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귀퉁이 서재

[쇼펜하우어] 인생론 본문

책과 사유

[쇼펜하우어] 인생론

데이터 파수꾼 Baek Kyun Shin 2021. 8. 4. 20:57
참된 고전 원작을 그대로 애써 꾸준히 읽어라. 이 말에는 더 이상 덧붙일 말이 없다.  - A.W. 슐레겔

쇼펜하우어는 내가 막연히 좋아하는 철학자다. '막연히'라고 표현한 이유는 이 책을 제외하곤 쇼펜하우어의 책을 읽어보지 않아서다. 쇼펜하우어 철학을 설명한 다른 책을 읽었을 뿐이다. 그의 주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언제나 인터넷 서점 장바구니에 담겨 있다. 그 말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계속 안 사고 있다는 이야기다. 여유를 가지고 진득하니 봐야 할 책이라 못 보고 있다. 언제 보려나...

적잖은 작가와 철학자, 예술가들이 쇼펜하우어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 마르셀 프루스트, 에밀 졸라, 토마스 만, 헤르만 헤세, 프란츠 카프카, 안톤 체호프, 윌리엄 서머싯 몸, 조지 버나드 쇼, 칼 융, 프리드리히 니체, 비트겐슈타인, 칼 포퍼 등 당대 최고의 작가와 철학자들이 쇼펜하우어 사상에서 영향을 받았다.

톨스토이는 유일하게 쇼펜하우어의 초상화만을 집에 걸어두었다고 한다. 톨스토이는 쇼펜하우어의 책을 번역한 자신의 친구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이번 여름에 내가 뭘 했는지 알고 계십니까? 나는 쇼펜하우어를 읽으며 강력한 기쁨을, 여태껏 한 번도 몰랐던 감동을 만끽했습니다. 나는 쇼펜하우어의 모든 책을 모조리 구해서 읽었고 자주 읽고 있습니다. 앞으로 이런 내 의견이 언제 변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나는 쇼펜하우어야말로 모든 인간들 중에 가장 위대한 천재에 속한다고 생각합니다. 언젠가 당신은 쇼펜하우어가 철학적 주제들을 다룬 무언가를 썼다고 말해주셨습니다. 그게 무엇인가요? 그것은 경이롭고도 생생하게 성찰되는 온전한 세계입니다. 나는 벌써부터 쇼펜하우어의 글을 번역하기 시작했습니다. 나와 함께 번역에 참여하시겠습니까? 쇼펜하우어의 책을 많이 읽는 나는 어째서 아직도 쇼펜하우어가 그토록 세상 사람들에게 덜 알려졌는지 이해가 안 됩니다. 그 이유란 아마도, 쇼펜하우어가 토로했듯이 세상은 하찮은 인간들로 가득하기 때문이겠지요."
- 톨스토이

노벨 문학상을 받은 앙드레 지드는 이런 말을 남겼다.

"나는 쇼펜하우어에게서 위로를 받았다. 표현할 수 없는 기분으로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자세히 읽어나갔고 자주 읽었다. 다른 모든 것들이 나의 주의를 뺏지 못할 정도로 집중해서 읽었다. 스피노자나 니체같은 철학자들의 책도 읽었다. 내가 철학에 빠진 계기는 쇼펜하우어 덕분이며 오로지 쇼펜하우어 덕분이었다."
- 앙드레 지드

분석심리학의 개척자인 카를 융은 쇼펜하우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나의 탐구가 가져다 준 가장 큰 결실은 쇼펜하우어였다. 쇼펜하우어는 눈에 보이도록 여실히 우리를 둘러싼 고통과 고난에 대해서 처음으로 이야기한 사람이었다. 다른 모든 사람들은 이것을 주목하지 않는 것 같다."
- 카를 융

쇼펜하우어를 향한 작가와 철학자들의 평가를 보니, 다른 책은 재껴두고 그의 책부터 읽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그래서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언제 읽을 건데?).


