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퉁이 서재
[헬런 짐먼] 쇼펜하우어 평전 본문
철학 사상과 관계없이 일생이 궁금한 철학자가 딱 두 명 있다. 쇼펜하우어와 비트겐슈타인. 전형적인 괴짜 천재였기 때문이다. 둘에게는 공통점이 여럿 있다. 엄청나게 독창적인 생각을 했다는 점, 그러면서도 어딘가 부족해 보인다는 점, 타고난 아웃사이더였다는 점, 우울한 나날을 보냈다는 점, 동시에 스스로에겐 만족스러운 삶을 살았다는 점이다.
그 이유로 두 철학자의 평전을 읽고 싶었다. 공교롭게 쇼펜하우어 평전과 비트겐슈타인 평전은 국내에 딱 한 권씩 출간되어 있다. 비트겐슈타인 평전엔 선뜻 손이 안 간다. 900쪽이라는 분량 압박과 비트겐슈타인 철학의 난해함 때문에. 삶은 궁금한데 그의 철학엔 별로 흥미가 없다. 비트겐슈타인의 분석철학이 어렵기도 하거니와 다른 철학과 다르게 나에겐 재미가 없다. 어려워서 재미없는 것일 수도 있겠다. 반면, 쇼펜하우어 철학엔 흥미가 있다. 쇼펜하우어-니체-키르케고르-샤르트르로 이어지는 생철학, 실존철학을 좋아해서 그렇다.
<쇼펜하우어 평전>은 작가이자 여성참정권 운동가인 헬런 짐먼이 1876년에 쓴 책이다. 국내에 쇼펜하우어 평전이라곤 150년 전에 쓰인 이 책 하나뿐이라는 게 희안하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큰 기대 없이 읽었는데 웬걸, 제법 재밌었다. 삶과 사상 가운데 '삶'에 더 초점을 둔 책이다. 내가 딱 원하던 내용이다. 쓸데없는 정리벽이 도져 책 전체를 요약해봤다.
제1장 출생과 성장
쇼펜하우어가 태어난 집은 많은 변화를 겪었어도 여전히 건재하다. 그 집은 현재 폴란드의 항구 도시인 그단스크에 있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의 부모인 하인리히, 요한나는 여행을 많이 다녔다. 매번 아르투어를 데리고 다녔다. 상인이 되라는 아버지의 권유로 온 가족과 함께 유럽 여행을 한 것이다. 이 여행은 상인이 되기 싫어하는 쇼펜하우어를 달래기 위한 것이었다. 상인인 아버지 하인리히는 아르투어를 상인으로 키우고 싶어 대학에 보내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아르투어는 철학에 관심이 많아 상인이 되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는 기만 전술로 아르투어를 꼬드겼고, 결국 아르투어는 아버지 말에 따라 철학을 포기해야만 했다.
훗날 아버지는 실족해 익사하고 말았다. 하지만 막대한 투자 손실액을 감당하지 못해서 자살했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어쨌든 아르투어는 아버지를 계속 존경했다. 상인을 향한 아르투어의 다음 글도 아버지를 존경하는 그의 마음을 확인하게 해준다.
상인들은 유일하게 정직한 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상인들은 돈벌이를 추구한다고 공개적으로 인정하는 반면에 다른 사람들은 똑같이 돈벌이를 추구하면서도 마치 이상적인 직업처럼 보이도록 포장하는 위선자들이기 때문이다.
제2장 학창시절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르투어는 어머니와 사이가 멀어진다. 어머니 요한나 쇼펜하우어는 낙천적이고 유쾌한 성격이었다. 아르투어는 이런 어머니의 성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반면 어머니도 아들 아르투어의 침울하고 고독한 성격을 이해하지 못했다.
결국 요한나는 아들을 두고 딸과 함께 다른 도시로 떠났다. 그곳에서 여러 사교 모임에 참여하며 제2의 인생을 산다. 아르투어는 상업에 종사하면서 무미건조한 삶을 살았다. 그럴수록 더욱 침울하고 우울해져 갔다. 억누르지 못할 충동에 휘둘린 듯 사무실에 사표를 내던지고 함부르크를 떠났다. 그리고는 1807년 독일의 국립 중등학교인 김나지움에 입학한다. 김나지움에서 공부하면서도 개인교습으로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배웠다. 배우는 속도가 너무 빨라서 선생님들은 그가 뛰어난 고전학자가 되리라고 생각했다. 그즈음부터 쇼펜하우어는 고대 언어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고대인들의 언어를 친숙하게 여기는 정신이 자취를 감추는 시대가 오면 야만성, 비속함, 진부함이 모든 문학을 잠식해버릴 것이다. 왜냐면 고대인들의 업적은 모든 예술적이고 문학적인 노력을 인도하는 북극성이기 때문이다.
