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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뮤얼 스텀프] 서양 철학사 - 제2부 헬레니즘과 중세 철학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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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뮤얼 스텀프] 서양 철학사 - 제2부 헬레니즘과 중세 철학

Baek Kyun Shin 2020. 7. 8. 21:14

제5장 아리스토텔레스 이후의 고대 철학

아리스토텔레스 이후의 고대 철학은 네 가지 부류로 나뉜다. 그것은 바로 에피쿠로스학파, 스토아학파, 회의주의자, 신플라톤주의자이다. 에피쿠로스학파는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을 받아들였고, 스토아학파는 헤라클레이토스의 만물의 근원은 불이라는 개념을 받아들였고, 회의주의자는 소크라테스적인 회의의 방법을 자신들의 탐구 방법으로 이용했고, 신플라톤주의자는 플라톤에게 크게 영향을 받았다. 그들은 모두 실천적인 철학을 강조했다. 

알렉산드로스에 의해 로마 대제국이 생기고 그리스의 소도시도 로마 제국에 흡수됨에 따라 더 이상 사람들은 이상 사회에 관한 문제들을 사색하는데 관심을 잃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변화하는 조건 속에서 삶의 방향을 제시해줄 실천 철학이었다. 따라서 더 이상 국가나 이상 사회에 대한 사색은 필요 없었다. 개개인의 삶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며 자연스럽게 실천 철학이 중요해지게 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에피쿠로스학파, 스토아학파, 회의주의자, 신플라톤주의자가 탄생한 것이다. 

에피쿠로스학파는 <아타락시아 ataraxia>, 즉 영혼의 평정을 추구했다. 스토아학파는 불가피한 사건에 대한 자신들의 반응을 조절하는데 힘을 썼다. 회의주의자들은 진리를 의심하고 개인의 자유를 추구했으며, 신플라톤주의자는 신과의 신비적인 결합 속에서의 구원을 믿었다.

1. 에피쿠로스

에피쿠로스는 플라톤이 죽은 뒤 약 5~6년 후에 태어났으며 그때 아리스토텔레스의 나이는 42살이었다. 그는 피타고라스가 태어난 에게 해의 사모스 섬에서 기원전 342년(또는 기원전 341년) 태어났다. 그는 10대쯤 데모크리토스의 저서를 접했고, 데모크리토스의 철학은 그에게 지속적인 영향을 주었다.

에피쿠로스는 실천적인 철학자였기 때문에 <세계는 무엇으로 만들어졌는가>와 같은 난해한 문제는 다루지 않았다. 단지 세계는 원자로 구성되어 있다는 데모크리토스의 이론을 그대로 따랐다. 에피쿠로스에게 인생의 주된 목적은 <쾌락>이다. 하지만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유흥적 의미의 쾌락만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강렬하지만 짧은 쾌락과 덜 강렬하지만 오래 지속되는 쾌락, 후에 고통을 주는 쾌락과 안정이나 휴식의 감정을 주는 쾌락을 구별했다.

1. 1. 물리학과 윤리학

에피쿠로스는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은 만물은 원자로 이루어져있다는 주장이다. 즉 모든 사물과 인간, 심지어 신까지도 원자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원자론에 따르면 신 조차 물질적인 존재여야 한다. 따라서 에피쿠로스는 인간이란 신에 의해 창조된 존재가 아니라 단지 원자들로 구성된 존재라고 믿었다.

1. 2. 신과 죽음

에피쿠로스는 신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느낄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모든 존재는 원자로 구성되어 있고, 신 조차 물질적 요소의 일부이므로 신이 인간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수 없다고 믿었다. 신이 인간의 삶에 개입할 수 없기 때문에 더 이상 신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죽음에 대해서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인간이 살아 있는 동안 죽음은 없고, 인간이 죽은 뒤에는 아무런 감각도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과 죽음은 동시에 존재할 수 없어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물질만이 존재하며 인간의 삶 속에서 우리가 아는 것이라고는 이 육체와 경험하는 현재의 순간뿐이다.

1. 3. 쾌락 원리

결국 에피쿠로스는 인간이 경험하는 현재의 순간을 중시했다. 즉, 쾌락이 인생의 주된 목적이라는 것이다. 그는 여러 종류의 쾌락을 구별하는데 최대의 주안점을 두었다. 식욕과 같은 자연적이고 필수적인 욕망이 있는가 하면, 성욕과 같은 자연적이지만 필수적이지는 않은 욕망도 있고, 사치나 명예처럼 자연적이지도 필수적이지도 않은 욕망도 있다. 그는 이런 욕망, 쾌락들을 확실하게 구분할 수 있었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우리는 쾌락이 곧 목적이라고 주장할 때, 그것은 방탕한 자의 쾌락도 아니며 무지하거나 우리와 의견을 달리하는 또는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 의해 상상되는 호색적 쾌락도 아니다. 그것은 육체의 고통과 정신의 불안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한다. 그것은 연일 음주와 연회를 벌이는 것도 아니고 또 정욕의 충족도, 편안한 생활을 하는, 즉 생선을 즐기고 호화로운 식탁을 소유하는 것과 같은 사치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취할 것을 취하고 금할 것을 금하는 동기를 탐구하거나 정신이 매우 혼란할 때 생기는 잘못된 의견을 떨쳐 버리는 건전한 논리적 사고다.

에피쿠로스는 육체적 쾌락을 반대하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이러한 쾌락에 너무 관심을 두는 것은 오히려 고통에 이르는 길임을 밝히고자 했던 것이다. 그가 생각하기에 인간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쾌락은 <마음의 평정>이다. 그것은 육체적 고통 없이 정신이 평온한 상태를 뜻한다. 

2. 스토아 철학

스토아 학파는 고대의 가장 뛰어난 지성인들 가운데 몇 명을 포함하고 있다. 키티온의 제논(기원전 334년 ~ 262년)이 청중을 대상으로 한 강연을 시작으로 스토아 철학이 시작되었다. 키티온의 제논은 파르메니데스의 제자인 제논과 이름은 같지만 서로 다른 사람이다. 스토아 학파에는 그 유명한 키케로, 세네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도 있다. 

2. 1. 지혜와 통제 대 쾌락

스토아 학파도 행복을 추구했지만 에피쿠로스학파와 달리 쾌락에서 행복을 찾지는 않았다. 그들은 지혜를 통해 행복을 추구했다. 스토아 철학의 창시자인 제논은 소크라테스의 용기 있는 죽음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리하여 생존이 위협당하는 상황 속에서도 감정을 억제하는 기개와 모범을 스토아 학파의 귀감으로 삼았다.

스토아 학자인 에픽테토스가 쓴 다음 구절을 통해 스토아 철학에 대해 이해할 수 있다.

