 반대했다. 그들에 따르면, 자연현상에는 목적이 없다. 그냥 발생할 뿐이다. 그리고 법칙이나 규칙이 있다. 법칙이나 규칙 역시 신의 목적에 따라 만들어진 게 아니다. 이러한 새로운 방식의 정확한 자연 인식은 인간 지성사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코페르니쿠스, 케플러, 갈릴레이 덕분에 자연과학은 이제 학문의 주도권을 넘겨받았다. 이후로는 어떤 철학자도 자연과학을 무시할 수 없었다.

3. 인본주의와 르네상스

몽테뉴

중세에는 고대 사상을 신학적으로 해석하려 했다. 14세기에 이르러 고대 사상을 '인간적'으로 해석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이를 인본주의라고 한다. 철학에서 인본주의는 고대 사상을 참된 형태, 다시 말해 스콜라식 해석을 배제한 형태로 부활하려는 시도를 보였다. 인본주의 시대에 철학은 스콜라 사상에서 벗어나고, 아무 편견 없이 그리스 철학을 고찰했으며, 이를 당대와 후대에게 보여주어 새로운 창조의 자극을 받게 했다.

15~16세기에는 천재들이 연이어 등장한다. 역사상 유례없는 일이다. 이미 언급한 코페르니쿠스, 케플러, 갈릴레이를 비롯해서,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빈치, 세르반테스, 말로, 셰익스피어, 루터, 칼뱅, 몽테뉴 등이 있다.
몽테뉴는 이 시대정신을 집약한 사람이다. 사실 몽테뉴가 체계적인 사상을 전개한 철학자는 아니다. 그렇지만 현실적, 비판적, 회의적이면서 동시에 자유로운 철학자였다.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지성인이라 볼 수 있다.

몽테뉴는 <에세이>라는 책을 집필했다. 여기서 그는 많은 성찰은 한다. 국가, 정치, 정신, 지식, 교육, 덕성, 용기 등을 주제로 삼지만 언제나 하나의 문제로 돌아온다. 삶과 죽음의 문제다. <에세이>에 쓴 글을 보면 몽테뉴가 철저한 회의주의자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우리 경험이 믿을만 한가? 그렇다면 이성은 믿을만 한가? 과거에 사실로 여긴 학설이 지금은 거짓으로 드러났다. 그렇다면 지금 사실이라고 여기는 학설도 나중엔 거짓이 될지 어떻게 알까? 그리고 그게 사실인지 거짓인지는 누가 알 수 있을까? 몽테뉴는 이런 식으로 모든 것을 비판하고, 검증하려고 했다. 이는 나중에 '계몽주의'라고 불리게 된다.

몽테뉴의 에세이 초판본

4. 근세 여명기의 사회 정치 변혁 - 새로운 법사상과 국가 사상

마키아밸리 - "국가 권력을 강화하려면 기만, 배신, 위증, 폭력 모두를 허용해야 한다."

마키아밸리

마키아밸리(1469~1527)는 정치사상가이자 역사학자다. 마키아밸리는 분열된 조국이 통일해 번영하기를 바랐다. 조국 통일에 방해가 되는 교황 제도를 심하게 싫어했다. 마키아밸리는 그 유명한 <군주론>을 썼다. 여기서 그는 국가 권력을 최우선시했다. 국가 권력을 강하게 하려면 도덕이든 비도덕이든 모든 수단을 정당하게 여겨야 한다고 보았다. 기만과 배신, 위증, 폭력과 같은 비도덕 수단도 모두 허용했다. 마키아밸리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기분을 맞춰 주거나 아니면 완전히 짓이기는 방식으로 대해야 한다."  

마키아밸리는 인간의 약점을 깊이 통찰한 사람이다. 정치가라면 그런 약점을 이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마키아밸리에 따르면, 인간은 모두 사악하며 그중 대다수는 멍청하기까지 하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를 제대로 유지하려면 빠르고도 자비 없게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보았다.

  "분쟁을 끝내는 데는 오직 두 가지 방법밖에 없다.
법으로 정한 방식을 따르거나 폭력을 행사하는 길이다.
첫 번째 방식은 인간이 사용하고, 두 번째 방식은 동물이 사용한다.
그러나 첫 번째 방식이 언제나 분쟁을 해결하진 않는다.
그러므로 때로는 두 번째 방식도 취해야 한다."  

토머스 홉스 -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에서 벗어나려면 절대적인 국가 권력이 필요하다."