김나지움에서 학습하며 쇼펜하우어는 인생을 새롭게 보는 흥미가 생겼다. 그러면서도 사교모임에 드나들기도 하고, 돈을 펑펑 쓰기도 했다. 하지만 6개월 만에 김나지움을 자퇴했다. 슐체라는 교사와 마찰이 있었기 때문이다.
1809년 스물한 살이 된 쇼펜하우어는 괴팅겐 대학교 의학과에 입학한다. 그의 엄청난 학습 에너지는 결코 줄어들지 않았다. 1학년 대 헌법역사학, 박물학, 광물학, 물리학, 식물학, 십자군역사 강의를 들었다. 2학년 겨울학기부터 철학 강의를 수강했다. 플라톤, 칸트, 아리스토텔레스, 스피노자를 공부하며, 틈틈이 천문학, 기상학, 생리학, 민족학, 법학 강의도 들었다. 엄청난 학습욕이다. 거의 대부분의 학문을 섭렵했다. 쇼펜하우어는 언제나 강의 내용을 필기첩에 기록했다. 강의 내용뿐 아니라 비평도 함께 기록했다. 필기첩에는 학습과 연구에 관한 기록을 제외하면 사생활에 관한 기록은 드물다.
쇼펜하우어는 괴팅겐을 떠나기 전에 철학 쪽으로 기울어진 자신의 관심을 완연하게 자각했다. 그는 비록 열광적인 감수성을 지녔어도 침착하게 분석적인 판단을 마칠 때까지 그런 감수성을 발휘한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그가 괴팅겐 시절에 쓴 필기첩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철학은 알프스의 산길이고, 그 가파른 산길에는 돌멩이들과 가시나무들이 가득하다. 그 산길을 더 높이 올라가는 사람일수록 더 고독해지고 더 쓸쓸해진다. 그러나 그 산길을 오르는 사람은 두려움을 일절 몰라야 한다. 그는 모든 것을 자신의 뒤에 남겨두고 떠나야 한다. 그 산길은 이따금 천 길 벼랑 가장자리로 이어질 것이고, 그는 그 벼랑길 아래 도사린 짙푸른 계곡을 내려다볼 수도 있을 것이다. 아찔한 현기증은 그를 압도하고 걸음을 돌려 산길을 다시 내려가라고 그를 윽박지르겠지만, 그는 현기증을 거부하고 억눌러야 한다. 그러면 얼마 지나지 않아 세계가 그의 발아래 아득하게 펼쳐지고 세계의 황무지들과 수렁들은 그의 시야에서 사라지며 세계의 요철들은 평평해지고 세계의 불협화음들은 잠잠해지며 세계의 구면은 확연해진다.
1811년 괴팅겐 대학교를 떠나 베를린 대학교로 전학한 쇼펜하우어는 다시 다양한 과목을 수강하면서 정력적으로 공부했다. 맹목적으로 수강하지 않았다. 교수들의 주장을 정확하고 명료한 언어로, 그리고 이다금 세련되게 비판하기보다는 오히려 매우 신랄하게 비꼬는 식으로, 서슴없이 논박한다. 그렇게 강렬하게 표현하는 습관은 나이가 들수록 점점 더 심해졌다.
쇼펜하우어가 베를린 대학교로 간 이유는 피히테의 명성 때문이었다. 피히테의 강의에서 철학의 핵심을 발견하리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금세 실망을 한다. 쇼펜하우어의 필기첩에는 피히테를 비판하는 글로 가득하다. 쉽게 말할 수 있는 내용도 굳이 모호하고 어렵게 말한다는 이유에서였다. 피히테를 "대중 앞에서 웅변을 토해내며 진지한 표정으로 심오한 사상가인 척하는 사기꾼" 정도로 평가했다.