<사건들이 당신의 의도대로 일어나기를 바라지 말라. 오히려 그것들이 일어나는 대로 진행되기를 원하라. 그러면 당신은 모든 일이 잘 될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모든 사건을 통제할 수 없으며 단지 일어나는 일에 대한 우리의 자세만을 조정할 수 있다. 미래에 일어날 사건들을 두려워하는 것은 부질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쨌든 그 사건들은 일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지의 행위에 의해서 우리의 공포를 조절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건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실제로 <두려움 외에 우리가 두려워할 일은 없다.>

결론적으로 스토아 철학 핵심사상은 우리의 주변 상황이 바뀌길 기대하지 말 것이며, 단지 개인의 관점이나 태도는 충분히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스토아 학파가 이런 결론에 도달한 이유는 신이 모든 사물 안에 존재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주변 상황을 결정하는 존재는 다름 아닌 만물에 존재하는 신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만물에 신이 존재한다는 것은 신이 육체나 현실과 동떨어진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를 통해 스토아 학파는 유물론적 세계관, 범신론적 세계관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2. 3. 모든 실재의 기초로서의 물질

앞서 말했듯이 스토아 학파는 유물론적 세계관을 가졌다. 즉, 실재하는 모든 것은 물질적이라는 논리를 가졌다. 또한 스토아 학파는 만물이 정적인 것이 아니라 역동적이고 계속 변화하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변화하게 만드는 물질이 있다고 믿었는데 그것은 바로 <불>이다. 헤라클레이토스가 만물의 근원은 <불>이라고 한 사상을 받아들인 것이다. 불은 모든 사물에 퍼져있어서 그것들에게 생명력을 불어넣어 주는 물질이다.

2. 4. 만물에 내재하는 신

스토아 학파는 신이 만물에 내재한다고 주장했다. 신은 불, 힘, 로고스, 이성이며, 신이 만물에 내재한다는 말은 곧 자연 전체가 이성의 원리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뜻한다. 

물질은 그 자체에 이성의 원리가 존재하기 때문에 자신이 행하는 바대로 행동한다. 이 원리에 일치된 물질의 연속된 행위가 곧 자연적인 법칙, 즉 한 사물의 본질에 대한 법칙이라는 것이다. 스토아 학파가 모든 사물에 대해 뜨겁게 불타는 모체인 신을 자연의 근원이라고 생각했다는 사실과 모든 사물들은 신의 구조화하는 이성의 각인을 직접적으로 받아들여 자신들이 행하도록 배열된 그대로 계속 행위를 한다는 사실을 상기해 볼 때, 우리는 스토아 학파가 어떻게 이러한 관념들로부터 숙명과 섭리의 개념을 전개시켰는지를 알 수 있다.

스토아 학파는 바꿀 수 있는 건 주변 상황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가짐, 태도라고 했다. 왜 주변 상황이나 자연현상을 바꿀 수 없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주변 상황, 자연현상은 이성의 원리대로 돌아가기 때문에 바꿀 수 없다는 것이다.

2. 6. 인간의 본성

스토아 학파는 자연을 기술할 때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본성을 설명했다. 그들은 만물에 이성, 신, 로고스, 불이 내재되어 있는 것처럼 인간에게도 이성, 신, 로고스, 불이 내재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2. 7. 윤리와 인간의 연극

스토아 학파의 도덕 철학은 사뭇 특이하다. 그들은 인간을 연극 속의 배우로 간주했다. 연극 속에서 각 인간의 배역을 결정하는 것은 이성의 원리인 신이다. 스토아 학파에 의하면 인간의 지혜는 이 연극에서 자신의 배역을 잘 인지하고 충실히 수행하는지에 의해 나타난다. 당신이 가난한 자의 역을 하더라도 즐거운 마음으로 그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 왜냐하면 주어진 역할을 잘 해내는 것이 당신이 할 일이기 때문이다. 모든 배우는 주변 사람들이나 주변 환경, 배경 등에 대한 통제권이 없다. 연극의 줄거리나 주제에 대한 통제권도 없다. 그들이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 그들의 태도나 감정이다. 태도나 감정을 어떻게 취하느냐에 따라 그들은 행복해질 수도 불행해질 수도 있다. 이러한 감정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거나 소위 <무관심 apatheia>에 이른다면 그들은 평정과 행복을 얻을 수 있다. 여기서 아파테이아(apatheia)란 파토스(pathos)가 없는 상태를 뜻한다. 파토스란 외부의 영향을 받아 생기는 감정을 의미한다. 따라서 아파테이아란 외부의 영향으로부터 초연한 무감동의 경지를 말한다. 스토아 학파는 이것을 삶의 이상으로 삼았다.

2. 8. 에피쿠로스 철학과의 비교

스토아 철학은 에피쿠로스 철학과 대부분 공통된 특징을 가지고 있지만 일부 다른 점도 있다. 스토아 철학은 에피쿠로스 철학와 마찬가지로 사변적인 철학이 아닌 실천적인 철학에 관심을 두었다. 또한 절제를 윤리의 핵심으로 간주했으며, 만물은 물질로 구성되어 있다는 유물론적 관점을 취했다. 마지막으로 두 철학 모두 행복을 삶의 목적으로 삼았다. 반면 에피쿠로스 철학과의 차이점이라면 스토아 철학은 세계를 이성의 산물로 보았다는 점이다. 따라서 인간의 지혜의 가능성에 대해 낙관적인 입장이었다. 인간을 포함한 만물은 이성의 산물이므로 인간은 지혜를 통해 많은 것을 알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회의주의자들은 인간이 많은 것을 알 수 있다는 주장에 반대했다.

3. 회의주의

회의주의자는 말 그대로 의심하는 사람들을 뜻한다. 그들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에피쿠로스 학파, 스토아 학파의 주장에 회의를 품었다. 그러나 이런 회의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평정한 삶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을 추구했다. 회의주의 학파의 창시자는 피론(기원전 361년? ~ 기원전 270년?)이다. 피론은 인도에 머무는 동안 극도의 고행을 통해 열반을 깨달은 불교 수행자들을 보았다. 그들은 금욕과 절제를 통해 평정에 도달하려는 피론의 회의주의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의 독특한 철학은 훗날 <피로니즘>이라 불리게 되었다. 피론은 어떠한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 그의 회의주의 철학에 대한 기록은 그를 계승한 섹스투스 엠피리쿠스가 남긴 것이다. 섹스투스가 남긴 저서는 회의주의의 의미와 목적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우선, 회의주의의 목적은 마음의 평화와 평정이다. 회의주의 이전에도 너무 많은 철학과 사상이 존재했고, 사람들은 그 많은 선택지로 인해 혼란을 겪었다. 회의주의자는 진리 발견의 가능성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경험을 통해 깨달은 진리를 부정했다. 누군가가 어떤 진리를 주장한다면 그와 반대되는 주장도 항상 존재했다. 회의주의자들은 동일한 현상에 대해서도 사람들마다 제각기 다른 주장을 한다는 사실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따라서 그들은 판단을 보류하며 어떤 것을 부정하지도 긍정하지도 않았다. 판단을 중지하므로써 혼란 없는 평온한 정신 상태를 추구했다. 그렇다고 회의주의자들이 사유를 포기한 것은 아니다. 다만 인간의 사유를 통해 얻은 사실을 의심했을 뿐이다. 자신들이 실제 세계에 살고 있음은 의심하지 않았지만 인간이 과연 세계를 진실되게 기술하는가에는 의심을 품었다. 예를 들어 꿀이 달콤한 것은 혀의 감각기관이 그것을 달게 느끼기 때문이다. 회의주의자들은 인간의 감각기관이 꿀을 달콤하게 느낀다는 것은 인정했다. 다만 그 꿀이 실제로 달콤한가에는 의심을 품었다. 인간이 꿀을 달콤하게 느끼는지에는 의심을 품지 않았지만 실제 꿀이 달콤한지는 의심을 품었다. 따라서 회의주의자들은 현상의 실재를 부인하려는 게 아니라 독단론자들의 무분별한 주장을 지적하고자 했던 것이다. 회의주의자는 감각기관에 대해 이러한 의견을 제시하며 다음과 같은 확신을 가졌다.

