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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사유

[수 프리도] 니체의 삶

Baek Kyun Shin 2022. 12. 30. 16:14

작년에 뤼디거 자프란스키의 <니체>를 읽었다. 니체 삶에 초점을 둔 전기라기보다는 사상의 전기였다. 내용이 쉽진 않아 꽤 집중해서 읽은 기억이 있다. 형광펜으로 밑줄을 그어가며. 이번에는 니체 삶을 중심으로 설명하는 전기를 읽고 싶었다. 그래서 고른 책이 수 프리도의 <니체의 삶>이다. 뤼디거 자프란스키의 <니체>가 512쪽이었는데, 수 프리도의 <니체의 삶>은 692쪽이다. <니체의 삶> 분량이 더 많지만 내용이 술술 읽혀 자프란스키 책보다 훨씬 빨리 읽었다.

니체가 쓴 책이나 그의 철학보다도 '삶'을 중심으로 정리를 해봤다. 순전히 나를 위해 정리한다. 기억을 보듬으려고.
(이 글을 다 읽으려는 분이 한 명이라도 있을까 싶지만, 혹시 있다면 니체 사상에 대한 중요한 내용이 별로 없으니 뒤로 가기를 하는 게 좋겠습니다. 시간 낭비가 될 가능성이 큽니다.)

프리드리히 니체

1장 음악의 밤

니체는 어릴 때부터 음악 감수성이 뛰어났다. 가족들 말에 따르면, 어린 시절 니체에게는 말보다 음악이 중요했다. 니체가 바그너를 처음 알게 된 것은 학창 시절 때였다. "모든 점을 고려할 때 그의 음악이 없었다면 젊은 시절을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바그너가 니체에게 미친 영향은 컸다.

리하르트 바그너

 

니체의 외삼촌은 정신 이상 증세를 보이며 자살을 했고, 친할머니는 정신병이 있어 치료가 필요했다. 니체의 남동생도 뇌졸중으로 죽기 전에 심한 발작을 일으켰다. 단언할 수는 없지만, 니체의 가족은 신경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성향이 강했던 것만은 분명하다. 니체는 언제나 아버지의 죽음을 떠올렸다.

어렸을 때 이미 큰 아픔과 슬픔을 경험했다.
그래서 보통 아이들처럼 마음 편하게 어리광을 부린 적이 없다.
친구들은 내 진지한 태도를 두고 늘 나를 놀렸다.
어린 시절부터 나는 고독을 추구했다.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을 때가 제일 좋았다.
주로 탁 트인 자연에 있을 때가 그랬다.
자연에서 나는 정말 행복함을 느꼈다.
천둥 번개는 항상 나에게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한편, 돔 김나지움에서 받은 성적표는 니체가 성실한 모범생이었음을 말해준다. 어머니는 아들이 아버지를 따라 목사가 되기를 바랐다. 니체는 열심히 공부해서 신학 과목에서 우수한 성적을 받았다. 신앙이 깊었던 열두 살 니체는 모든 영광 속에 있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며 자신의 삶을 하나님에게 바치기로 마음먹었다.

2장 독일의 아테네

운동에는 소질 없고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며 너무 똑똑하기만 한 니체는 학창 시절 친구들 사이에서 당연히 인기가 없었다. 니체가 가장 좋아한 시인은 프리드리히 횔덜린이다. 선생님들은 횔덜린이 정신이나 도덕적인 면에서 건전하지 않다고 생각해 좋아하지 않았다. 횔덜린은 말년으로 갈수록 정신이 이상해졌기 때문에 학교에서 배우는 인물로는 부적절했다.

프리드리히 횔덜린(독일 시인, 1770~1843)

신이 되기 위한 과정으로서 광인이 되어간다는 주제는 니체와 횔덜린, 엠페도클레스의 삶과 사상을 모두 관통한다.

3장 네 자신이 되어라

양심에 귀 기울일 방법은 수백 가지가 있다. 하지만 내가 무언가를 옳다고 느끼는 건 나에 대한 깊은 성찰 없이 어릴 때부터 옳다고 규정된 것들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일 수도 있다.