<인생론>은 2~3페이지의 짧은 글로 구성된 에세이집이다. 쇼펜하우어의 생각을 간결하게 보여주는 책이다. <인생론>을 읽노라면 쇼펜하우어가 인도 철학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행복을 '불행이 없는 상태'라고 여긴 점, 불행하지 않으려면 욕망과 허영을 없애야 한다고 말한 점, 자칫하면 허무주의에 빠질 수 있다는 점, 길흉화복에 일희일비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한 점 등에서 알 수 있다.

<인생론>에 나온 쇼펜하우어의 잠언을 정리해봤다. 

독과 같은 명예욕

모든 고뇌와 번민, 불안과 초조의 80~90%는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걱정에서 비롯한다.

 

칭찬을 받으면, 비록 사탕발림이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흐뭇해한다.
인간의 이런 특성은 이해하기 어려울 만큼 어리석고 무의미하다.

 

행복하려면 진정한 자아와 남의 눈에 비친 자신을 확실히 구분해야 한다.
자신을 향한 제3자의 판단이란 아주 불확실할 수 있다.
왜냐하면 제3자가 멍청이일 수 있고, 어떤 일에 깊은 편견을 갖고 있는 사람이거나, 자신에 대해 큰 오해를 하고 있을 수도 있다. 사고방식이 천박하거나 무가치한 사람일 수 있고, 소견이 좁고 생각이 빈약한 사람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만일 그런 사람이 악평을 할 경우, 어떻게 우리는 그 악평을 가치 있는 견해로 받아들이겠는가.

 

사람들이 한평생 수많은 위험을 무릅쓰고 땀 흘려 노력하는 원인은 무엇일까?
이는 무엇보다도 남들에게 인정을 받기 위해서다.
남에게 인정받지 않으려면 왜 그토록 힘들고 고단한 삶을 살겠는가. 
남의 평가를 중요하게 여기는 습관이 굳어지면 굳어질수록 삶은 그만큼 해롭고 불리해진다.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남들이 알아주는 걸 개의치 않으며 사는 사람은 훨씬 행복하다.

 

행복은 주로 안정된 기분과 흐뭇한 상태를 뜻한다.
지금 안정된 기분이 좀 더 지속되길 바라는 마음 상태가 곧 행복이다. 
남의 시선을 의식하는 순간, 안정된 기분은 흐트러진다.
따라서 행복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허영심을 버려야 한다.
그것이 행복을 증진하는 방법이다.
만일 우리가 이 허영심을 줄이면 그만큼 불행도 줄어든다.
하지만 허염심을 없애는 일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기에 행복이라는 대가가 크다.

 

행복의 빛과 그림자

우리가 소유로 인해서 불행을 느낄 때는 자신의 욕망 지수를 줄여야 한다.
그 길밖에는 없다.


 

행복할 때는 자신이 행복하다는 사실을 느끼지 못한다.
불행해져야 그때가 행복했다는 점을 깨닫는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현재의 행복이란 없고,
행복은 과거의 기억에만 존재한다는 이야기가 된다.

 

내가 처세에 관해서 가장 큰 가르침으로 여기는 구절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 나오는 다음 구절이다.
"현명한 사람은 쾌락이 아니라 고통이 없는 상태를 원한다.
현명한 사람은 고통이 없길 바랄 뿐이지 쾌락을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행복이나 만족이나 쾌락 추구를 단념해야 한다.
큰 불행을 피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그것밖에 없다.

 

어떤 사람이 아주 작은 일 때문에 괴로워한다면 지금 행복을 누리고 있다는 뜻이다.

 

작고 조그마한 일을 잘하는 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든다.
작은 일이란 무엇인가.
아무도 만나지 않고 혼자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거나 명상을 즐기고
또는 마당을 쓸고 꽃을 바라보는 일 같은 것이다.
일상의 평범한 일 그 자체가 그것이다. 


넓은 곳을 바라보기보다 좁은 시야를 가질수록,
또 행동 범위가 넓은 것보다 좁을수록 더욱 행복해진다.