인간이 이성이 현상에 그렇게 쉽게 속는다면, 다시 말해 <이성이 아주 잘 속기 때문에 우리의 바로 눈앞에 있는 현상에 쉽게 따른다면> 우리는 명백하지 않은 일들에 대해서는 이성을 따를 때 조심해야 하며, 따라서 무분별을 피해야 하지 않겠는가?

3. 1. 감관은 기만적이다.

스토아 학파는 우리의 지식이 경험이나 감각기관의 인상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했다. 스토아 학파의 말대로라면 모든 지식의 타당성은 의심을 받아야 한다. 감각기관은 동일한 현상에 대해서도 제각기 다른 정보를 주기 때문이다. 우리의 지식이 경험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라면, 그 지식이 참된 지식인지 아닌지는 밝힐 수 없다는 것이 회의주의자들의 결론이다.

3. 2. 도덕률은 회의를 일으킨다

회의주의자들은 물질적 대상에 대한 지식뿐만 아니라 도덕에 대해서도 의심을 품었다. 감각기관마다 받아들이는 지식이 다른 것처럼 공동체마다 도덕에 대한 관념도 다르기 때문이다. 회의주의자들은 결국 모든 지식 및 도덕의 타당성에 대해 회의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우리는 확실하지 않은 지식 때문에 판단을 보류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도덕에 대해서도 판단을 보류해야 한다면 행동의 문제에 직면했을 때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3. 3. 지적인 확실성 없이도 가능한 도덕률

그러나 분별 있는 행동을 하기 위해 지식을 가질 필요는 없다고 회의주의자들은 주장했다. 완벽한 확신이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의 개연성이 있는 적당한 확신만으로도 분별 있는 행동을 할 수 있다고 했다. 절대적인 확실성은 결코 없지만 우리가 행복하고 평온하게 살아갈 수 있게 할 개연성 정도만 있다면 그 도덕을 따라도 된다고 주장했다.

회의주의자들이 <어떤 체계>를 가지고 있는지의 여부를 묻는다면 섹스투스는 <아니오>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체계가 <올바르게 사는 방법을 밝혀 주는 일련의 추론 과정>을 의미한다면 회의주의자들은 체계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섹스투스의 말대로 <우리는 일련의 추론에 의해 우리나라의 관습과 법과 제도들, 그리고 우리 자신의 본능적인 감정에 일치하는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4. 플로티노스

플로티노스(204~270)는 고대의 마지막 철학자, 다른 말로 하면 고대 철학과 중세 철학을 연결해주는 철학자였다. 그 당시에는 수많은 교단들이 생겨났으며 위대한 사상들이 혼합된 다양한 철학과 종교가 생겨나던 절충주의 시대였다. 그의 철학은 플라톤의 철학을 재해석했다는 이유로 신플라톤주의라고 불린다. 플로티노스는 204년 이집트에서 태어났다. 그는 피타고라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에피쿠로스, 스토아 학파를 포함하는 고전 철학을 광범위하게 접했다. 그는 플라톤 철학을 최우선으로 생각했으며, 나머지 철학에 대해서는 비판을 했다. 

플로티노스는 실재에 대한 사유를 종교적인 구원론과 결합시켰다. 그리하여 훗날 아우구스티누스는 플로티노스를 <단지 몇 마디만> 바꾸면 기독교인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플로티노스는 스토아 학파, 에피쿠로스 학파, 피타고라스 학파, 아리스토텔레스 학파의 사상을 거부했다. 이들 사상은 영혼과 신에 대한 본질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4. 1. 일자로서의 신

플로티노스는 플라톤의 형상론을 받아들였다. 물질세계는 항상 변하기 때문에 참된 실재일 수 없다고 주장했다. 불변하는 참된 실재는 신이며, 신이란 물질세계를 초월한 곳에 있다고 말했다. 플로티노스는 신을 일자<The one>라고 생각했다. 신이 일자라는 것은 <신은 불변하고 어떠한 복합성이나 다양성도 없으며 창조되지 않고 변형되지도 않는다>라는 뜻이다. 따라서 일자는 존재하는 어떤 사물일 수 없고, 존재하는 모든 사물에 선행하는 것이다. 우리가 일자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것은 이것뿐이며 일자의 속성에 대해서는 묘사할 수 없다. 일자의 속성을 묘사한다는 것은 일자를 어떤 한계 내에 한정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4. 2. 유출의 비유

그렇다면 신(일자)은 어떻게 만물을 만들었을까? 플로티노스는 신이 만물을 직접 창조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만물을 창조한다는 것은 변형의 속성을 띄고 있는데 신은 창조나 변형의 속성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신이 만물을 직접 만들지 않았다면 만물은 어떻게 탄생한 것일까? 그것은 바로 <유출>에 의해서이다. 태양에서 빛이 방출되듯이, 물이 샘에서 솟아나듯이 사물들은 신으로부터 유출된다는 뜻이다. 태양은 빛을 직접 만들어 내보내지 않는다. 태양이 빛을 발산하는 것은 태양의 본질이다. 필연적인 것이다. 태양이 빛을 발산하듯 신도 무언가를 발산하는데 그 무언가가 만물의 원천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빛이 태양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신이 유출한 그 어떤 것도 신은 아니다. 이를 플로티노스의 유출설이라고 한다.

플로티노스는 일자로부터 최초의 유출물을 정신(nous)이라고 기술했다. 이 정신은 세계의 토대를 이루는 이성 능력이다. 

4. 2. 1. 세계의 영혼

태양에서 방출된 빛은 그 강도가 점차 약해지듯 신으로부터 유출된 존재도 그 완전성이 점차 약해진다. 플로티노스에 따르면 신으로부터 정신이 유출되고 정신으로부터 영혼이 유출되고 영혼으로부터 만물이 유출된다.