니체는 본대학교에 입학했다. 관심이 있는 분야는 고전문헌학이다. 하지만 순종적인 아들 노릇을 하느라 신학을 전공해야 했다. 어머니는 니체가 목사가 되길 바랐기 때문이다. 본대학교를 선택한 건 당시 이름난 고전학자였던 프리드리히 리츨과 오토 얀 교수 때문이었다. 니체는 신학 수업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어려서부터 음악에 관심 있던 니체는 본대학교에서 보낸 두 학기 동안 여전히 음악과 작곡에 열의를 보였다. 그러면서 아직 완전히 신앙심을 잃지는 않았지만, 기독교에 상당히 의구심을 품기 시작했다.

한편 리츨 교수와 얀 교수가 서로 다퉈, 리츨 교수는 라이프치히대학교로 옮겼다. 그런 바람에 니체도 리츨 교수를 따라 라이프치히로 학교를 옮겼다. 라이프치히에서 시작한 새 출발은 순조로웠다. 니체는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공부했다. '고전학회'라는 모임도 찾아냈다. 당시 꽤 유명한 문헌학회에도 가입해 고전문헌학과 관련된 크고 작은 모호한 주제에 관해 라틴어로 논문도 썼다.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친구들과 찍은 사진 (오른쪽 니체)

스물네 번째 생일을 맞이한 니체는 바로 3주 뒤에 리하르트 바그너와 영광스러운 첫 만남을 가졌고, 얼마 뒤 바젤대학교 문헌학 교수 자리를 제안받았다. 아직 학생에 불과한 니체에게는 놀라운 제의였다. 그는 본대학교와 라이프치히대학교에서 각각 두 학기를 보냈을 뿐 학위도 없었다. 하지만 사람 보는 눈이 뛰어난 리츨 교수는 니체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를 적극 추천했다. 교수직을 제안받은 날이 1869년 2월 13일이었기 때문에 니체는 약 한 달 뒤인 3월 23일에 논문 심사도 받지 않고 라이프치히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4월부터 3천 프랑의 급여를 받으며 바젤대학교에서 고전문헌학 교수로서 수업을 시작했다.

스위스 바젤대학교(1459년에 설립되었고, 바젤대학교에 다녔거나 관련된 인물은 에라스무스, 오일러, 니체, 후버, 카를 융 등이 있다.)

바젤대학교는 니체가 군대에 불려 가기를 원치 않았다. 그래서 니체에게 프로이센 시민권을 포기하고 스위스 국적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니체는 프로이센 시민권을 버렸지만, 스위스 시민권을 취득하는 데 필요한 요건을 채우지 못해 결국 평생 국적 없이 지내야 했다. 하지만 그는 교양 없는 속물 계급에 속하기보다 그 편이 확실히 낫다고 생각했다.

그런 와중  여전히 바그너 음악이 니체에게 마법을 걸었다. 시간이 갈수록 그 마법은 점점 더 강한 힘을 발휘했다. 바그너의 음악을 들을 때는 냉정함을 지킬 수 없었다. 그래서 온몸의 신경이 전율하고 모든 세포가 떨렸다.

4장 낙소스섬

1870년 프랑스의 나폴레옹은 프로이센에 전쟁을 선포했다. 니체는 전쟁에 참전할 계획이었다. 바젤대학교는 니체가 사실상 스위스 시민이므로 비전투원인 위생병으로 참여하는 걸 조건으로 니체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니체는 전쟁의 참상을 어머니에게 편지로 전했다.

가엾은 유골이 사방에 끝도 없이 흩어져 있고 거리는 시체 때문에 악취가 가득합니다.

불행히도 니체는 전쟁 중에 병에 걸려 위생병을 그만두어야 했다. 참담했다. 병세는 거의 목숨을 위협할 정도로 심했다. 그때 처방받은 약인 질산은과 아편, 탄닌산 관장제는 당시에는 일반적인 치료제였지만, 환자의 장기에 평생 영향을 줄 만큼 치명적이다. 극심한 고통과 구토 때문에 니체는 약을 스스로 처방하는 나쁜 습관이 생겼다. 이 약들은 잠시 증상을 가라앉힐 뿐 시간이 갈수록 그의 체질을 더 나쁘게 만들었다.

점차 몸을 회복하면서 다음 학기 강의 준비를 하고 친구들에게 편지를 쓰며 바쁘게 지냈다. 전쟁터에서 소름 끼치는 기억이 밤낮으로 니체를 괴롭혔겠지만, 편지에는 그런 얘기를 쓰지 않았다. 니체는 장기 손상, 황달, 불면증, 구토, 치질, 구강 출혈에 시달려야 했다. 어느 날 이렇게 편지를 쓴다.

