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퉁이 서재
[김정선] 내 문장이 그렇게 이상한가요? 본문
1년 반 전에 이미 본 책이긴 한데 글쓰기 기법을 한 번 더 점검하려고 읽었다. 글쓰기 책 대부분이 비슷한 얘기를 해서 더 읽으려 하진 않았지만, 그러면서 놓친 게 있진 않나 하는 마음에 또 읽어본다. 책이 얇기도 하고, 각설하며 바로 글쓰기 기법을 다루니 맘에 들었다. 휘휘 돌려서 서론을 길게 말하지 않고 바로 수업을 시작하는 강의 같았다.
저자 김정선 님은 30년 가까이 교정교열 일을 해온 분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문장을 다듬는 일에 무슨 법칙이나 원칙 같은 게 있는 것처럼 말할 수는 없다.
김정선 님은 어느 날 한 저자에게 "내 문장이 그렇게 이상한가요?"라는 메일을 받았다. 그는 답신을 보냈다.
모든 문장은 다 이상합니다. 모든 사람이 다 이상한 것처럼 말이죠. 제가 하는 일은 다만 그 이상한 문장들이 규칙적으로 일관되게 이상하도록 다듬는 것일 뿐, 그걸 정상으로 되돌리는 게 아닙니다. 만일 제가 이상한 문장을 정상으로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면, 저야말로 이상한 사람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글쓰기에는 '법칙'이 없다는 말이다. 누구나 인정하는 100% 정확하고 올바른 글은 세상에 없다는 뜻이다. 글쓰는 사람이 힘써야 할 건 일관된 글을 쓰는 일이다. '정도'에 아주 많이 벗어난 글을 피하는 일이다.
잊지 않기 위해 도움되는 내용을 정리했다.
1. 적·의를 보이는 것·들
-것과 -들은 되도록 쓰지 않는 게 좋다.
- 모든 아이들이 손에 꽃들을 들고 → 모든 아이가 손에 꽃을 들고
- 수많은 무리들이 → 수많은 무리가
관형사 '모든'으로 수식되는 명사에는 복수를 나타내는 접미사 '-들'을 붙이지 않는 것이 자연스럽다. '무리'나 '떼'처럼 이미 복수를 나타내는 명사도 마찬가지다.
- 상상하는 것은 즐거운 것이다 → 상상은 즐거운 것이다. (또는) 상상은 즐거운 일이다.
-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를 배려한다는 것이다. → 사랑이란 서로를 배려하는 것이다.
물론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를 배려한다는 것이다'라고 써도 문제는 없다. 일부러 '것은'과 '것이다'를 반복해 써서 강조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습관처럼 반복해서 쓰면 문장이 어색해진다.
한편 앞일을 예상하거나 다짐할 때도 유난히 '것'을 많이 쓴다. 이럴 땐 '것이라고'나 '것이라는'을 '-리라고' 또는 '-겠다고'로 바꾸어 쓰면 좀 더 부드러워진다.
- 내일은 분명히 갈 것이라고 믿었다. → 내일은 분명히 가리라고 믿었다.
- 쫓아오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 쫓아오는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2. 굳이 있다고 쓰지 않아도 어차피 있는
- 멸치는 바싹 말라 있는 상태였다. → 멸치는 바싹 마른 상태였다.
- 눈으로 덮여 있는 마을 → 눈으로 덮인 마을
- 그림을 그리고 있는 거리의 화가들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시민들 → 그림을 그리는 거리의 화가들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는 시민들
- 도시 끝에 자리 잡고 있는 거대한 기념비 → 도시 끝에 자리 잡은 거대한 기념비
술어에 별 의미 없는 '있었다'를 쓰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
- 길 끝으로 작은 숲이 이어지고 있었다. → 길 끝으로 작은 숲이 이어졌다.
- 회원들로부터 정기 모임 날짜를 당기라는 요청이 있었다. → 회원들이 정기 모임 날짜를 당기라고 요청했다.
'-에게 있어'도 안 쓰는 게 자연스럽다.
- 그에게 있어 가족은 목숨보다 더 중요했다. → 그에게 가족은 목숨보다 더 중요했다.
- 나에게 있어 봄은 모란에서 시작하고 끝났다. → 내게 봄은 모란에서 시작하고 끝났다.