4. 2. 4. 악의 원인은 무엇인가?

플로티노스는 유출설을 통해 신은 자신의 완전성을 공유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넘쳐흐른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신으로부터 넘쳐흘러 결국 인간이 생겨났는데, 인간 사회에서 <악>은 왜 존재하는 것일까? 만물과 인간은 신의 유출물의 최하단에 존재한다. 유출의 최하단에 존재하는 것이 바로 악의 원인이다. 악은 그 자체로 근본적인 악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형상의 결핍이다. 신으로부터 최초의 유출물은 정신이라고 했다. 이 정신은 이성 능력이다. 하지만 인간은 정신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인간은 유출물의 최하단이지만 정신은 신의 최초 유출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에게 이성 능력이 부재하기 때문에 악이 생겨난 것이다. 따라서 악은 그 자체로 근본적인 악이 아니라 단지 부재의 산물이다.

제6장 아우구스티누스

1. 아우구스티누스의 생애

아우구스티누스는 354년 아프리카의 누미디아 지방의 타가스테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어서 어려서부터 그에게 기독교의 전통적인 교리와 행실을 가르치려 했다. 그러나 그는 신앙과 도덕을 다 던져 버리고 18세에 어느 여인과 아들을 낳고 10년간 동거를 했다. 그러면서도 지식욕에 불타 공부에 전념했다. 특히 그는 인간의 악의 문제에 대해 고심했다. 기독교인들은 신이 만물의 창조주며 선한 존재라고 하는데, 신이 만든 이 세계에는 왜 악이 존재하는지가 궁금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어릴 때 배운 기독교에서는 그 해답을 찾을 수 없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잠시 회의주의에 빠지기도 했다. 그리하여 384년 수사학 교사로 초빙되어 밀라노로 거처를 옮겼다. 그곳에서 그는 플라톤주의와 플로티노스의 신플라톤주의를 접하게 되었다. 특히 신플라톤주의에 매료되어 인간이 신과 비물질적 세계를 인식할 수 있다는 견해를 갖게 되었다. 하지만 신플라톤주의조차 그의 도덕적 문제를 해결해주지는 못했다. 

그의 극적인 회심은 386년에 일어났다. 수사학을 버리고 그의 모든 인생을 신에게 바치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이렇게 마음을 먹었다.

나는 예수보다 더 강한 사람을 찾아볼 수 없으므로 이 순간부터 나는 예수의 권위에서 벗어나지 않겠다.

그에게 진정한 철학은 신앙과 이성의 합일 없이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에게 지혜란 곧 기독교적인 지혜였고, 철학과 신학의 구별은 있을 수 없었다. 

2. 인간의 지식

인간은 대상을 보고, 듣고, 느끼며 그 대상에 대한 지식을 얻는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에게 그러한 감각적 지식은 인식의 최하의 단계였다. 감각으로부터 얻은 지식은 확실성이 낮기 때문이다. 감각적 지식이 확실성이 낮은 이유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우리가 감각하는 대상이 변하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감각 기관도 변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에게 차갑게 느껴지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따뜻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감각 기관으로부터 얻은 지식은 불확실한 지식인 것이다. 그러므로 아우구스티누스는 감각은 우리에게 어떤 지식을 주지만 그것이 갖는 본질은 대상 이외의 것을 가리키고 있다고 주장했다. 우리가 아름다운 사람을 보고 <아름다움>이라는 일반적인 개념을 떠올리고, 사과 세 개를 보고 <3>이라는 수학을 떠올리는 것처럼 말이다. 동물과 달리 인간은 사물을 감각할 뿐만 아니라 그 사물들에 대해 이성적 판단도 내린다. 어떤 사람이 그런 이성적 판단을 내릴 때 그는 단지 감각 기관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미(美)나 수학과 같은 진리를 떠올린다. 따라서 지식을 감각 대상에 대한 지식에서 보편적인 진리로 확장시킬 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최고의 지식은 신에 대한 지식이다. 인간은 낮은 단계에서 더 높은 단계로 즉, 신을 향하여 지식을 확장시키는 존재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의 정신은 감각 기관으로부터 얻은 지식을 통해 영원하고 보편적인 진리를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는 감각으로부터 얻은 지식은 불확실하다고 주장했다. 불확실하고 불완전한 지식으로부터 어떻게 영원하고 보편적인 진리를 얻을 수 있단 말인가? 이 모순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하는가? 

그는 이에 대한 답변으로 <추상>이라는 개념을 주장했다. 우리가 어떤 사물을 보려면 그 사물은 빛에 싸여 있어야 한다. 어두컴컴한 곳에서는 사물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영원한 진리 역시 고유한 빛에 싸여 있을 경우에만 정신이 그 진리를 볼 수 있다.

눈이 이러한 육체의 빛 속에서 주위의 모든 사물을 보는 것과 같은 이치로 창조주의 배열에 따라 본래 지성적인 실재에 속하는 정신은 독특한 종류의 어떤 비물질적인 빛 속에서 수학적 진리 같은 진리를 볼 수 있도록 지적인 정신의 본질이 구성되어 있다.

한마디로 정신이 영원한 진리를 보고자 한다면 그것은 계시를 지녀야 한다. 우리가 빛 없이 사물을 볼 수 없듯이 정신은 어떤 계시 없이는 진리를 볼 수 없다. 어떤 사람이 신의 계시를 받았다면 그의 정신은 불변의 진리를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이 신의 계시를 받았다면 감각 기관으로부터 얻은 지식을 통해 불변의 진리를 터득할 수 있다고 믿었다. 물질적 대상의 가변성과 인간 정신의 유한성에 의한 인식의 한계가 신의 계시에 의해 극복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계시론>이다.

3. 신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신은 절대적인 존재였다. 그는 불변의 진리는 신에게서 비롯된다고 믿었다. 또한 만물이 그 존재를 가지는 것은 신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세계와 신을 밀접하게 관련이 있기 때문에 한쪽을 안다는 것은 곧 다른 한쪽을 안다는 것과 같다. 따라서 신에 대해 잘 알게 된다면 세계의 본질도 이해할 수 있다.

4. 창조된 세계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이 만물을 창조>했다고 주장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것이다. 플로티노스는 신의 유출물로서 세계를 바라봤지만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이 이전에 없었던 것을 새롭게 창조했다고 설명했다. 만물이 신에 의해 창조되었기 때문에 만물은 선함을 간직하고 있다. 왜냐하면 신에 의해 창조된 것은 모두 선하기 때문이다. 신은 어떠한 악도 창조하지 않으므로 만물은 선하다는 것이다. 만물이 본질적으로 선하다는 것은 그의 도덕 철학에도 영향을 미쳤다.