빛나는 예술 작품, 심지어 한 시대의 모든 작품이 하루아침에 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하니
그 모든 학문적, 과학적, 철학적 업적과 예술 작품이 다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더군.
나는 그동안 예술의 철학적 가치에 내 신념을 걸었어.
예술이 그저 불쌍한 인간을 위해 존재해선 안 된다고,
더 높은 의미의 어떤 사명을 이루어야 한다고 말이야.

요양을 하려고 니체는 여동생 엘리자베스와 알프스로 떠났다. 그곳에서 니체는 그리스 비극의 기원과 목적, 그리고 그리스 비극이 현재와 미래 문화에 미치는 영향을 설명하는 그의 첫 번째 저서인 《비극의 탄생》을 썼다.

비극의 탄생(1872)

당시 문화 퇴보를 냉정하게 비판하면서 바그너의 시각으로 새로운 통일 독일의 문화 부흥을 이루려는 목적에서 《비극의 탄생》을 썼다.

5장 비극의 탄생

예술과 문화가 계속 발전하려면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라는 두 가지 상반된 성질이 필요하다. 두 성질은 잠시 조화를 이룰 뿐 끊임없이 대립한다. 니체는 아폴론적인 것을 조형 미술, 특히 조각이라고 생각했다. 아폴론적인 것의 특징은 눈으로 확인할 수 있고 설명할 수 있다. 쇼펜하우어식으로 보면 '표상'이다. 아폴론적 세계는 도덕적이고 이성적인 사람들로 이루어진다.

아폴론(왼쪽)과 디오니소스(오른쪽)

반면 디오니소스적인 것에 속하는 예술은 음악과 비극이다. 음악과 비극은 충동성을 깨운다. 그렇게 감정이 고조되고 개인의 자아가 점점 줄어들면 완전한 몰아의 상태가 된다. 개인의 영혼은 극도의 행복이나 공포심을 초월하는 상태로 신비스럽게 변한다. 음악 정신을 통해서만 우리는 자기를 완전히 잊는 무아지경의 황홀경을 이해하게 된다.

니체는 소크라테스의 합리주의 때문에 그리스 비극이 몰락했다고 생각했다. 니체에 따르면 '학문의 전수자'인 소크라테스는 광기에서 나오는 아름다운 광채로 빛난 적이 없었다.

소크라테스는 대부분의 문명 세계에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보편적인 지식욕을 부추기고
능력이 뛰어난 모든 사람에게 본연의 과제로서 학문을 제시했다.
그는 학문을 높은 대양으로 이끌고 갔으며,
그 후 대양에서 완전히 물러나는 법이 없다.

니체는 소크라테스를 비판한다. 소크라테스식 통찰력이라는 건 세계가 현상을 모사 이상을 보여준다는 사실을 무시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디오니소스적인 것, 즉 의지도 존재한다. 니체가 관찰한 바로, 학문은 그리스에서 소크라테스가 나타난 이후부터 문제가 됐고, 다윈 이후 유럽에서도 여전히 문제였다. 학문이 자연을 설명한다고 믿고 지식을 모든 것의 만병통치약으로 믿어 모든 신화를 말살했다.

6장 포이즌 코티지

니체는 점점 건강이 나빠졌다. 눈도 나빠져 글을 읽거나 쓰기도 어려운 지경이 됐다.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병이 내 모든 습관을 완전히 바꿀 권리를 주었다.
내 병은 내가 망각하기를 허용했고, 요구했다.
내 눈은 책벌레와 관련된 모든 습관에 작별을 고하게 했다.
쉽게 말해 문헌학과 작별을 고했다. 나는 '책'에서 벗어났다.
그것은 나에게 내린 최고의 축복이었다!
제일 밑바닥에 있던 나 자신, 끊임없이 다른 자아의 목소리를 듣느라
침묵을 강요당했던(독서를 말한다!) 나 자신이 수줍어하며
의심에 가득 찬 눈으로 서서히 깨어났다.

7장 개념의 지진

니체는 사람들이 거의 찾지 않는 책 몇 권과 문헌학의 천재였다는 빛바랜 명성만 남긴 채 서른을 맞이했다. 건강은 계속 나빠졌다. 발작을 하거나 피를 토하기도 했다. 너무 고통스러워서 죽기를 바랐던 순간도 여러 번 있었다.