토머스 홉스

토머스 홉스(1588~1679)는 국가철학에 큰 영향을 준 철학자다. 홉스 철학의 핵심을 이룬 사상은 국가론이다.

유물론자인 홉스는 자유를 거부했다. 홉스에 따르면, 인간은 스스로 이익만 추구하는 이기주의자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 상태에서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있을 수밖에 없다. 이 상태에서 인간은 안전하지 않다. 자연스럽게 사람은 안전하길 원한다. 안전을 보장받으려면 국가가 개입해야 한다. 인간이 국가 권력에 복종할 때만 안전할 수 있다. 인간은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완전히 질서 없는 자연 상태와 국가 질서에 철저히 복종하는 상태 중 하나를 말이다.

홉스에 따르면, 국가는 전능해야 한다. 신과 같은 존재여야 한다. 국가가 허용하는 게 정의며, 국가가 금지하는 게 곧 불의다. 도덕적인 선악도 국가가 정한다. 도덕은 인간에게 타고난 본성이 아니다. 사회 공동체를 형성하며 터득한 것이다. 홉스는 <리바이어던>에서 이렇게 말했다. 홉스의 주장은 인간이 낙원에 살다가 추방됐다는 성서 내용과 상반된다. 이런 이유로 홉스는 무신론자라는 비난을 받았다.

홉스가 그린 삽화

토머스 모어 - 이상국가를 꿈꾼 사회주의자

토머스 모어

토머스 모어(1478~1535)가 쓴 <유토피아>는 표면적으로는 문학이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혁명 사상을 담고 있는 책이다. 모어는 <유토피아>에서 이상적인 사회주의 공동체를 그렸다. 모어가 원하는 사회는 하층민을 착취하지 않고, 모든 사람이 일을 하며, 모든 재물을 사회가 갖고, 모든 노인은 복지혜택을 받고, 교육과 소유물은 평등하게 제공하는 사회다.

II. 과도기의 주요 사상가

1. 조르다노 브루노

조르다노 브루노

조르다노 브루노(1548~1600)는 어린 나이에 수도회에 들어갔다. 그러나 자연과 학문에 관심이 있어서 교단을 떠났다. 당시로서는 사례가 없던 행보였는데, 그때부터 브루노는 이단으로 쫓기며 방랑 생황을 했다. 브루노는 어디서도 인정받지 못했다. 그의 강연엔 사람이 적었고, 그의 책을 인쇄하려는 출판사도 거의 없었다. 그렇게 방랑하던 중 어떤 사람이 초대를 해 15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초대를 한 그 사람이 브루노를 종교재판소에 밀고했다. 브루노는 7년간 감옥에 갇혔다가 결국 화형으로 죽었다.

코페르니쿠스는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태양계 너머에는 천체가 마치 고정된 반구형 지붕처럼 자리 잡고 있다고 생각했다. 반면에 브루노는 우주를 한계도 중심도 없는 무한한 것이라 생각했다. 브루노가 이단으로 쫓긴 이유는 신과 우주의 관계에 대한 주장 때문이다. 브루노는 우주는 무한하다고 보았다. 신도 우주 안에 존재한다고 본 것이다. 우주 밖에 신이 있고, 신이 우주 전체를 다스린다고 보지 않았다. 신도 우주 안에 있는 존재라고 봤다. 훗날 라이프니츠, 스피노자, 괴테, 셸링은 브루노의 영향을 받았다.

2. 프랜시스 베이컨 - '가설 검증'이라는 근대 과학방법론을 생각해 낸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

베이컨은 정치로 출세했다. 검사총장과 변호사를 거쳐 대법관 자리까지 올랐다. 국왕은 그에게 남작 작위도 줬다. 베이컨은 입신양명과 학문 사이에서 계속 갈등을 겪었다. 학문을 향한 관심은 시간이 날 때만 틈틈이 채울 수 있었다.

가장 높은 자리까지 오른 베이컨은 한순간 나락으로 떨어졌다. 여러 차례 뇌물을 받은 죄로 고발되었기 때문이다. 이 사건으로 그의 정치 행보는 끝나고 말았다. 이후로 시골에서 은둔하며 학문 연구를 다하다가 5년 뒤 세상을 떠났다.

베이컨의 주요 저작은 다음과 같이 세 가지다.