쇼펜하우어가 좋아한 교수는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볼프였다. 그들은 서로를 스승과 제자로 존중했다.
제3장 발전하는 정신
괴테처럼 쇼펜하우어도 정치에 관심이 없었다. 쇼펜하우어는 국가 대사건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공부에만 열중했다. 전투를 하며 나라가 불안한 정세에서도 자신의 학위논문을 구상하는 데 몰두했다. 천재는 자아 수양을 우선시하기 마련이다. 그는 자신을 방해하는 요소를 증오했다. 그래서 나폴레옹이 몰아오던 전란의 소용돌이가 베를린으로 접근하던 1813년에는 루돌슈타트라는 자그마한 소도시로 피난했다. 루돌슈타트의 여관에서 박사학위논문을 구상하고 집필하는 데만 조용히 열중했다.
마침내 박사학위논문인 <충족 이유율의 네 겹의 뿌리에 관하여>를 완성한다. 이 논물을 예나 대학교에 제출해 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당시 대학교는 철학 박사학위를 남발하다시피 했다고 한다. 쇼펜하우어는 이 논문에서 '인과 법칙의 근거는 네 겹의 근거 속에서 관찰되는 단일하고 필연적인 진리일 수 있다'는 주장을 증명한다. 이런 네 겹의 근거는 각각 '현상들 또는 감각적 인식대상들', '이성 또는 합리적 인식대상들', '공간 및 시간의 범주에 속하는 존재', '의지'이다.
1813년 11월 바이마르로 간 뒤, 책으로 나온 자신의 박사학위논문을 어머니에게 보냈다. 어머니의 반응은 냉담했다.
"네 겹 뿌리라니. 약제사들을 위한 책인가 보구나."
그러자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받아쳤다.
"어머니 책을 헌책방에서 구할 수 없을 때에도 제 책은 읽힐 겁니다."
어머니는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그때에도 너의 책은 팔리지 않을 거야"라고 응수했다.
두 사람의 예언은 적중했다. 쇼펜하우어가 쓴 박사학위논문 초판본은 대부분 폐기된 반면 어머니의 책은 잘 팔렸다. 이후 수년간 쇼펜하우어를 가장 짜증나게 하는 질문은 "당신이 그 유명한 요한나 쇼펜하우어의 아들입니까?"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그녀는 잊혔다. 끝내 두 사람은 서로를 증오하는 마음만 품은 채로 헤어지고 말았다.
쇼펜하우어는 1813년 겨울 어머니의 살롱에서 괴테를 만났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매료되었고, 서로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어느 날 연회에 참석한 쇼펜하우어는 구석에 숨어서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몇몇 사람들이 쇼펜하우어를 놀려대며 쑥덕였다. 그때 괴테가 다가가서 이렇게 타일렀다.
"이 녀석들아. 저 청년을 평화롭게 그냥 놔둬. 그러면 저 청년은 우리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성장할 거니까."
괴테는 <충족 이유율의 네 겹의 뿌리에 관하여>의 가치를 인정했다. 당시 괴테는 색채론을 연구하고 있었다. 이미 괴테는 시인으로써는 충분히 존경받는 사람이었지만, 과학계에서는 인정받지 못했다. 과학계에서는 아마추어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청년 쇼펜하우어의 독창성을 알게 된 괴테는 자신보다 마흔 살이나 어린 청년에게 자신의 색채론을 소개했다. 그리고는 쇼펜하우어에게 색채론을 연구해보라고 제안했다. 괴테의 제안을 받자 의기양양해진 쇼펜하우어는 기대에 부응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쇼펜하우어는 대담하게도 추가 연구를 반대하면서 괴테의 훈육을 거부했다.
괴테는 쇼펜하우어의 천재성을 호평했지만 인간으로서는 썩 편하게 대하지 못했다. 쇼펜하우어가 가진 까다롭고 침울한 성격 때문이다. 괴테가 쇼펜하우어와 헤어질 즈음 쇼펜하우어 사진첩에 이렇게 썼다.
"그대가 인생을 즐기려면, 세계에 가치를 부여해야 하리라."
쇼펜하우어는 이 글귀 옆에 "사람들을 바꾸기보다 그대로 내버려 두는 편이 더 낫다."는 문구를 인용하고는 "위대한 자아보다 더 풍요로운 것은 없다."는 글을 덧붙여 썼다. 당돌하다.