한편, 니체는 바그너에게 점점 등을 돌렸다. 바그너의 속물근성이 싫었기 때문이다. 바그너는 니체가 음악적으로 자신을 배신한 것 같아 기분이 나빴고, 니체도 바그너의 속물근성이 점점 보기 싫었다. 음악의 '대가'인 그가 한때 함께 욕했던 돈의 힘 앞에 완전히 굴복한 것 같았다. 바이로이트는 그들이 함께 꿈꿔왔던 이상적인 세계, 즉 모두가 평등하고 자유롭게 문화 부흥을 이루는 곳과는 거리가 멀었다.

8장 마지막 제자와 첫 제자

니체는 <바이로이트의 리하르트 바그너>라는 50페이지 분량의 논문을 썼다. 바그너의 천재성을 찬양하면서도 바그너에게서 벗어나야 할 이유를 깨달았다. 바그너는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는 위대한 음악가지만 얼마나 위험한 영향을 주는 사람인지 부인할 여지가 없었다. 니체는 자신이 성장하려면 먼저 바그너를 넘어서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 생각으로 심한 내적 갈등을 겪는다.

바그너의 음악이 자신의 감각에 미치는 숭고한 힘을 오랫동안 찬양해 왔지만, 결국 그게 자신의 자유 의지를 빼앗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러자 한때는 인생 최고의 구원이라 생각한 난해하고 광적인 그의 음악이 적대적으로 느껴졌다. 이제 바그너는 낭만주의를 흉내 내는 연기자이자 위선적인 독재자, 교묘하게 감각을 조작하는 사기꾼 같은 존재로 느껴졌다. 이제 니체에게 바그너는 병적인 존재다.

9장 자유로운 영혼과 자유롭지 못한 영혼

니체는 자신의 독창적인 생각을 죽이는 잡초를 베어버리고 싶었다. 즉 지금까지 우상으로 여긴 바그너와 쇼펜하우어를 지워버리고 싶었다.

10장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이후 니체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을 썼고, 이 책이 위기의 기념비라고 말했다. 이 책엔 ‘자유로운 영혼을 위한 책’이라는 부제가 달렸다. 오랫동안 이어진 모든 허구에서 벗어나 문화·사회·정치·예술·종교·철학·도덕·과학과 관련한 질문을 기꺼이 탐구하려는 사람을 위한 책이다. 니체는 현상계(the phenomenal world)를 볼테르적 시각으로 탐구하며, 실재계(noumenal world)는 접근하기 힘들 뿐 아니라 인간에게 별 의미가 없다고 말한다. 그는 자유로운 계몽운동의 계승자가 되고 싶었다. 니체는 볼테르에게 그 책을 헌정하면서 자신의 의도를 분명히 했다. 바그너에 대한 도전을 확실하게 하는 행위였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초판

먼저 ‘최초의 것과 최후의 것에 관하여’는 철학자의 기본 사고에 선천적 결함이 있다는 지적으로 시작한다. 즉, 철학자들이 인간 본성을 영원한 진리로 본다는 점을 꼬집었다. 철학자들은 인간이 온갖 혼란에서도 변하지 않는 존재이며 사물의 확실한 척도라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이는 한정된 시간 동안 관찰한 인간의 모습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주장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은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 진화해 왔다. 세상에는 영원한 사실도, 절대 진리도 없다. 인간 발달에 관한 모든 본질적인 점은 4천 년보다 훨씬 오래 전인 태고의 시대에 나타났다. 4천 년 동안 인간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그런데 철학자는 현대인의 모습에서 ‘본능적인 점’을 보려 한다. 그것을 변하지 않는 사실이라 믿으며, 세계를 이해하는 핵심 고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인간 중심 사상이나 신을 인간과 비슷하게 바라보는 신인 동형설로는 세계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한다. 종교, 도덕, 미적 감수성은 사물의 표면과 관련 있는 것인데도, 철학자들은 세상의 중심에 닿았다고 믿고 싶어 한다. 이런 생각은 인간을 아주 행복하게 혹은 불행하게 만든다. 인간의 삶에 의미를 주는 것들이니까. 그래서 인간은 하늘의 별이 인간의 운명을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믿으며 점성술의 망상 속에서 자신을 속인다.