  • <학문의 가치와 진보에 관하여>: 당시 학문에 대한 비판과 새로운 방향 제시
  • <새로운 오르가논>: 학문 방법에 대한 논의
  • <새로운 아틀란티스>: 이상적 미래 사회에 대한 계획

첫 번째 저작 <학문의 가치와 진보에 관하여>에서는 인간에게 외면당한 지식 세계를 고찰해보고, 방치된 영역에 관해 정확히 서술했다. 두 번째 저작 <새로운 오르가논>은 가장 중요한 책이다. <새로운 오르가논>에서는 학문이 어떻게 진보할 수 있는지 서술했다. 인간이 자연을 올바로 이해하려면 올바른 방법을 거쳐야 한다. 올바른 방법을 쓰려면 첫째, 지난 편견에서 벗어나야 하며, 둘째, 더 적극적인 자세로 올바른 학문 방법을 찾아야 한다.

베이컨은 '우상론'을 주장하며 인간이 왜 편견과 오류에 사로잡혀 있는지 설명한다. 베이컨은 네 가지 우상을 경계해야 한다고 말한다.

  • 종족의 우상: 여기에는 인간 본성 자체에서 비롯한 모든 오류를 포함한다. 원숭이는 원숭이 나름대로 세상을 보고, 다람쥐는 다람쥐 나름대로 세상을 본다. 마찬가지로 사람은 사람 나름 세계를 바라본다. 따라서 우리는 쉽게 수긍할 수 있는 모든 논증을 믿지 말아야 하며,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논증을 더 세심하게 검토해야 한다.
  • 동굴의 우상: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에서 빌려온 개념이다. 이는 개인의 상황이나 관점에서 비롯되는 오류들이다. 이런 오류는 최소한 사람 수만큼이나 많이 존재한다.
  • 시장의 우상: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발생하는 오류다. 특히 소통의 수단인 언어가 이 오류들을 야기한다. 한갓 말이 개념이나 사물 역할을 하는 경우가 흔하다.
  • 극장의 우상: 과거 유명한 철학자들의 주장을 의심하지 않고 믿기 때문에 발생하는 오류다. 당시 숭배의 대상이었던 아리스토텔레스를 베이컨은 멀리했다.

네 가지 우상에서 벗어나면 편견이나 오류를 피할 수 있다. 하지만 편견이나 오류를 피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적극적인 자세로 올바른 학문 방법을 찾아야 한다. 베이컨은 최초로 '가설 제시 - 검증 - 이론화' 단계를 거치는 실험 방법을 제시한다. 베이컨 이전에는 이런 방법으로 학문을 하지 않았다. 그저 머릿속으로 생각해 주장하거나 몇 가지 사실을 통해 주장할 뿐이었다. 근대 자연과학의 실험방법론을 구상했다는 점에서 베이컨은 큰 업적을 남겼다.

제2장 바로크 시대의 3대 체계

르네상스를 거치면서 이미 '이성'이 승승장구했고, 수학이 중요해졌다. 이 시대 철학은 수학과 분리할 수 없다. 실제로 당대 최고의 철학자 데카르트, 라이프니츠, 파스칼은 모두 수학자였다. 이 시대 철학에는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 수학적 인식 도입, 확실하고 보편타당한 인식 방법을 발견하려는 노력, 이성의 지배 등이다.

I. 데카르트 - 유신론적 심신 이원론자,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르네 데카르트

1. 생애와 저작

데카르트는 1596년 프랑스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은둔하며 학문에 매진하기도 하고, 적극적으로 외부 활동을 하기도 하며 번갈아 가며 생활을 했다. 파리 사교계에서 생활하다가 2년간 친한 친구들도 모르게 숨어 수학에만 몰두했다. 이어서 30년 전쟁에 참전했으며, 군복무를 마치고 유럽 각지를 여행하면서 다시 은둔 생활을 했다. 데카르트는 20년 가까이 고향인 프랑스를 떠나 네덜란드에서 생활했다. 프랑스를 떠난 이유는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서다. 20년 동안 네덜란드에서 가장 생산적인 시기를 보냈다. 그는 대부분 책을 이 시기에 썼다.

