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퉁이 서재
[현진건] 운수 좋은 날, 술 권하는 사회, B사감과 러브레터, 빈처, 타락자 외 본문
김유정의 소설이 일제강점기 농촌의 생활상을 그린 반면, 현진건의 소설은 주로 지식인의 삶을 그렸다. 중고등학생 때 한 번쯤 읽어봤던 운수 좋은 날은 인력거꾼 김첨지의 이야기를 다루지만 술 권하는 사회, 빈처, 타락자는 모두 지식인의 삶을 다루고 있다. 술 권하는 사회, 빈처, 타락자에는 모두 지식인으로서 꿈을 펼치고 싶어도 일제의 억압으로 그렇게 하지 못하는 고뇌가 담겨 있다.
그의 작품의 배경은 1920년 경이다. 김유정의 소설과 마찬가지로 일제강점기 시대를 담고 있다. 일제강점기 시절 한국문학을 읽으며 느끼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어휘, 생활상은 달라도 인간의 감정은 똑같다는 것이다.
'운수 좋은 날'의 인력거꾼 김첨지는 자기 아들뻘 되는 돈 많은 손님에게 굽신거리며 큰 돈을 벌기를 기대한다. '술 권하는 사회'의 '나'는 일본 유학까지 다녀왔는데 사회에게도 가족에게도 인정을 받지 못한다. '나'는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다 해봤지만 돈 한 푼 벌지 못하여 고뇌한다. '나'의 아내는 공부라는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남편이 유학을 가 공부를 하면 큰돈을 벌 수 있고 그러면 자신도 금가락지를 낄 수 있다는 기대를 앉고 남편의 유학이 끝날 때까지 기다린다. 그러나 남편이 공부라는 것을 했으면서도 돈 한 푼 벌지를 못하니 이해를 하지 못한다. 'B사감과 러브레터'의 B사감은 기숙사 학생들에게 러브레터를 받지 못하도록 하면서, 정작 학생들이 받은 러브레터를 몰래 감정을 담고 소리를 내어 읽는다. 이중적이고 위선적인 인간상을 드러낸다. '빈처'의 아내는 좋은 옷과 신발을 신은 다른 여자를 부러워하지만 남편이 기죽을 까봐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다. 그 속내를 안 남편은 자신이 처량하기도 하고 아내가 애처롭게 느껴진다.
불과 100년 전이다. 생활상은 다르지만 우리의 감정은 그대로다. 1720년과 1820년의 생활상이 크게 다를 것 같진 않다. 1820년과 1920년의 생활상도 아주 크게 다를 것 같진 않다. 그러나 1920년과 2020년의 생활상은 정말 많이 다르다. 그러면 2120년과 현재의 차이는 현재와 1920년의 차이보다 클까? 그리고 그때 느끼는 인간의 감정은 지금과, 과거와 크게 다르지 않을까? 작품의 주제를 떠나서 이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현진건은 20편의 단편소설과 7편의 중장편소설을 썼다. 그중 현재 가장 많이 알려진 소설은 단연 '운수 좋은 날'일 것이다. 중고등학교 국어책에 실렸기 때문이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내가 읽었던 현진건 소설 중 제1을 꼽는다면 '타락자'이다. 타락자는 중편 소설로 다른 현진건 소설에 비해 내용이 좀 더 길다. 그만큼 주인공의 욕망, 이성, 양심, 감정이 잘 묘사되어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는 '타락자'에 대해 이렇게 평가되어 있다.
"무려 13장에 걸친 사연은 다소 지루한 느낌마저 주지만 전편에 실사된 표현은 실감을 돋우어준다."
하지만 나는 이 작품을 읽으며 전혀 지루함을 못느꼈다. 주인공의 심리상태가 잘 묘사되어 있어 심지어 2번이나 읽었다.
다른 얘기지만, 현진건부터 그랬고 예나 지금이나 글을 쓰는 사람은 금전적 보상을 만족스럽게 받지 못한다. 이것이 문학을 더 풍부하게 하는지 빈약하게 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니체의 표현을 빌리자면 좋은 글은 '시장의 파리 떼'를 벗어난 곳에서 태어난다. 그러니 현대소설보다 더 재미있게 현진건의 소설을 읽었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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