또한, 쇼펜하우어는 괴테가 10년 동안 관직에서 일한 점을 비판했다. 괴테가 가진 외향적인 과시욕이 괴테 최전성기와 뛰어난 역량을 헛되이 낭비시켰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의문이 들긴 한다. 만약 쇼펜하우어가 괴테 입장이었다면 단호하게 관직을 포기할 수 있었을까?
다른 한편, 동양학자 프리드리히 마여도 쇼펜하우어의 바이마르 생활을 흥미롭게 만드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1813년 12월에 마여는 인디아에 관한 지식을 쇼펜하우어에게 소개했다. 그 결과 쇼펜하우어가 불교에 심취했고, 이후 그가 쓴 모든 글에서 불교정신이 발견된다.
쇼펜하우어는 바이마르에서 여러 일을 겪으면서 차츰 괴로워지고 삶이 무익해졌다. 그리하여 1814년 봄에 드레스덴으로 거처를 옮긴다.
제4장 드레스덴 생활
드레스덴으로 온 쇼펜하우어의 내면에는 천재성이 들끓었다. 스스로가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고 생각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쓴다.
자아와 완벽히 일치하기를 바라는 철학자 대다수의 욕망을 실현될 수 없는 것이며 자기모순 같은 것이다. 그가 거룩해지려면 일평생 관능을 줄기차게 파괴해야 한다. 그러나 그는 관능을 없앨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의 관능적 자아도 그와 함께 죽을 때까지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가 온갖 향락을 누리기로 결심했다면, 그는 '순결해지고 자유로워지며 거룩해지기를 바라는 존재'를 상대로 투쟁하듯이 그의 자아를 상대로 일평생 투쟁해야 한다. 인간은 끝없이 싸우는 능력들의 경기장으로 차츰 변한다. 인간은 승리자인 동시에 패배자라서 이기든 지든 상관없이 모든 경우에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이런 고통이야말로 삶의 조건이다.
또한, 자신이 평범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은 쇼펜하우어는 이렇게도 말한다.
천재성을 타고난 사람은 그냥 가만히 일하기만 해도 인류 전체를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는 것이다. 따라서 천재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지 않아도 된다. 이런 이유에서 천재는 다른 사람들이 반드시 이루려는 것을 무시해도 된다. 그래도 천재는 모든 타인이 겪는 것보다 더 많은 고통을 겪고 그들이 이루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이룬다.
쇼펜하우어는 생각과 연구에 열중할 시간이 필요했다. 다행히도 아버지에게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아 일을 하지 않아도 됐다. 그는 바라던 일에 완전히 몰입할 수 있었다.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한다.
설혹 그대가 속물이 되기를 바라더라도 그대는 속물이 될 수 없을뿐더러 기껏해야 반속물이나 실패자로 남을 것이므로 속물들의 전철을 결코 답습하지 말게나.
드레스덴으로 거처를 옮긴 쇼펜하우어는 먼저 괴테의 색채론을 변호하는 소논문을 쓴다. 그런 다음 자신만의 철학 체계를 가다듬기 시작한다. 아울러, 가끔 극장이나 미술관에 갔다. 미술관에서는 그림 앞에서 몇 시간이고 앉아있기도 했다. 또한, 드레스덴 근교에 있는 시골 풍경에도 매혹되었다. 그는 자연을 사랑했고 자연과 교감하면서 영감을 얻었다.
쇼펜하우어가 사색을 즐긴 또 다른 장소는 궁전의 대형 온실이었다. 어느 날 온실 안에서 식물들 앞을 서성이며 큰 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이 식물들은 언제부터 이토록 다채로워졌을까? 이 관목들의 진기한 형태는 나에게 무엇을 계시하는가? 이 잎과 꽃에서 발현되는 '의지'라는 '내면적이고 주관적 존재'는 무엇인가?
그는 이런 의문을 속으로 삭이지 못하고 과격한 몸짓과 함께 큰 소리로 발설할 수밖에 없었다. 이 광경을 바라보던 온실 관리인은 그가 미치광이가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쇼펜하우어의 비관주의는 점점 심해졌다. 우편배달부가 배달해주는 편지를 받을 때마다 불안해했다. 또한, 자다가 작은 소리만 들어도 벌떡 일어나서 머리맡에 둔 권총을 집어 들었다고 한다. 그는 이발사에게 면도를 맡기지도 않았다. 이런 과민불안증은 그를 몹시도 괴롭혔다.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고질병이었다.