2. 기본 사상

데카르트 사상의 기본 주제는 중세 철학과 마찬가지로 신과 영혼이다. 하지만 신과 영혼을 다루는 방식이 중세 철학과 크게 달랐다. 데카르트는 신과 영혼을 이성과 논리로 다룬다. 왜냐하면 그의 목표는 철학을 수학의 엄밀함에 기반해 연역 방식으로 도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데카르트는 '우리는 어떻게 확실한 인식에 다다를 수 있는가?'에 대해 생각했다. '완벽히 확실한 것은 무엇인가?'를 따져보려면 먼저 그 무엇도 확실하지 않다고 생각해야 한다. 모든 걸 의심하는 것이다. 과거 이론, 경험으로 터득한 지식과 지혜, 지각하는 모든 것을 의심해야 한다. 지각이 거짓말을 할 수도 있고, 누군가가 내 정신을 조작해 거짓을 참으로 받아들이게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데카르트의 철학은 모든 걸 철저히 의심하는 데에서 시작한다. 모든 걸 의심하더라도 단 한 가지 의심할 수 없는 게 남는다. 바로 내가 지금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생각하고 있다는 단순한 사실이다. 내 모든 생각이 오류일 수 있지만 내가 생각한다는 사실만은 확실하다. 생각하는 존재로서 내가 있다는 점은 의심할 수 없다. 이를 바탕으로 데카르트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명제를 생각해낸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cogito ergo sum)"

데카르트의 철학은 이 명제에서 출발한다. 다른 모든 것은 거짓이라 생각할지라도 이 명제만큼은 사실이다. 이 명제에서 시작해 차근차근 진리를 넓혀 간다. 연역의 방법으로 말이다. 이 명제만큼 확실한 무언가를 찾아낸다면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 데카르트는 다음 단계로 '신'을 생각한다. 데카르트에 따르면, 신은 무한하고 전지전능한 존재다. 그러나 나는 불완전하고 유한한 존재다. 불완전하고 유한한 존재가 완전하고 무한한 존재를 생각해 낼 수는 없다. 불완전한 존재가 완전한 존재를 떠올릴 수 있는 건 완전한 존재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은 존재한다. 이렇게 해서 데카르트는 신이 존재한다는 명제를 끌어냈다. 하지만 이 연역 방식에는 모순이 있다. 데카르트는 지각으로 인식한 외부 세계를 모두 의심하기로 했다. 그런데 외부에 존재하는 신을 아무런 의심 없이 끌어들였다.

어쨌든 데카르트는 합리주의 철학의 대표 인물이다. 데카르트에 따르면, 경험은 불명확해서 가치가 없다. 오로지 이성만이 명백하고 합리적인 인식을 할 수 있다. 데카르트는 정신과 육체가 떨어져 있다고 믿었다. 육체가 없어져도 정신은 살아있다고 보았다. 그런데 우리는 밥을 먹겠다고 생각하면 손으로 밥 숟가락을 든다. 정신과 육체가 분리돼 있다면 이게 어떻게 가능한가? 이에 대해 데카르트는 명확한 답변을 하지 못했다. 단지 우리 몸 안에 정신과 육체를 연결하는 '송과선'이라는 기관이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역시 받아들이기 어려운 주장이다.

또한, 데카르트의 관점에서 육체는 기계에 불과하다. 아니 생명체 전체가 하나의 기계다. 물론 인간은 정신과 기계(육체)가 합쳐진 존재다. 정신은 인간에게만 있기 때문에 동물은 순수한 기계라고 밖에 할 수 없다. 데카르트 주장에 따르면, 학대를 받은 개가 낑낑 우는 건 건반이 눌린 오르간과 다를 게 없다. 개에는 정신(영혼)이 없기 때문이다. 아마 종교 때문에 영혼이 사람에게만 있다고 믿었을 수도 있다. 그의 철학은 천재적인 출발점에 비해 모순이 다소 많다.

II. 스피노자 - 렌즈공으로 생계를 이어간 무신론적 일원론자

스피노자

1. 생애

스피노자는 1632년 네덜란드 암스트레담에서 태어났다. 그는 포르투갈계 유대인이었다. 어려서부터 스피노자는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 아버지는 그를 유대교 지도자인 랍비로 키울 생각이었다. 소년 시절 스피노자는 성경과 탈무드, 중세 유대 철학, 중세 스콜라 철학, 그리스 철학, 브루노와 데카르트 철학을 공부했다. 이렇게 다양한 학문을 공부해서 그런지 스피노자는 유대 신도들에게 배척을 받았다. 24살 때 이단으로 고발당해 유대 교단에서 제명됐다. 이후 스피노자는 철저히 고립 생활을 했다. 덕분에 자유롭게 살았다. 스피노자는 네덜란드 여러 도시를 돌아다니며 은둔자로 검소하게 살았다. 1673년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철학 교수직을 제안받지만 거절했다. 그는 렌즈공을 하면서 생계를 꾸려나갔다. 렌즈공을 하느라 유리 가루를 많이 마셔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44세였다.