세상 사람들이 미덕이라 부르는 것은
벌 받지 않고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적당히 이름 붙인,
우리의 열정이 만들어낸 환영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은 잠언적 문체로 번호를 매겨 쓴 니체의 첫 번째 책이다. 건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쓴 짧고 강렬한 문체 덕분에 단점이 장점으로 바뀌었다. 니체는 이런 방식으로 글을 써 한층 더 심도 있는 질문을 자극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이 책으로 니체는 독창적인 문장가이자 진정한 사상가로서 알려지게 됐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증정본을 받은 다른 사람들은 니체를 따라 바그너와 쇼펜하우어에 깊이 빠져 있던 사람들이라 배신감을 느끼거나 당황해하거나 불쾌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니체는 그들이 의구심을 표현할 때 이렇게 단호히 말했다.

나는 추종자를 원치 않는다.

니체는 이제 주변 사람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가장 정점에서 빛나고 있던 바그너와 코지마를 대신할 무언가가 필요했다. 여동생인 엘리자베스는 니체의 소개로 코지마와 친분을 맺은 후로 그들 부부를 여러모로 소소하게 도왔다. 두 여성 모두 몹시 속물이고 신앙이 독실하다는 공통점이 있었고,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을 읽고 불쾌해했다. 코지마는 엘리자베스에게 니체의 책이 수준도 낮고 도덕적으로는 통탄할 지경이라고 솔직하게 편지를 썼다. 니체가 자신들을 떠나, 튼튼한 요새로 무장한 적군의 진영으로, 다시 말해 유대인에게로 간 것이다.

니체는 이제 집안일을 도와주는 엘리자베스가 곁에 없기 때문에 시내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가구를 팔고 동물원 근처 마을 외곽으로 집을 옮겼다. 완전히 혼자가 된 그는 통증과 피로로 몹시 힘든 상태였다. 1879년 5월 2일, 니체는 결국 건강상의 이유로 교수직을 사임했다.

11장 방랑자와 그의 그림자

니체는 1879년 한 해를 돌아보며 118일간은 극심한 고통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고 기록했다. 그렇게 죽음에 직면하면서 그가 얻은 바는 무엇인가? 중요하지 않은 글 몇 편과 실패로 끝난 교수 생활, 책 두 권이 전부다. 그중 한 권인 《비극의 탄생》은 이미 마음이 떠난 바그너를 기쁘게 한 것 말고는 문화 개혁에 아무 역할도 못 했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은 하늘 높이 날아오르려던 이카로스의 열망을 품었으나, 세 명의 팬만 확보할 뿐 별다른 비평을 얻지 못했다.

절망적이네. 고통이 내 삶과 의지를 집어삼키고 있어.
다섯 번이나 죽음의 의사를 불렀다네.

니체는 오버베크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 하지만 고통 심할수록 생각도 깊어져 "그전까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생각들이 떠오른다."라고도 했다. 자신을 폭발할지 모르는 기계라고 말한 니체는 정말로 8월 초에 디오니소스와 아폴론적 이분법을 떠올린 이후 처음으로 폭발적인 생각을 떠올렸다. 실바플라나 호숫가에서는 그가 나중에 '차라투스트라 바위'라고 부른 피라미드 모양의 거대한 바위를 바라보며 처음으로 '영원 회귀 사상'을 생각해 냈다.

12장 철학과 에로스

루 살로메는 평생토록 니체에게 가장 중요한 여자였다. 니체는 루에게 두 차례 청혼했지만 루가 모두 거절했다.

루 살로메

어느 날 니체와 루는 필라투스산처럼 신화와 상징으로 가득한 몬테 사크로 언덕에 올랐다. 니체는 나중에 루와 함께 그 언덕에 오르던 순간이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험이었다고 말했다. 그녀와 함께 몬테 사크로를 오른 그날 이후, 그는 오랫동안 찾고 있던 제자를 찾았다는 확신이 들었다. 루는 온 세상이 니체를 새로운 종교의 예언자로 보게 될 것이고, 그 종교는 영웅을 제자로 삼을 것이라 예언했다.

두 사람은 서로 생각이 얼마나 비슷하고, 사물을 얼마나 비슷하게 느끼고, 어떻게 단어가 그들 사이를 오갔는지 설명했다. 그들은 음식을 취하듯 서로의 입에서 단어들을 취했다. 두 사람이 생각 하나를 마무리 짓고 문장 하나를 완성할 때마다 서로의 지식이 한데 어우러졌다. 니체는 산에서 내려왔을 때, 그녀에게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고마워요. 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꿈을 꾸게 해주어서.