쇼펜하우어는 드레스덴에서 4년간(1814년~1818년) 살았지만 드레스덴의 일상생활에 관해서는 거의 알려진 게 없다. 이런 여건 속에서 쇼펜하우어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천천히 그리고 꾸준하게 썼다. 이 책에는 그의 철학 체계가 완전하게 담겼다.
제5장 쇼펜하우어 대표 저서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쇼펜하우어는 그의 대표 저서인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1818년 3월에 완성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조르다노 브루노, 스피노자, 셸링의 가르침을 이어받은 우리 시대는 '모든 것은 결국 하나'라는 사실을 완전하게 이해했다. 그러나 이런 '통일성의 본성'과 '통일성이 다원성으로서 드러나는 근본 이유'를 처음으로 설명한 사람은 바로 나(쇼펜하우어)다.
쇼펜하우어는 이 근본 이유를 '의지'라고 봤다. 그에 따르면, 현상 세계의 존재는 '외형으로 나타나려고 열망하는 영원한 의지(모든 존재의 실체)의 결과'다. 이런 의지가 곧 '삶 의지'이다. 존 옥스퍼드는 쇼펜하우어의 원칙을 이렇게 표현한다.
"세계자체는 삶으로 줄기차게 난입하는 하나의 막대한 의지이다"
의지는 살아 있는 생명체에만 있는 게 아니다. 무생물에게도 존재한다. 따라서 의지는 우리의 핵심이자 만물의 핵심이므로, 우리는 의지를 최고 권좌에 앉혀야 한다. 이전까지 많은 철학자는 지성을 더 높게 평가했다. 하지만 쇼펜하우어에 의하면, 의지만이 인간의 본질이고, 지성은 의지의 수많은 기능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제6장 이탈리아 여행
쇼펜하우어는 <의자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완성한 뒤, 이탈리아로 떠났다. 그가 이탈리아에서 어떻게 여행했는지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그가 내향적이기도 하고, 일절 기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어는 이탈리아를 여행하며 내심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가 받을 찬사를 기대했다. 그의 박사 논문인 <충족 이유율의 네 겹의 뿌리에 관하여>도 좋은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1818년 11월 이탈리아 북부에서 그는 필기첩에 이렇게 썼다. 행복에 관한 그의 의견이다.
모든 행복은 부정적인 것들이기 마련이다. 그래서 우리는 마침내 행복한 상황에 도달하더라도 그런 상황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고 우리 눈앞에서 쉽게 슬그머니 스쳐 지나가는 모든 것을 놓치는 바람에 상황이 끝나는 경우가 있다. 그런 경우에만 우리에게 선연히 느껴지는 상실감은 사라진 행복을 뚜렷하게 떠오르게 한다. 그리고 오직 그런 경우에만 우리는 놓친 것들을 알아차리고 우리의 후회는 상실감과 합쳐진다.
편집을 거쳐 1818년 12월에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가 드디어 출간되었다. 쇼펜하우어는 이 저서 한 부를 괴테에게 보냈다. 괴테는 책이 훌륭하다고 평가를 했다. 그러면서 이 책 덕분에 1년 내내 즐거울 거라고 답했다. 그렇지만 쇼펜하우어는 괴테를 비판했다. 괴테가 자신의 책을 충분히 주의해서 읽지도 않았고, 철학에 관심도 없는 늙은 시인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 와중 금융회사가 파산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쇼펜하우어는 다급하게 독일로 돌아왔다. 그가 빠르게 대응해서 재산 대부분을 지킬 수 있었다. 반면 쇼펜하우어의 어머니는 그녀가 투자한 회사가 결국 파산하자 거의 무일푼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 사건을 통해 쇼펜하우어가 어수룩하고 비현실적인 철학자가 결코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상인이던 아버지의 자질을 물려받았기 때문이다.