'-하는 데 있어'나 '-함에 있어'도 마찬가지다.
- 살아가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 공부하는 데 있어 집중력만큼 중요한 것도 없다. → 공부하는 데 집중력만큼 중요한 것도 없다.
- 글을 씀에 있어서 → 글을 쓰는 데
- 자식을 교육함에 있어서도 → 자식을 교육하면서도(자식 교육에)
'-있음(함)에 틀림없다'는 '분명하다'로 쓰는 게 좋다.
- 그의 말은 자신이 일전에 언급한 내용과 관련이 있음에 틀림없다. → 그의 말은 자신이 일전에 언급한 내용과 관련이 있는 게 분명했다.
3. 지적으로 게을러 보이게 만드는 표현
-에 대한(대해)
맞선, 향한, 다룬, 위한 등의 표현들로 분명하게 뜻을 가려 써야 할 때까지 무조건 '대한'으로 뭉뚱그려 쓰면 글쓴이를 게을러 보이게 만들기도 한다.
- 그 문제에 대해 나도 책임이 있다. → 그 문제에 나도 책임이 있다.
- 사랑에 대한 배신 → 사랑을 저버리는 일 (또는) 사랑하는 사람을 배신하는 행위 (또는) 사랑에 등 돌리는 짓
- 노력에 대한 대가 → 노력에 걸맞는 대가 (또는) 노력에 합당한 대가 (또는) 노력에 상응하는 대가
- 종말에 대한 동경이 구원에 대한 희망을 능가했다. → 종말을 향한 동경이 구원을 바라는 희망을 능가했다.
- 성공에 대한 열망 → 성공을 향한 열망 (또는) 성공하고자 하는 열망
- 미래에 대한 투자 → 미래를 위한 투자 (또는) 미래에 대비한 투자
- 고문과 강제 연행에 대한 언론 보도 → 고문과 강제 연행을 다룬 언론 보도
-들 중 한 사람, -들 중(가운데) 하나, -들 중 어떤
산속에 굴을 파고 혼자 숨어 지내는 도인이 아니라면 누구나 무리 가운데 한 사람이다. 이 당연한 사실을 굳이 문장 안에 길게 늘어놓을 필요가 있을까.
- 그녀는 전형적인 독일 여자들 중 한 사람이었다. → 그녀는 전형적인 독일 여자였다.
- 회의에서는 우리 시대의 본질을 드러내는 것들 중 어떤 것도 언급되지 않았다. → 회의에서는 우리 시대를 드러내는 본질적인 문제는 아무것도(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같은 경우
'나 같은 경우에는', '중국 같은 경우에는', '그 같은 경우에는'처럼 쓰면 '나', '중국', '그'와 '경우'가 동격이 된다. 굳이 경우를 써야겠다면 '내 경우에는'이라고 쓰면 될 일이다.
-에 의한, -로 인한
'의하다'는 '따르다'로 바꿔 쓸 수 있고, '인하다'는 '때문이다' 또는 '비롯되다', '빚어지다' 따위로 바꿔 쓸 만하다.
- 시스템 고장에 의한 동작 오류로 인해 발생한 사고 → 시스템 고장에 따른 오동작 때문에 발생한 사고
- 실수에 의한 피해를 복구하다. → 실수로 빚어진 피해를 복구하다.
4. 당하고 시키는 말로 뒤덮인 문장
당할 수 없는 동사는 당하는 말을 만들 수 없다.
- 그러다가 언젠가는 크게 데일 날이 있을 거야. → 그러다가 언젠가는 크게 델 날이 있을 거야.
- 고기를 구워 먹고 나니 웃옷에 고기 냄새가 온통 다 배였다. → 고기를 구워 먹고 나니 웃옷에 고기 냄새가 온통 다 뱄다.
- 마음이 설레여 잠을 이루지 못했다. → 마음이 설레 잠을 이루지 못했다.
- 날이 궂더니 어느새 활짝 개여서 하늘이 파래졌다. → 날이 궂더니 어느새 활짝 개어 하늘이 파래졌다.
- 휴가가 너무 기다려진다. → 휴가를 손꼽아 기다린다. (또는) 휴가만 기다리고 있다.