니체와 루는 레를 만나 함께 사진관으로 갔다. 그리고 그 유명한 사진을 함께 찍었다.

루 살로메(왼쪽), 레(가운데), 니체(오른쪽)

13장 철학자의 제자

니체는 루를 위해 글을 쓸 때 필요한 지침을 알려주었다. 지침은 이렇다.

- 문체는 활기차야 한다.

- 글을 쓰기 전에 자신이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정확히 알아야 한다.

- 글을 읽는 대상에 문체를 맞추어야 한다.

- 긴 문장은 허식이다. 호흡이 긴 사람만이 긴 문장을 쓸 자격이 있다.

- 독자에게서 반대 의견을 빼앗는 것은 좋은 태도, 영리한 태도가 아니다. 지혜의 궁극적인 본질을 독자 스스로 찾게 하는 것이 좋은 태도이자 영리한 방법이다.

- 인간은 발이 빨라야 한다. 인간은 춤을 추어야 한다. 삶은 간단하지 않다. 만약 어느 날 누군가 과감히 영혼의 본질에 상응하는 건물을 짓는다면, 미로를 모델로 삼아야 할 것이다. 춤추는 별을 잉태하려면 먼저 내면에 혼란이 있어야 한다. 모순과 마음의 변화, 산만해지고 싶은 충동, 그것이 필수다. 고정된 생각은 죽은 생각이고 꾸며낸 마음은 죽은 마음이며 벌레만도 못한 것이다. 그러니 발로 짓밟아 완전히 없애버려야 한다.

14장 아버지인 바그너가 죽고, 아들이 차라투스트라가 태어났다.

니체는 밤만 되면 오한과 고열에 시달렸고 만성피로가 쌓여 식욕이 없었다. '오랜 두통'은 아침 7시에 시작해 밤 11시까지 이어졌다. 그러면서 위버멘쉬의 개념을 생각해낸다.

인간은 무엇인가? 식물과 유령 사이에 있는 혼합체이다. 위버멘쉬는 무엇인가? 위버멘쉬는 지구에 충실하게 남아 있는 지구의 의미다. 그는 지구를 벗어난 영역의 희망을 제안하는 사람을 믿지 않는다. 그들은 삶을 멸시하는 자이고, 자기 자신을 독살하는 자이다.

위버멘쉬는 잔인하고 임의적이고 처참해 보이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영원한 이성의 거미가 죄인을 벌하려고 보내는 벌이 아님을 안다. 세상에는 영원한 이성의 거미도, 영원한 이성의 거미줄도 없다. 오히려 삶은 신성한 우연을 위해 춤추는 무도회장이다. 의미라는 것은 그 무도회장에서 일어나는 신성한 우연에서 보이는 긍정의 반응을 통해 찾아야 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인간은 목적이 아니라 다리라고 설파한다. 그 점이 인간의 영광이다. 인간은 짐승과 위버멘쉬 사이에 있는 심연을 가로지르는 밧줄이다.

니체에게 차라투스트라의 영감을 준 바위 (일명 차라투스트라 바위)

16장 그가 나를 덮쳤다.

니체는 자유로운 생각을 방해하는 걸 혐오했다. 그래서 위버멘쉬가 되는 길을 직접 보여주지 않고, 위버멘쉬가 무엇인지도 말해주지 않는다. 이 점이 니체에게 느껴지는 가장 답답하고 괴로운 특징이다.

위버멘쉬는 니체가 미래를 위해 마음속에 그린 강력한 인물이고, 유럽의 타락과 교회의 지배 아래 탄생한 도덕적, 문화적 소인배에 대한 해독제이다. 그는 신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회의론과 허무주의에 굴복하지 않는 인물이며, 종교에서 벗어난 자유로 자신의 삶을 더 강하게 만드는 인물이다. 종교적 믿음에서 벗어났듯 그 믿음을 과학으로 옮겨가기도 거부한다. 위버멘쉬는 안정된 세상을 느끼기 위해 믿음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17장 허공에 외치다

모든 진리는 개인적인 해석일 뿐이다. 우리는 우리가 속한 사회 내에 존재하는 기억과 정신 상태에 불과하다. 아마도 진리는 없다는 것이 진리일 것이다.