세상을 넓게 보면 욕망이 커진다.
시야와 행동반경이 넓을수록 욕구가 더 많아진다.

그럴수록 욕구와 욕망을 이루려는 걱정과 불안이 커진다.

 

행복한 죽음

내가 인간의 삶을 하나의 착각으로 보는 이유는
모든 존재가 끝내는 파멸하기 때문이다.
결국은 무(無)로 돌아가는 존재가
왜 그토록 살려는 강한 의지를 보이는지 정말 불가사의한 일이다.

 

우리의 삶은 끝내 죽음을 통해 원래 상태로 돌아간다.
위대한 생명이 한낱 죽음으로 끝나고 말다니. 참으로 허망하다.
그런 뜻에서 보면 삶은 별 의미가 없고, 인간은 불쌍한 존재에 불과하다.
하지만 불쌍할 이유도 없다. 우리는 본래 없던 존재가 아닌가.
잠시 존재하다가 다시, 없는 상태로 돌아간다. 때문에 사실상 잃는 게 없다.
생각해보라. 우리가 죽음으로 무엇을 잃는단 말인가.

 

죽음은 잃는 게 아니라 본래대로 되돌려지는 것이다.
우리는 손해 볼 게 없다.
빈손으로 태어났다가 빈손으로 가는데 무슨 손해를 본단 말인가.

 

호라시시스가 말한 바와 같이 '어떤 일에도 경탄하지 않는 경지'는 늙어서야 도달할 수 있나 보다.
세상이 공허하다는 사실, 세상의 아름다움도 허망하다는 확신이 들어야 참된 세계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처세론의 근본

어찌하여 끊임없이 계획을 세워 연약한 마음의 짐을 만드는 것이냐.

 

우리는 가장 친한 친구의 불행에 일종의 고소한 기쁨도 함께 느낀다.
사실 우리를 기쁘게 하는 일 중 하나는
최근 겪고 있는 친구의 불행과 슬픔에 관해 듣는 일이다.
이것이 인간이 지닌 특성이자 본성이다. 

 

자기 재능을 크게 과시하는 일처럼 어리석은 행동은 없다.
남의 재능을 보고 대다수 사람들이 칭찬과 격려를 할 것 같지만
속으로는 시기와 질투심에 사로잡힌다.
특히 똑같은 일로 경쟁 관계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증오나 원한을 사기 쉽다.
재능은 과시하는 순간 공격 대상이 된다.
이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는 재능을 애써 감춰야 한다.
남들과 똑같이 평범하다는 점을 보여야 한다.

 

남을 불합리한 생각과 허망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것만큼 어려운 일은 없다.
만일 남이 차마 귀로는 들을 수 없고,
전혀 이치에 닿지 않는 말을 하더라도 개입할 필요가 없다.
단지 그가 서투른 연극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사랑하지도 말고 미워하지도 말라.
이것이 지혜의 절반에 해당한다.
아무것도 말하지 말고 아무것도 믿지 말라.
이것이 지혜의 나머지 절반이다.
하지만 이런 명언을 지켜야 하는 이 같은 세상에서 사는
우리의 삶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가.

 

우리는 지나치게 기뻐해서도 지나치게 슬퍼해서도 안 된다.
세상은 변한다.
때문에 기쁨이 슬픔이 되기도 하고 슬픔이 뜻밖에 기쁨으로 바뀔 수 있다.
우리 머리로는 인간사의 길흉화복을 판단할 수 없다.

 

좋은 책은 두 번 이상 읽어야 한다.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한 가지 일을 두 번 경험하면 그 경험을 다른 일과 연관시키는 힘이 생긴다.
처음 놓친 부분을 되살릴 수도 있다. 결론에 대한 확신도 선다.
둘째, 처음과 다른 생각과 기분을 얻게 되면서 그 인상도 달라진다.
똑같은 물체에 다른 조명을 비춰보는 것과 같다.
두뇌가 원하는 만큼의 역량을 갖게 된다.
2 Comments
댓글쓰기 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