5. 도덕 철학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 행위의 목적을 행복이라고 주장했다. 다만, 참된 행복의 조건은 자연적인 것을 넘어 초자연적인 것을 이행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초자연적인 것을 이행하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인간은 사랑을 통해 행복해질 수 있다. 인간이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는 그가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사랑을 통해 행복을 추구하지만 인간은 비참하고 불행하다. 왜 그럴까? 바로 무질서한 사랑 때문이다. 인간은 지나치게 특정 사물, 사람을 사랑하는 경향이 있다. 반면 신에 대한 궁극적인 사랑은 결여되어 있다. 이러한 무질서한 사랑은 불행은 야기한다. 그러므로 인간이 행복으로 갈 수 있는 필수 조건은 신에 대한 사랑이다. 왜냐하면 신만이 인간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5. 2. 악의 원인으로서의 자유 의지

아우구스티누스는 악의 원인이 단순히 무지에서 기인한다는 플라톤의 주장에 반대했다. 인간을 곤경에 빠지게 하는 것은 그가 무지하다는 사실이 아니라 양자택일이란 선택 상황에 놓여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신을 향하거나 신에게서 멀어져야 하는 선택의 기로를 맞는다. 쉽게 말하면 인간은 자유롭다. 자유롭기 때문에 죄를 저지를 수 있는 것이다. 죄를 저지르는 것은 인간이 무지해서가 아니라 자유롭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에 대한 사랑을 도덕성의 중심 원리로 삼았다. 또한 자신의 무질서한 사랑론으로 악을 설명하기도 했다. 이로부터 인간이란 신을 사랑하는 부류와 자기 자신과 세계를 사랑하는 부류로 구분된다고 그는 결론지었다. 사랑은 근본적으로 두 가지 형태로 나누어지며 따라서 서로 상반되는 사회가 존재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을 사랑하는 부류를 <신의 나라>라고 부르며 자신과 세계를 사랑하는 부류를 <지상의 나라>라고 칭한다.

제7장 중세 초기의 철학

1. 보에티우스

중세 초기 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철학자 가운데 한 명은 보에티우스(480?~524?)였다. 그는 어렸을 때 아테네로 보내져 그곳에서 그리스어를 배우고,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신플라톤주의 및 스토아 철학을 접했다. 510년에는 황제의 집정관으로 등용되어 명예를 누리게 되었다. 하지만 훗날 반역자로 내몰리어 오랫동안 수감생활을 하다 524년 처형되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몇 가지 저작들의 번역과 주석, 키케로 저작들의 번역을 비롯하여 상당히 많은 철학 저술들을 유산으로 남겼다. 그뿐만 아니라 신학, 대수, 기하, 천문, 음악에 관한 저서 및 논문들도 썼다. 그의 저작들은 훗날 토마스 아퀴나스를 비롯하여 주요 철학자에게 고대 철학에 대한 해석서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1. 1. 철학의 위안

그는 수감되어 있는 동안 그 유명한 [철학의 위안]을 저술했다. 이 책은 신, 행운, 자유, 악이라는 주제에 관한 책이며, 보에티우스 자신과 의인화된 철학과의 대화집이다. 보에티우스는 명예로운 관직 생활을 하다가 하루아침에 반역자로 몰리게 되어 수감 생활을 하게 되었다. 수감 생활을 하는 자신의 슬픔을 극복하기 위해 그는 비유적 수법을 사용하며 [철학의 위안]을 집필했다. 그는 이 책을 쓰며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깨닫고 위안을 얻었다. 돈이나 쾌락은 참된 행복을 가져오지 못하며, 인간은 철학이 인도하는 최고선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이다. 

1. 2. 보편자의 문제

보에티우스는 <보편자>라는 개념을 주장했다. 우리가 대화 시 <나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이는 현실적이고 개별적인 나무를 가리킨다. 하지만 나무를 <본다>는 것과 나무를 <생각한다>라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우리가 보는 것은 현실 세계에 있는 나무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보편자로서의 나무다. 우리가 나무를 생각할 때는 현실 세계의 나무를 생각하지 않고 어떤 종이나 어떤 류의 나무를 생각한다. 

보편자는 개별자로부터 추상된다고 말한 보에티우스는 유나 종이 개별 사물 <속에> 존재하며 그것들이 정신에 의해 <사유>될 때 곧 보편자가 된다고 결론을 내린다.

즉, 나무라는 일반적인 종은 느릅나무, 소나무, 단풍나무 속에 이미 존재하는 개념이다. 느릅나무, 소나무, 단풍나무 등을 보고 <나무>라는 일반적인 종을 떠올렸다면 그 <나무>는 곧 보편자가 된다는 뜻이다. 보편자는 개별자로부터 추상된다는 말이다. 결론적으로 보편자는 현실 세계의 사물과 정신 속에 동시에 존재한다. 그것은 사물 안에 내재하고 정신에 의해 사유된다.

2. 요한네스 스코투스 에리우게나

보에티우스 이후 또 다른 뛰어난 철학자가 출현하기까지는 3세기가 지나야 했다. 그는 에리우게나로 중세 철학을 체계적으로 정립한 인물이었다. 810년 아일랜드에서 태어났으며 그 당시 그리스어를 완전히 익힌 몇 사람 가운데 한 명이었다. 851년경 아일랜드를 떠나 샤를 2세의 궁정으로 들어갔다. 그 시기에는 아우구스티누스와 보에티우스에 대해 연구했으며 보에티우스의 [철학의 위안]에 대한 주석을 달았다. 그리고 864년 [자연 구분론]이라는 대작을 썼다.

2. 1. 자연 구분론

에리우게나에게 <자연>은 존재하는 모든 사물을 의미했다. 신도 존재하고 피조물도 존재하므로 신, 피조물 모두가 자연이었다. <구분>이란 신과 피조물이 구분되는 방식을 의미한다. 그에 의하면 자연의 구조를 이해하는 데는 두 가지 방식이 있는데 하나는 <구분>에 의한 것이요, 다른 하나는 <분석>에 의한 것이다. 구분은 우리가 하나의 대상을 둘로 나눌 때처럼 더욱 보편적인 것에서 덜 보편적인 것으로 구분하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 <분석>은 구분의 반대 개념이다. 즉, 덜 보편적인 것에서 더 보편적인 것으로 일치되는 과정을 의미한다. 이에 따르면 신은 사물과 세계로 <구분>된다. 반대로 <분석>은 사물과 세계가 신에게 회귀되는 과정이다.

에리우게나는 [자연 구분론]에서 범신론을 보여 주었다. 신은 사물과 세계로 구분되며, 사물과 세계는 또 신으로 회귀하기 때문에 결국 모든 사물에는 신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의 저서는 즉각적인 반응을 얻지는 못했지만 중세 철학의 발전에 큰 공헌을 했다.

