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퉁이 서재
[김유정] 봄봄, 동백꽃, 금 따는 콩밭, 산골 나그네 외 본문
군 시절, 김유정의 단편 소설들을 재밌게 읽던 기억이 있다. 그러고 보니 군 시절 참 많은 책을 읽었다. 집에서 책장 정리를 하다가, 책의 좋은 구절을 필사해놓은 노트를 우연히 발견했다. 오랜만에 그 노트를 읽으니 당시 감정이 물씬 느껴졌다. 그때의 나는 문학을 순수하게 좋아했던 것 같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책에 대한 순수함이 많이 사라졌다. 읽을 책이 나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지 판별하고 있는 나를 어느 순간 발견하게 되었다. 물론 지금도 철학과 문학에 대한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지만, 과거에 비해 많이 사라진 것은 사실이다. 책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라 생각한다. 책으로 어떠한 유용이나 득을 얻으려는 태도는 책에 대한 순수성을 퇴색시킨다고 생각한다. 무엇을 얻기 위해 '수단'으로써 책을 접하는 게 아니라 책 자체가 목적인 책 읽기를 해야 책의 '참맛'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순수성이 퇴색된 나를 반성하며, 오랜만에 김유정의 작품을 다시 접했다.
김유정의 작품은 모두 1900년대 농촌을 배경으로 한다. 왜 그런진 잘 모르겠지만 '그때 그 시절' 이야기를 접하면 미소가 절로 나온다. 응답하라 1988이라는 드라마를 볼 때도 그랬고, 써니라는 영화를 볼 때도 그랬다. '그때 그 시절'을 살아보지도 않았으면서 아날로그에 대한 애틋함이 있어서인지 모르겠다. 김유정의 작품을 읽을 때도 내내 마음속 미소가 지어졌다.
'봄봄'은 지주인 '봉팔씨'와 그의 딸 '점순이', 그리고 점순이와의 혼인을 계약으로 봉팔씨 땅에서 온종일 일을 하러 온 데릴사위 '나'가 등장인물이다. 예비 장인인 '봉팔씨'는 점순이와의 혼인을 미끼로 '나'에게 온종일 일만 시킨다. 상당히 오랫동안 일을 했음에도 장인은 점순이와의 혼인을 승낙하지 않는다. 점순이의 키가 아직 작다는 이유에서다. '나'는 점순이가 빨리 크기를 바라며 죽도록 일을 했다. 하지만 점순이의 키는 도통 크지 않는다. 장인이 점순이와의 혼인을 승낙하지 않은 진짜 이유는 노동을 더 시키기 위함이다. 사실 장인의 부인도 키가 작다. 점순이는 그냥 선천적으로 키가 작은 건데 아직 크지 않았다는 이유로 데릴사위에게 계속 일을 시키려는 속셈이다. 점순이는 병신이라는 소리를 하면서까지 '나'를 꾸짖는다. 언제까지 일만 할 것이냐는 것이다. 장인을 설득해 혼인을 빨리 해야 하지 않겠냐는 것이다. '나'는 결판을 내야겠다며 장인과 치고받고 싸운다. 어리석게도 점순이가 좋아해 주겠지라는 마음을 가지고. 하지만 점순이는 뭐하는 짓이냐며 '나'를 나무란다. '나'는 점순의 태도에 어안이 벙벙해지며 소설을 끝이 난다.
봄봄을 읽고 있노라면 주인공인 데릴사위의 우둔함과 멍청함, 그리고 순수함이 절절하게 느껴진다. 주인공은 장인을 한참 욕하면서도 그래도 장인은 이래서 좋다고 말한다. 우둔할 정도로 착하고 순수하다. 그때의 시대상이 머릿속에 환하게 그려진다. 사실만 놓고 보자면 이 소설 속에서는 비애가 느껴져야 한다. 지주가 혼인을 계약으로 데릴사위에게 갑질을 하는 것 아니겠는가. 그 시대에 흔하게 있을 수 있는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소설 어디에서도 슬픔은 느껴지지 않는다. 웃음과 해학만 있을 뿐이다. 2020년인 지금, 1900년대의 한 장면을 아주 짧은 글로, 웃음과 해학을 곁들여, 미소를 머금게, 그리고 실감 나게 느낄 수 있는 게 신기하지 않나. 김유정 소설의 특징이 어떻다는 문학사적 의미를 떠나서 그냥 좋다.
동백꽃에서는 나를 좋아하는 '점순이'와 그걸 전혀 모르는 '나' 사이에서 일어나는 미묘한 사랑싸움을 다루고 있다. 점순이는 좋아하는 마음을 나에게 표현했지만 '나'는 그것을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 그러자 점순이는 닭싸움을 시키며 '나'의 화를 북돋았다. 그러다 결국 수풀 속에서 '나'는 그녀의 마음을 알게 되었다.
동백꽃에서의 '나'도 참 우둔하다. 점순이도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방법에 서툴렀다. 그 시절의 남녀 관계도 지금과 크게 다르진 않았나 보다. 더군다나 농촌의 어린 소년, 소녀의 이야기라 미소가 지어지면서도 갸륵하다.
금 따는 콩밭은 콩밭에서 금을 캘 수 있다고 믿고 연일 콩밭을 파는 어리석고 탐욕적인 인간을 해학스럽게 그려낸 작품이고, 산골 나그네는 이미 남편이 있지만 돈을 벌기 위해 갈보가 되고 마는 한 여인의 애환을 토속적으로 그린 작품이다.
김유정은 1908년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났으며, 1937년 29살의 젊은 나이에 폐결핵으로 안타깝게 요절했다. 일제강점기의 가난했던 농촌 시절을 그리고 있지만 그의 작품에는 웃음과 해학이 묻어 있다. 앞서 말했듯 그의 글을 읽다 보면 절로 미소가 나온다. 일제강점기 시절 농촌의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눈 앞에서 보듯 내용이 구체적으로 그려지고,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게 신기하다. 심지어 장황하게 묘사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글은 짧고 묘사도 자세하지 않은데 감정과 시대상이 고스란히 전달된다. 아직도 그게 신기하다. 어쩌면 내가 '그때 그 시절'을 담은 문학을 좋아해서 그렇게 느끼는 걸지도 모르겠다. 김유정 작가가 의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해학이 지배하는 그의 작품을 다 읽고 나면 조금의 아련함과 비애, 애환이 느껴진다.
한국 문학의 위상이라 말할 정도로 김유정이 대단한 작가인지는 모르겠다. 대부분이 상당히 짧은 단편이고, 스토리가 꽉 짜인 것도 아니다. 있는 그대로의 향토적 시대상을 해학을 더해 그린 것뿐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의 작품이 다른 작가들만큼 고민을 많이 하고 쓴 작품은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물론 지극히 주관적인 의견이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나에게 문학의 순수성을 일깨워 주었고, 이유 없는 독서의 즐거움을 느끼게 해 주었다. 일제강점기 당시 농촌의 시대상에 대한 생생한 간접 체험은 덤으로 얻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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