2. 저작

스피노자는 예수를 신의 아들이 아니라 모든 인간 중 가장 위대하고 고귀한 자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생각하면 구세주의 가르침을 유대인과 기독교인만이 누릴 수 있는 게 아니라 모든 사람이 누릴 수 있다.

스피노자의 주저는 <에티카>다. 그는 이 책을 죽기 직전까지 밀봉한 채로 서랍 속에 보관했다. 자신이 세상을 뜬 후 원고가 없어질지 모른다는 불안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스피노자가 죽은 후 친구들은 <에티카>를 출판했고, 세상에 큰 영향을 줬다. <에티카>는 기하학 원리를 바탕으로 철학 체계를 설명하는 책이다. 공리, 정리, 명제, 증명, 추론 등으로 서술되어 있다. 그래서 상당히 읽기 어렵다. 수학의 엄밀함으로 철학 체계를 설명한 건 이미 데카르트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었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실체는 영원하고 무한하며 자기 자신에게서 비롯된다. 그리고 실체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 결국 이런 실체는 신의 개념과 일치한다. 결국 스피노자의 사상에서 '실체는 곧 자연이고, 이는 곧 신'이다.

실체 = 자연 = 신

만물이 곧 신이라는 말이다.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와 다르게 영혼과 육체가 나눠져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 데카르트는 심신 이원론을 주장했지만 스피노자는 일원론을 주장했다. 데카르트는 정신과 육체는 분리돼 있지만 생각하는 대로 행동하는 이유는 우리 몸 안에 송과선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우리 자신이 곧 신의 속성이기 때문에 생각하는대로 행동한다고 보았다.

스피노자는 감성이나 본능을 신뢰하지 않는다. 반면 그는 명료한 인식과 절대 확실성을 보장하는 이성을 믿는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오직 이성을 통해서만 높은 수준의 자유에 도달하며, 수동성에서 점점 더 해방된다.

III. 라이프니츠 - 체계적이진 않지만 박학다식한 모나드론 주의자

라이프니츠

1. 생애와 저작

라이프니츠는 1646년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났다. 1618년부터 1648년까지 30년 전쟁(신교를 지지하는 국가들과 구교를 지지하는 국가들 사이에서 벌어진 전쟁)이 발발했는데, 당시 독일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독일은 정신적으로도 황폐해졌다. 이 상황에서 라이프니츠는 독일 철학을 힘차게 비약시켰다. 라이프니츠는 거의 모든 학문을 섭렵하며 탁월한 업적을 남겼다. 라이프니츠는 15세에 대학에 들어가, 17세에 졸업했으며, 20세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데카르트와 스피노자를 연구했다. 스피노자와는 실제로 만났다고 한다. 또한, 미분법도 창시했다.

이후 라이프니츠는 역사학자로 활동했다. 장기간 문헌을 연구한 끝에 방대한 역사책을 썼다. 동시에 수학과 철학 연구도 했다. 하지만 라이프니츠는 관심사가 너무 많아서 시작한 일에 끝을 보지 못한 경우가 자주 있었다. 그는 한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문서실을 뒤지면서 낡은 문헌들을 꺼내 읽고 인쇄되지 않은 증명서들을 수집합니다. 또 나는 수많은 편지를 읽고 답장도 써야 합니다. 게다가 나는 많은 수학 연구거리와 철학 분야의 새로운 생각 그리고 그 밖의 여러 문헌을 탐구해야 합니다. 그래서 나는 무엇부터 손대야 할지 모를 때가 많습니다."

라이프니츠는 굉장히 박학다식했다. 철학자이자 신학자, 외교관, 수학자, 역사가, 사서로서 중요한 업적을 남겼을 뿐 아니라 기술 분야에서도 공로가 많다. 가령 시계, 풍차, 수력압착기 등도 연구했다.

라이프니츠의 철학은 당시에 인정을 받지 못했다. 이유는 그의 철학 이론이 체계적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라이프니츠는 무수한 편지와 소논문 여기저기에서 자신의 철학 사상을 표현했다. 편지와 소논문들 중에는 수십 년이 지나서야 인쇄되어 세상에 알려진 게 적지 않다. 후대 연구자들은 라이프니츠의 단편적인 저술들을 종합하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어려운 과제다.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기도 하고, 철학 이론에 모순이 있기 때문이다.

2. 라이프니츠 철학의 기본 사상

모나드론

라이프니츠는 세상이 모나드(monad)로 이루어져 있다고 믿었다. 모나드는 여러 해석이 있겠지만, 쉽게 말해 힘 또는 에너지라고 보면 된다. 모나드는 네 가지 특징이 있다.