3. 보편자 문제의 새로운 해결

3. 1. 과장된 실재론

보편자의 문제는 결국 보편자란 실재하는 사물인가 아닌가 하는 단순한 질문으로 귀결되었다. 보편자가 실제로 실재하는 사물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실재론>이라고 부른다. 실재론자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보는 개별적 사물들은 보편자를 공유하고 있고, 그 보편자는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었다. 실재론은 기독교 교리와 관련이 있다. 기독교에서는 인간의 원죄설을 주장하는데, 인간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고통을 받는다는 것이다. 내가 지은 죄가 아닌데 왜 내가 고통을 받아야 하나? 이는 실재론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모든 개별 인간은 <인간>이라는 보편자를 향유한다. <인간>이라는 보편자가 원죄를 지었기 때문에 모든 개별 인간도 역시 죄가 있다는 것이다. 

3. 2. 유명론

유명론은 실제론의 반대 개념이다. 유명론은 개별 사물만이 자연 내에 존재한다는 주장이다. 실재론이 주장하는 <보편자> 따위는 없다는 말이다. 실재론에서 보편자로 간주하는 <인간>은 단지 단어일 뿐이다. 그것은 문자로 표현되는 명사에 지나지 않으므로 뜬 구름에 불과하다. 

3. 3. 개념주의 또는 온건 실재론

실재론과 유명론은 모두 극단적인 주장이다. 실재론자는 절대적인 <보편자>는 실재한다고 주장했다. 모든 인간이 지구 상에서 사라지더라도 <인간>이라는 보편자는 어딘가에 존재한다. 반면, 유명론자는 보편자의 개념은 단지 단어에 불과하고 자연 내에 존재하는 건 개별 인간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온건 실재론은 실재론과 유명론의 극단적인 견해를 지양한 주장이다. 보편성이란 원칙적으로 단어에서 연유해야 한다고 말한다. 개체의 개념은 분명하지만 보편자의 개념은 확연하지 않다. 우리는 보편자가 의미하는 바를 사실상 인식할 수는 있을지라도 그것의 정확한 의미를 파악할 수 없다. 보편자는 개별적인 감각적 대상과 분리되어 존재한다. 그러나 이들 개체에 적용된 단어들로서 보편자는 이들 대상 안에만 존재한다. 즉, 모든 인간이 지구 상에서 사라지면 개별 인간이 향유하는 <인간>이라는 보편자 역시 사라진다. 대표적인 온건 실재론자로는 토마스 아퀴나스가 있다.

제8장 토마스 아퀴나스와 그의 후계자들

토마스 아퀴나스는 고대 철학과 기독교 신앙을 결합했다는 위대한 업적을 가지고 있다. 그의 철학은 주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의존하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플라톤주의를 기독교 신앙과 결합함으로써 철학과 신학의 초기 융합을 꾀한 바 있다. 그 뒤를 이어 나온 보에티우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를 라틴어로 번역하여 철학적 사색을 다시 활기를 띠게 되었다. 그 이후로 플라톤주의자들과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 간의 갈등이 생겼다. 이러한 갈등은 13세기 이후 아우구스티누스주의자들과 토마스 아퀴나스 주의자들 간의 논쟁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이 신학자들 모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그 말은 아우구스티누스와 토마스 아퀴나스 모두 철학과 신학의 관계, 이성과 신앙의 관계에 대해 고심했다는 뜻이다. 

1. 토마스 아퀴나스의 생애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는 1225년 나폴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245년 파리 대학교에 입학하여 탁월한 학자였던 알베르투스라는 스승을 만나게 되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알베르투스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알베르투스는 철학과 과학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당시 대부분의 신학자들이 비종교적인 학문은 거들떠보지도 않은 반면 알베르투스는 신학자는 철학과 과학 모두를 익혀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연스럽게 토마스 아퀴나스는 철학과 신학, 이성과 신앙을 모두 중시했다. 따라서 토마스 아퀴나스가 하고자 했던 일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기독교와 조화시키는 일, 즉 아리스토텔레스를 <기독교화>하는 일이다.

2. 철학과 신학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학자였다. 동시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깊이 빠졌었다. 그렇다고 철학과 신학 두 원리를 혼동하고 있었다는 뜻은 아니다. 당시 철학과 신학은 반대되는 개념으로 생각되었다. 신학자는 비종교적인 철학을 등한시했고, 철학자는 비이성적인 종교를 등한시했다. 하지만 토마스 아퀴나스는 철학과 신학을 모두 수용했고, 오히려 인간의 진리 추구에서 철학과 신학은 상보적인 역할을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신앙과 이성 간의 경계를 구분 짓기 위해 심한 고뇌를 해야 했다.

2. 1. 신앙과 이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철학과 신학, 즉 이성과 신앙 간에 명확한 차이점이 있다고 생각했다. 철학은 현실 세계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경험에서 시작해 더 보편적인 개념으로 추론해 나가 신의 개념에 이른다. 반면 신학은 신에 대한 신앙에서 시작해 모든 사물을 신의 피조물이라 생각한다. 방법상 명확한 차이가 있다. 철학자는 사물의 본질에 대해 합리적 추론을 통해 결론을 이끌어 내는 반면, 신학자는 절대적인 신의 계시에 기반을 두고 자신들의 결론을 논증한다. 따라서 철학과 신학은 서로 독립적인 학문이다. 이성이 개입되는 곳에는 신앙이 필요 없고, 신의 계시를 통해 알게 된 것은 이성으로는 인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의 대상을 제1원리와 제1원인에 대한 연구, 즉 존재와 그 원인에 대한 연구라고 생각했으며 이러한 생각에 의해서 우주 안에 있는 진리의 근거로 제1동자를 제시했다. 이것은 신학자들이 말하는 신의 존재 및 창조된 세계를 나타내 주는 진리에 대한 철학적인 표현 방식이다. 토마스 아퀴나스 철학의 중요한 측면들을 발견하려면 그가 전적으로 이성적인 방법에 의해 진리를 논증하려는 부분들을 그의 신학적인 저서에서 발췌해 보아야 한다.

3. 신의 존재 증명

3. 1. 운동, 작용인, 필연적 존재를 통한 증명

우리는 어디에서나 운동하고 있는 사물을 발견한다. 도미노를 예를 들어보자. 하나의 도미노가 쓰러지기 위해서는 바로 앞에 있는 도미노가 먼저 쓰러져야 한다. 앞에 있는 도미노가 쓰러지기 위해서는 그 앞에 있는 도미노의 앞에 있는 도미노가 먼저 쓰러져야 한다. 이렇게 계속 앞으로 가다 보면 맨 처음 쓰러진 도미노가 있을 것이다. 맨 처음 도미노가 쓰러지려면 누군가가 첫 도미노를 쓰러뜨려야 한다. 이 첫 도미노를 쓰러뜨리는 존재가 바로 신이라는 것이다.

즉, 우리가 사물의 운동을 관찰했을 때 그 운동을 야기한 원인이 있을 것이다. 그 원인의 원인의 원인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여타의 것에 의해 움직여지지 않지만 다른 사물들을 움직일 수 있는 동자가 있어야 한다. 이것을 곧 신이라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신은 가능태가 없는 순수한 현실태이다.