니체는 체계를 만드는 일을 거부한다. 관념을 버리고, 자유로운 정신을 갖기를 원했다. 확고하게 독립하려면 어떤 일에도 집착해서는 안 된다. 초연함에도 집착하면 안 된다. 쉽게 독립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독립은 줄을 타고 건너는, 무모할 정도로 용기를 내는 사람만이 누리는 특권이다. 노예 도덕에 대한 해결책은 '위버멘쉬'의 도덕, 바꿔 말해 자유롭고 긍정적이며 독립적인 위버멘쉬의 정신이다.

'힘에의 의지'도 니체 사상에서 중요한 말이다.

힘에의 의지는 절대 멈추지 않는다. 그것은 개인과 개인, 집단과 집단, 국가와 국가 사이에 존재하는 변화무쌍한 힘이다.

자유를 얻으려면 위버멘쉬가 되어야 한다. 그러려면 힘에의 의지를 가져야 한다. 결코 편한 상태가 아니지만 말이다.

19장 나는 다이너마이트다!

평생 여기저기 떠돌던 니체는 이제 토리노에 왔다. 베네치아에서 있을 때처럼 주변을 맴돌며 그를 챙겨주었던 고마운 페터 가스트도 없었고, 실스마리아에서처럼 그에게 관심을 보이던 여름 인파도 없었다. 니스에서 그랬듯 그의 시력과 주머니 사정을 고려해주던 친절한 이웃들도 없었다. 토리노에서는 다른 사람의 연민이라는 부담에 얽매이지 않고 완벽하게 자유로운 정신이 될 수 있었다.

20장 토리노의 영혼

니체 편지에 새로운 특징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는 점점 공격적이고 전투적이며 위압적인 태도를 보였다. 자신을 신성화하는 표현도 여기저기 나타났다. 자신의 지위와 힘에 관해 기이한 주장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는 자서전이 겸손과 자기비하라는 가면과 역사적 기록 보존이라는 당당한 핑곗거리 뒤에 작가의 허영심을 숨기는 관행이라며 분노한다.

니체는 그 유명한 말을 남긴다.

나는 인간이 아니다. 나는 다이너마이트다.

21장 미노타우로스 동굴

1889년 1월 3일, 그날 아침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확실치 않다. 니체는 한 마부가 말을 심하게 채찍질하는 모습에 충격을 받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러고는 몸을 던져 마부를 가로막았다. 말의 목을 부둥켜안고 목 놓아 울다가 정신을 잃었다. 혹은 그랬다고 전해진다. 극적인 장면은 순간적으로 왔다가 순간적으로 지나간다. 그래서 목격자들이 말하는 진실은 형태가 다양하다.

다행히 니체를 아는 피노가 근처에 있어서 그를 집으로 데려왔다. 니체는 3층에 있는 자기 방에 들어간 후로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며칠 동안 그는 혼자서 횡설수설 떠들고, 고함지르고, 목청껏 노래를 불렀다. 밤낮을 가리지 않았다.

피노 가족은 불안한 눈빛으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머리 위로 들리는 니체의 발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기어가는 듯한 소리가 나다가 잠시 후에는 미친 듯이 쿵쿵거리며 뛰어가는 소리도 났다. 니체는 춤을 추고 있었다. 벌거벗은 채로 어린아이처럼 깡충거리며 뛰어다녔다. 그의 모습은 디오니소스의 광란 축제를 떠올리게 했다.

정신 이상을 보이는 니체

어느 날 니체는 오버베크를 보자마자 그에게 달려가 목을 끌어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더니 다시 소파로 돌아가 한쪽에 웅크리고 앉아서 끙끙대며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오버베크는 평소 조용하고 침착한 편이라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았지만, 그의 오랜 친구가 그 지경에 이른 모습을 보니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22장 무지한 점거자

죽기 1년 전인 1899년의 니체

니체는 정신 이상 증세를 보인 후 10년 동안 정신 병원과 집에서 지내다 1900년 8월 25일에 세상을 떠났다. 니체가 광증을 앓으며 뇌는 망가졌지만 기분을 좋게 해주는 거나 마음에 드는 것을 보면, 그것을 '책'이라고 불렀다.

혁명적이고 독창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을 '천재'라고 부른다면, 니체는 천재라는 수식어를 받기에 아주 적합한 인물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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