두 번 당하는 말을 만들지 말자. '-이-', '-히-', '-리-', '-기-'를 붙여 당하는 말로 만든 동사에 다시 '-아(어)지다'를 붙여 두 번 당하게 만드는 경우가 문제다.
- 둘로 나뉘어진 조국 → 둘로 나뉜(나누어진) 조국
- 잠겨진 차문 → 잠긴 차문
-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 마음이 갈가리 찢겨져 → 마음이 갈가리 찢겨
- 벌려진 틈으로 → 벌어진 틈으로
- 기자 회견을 열 것으로 보여집니다. → 기자 회견을 열 것으로 보입니다.
한자어 명사에 '-시키다'를 붙여 동사를 만드는 건 잘못된 습관이다. 이미 한자어 자체에 '시키다'의 뜻이 있기 때문이다.
- 자식을 제대로 교육시키다. → 자식을 제대로 교육하다.
- 협상을 지연시키다. → 협상을 지연하다.
- 환자를 격리시키다. → 환자를 격리하다.
- 탁자 다리를 고정시키다. → 탁자 다리를 고정하다.
- 노예를 해방시키다. → 노예를 해방하다.
- 업무 부담을 가중시킨다. → 업무 부담을 가중한다.
- 의혹을 증폭시키다. → 의혹을 증폭하다.
5. 될 수 있는지 없는지
'될 수 있는, 할 수 있는'과 같이 '-ㄹ 수 있는' 형태도 중독성이 강한 표현이다. 가능성이나 능력을 나타내는 경우가 아니라면 빼 보자.
- 1등이 될 수 있는 가능성 → 1등이 될 가능성
- 그제야 나는 그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 그제야 나는 그 사실을 깨달았다.
- 안전하게 치료해 줄 수 있는 의사 → 안전하게 치료할 의사
- 마실 수 있는 물이 없다. → 마실 물이 없다.
- 못할 수 있다 → 못할지도 모른다.
- 어떻게 그걸 모를 수 있어? → 어떻게 그걸 모른다고 말할 수 있어?
- 큰 도움이 안 될 수 있다. → 큰 도움이 안 될지도 모른다.
- 그런 시도는 자칫 위험할 수 있다. → 그런 시도는 자칫 위험해지기 쉽다.
6. 문장은 손가락이 아니다.
'그, 이, 저, 그렇게, 이렇게, 저렇게, 여기, 저기, 거기'와 같은 지시 대명사는 꼭 써야 할 때가 아니라면 쓰지 않는 게 좋다. '그, 이, 저' 따위를 붙이는 순간 문장은 마치 화살표처럼 어딘가를 향해 몸을 틀기 마련이다. 지시 대명사를 한 문단에 섞어 쓰면 문장은 이리저리 헤매게 된다.
'그 어느, 그 어떤, 그 누구, 그 무엇'과 같은 표현도 마찬가지로 쓰지 않는 게 바람직하다.
- 그 누구도 그 자신조차도 몰랐다. → 아무도 심지어는 자신도 몰랐다.
- 그 누구도 나를 대신할 수는 없다. → 아무도 나를 대신할 수는 없다.
- 그 무엇도 슬픔에 빠진 사람들에겐 위로가 될 수 없다. → 슬픔에 빠진 사람들에겐 아무것도 위로가 될 수 없다.
- 그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 그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정신만 바짝 차리면 된다. →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정신만 바짝 차리면 된다.
7. 과거형을 써야 하는지 안 써도 되는지
한 문장에 과거형을 여러 번 쓰면 가독성도 떨어지고 문장도 난삽해진다. 되도록 한 문장에서는 과거형을 한 번만 쓰는 게 바람직하다. 아예 안 쓸 수 있으면 안 쓰는 게 더 좋다.
- 배웠던 내용을 다시 확인하는 것이 복습이다. → 배운 내용을 다시 확인하는 것이 복습이다.
- 어린 시절 외국에서 보냈던 시간 → 어린 시절 외국에서 보낸 시간
- 10년 전 내가 아내와 처음 만났던 작은 공원에 가 보았다. → 10년 전 내가 아내와 처음 만난 작은 공원에 가 보았다.
- 서울을 처음 방문했던 1990년 → 서울을 처음 방문한 199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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