제7장 불만스러운 시절
비록 대부분의 재산을 지켰지만 금융회사가 파산했다는 사실은 쇼펜하우어에게 충격을 줬다. 그 충격은 타고난 공포심과 합쳐져 그의 정신에 큰 영향을 끼쳤다. 결국 언제 다시 겪을지 모르는 재난을 피하려고 안정된 직업을 찾기로 한다. 1819년 12월 베를린 대학교에서 무급강사(정식 교수가 아닌 무급으로 일하는 강사직)로 일을 시작했다. 특히 그는 강의시간을 같은 대학교 철학 교수이던 헤겔의 강의시간과 같은 시간대에 배정해 달라고 대학교에 요청하기도 했다. 그만큼 헤겔을 싫어하기도 했고, 자신이 있었던 것이다. 더불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가 점차 알려지면서 자신의 명성도 높아질 거라 예상했다. 물론 예상은 빗나갔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 관한 서평은 거의 발표되지 않았다. 아주 드물게 호평이 있을 뿐이었다. 독일 작가 장 파울은 이 책에 관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
천재성, 심오함, 통찰력을 가득 머금었으되, 마치 노르웨이의 울퉁불퉁하고 황량한 바위 장벽에 둘러싸인 음울한 호수처럼, 때로는 햇빛마저 한 번 빠져들면 도무지 헤어날 수 없을 아득하게 깊은 심연을 품고 오직 밤하늘의 빛나는 별들만 반사할 뿐 새 한 마리 날아와 앉지 않은 듯이 잠잠하기 그지없는 표면을 겸비한, 대담무쌍하면서도 철학적 다재다능함마저 과시하는 저작.
그러나 2년간 무급 강사로 일하면서 쇼펜하우어는 인기를 얻지 못했다. 반면 같은 대학교에서 강의하던 헤겔을 엄청난 전성기를 누렸다. 쇼펜하우어는 끝까지 거만하고 당당했다. 자신의 철학을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들을 낮게 평가했다. 쇼펜하우어가 겸손하게 조금이라도 더 낮은 자세로 본인의 철학을 소개했다면 오히려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쇼펜하우어의 강의실은 점점 더 썰렁해졌고, 그럴수록 그는 점점 더 괴팍해지고 신랄해졌다.
결국 그는 베를린 대학을 떠나 이탈리아를 여행한다. 여행을 마치고 독일로 돌아온다. 우울한 나날을 보냈다. 그는 데이비드 흄의 책을 독일어로 번역하려고 한다. 데이비드 흄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다.
흄의 모든 저작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헤겔, 헤르바르트, 슐라여마허의 철학에서 배울 수 있는 모든 것보다도 더 많다
하지만 아쉽게 출판사를 찾지 못해 변역은 무산되었다.
그렇게 몇 년을 지냈다. 아무런 관심을 받지 못한 쇼펜하우어는 베를린을 떠나야겠다고 마음먹는다. 때마침 1831년 콜레라가 창궐했다. 그는 도망치듯 베를린을 떠났다. 어떤 전염병이든지 쇼펜하우어는 거의 미치도록 과민하기 때문이다. 여담이지만 헤겔은 콜레라로 죽었다. 쇼펜하우어는 깨끗하고 전염병 없는 도시인 프랑크프루트로 향했다. 그곳에서 여생을 보냈다.
쇼펜하우어는 베를린에서 인정받기를 원하던 시절에 느낀 감정을 필기첩에 절절하게 썼다.
나는 무시를 당해서 그랬는지 나 자신뿐 아니라 내가 그때까지 시도한 모든 노력마저 의심했으리라. 그러나 동시에 다행히도 나는 '완전히 무가치한 것, 명백하게 불량한 것, 전혀 무의미한 것이 탁월한 것이고 인간 지혜의 극치에 도달한 것'이라고 선포하는 운명의 나팔 소리를 들었다.
또한 이렇게 썼다.
타인들이 오르지 못하는 고지대에 고독하게 서 있는 인간은 고독을 바라지 않으면 타인들이 있는 저지대로 내려가야 한다.
제8장 프랑크푸르트 생활
프랑크푸르트에서 오직 연구에만 전념하며 은둔하다시피 살았다. 그래서였는지 '프랑크푸르트의 괴짜', '현대의 고행 수도사', '프랑크푸르트의 염인주의자'라는 별명을 얻었다. 결국엔 '현자'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그가 빠르게 산책하는 모습은 프랑크푸르트의 구경거리였다. '아트만'이라는 푸들을 데리고 자주 산책했다. 아트만이란 '세계영혼' 정도의 뜻을 갖는 말이다. <우파니샤드>에 나온 말인데, 쇼펜하우어는 <우파니샤드>를 즐겨 읽었다.