3. 2. 완전성과 질서를 통한 증명

우리는 경험 속에서 어떤 사물들이 선하고, 참되고 고귀한 점이 다소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물들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비교할 수 있는 이유는 구 사물들이 자신들의 방식으로 극치인 어떤 것을 닮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장 참되고, 가장 고귀하고, 가장 선한 사물이 존재해야 한다. 즉, <모든 존재들에 대해 그것들의 존재와 선성과 이외의 모든 완전성의 원인인 그 어떤 것이 존재해야 한다. 이것이 곧 신이다>라고 결론을 내렸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에 대한 증명은 이성의 실질적인 성과이자 서양 철학에서 가장 유명한 논증에 해당한다.

4. 신의 본성에 대한 지식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의 존재를 증명했다. 하지만 신이 존재한다고 해서 신의 본질에 대해 알지는 못한다. 이에 대해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의 실재는 인간의 개념으로는 표현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는 신의 존재를 증명했지만 신의 본질은 알 수 없다고 말했다. 다만 신의 본질이 아닌 것은 제거할 수 있다. 그러한 방법으로 신의 본질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신의 본질은 다음과 같다. 신은 움직이지 않으며 따라서 불변한다. 신은 시간 안에 있지 않으며 따라서 영원하다. 운동을 설명하기 위해 가능태를 가지지 않는 존재가 필요하며 (물질은 가능태를 소유한다.) 따라서 신 안에는 물질적인 것이 없다. 신은 순수하며 비물질적이다. 신 안에는 물질도 가능태도 없다.

5. 창조론

신의 존재 증명과 신의 본질에 대한 논의를 통해 토마스 아퀴나스는 창조론의 관념을 가정한다. 신의 계시적인 본질에 의해 인간이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신의 이전에는 또 다른 근원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창조에 선행해서 신만이 있을 뿐이다. 원초적으로 신만이 존재하며,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신으로부터 그 존재를 부여받았다. 따라서 모든 것은 신의 피조물이다. 

만물이 신의 피조물이라면 왜 악이 존재할까? 신은 전지전능하고 선한데 그로부터 만들어진 세상 속에는 어떻게 악이 존재할 수 있을까? 토마스 아퀴나스는 악의 문제에 대해 아우구스티누스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자연적인 악, 자연적인 고통은 그 자체로 선하지 않은 다른 어떤 것에 내재하는 부재(또는 결핍)를 나타낸다. 그렇다면 신은 왜 그런 악을 그대로 방치해두는가? 토마스 아퀴나스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우주가 완전하려면 다양한 존재로 구성되어야 하며, 따라서 악과 고통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6. 도덕과 자연법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이 토마스 아퀴나스는 윤리를 행복 추구에 있다고 보았다. 더욱이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대로 행복은 인간의 목적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생각했다. 인간은 행복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목적을 충족시켜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덕과 행복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본래의 능력이나 목적을 충족시켜야 한다는 <자연주의적>인 도덕을 그리고 있는 반면,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것 이외에 인간의 <초자연적>인 목적을 추가했다.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인간의 본질의 근원과 궁금적인 목적을 신 안에서 찾고자 했다.

인간의 본성은 고정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특성에 대응하는 행동 규칙들을 <자연법>이라고 부른다. 이 자연법은 이미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전개되었다.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하면 법은 인간에게 올바른 목적으로 향하게 하는 데 그 기능이 있다. 인간은 운명적으로 그의 일시적인 행복 이외에도 영원한 행복의 목적을 향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그를 그 초자연적인 목적으로 향하게 해 줄 수 있는 어떤 법이 있어야 한다. 그는 특히 이 점에 있어서 아리스토텔레스와 의견을 달리한다. 왜냐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단지 인간의 자연적인 목적만을 인식하고 있었으며,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인간의 이성에 의해 알려진 자연법만으로도 충분한 지침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이 추구해야만 하는 영원한 행복은 <인간의 본래적인 능력에 비례한다>고 토마스 아퀴나스는 말한다. 그러므로 <결국 자연법과 인간법 이외에도 신에 의해 주어진 법이 필요하다.> <신법>은 계시를 통해 인간에게 주어지기도 하고 성서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인간이 자신의 자연적인 목적과 특히 초자연적인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이성에 의한 것이 아니라 신의 은총에 의한 것이다. 자연법과 신법의 차이는 이렇다. 자연법은 선에 대한 인간의 이성적인 지식을 나타내며, 지성은 그 지식에 의해 의지에게 인간의 욕구와 정념을 조정하게 한다. 그러면 인간은 정의, 절제, 분별이라는 기본적인 덕들을 이룸으로써 자신의 자연적인 목적을 만족시키게 된다. 반면에 신법은 계시를 통해 신에게서 직접 비롯되며 신의 은총에 의한 선물이기도 하다. 이를 통해 인간은 자신의 본래적인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신의 은총에 의해 더 고귀하거나 신학적인 덕, 즉 믿음, 소망, 사랑을 얻게 됨으로써 자신의 초자연적인 목적으로 향하게 된다.

7. 인간의 본성과 지식

토마스 아퀴나스는 인간을 <영혼과 육체의 통일체>로 보았다. 그는 영혼이 없다면 육체도 있을 수 없고, 육체가 없으면 영혼도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인간이 이성적인 동물이 될 수 있는 것은 지성 때문이라고 보았다. 지성은 인간에게 신을 관조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하기도 한다. 따라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능력은 이 지성 속에 내재한다.

플라톤은 감각적 지식은 어떠한 확실성도 없다고 주장했다. 절대적인 지식은 이데아나 형상 안에 존재한다고 믿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러한 플라톤의 이데아론에 기독교 사상을 적용했다. 이데아는 신의 정신 안에 존재하며, 신의 빛을 통해 인간의 정신을 비추게 될 때 비로소 인간은 진리를 터득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그에 의하면 우리가 사물을 감각할 때 우리의 정신은 그것의 본질을 인식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지성은 사물 안에서 보편자를 본다. 지성은 개별자로부터 보편자를 추상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정신 능력을 <능동적 지성>이라고 불렀다. 감각 기관 안에 없던 것은 지성에 있을 수 없기 때문에 감각 경험이 없는 지식은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보편자가 (1) 사물의 외부에 존재하지만 신의 정신 안에서 신성한 개념으로만 존재하며, (2) 종의 모든 구성 요소들 속에서는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본질로서 사물 내에 존재하고, (3) 개체로부터 보편 개념을 추상한 후에 정신 내에 존재하기도 한다고 했다.

8. 주의주의와 유명론

토마스 아퀴나스의 업적은 신학과 철학의 융합이었다. 그러나 그다음 세기에는 이를 다시 해체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요한네스 둔스 스코투스(1265?~1308), 윌리엄 오컴(1280?~1349?)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들은 많은 문제들에서 토마스 아퀴나스와 의견을 같이 했지만 근본적인 사상에 대해서는 반기를 들었다. 그리하여 철학과 신학, 이성과 신앙을 갈라놓았다. 