  1. 모나드는 점이다. 기하학에서 점은 공간을 차지하지 않는다. 따라서 모나드도 공간을 차지하지 않는다.
  2. 모나드는 힘 내지 힘의 중심체다. 라이프니츠에 의하면, 물체는 수많은 모나드(힘의 중심체)로 이루어진 복합체다.
  3. 모나드는 영혼이다. 모나드는 각기 정도 차이는 있지만 영혼을 가지고 있다. 가장 낮은 단계의 모나드는 꿈을 꾸는 상태에서 존재한다. 인간의 영혼처럼 조금 더 높은 단계에 있는 모나드는 의식을 가지고 있다. 가장 높은 단계의 모나드인 신은 무한한 의식과 전지전능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
  4. 모나드는 개체다. 똑같은 두 개의 모나드는 존재하지 않는다. 최상위 신적 모나드에서 최하위 단순한 모나드까지 다양하다. 각 모나드는 고유한 방식으로 우주를 구성한다. 모나드는 외부와 단절돼 있다는 점에서도 개체라는 특성이 있다. 모나드에는 '창문이 없다.' 모나드끼리 서로 상호작용을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예정조화설

라이프니츠는 예정조화설을 주장했다. 예정조화설은 말 그대로 조화가 예정되어 있다는 뜻이다. 데카르트에 따르면 실체는 사유(정신)와 연장(물질)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유와 연장은 서로 분리돼 있어 상호 작용할 수 없다. 데카르트는 이를 설명하려고 송과선이라는 억지 주장을 했다. 라이프니츠는 이 견해에 반대했다. 라이프니츠는 실체는 무수히 많은 모나드로 구성돼 있다고 말했다.

라이프니츠는 시계의 비유를 들어 모나드론을 설명한다. 서로 다른 두 시계가 있다고 하자. 두 시계는 시곗바늘이 정확히 일치하게 움직인다. 시계바늘이 일치하는 이유를 세 가지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다. 먼저 데카르트 이론을 적용하면, 두 시계가 장치로 연결돼 있어서 일치한다. 연결 장치는 바로 송과선인 것이다. 두 번째로 스피노자의 이론을 적용하면, 두 시계를 조절하는 감독자가 있다고 설명할 수 있다. 이 감독자가 바로 신이다. 마지막으로 라이프니츠의 이론을 적용하면, 두 시계는 아주 정교하게 제작되어 차이가 생길 수 없다. 이미 예정돼 있는 것이다.

정리하면 정신과 육체가 연결된 이유를 시계에 비유해 각 철학자마다 이렇게 설명한다.

  • 데카르트: 이원론이지만 송과선으로 설명
  • 스피노자: 범신론으로 설명
  • 라이프니츠: 모나드론, 예정조화설로 설명

데카르트는 실체를 두 가지로 봤다. 사유(정신)와 연장(물질)이다. 사유와 정신은 서로 관계를 맺을 수 없다. 하지만 사유와 정신이 어떻게 연관돼 있는지 설명하려고 송과선을 끌어들였다. 스피노자에게는 서로 다른 두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실체는 오직 하나다. 실체는 곧 신이자 자연 전체다. 범신론을 주장했다. 신은 사유의 속성도 있고 연장의 속성도 있다. 따라서 사유와 속성을 나눌 필요가 없다. 하지만 라이프니츠는 데카르트와 스피노자의 견해에 반대한다. 라이프니츠는 신이 세계 너머 저 위에 존재한다고 믿었다. 유신론적인 입장이다. 그는 세계는 모나드로 구성돼 있어서 모든 결과는 이미 예정되어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라이프니츠에 따르면, 시곗바늘이 서로 정확히 일치하는 이유도 이미 예정돼 있기 때문이다.

라이프니츠는 이미 모든 게 예정돼 있다고 믿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는 신의 구원도 필요 없다. 모나드란 애초부터 신이 완벽하게 창조한 실체다. 따라서 결과는 이미 결정되어 있다. 굳이 기도를 하고 행실을 가다듬어 구원을 받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신이 추가로 개입하지 않아도, 즉 구원을 하지 않아도 결과는 똑같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 라이프니츠의 철학은 체계적이지 않다. 라이프니츠가 죽은 뒤 크리스티안 볼프라는 철학자가 그의 사상을 정리했다. 그리하여 '라이프니츠-볼프' 철학은 칸트가 등장하기 전까지 독일 철학을 주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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