쇼펜하우어는 <우파니샤드>에 관해 이렇게 말한다.
이 고대 베다 해설서 한 페이지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칸트 이후에 활동한 철학자들의 저서 열 권에서 배울 수 있는 것보다 더 많다. <우파니샤드>를 읽는 경험은 이 세상에서 가장 유쾌하고 고귀한 경험이다. 이 책은 여태껏 내 삶을 편안하게 해주었고 내 죽음도 편안하게 해줄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책을 많이 읽지 않았다. 지나친 독서를 오히려 비판했다. 고전을 읽지 않은 채, 남는 것 없는 문학책만 읽는 사람을 신랄하게 비난했다. 심지어 어떤 주제를 깊게 생각하기 전에 그 주제를 다룬 책부터 읽으면 위험하다고 주장했다. 쇼펜하우어는 밑줄을 긋거나 메모를 하며 책을 천천히 읽었다. 또한, 한 번만 읽기보다는 두 번 이상 읽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책의 진수를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세네카 등 그리스 로마 철학자들의 책을 일평생 깊게 읽었다. 해설서, 편역서들은 당연히 싫어했다.
쇼펜하우어가 개인주의 성향을 가졌을 것 같지만 의외로 가난한 사람을 오랫동안 도왔다고 한다. 도덕심의 뿌리는 이웃사랑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어는 사람을 넘어 동물까지도 동정했다. 동물을 아끼고 동정해야 한다고 생각한 최초 독일인이다. 우리가 동물을 잡아먹을 수밖에 없다면 동물이 편안하게 죽도록 안락사할 것을 주장했다.
의외로 쇼펜하우어는 대화를 좋아했다. 말도 잘했다. 그와 대화하고 싶어 식사 자리에 찾아오는 사람도 많았다.
제9장 쇼펜하우어를 비추기 시작한 명성의 서광
1844년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개정판이 출간되었다. 그런데 사람들에게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엄청난 독창성과 심대함을 보여주는 책이 다시 출간되었지만, 언론의 관심을 끌지 못하고 만다.
그래도 쇼펜하우어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계속 가다듬었다. 비로소 재개정판(제3판) 출간을 준비했고, 쇼펜하우어의 진가를 알아본 몇몇 제자들이 그의 집을 찾기도 했다.
1850년 9월에 쇼펜하우어는 프라웬슈태트에게 보낸 편지에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지난 6년간 날마다 집필한 원고(<부록들과 보론들>)를 드디어 완성했어. 이제 홀가분해졌어!
지금은 <인생론>, <행복론>이라는 이름으로 출간되고 있는 바로 그 책이다. 쇼펜하우어는 프라웬슈태트에게 <부록들과 보론들>을 출간할 출판사를 찾아달라고 요청했다.
프라웬슈태트는 끈질기게 출판사를 물색한 결과 마침내 성공했다. 쇼펜하우어는 프라웬슈태트에게 진심으로 고마워하는 마음을 전했다. 프라웬슈태트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
자네야말로 정녕 진실한 벗이요. 우리에게도 우리 철학에도 모든 면에서 가장 크게 이바지하는 지대한 공로자라네.
쇼펜하우어는 출판사에게 이렇게 요청할 것을 당부했다. 책에 어떤 찬사나 추천사도 덧붙이지 말 것, 해설문도 달지 말 것을 말이다. 그는 추천사, 해설문을 극도로 싫어했다.
제10장 쇼펜하우어의 윤리학과 미학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사상과 불교사상이 일치한다고 생각한다. '불교가 신화의 굴레에서 벗어나 완벽한 자유를 누릴뿐더러 괴롭고 역겨운 속죄보다는 오히려 내면의 금욕을 통해 행복을 누리는 길마저 발견한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진정한 종교 정신은 모든 곳에서 같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쇼펜하우어는 기독교의 <신약> 정신이 자신의 사상과 같은 편이라고 강조한다.
쇼펜하우어는 동물세계에도 관심이 많았다. 동물세계에서는 삶의지가 불합리해보이기 때문이다.