8. 1. 주의주의

토마스 아퀴나스의 이성 우위에 반기를 든 스코투스는 신의 이성보다도 신에 내재하는 의자가 더없이 높다고 주장했는데, 이를 주의주의(voluntarism)라고 한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주장에 의하면 신과 인간의 의지는 지성에 종속되며 지성은 의지를 인도하거나 결정한다. 그러나 스코투스는 이러한 견해를 거부했다. 만일 신의 의지가 그의 이성에 종속되거나 영원한 진리에 의해 제한받는다면 신 자신도 제한받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신은 자신보다 위에 있는 어떤 이성적 규준에 의해 제한되거나 결정되기 때문에 자신이 원하는 일은 어떤 것도 할 수 없게 된다. 만일 신이 어떤 의미 있는 방식으로든 자유롭다면 그는 절대적인 자유 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야 하며, 따라서 그의 이성이 아닌 의지가 곧 그의 지배적인 능력이 된다. 19세기에 이러한 입장은 라틴어의 voluntas나 의지라는 단어에 기초하여 <주의주의>라고 불리게 되었다.

즉, 스코투스는 신의 지성이나 이성보다 의지가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달리 해석하면 이성은 별로 중요한 고려요소가 아니라는 것이다. 단적으로 신이 그렇게 하도록 의지한다면 살인도 허용될 수 있다. 이는 기존의 도덕적 기준을 흔들었다. 스코투스는 도덕이란 이성이 아닌 의지에 기초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도덕은 이성적인 탐구, 즉 철학의 주제가 될 수 없으며 단지 신앙과 수용의 문제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주의주의의 좀 더 확대된 결론은 다음과 같다.

인간의 이성은 원인과 결과가 상호 연결되어 있는 이성적인 질서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에 이성에 의해 결과로부터 원인으로의 확실한 추론이 가능하다는 <자연 신학>은 성립될 수 없다. 즉 이런 견해를 가지고 우리가 경험 세계와 신 사이에서 어떤 이성적 연관 관계를 발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신의 존재 증명은 기껏해야 <개연적> 논증에 지나지 않으며, 따라서 신의 존재도 철학적 발견이 아니라 신앙의 문제가 되는 것이다.

8. 2. 유명론

보편자가 어떤 형태의 존재를 소유한다는 토마스 아퀴나스에 반대하여 오컴은 보편자가 단지 단어에 불과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를 유명론(nominalism) 또는 명목론이라 한다. 유명론을 주장한 오컴도 주의주의자였다. 그의 급진적 주장은 당시 가톨릭 교단의 위계질서에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 

유명론은 우리가 흔히 쓰는 보편적 용어는 특정한 사물을 볼 때 우리가 형성하는 정신적 개념을 지시하는 <기호>나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예를 들어 <인간성>이라는 단어를 살펴보자. 이는 제임스나 존과 같은 특정한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특성을 뜻한다. 그 이외의 어떤 실체가 있는 건 아니다. 제임스나 존이 분유 하고 있는 인간적 본질을 지닌 어떤 실제적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즉, <인간성>이라는 이데아나 형상이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인간성>을 언급할 때는 실제로 만나는 특정한 사람들의 특성을 뜻하는 것일 뿐이다. 오컴에게는 오직 구체적인 개별 사물만이 존재한다. 

우리가 보편적인 용어를 사용할 때 우리는 특정 사물에 대하여 단지 정연한 방식으로 생각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인간의 이성은 개체에 국한된다. 오컴은 순수하게 경험적이다.

유명론은 오컴의 면도날(Ockham's razor)이라고 알려진 단순성의 원리에 기초한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적은 수의 원리에 의해 설명될 수 있는 것이 불필요하게 많은 원리에 의해 설명되고 있다.> 실재론자는 개별적 대상, 독립적으로 현존하는 속성들, 이것들에 대한 우리의 정신적 개념들을 가정한다. 하지만 유명론자는 개별 대상과 그 대상들에 관한 언어화된 정신적 개념들 뿐이라고 생각했다. 실재론자는 세 영역을 가정하는데 비해 유명론자는 두 영역만 강조한다. 단순할수록 진실이라는 오컴의 면도날에 의하면 실재론에 비해 유명론이 단순하고, 따라서 유명론이 진실이라는 것이다. 

오컴은 스코투스와 마찬가지로 이데아론을 거부했으며, 신의 이성보다도 의지가 더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인간이 신의 정시 안에 이데아로서 존재하는 영원한 원형을 반영하기 때문이 아니라 신이 그런 식으로 인간을 만들고자 의지했기 때문에 인간은 인간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편자는 인간의 정신 외부에 존재하는 그 무엇도 아니다>라고 오컴은 말한다.

보편자에 대한 오컴의 엄격한 해석에 의해 형이상학은 철학에서 분리되었고, 철학은 과학과 좀 더 비슷해졌다. 종교적인 진리는 철학이나 이성에 의해 터득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를 <이중 진리론>이라고 한다. 하나의 진리는 과학이나 철학에 의해 획득 가능하고, 다른 진리는 신의 계시를 통해 획득 가능하다. 전자는 이성의 산물이며, 후자는 신앙의 문제다. 더구나 두 진리는 서로 영향을 미칠 수 없다. 신학적 진리와 철학적 진리는 서로 독립적이고 서로 추론 불가능한 서로 다른 진리다.

 

이상으로 중세 철학에 대해 정리해봤다. 고대나 근대에 비해 중세는 철학의 암흑기였다고 볼 수 있다. 지나치게 종교를 강조하는 분위기 때문에 철학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시기였다. 중세 사람들은 모든 사고의 배후에 신을 두었다. 실제로 신을 믿은 건지, 신을 믿지 않으면 반역자로 내몰리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믿는 척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모든 문제를 신에 의지했기 때문에 이성적인 탐구가 이루어지긴 힘든 시기였다. 종교는 신앙의 문제고, 철학은 이성의 산물이기 때문에 신앙보다 이성을 중시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나마 신앙과 이성을 조화롭게 융화시킨 철학자에 의해 중세 철학이 발전할 수 있었다. 그중에는 기존 중세 철학에 반하는 스코투스나 오컴과 같은 인물들도 있었다. 그들이 근대 초기 철학의 발판이 되지 않았나 싶다.

평소에 철학을 좋아했지만 고대, 근대, 현대 철학만 탐구했었지 중세 철학을 이렇게 체계적으로 정리한 건 처음이다. <중세 철학은 곧 '종교'다>라는 편견이 있어 굳이 정리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생각보다 이성의 가치를 높게 산 철학자도 많았고 맹목적으로 신만을 갈구한 건 아니었다. 의외로 배울 점도 많았다. 이제 근대 초기 철학을 정리해보려 한다. 본격적으로 이성의 세계로 진입하기 때문에 더 재미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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