곤충과 마찬가지로 새들도 저마다 먼데까지 지치도록 날아다니다가 짝을 만나 교미하고 둥지를 지어 알을 낳는다. 부화한 새끼에게 먹이를 물어다 주느라 거의 힘을 거의 다 소모하고, 그렇게 자란 새끼들도 지난해에 행한 어미의 활동을 고스란히 반복한다. 그러면 모든 동물의 활동은 미래로 투입되는 활동이라서 결국 '현재만큼 미래도 파산지경'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활동일 수밖에 없다. 모든 동물을 고찰하는 우리는 '이 모든 동물의 솜씨와 노고에 상응하는 보답'을 물색할 수밖에 없고, '이 동물이 그토록 근면한 노력으로 달성하려는 목적'을 찾아볼 수밖에 없으므로 다음과 같이 묻기 마련이다. 모든 동물의 목표는 무엇인가? 그토록 막대한 노력을 요구하는 이런 동물적 생존은 무엇을 얻는가? 이 의문은 단지 '각자의 영원한 욕구와 노력 사이에서 갈등하는 모든 동물 개체는 먹이활동으로 허기를 면해야 하고 종족을 번식해야 하면서도 기껏해야 자잘하고 덧없는 쾌락조차 가끔밖에 누리지 못할 운명을 짊어졌다'는 답변만 얻을 수 있을 따름이다. 만약 우리가 형언할 수 없는 준비 솜씨, 풍부한 수단, 달성하려는 목적의 무의미함을 비교해본다면, 우리는 '삶이란 순익을 거의 내지 못하는 사업'이라고 확신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인간의 의지(본능적 요소)가 지성보다 엄청나게 더 우세하다고 주장한다. 지성은 지쳐서 시들어도 의지는 지칠 줄 모르고 꿋꿋하다는 것이다. 그 이유로 무의미한 삶 속에서도 꿋꿋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가 가장 행복한 순간은 '우리가 의지의 격렬한 충동을 벗어나서 자유로워지는 순간들, 그러니까. 저속한 대지를 짓누르는 둔중한 분위기를 초월하여 가볍게 날아오르는 순간'이다. 여러 사투를 치른 뒤 마침내 자신의 본성을 정복한 사람만이 오직 순수하게 지성적인 존재(세계를 비추는 티 없이 깨끗한 거울)로서 남는다. 아무것도 그를 방해하지 못한다. 왜냐면 그는 '세계에 우리를 결박하고 도처에서 욕망, 공포, 질투, 분노로 우리를 끝없는 고통스럽게 만드는 의지의 수천 갈래 끈들'을 모조리 끊어버렸기 때문이다.
제11장 쇼펜하우어의 명성과 죽음
1851년 11월에 비로소 <부록들과 보론들>이 출판된다. 쇼펜하우어는 막내 자식을 바라보듯 기뻐했다.
이때쯤 쇼펜하우어는 어느 정도 유명해졌다. 어느 제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명성의 확산은 불이 번지는 것처럼 빠르다는 사실을 자네도 알겠지. 명성도 산술급수적으로 확산되지 않고 화재처럼 기하급수적으로 심지어 세제곱 비율로 확산된다는 말이네. 그리하여 나일 강물은 카이로에서 벌써 도달했어! 이제 대학교수들은 여차하면 물구나무서기도 마다하지 않겠지. 물론 헛수고들이겠지만.
쇼펜하우어는 원기왕성하게 건강하므로 장수하리라 확신했다. 1860년 8월 심각한 병에 걸렸지만 치료약도 먹지 않고, 병원에 가지도 않았다. 같은 해 9월 9일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이렇게 죽는군.
쇼펜하우어는 죽는다는 사실을 슬퍼하진 않았지만, 자신의 사상이 철학교수들에게 농락당하고 난도질당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몸서리치며 끔찍해했다.
1860년 9월 21일, 쇼펜하우어는 평소대로 냉수 스펀지 목욕을 하고 아침을 먹었다. 가사도우미는 환기를 하려고 창문을 열어놓고 집 밖으로 나갔다. 몇 분쯤 지나서 집 안으로 들어왔는데, 소파에 앉아 죽어있는 쇼펜하우어를 목격했다. 죽음은 쇼펜하우어를 조용하고 고통스럽지 않게 하늘로 데려갔다. 장례식을 찾는 사람은 기이하리만큼 적었다. 고독하게 살다가 고독하게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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