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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퇴리히] 세계 철학사 - 제6부 19세기 철학 본문

책과 사유

[슈퇴리히] 세계 철학사 - 제6부 19세기 철학

Baek Kyun Shin 2021. 12. 10. 22:06

현대에 가까워질수록 철학이 여러 분기로 나뉜다. 따라서 한 철학 사상을 선별해서 적절한 비중으로 다루는 게 점점 더 어려워진다. 여기서는 19세기 철학의 여러 사상을 다양하게 살펴보겠다. 워낙 다양한 철학이 있어서 19세기 이전 철학만큼 깊이 있게 다루지는 못한다.

19세기 철학의 특징은 칸트에서 비롯한다는 점이다. 칸트를 계승하든 반대하든, 칸트를 염두하지 않은 철학 사상은 거의 없다. 19세기 철학인 실증주의, 유물론, 낭만주의, 생철학, 신칸트주의는 모두 칸트를 비판하거나 계승한 철학이다. 

제1장 낭만주의와 독일 관념론

I. 피히테 - 독일 주관적 관념론자

피히테

1. 생애와 저작

피히테는 '의지의 창조적 힘'을 광적으로 믿었다. 그는 하나의 욕구밖에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 욕구란 행위하는 욕구다. 달리 말해 자기 자신을 초월하려는 욕구다. 

피히테는 1762년 독일에서 태어나, 자녀 많은 가난한 집안에서 자랐다. 피히테는 어느 귀족의 후원을 받아 예나 대학과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공부했다. 후원자가 사망해 지원이 끊기자 가정교사로 일했다. 다시 궁핍한 생활에 시달렸다. 우연히 칸트 철학을 접했는데 이것이 피히테의 전환점이 됐다. 훗날 피히테는 당시 극심한 가난에 시달렸지만 가장 행복한 사람이었다고 회고한다. 피히테는 즉시 칸트를 찾아 쾨니히스베르크로 떠났다. 칸트와 피히테는 친해졌고, <모든 계시에 대한 비판의 시도>를 써서 유명해졌다. 그는 곧 예나 대학교수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무신론자라는 비난을 받아 예나 대학을 떠나 베를린으로 갔다. 베를린에서 강연과 연설로 큰 명성을 얻었다. 쉰이 넘은 나이에 스스로 예비군 훈련에 참가했고, 1814년 티푸스로 사망했다. 

2. 기본사상

피히테는 철학을 '지식학'이라고 표현했다. 개별 학문은 특정한 대상을 다루지만 철학은 지식 자체를 다루기 때문이다. 곧, 철학은 학문들의 학문이다. 다른 학문에 앞서는 학문이다. 따라서 철학은 지식학이다.

사물에서 표상을 구하는 방식이 유물론이다. 피히테에 따르면 유물론은 독단적이다. 반면에 표상에서 사물을 도출하는 방식이 관념론이다. 피히테는 관념론자다. 우리가 사물에서 출발하면 의식이 사물에서 생긴 이유를 설명하지 못한다. 우리가 사유에서 출발하면 (물자체는 아닐지라도) 사물에 대한 표상을 얻을 수 있다.

그렇다면 철학의 시작은 생각하는 주체다. 생각하는 주체야말로 철학의 시작이자 지식학의 출발점이다. 이런 맥락에서 지식학의 첫 번째 원리는 '자아가 자기 자신을 정립한다'이다. '너 자신을 생각하라!'라는 말이다. 이런 요구에서 이성이 생겨났다. 이성은 그 자체가 창조 활동이다. 

피히테는 이론이성과 실천이성을 구분한 칸트에 반대했다. 칸트는 두 가지를 모두 '이성'이라 불렀다. 이론이성과 실천이성 모두 공통 뿌리를 가져야 함을 암시했다. 더욱이 <판단력 비판>에서 칸트는 실천이성이 이론이성보다 우위라는 견해를 밝혔다. 피히테는 여기에 반대했다. 피히테에 따르면, 이론이성 역시 실천적이다. 그래서 피히테를 주관적 관념론자라고 부른다.

3. 실천적 적용

피히테에 따르면, 삶은 외부 불순물에서 자신을 정화해 나가는 과정이다. 바깥 불순물을 피할 수 없지만 그로부터 벗어나는 게 인간의 과제이기도 하다. 이 과제를 이루려는 노력으로 인간은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대 우주는 변해도 나는 변하지 않으며, 그대의 조각난 형상들 위에서 언제라도 굳건히 버티고 있을 것이다."

이처럼 피히테는 인간의 실천 과제와 사회 구성원으로서 의무를 칸트보다 훨씬 더 강조했다. 이렇게 과제와 의무를 밀고 나간 결과 독일에서는 최초로 사회주의 국가 이념을 생각해냈다. 

칸트는 세속 행복을 탐하지 말고 오직 의무를 실천하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무엇을 희망해도 되는가?'라는 물음을 제기했다. 뒷날 쇼펜하우어는 이런 칸트를 비판했다. "칸트의 도덕은 오만한 태도로 행복을 뿌리쳤다가 슬며시 손을 내밀어 팁을 챙긴다."

피히테는 칸트의 이런 생각을 넘어선다. 피히테에 따르면, 완전한 윤리를 향해 노력하는 삶이 곧 행복이다. 행복은 의무를 완수해야 얻을 수 있다. 의무를 실천하는 삶 이외에서는 행복을 얻지 못한다. 그리하여 피히테는 이렇게 말한다. "생기 있고 활동적이며 도덕적인 질서가 곧 신이다. 우리는 다른 신이 필요하지 않다. 다른 신은 있을 수 없다. 특수한 실체로서 신은 불가능하며 모순이다." 이러한 생각 때문에 피히테는 무신론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II. 셸링 - 독일 객관적 관념론자

셸링

1. 생애, 사상적 발전, 주요 저작

셸링은 1775년 독일에서 태어났다. 15살에 튀빙겐 신학교에 입학했고 여기서 헤겔과 만났다. 신학 외에 그리스로마 고전, 칸트 철학을 공부했으며 피히테 철학에도 관심이 많았다. 훗날 셸링은 피히테와 절교를 했는데, 이유는 자연과학 때문이었다. 피히테는 자연과학에 관심을 두지 않은 반면, 셸링은 자연과학에 관심을 두고 화학, 전기학, 생물학, 의학을 공부했다. <자연철학 이념>, <세계혼에 관하여>라는 책을 집필해 자연철학 체계를 발전시키려 했다. 괴테에게도 주목을 받아 23세에 예나대학 객원교수가 되었다. 예나대학에서 셸링은 낭만주의 사상가들과 만났다. 이들과 활발히 교류를 하며 낭만주의에 심취했다. 결국 셸링은 독일 낭만주의의 대표 철학자로 이름을 남기게 됐다. 

셸링의 가장 의미 있는 사상은 자연철학 관념이었다. 셸링은 결국 칸트와 스피노자에서 멀어졌고, 특히 피히테와는 적대적이었다. 헤겔도 셸링에게 등을 돌렸다. 아내가 죽은 뒤에는 낭만주의 사상가들과도 멀어졌다. 당시 셸링에게 강한 영향을 준 사상가는 폰 바더였다. 바더에 따르면, 자연과학이 신앙과 모순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종교 인식 없이는 올바른 철학을 할 수도 없다. 또한 인간의 자율성에만 의존하면 올바른 도덕에 다다를 수 없다. 신이 만든 사유 법칙, 윤리 법칙만이 의미를 갖는다. 인간의 생각은 신의 생각과 함께 하며, 인간의 지식은 신의 지식과 함께 아는 것이다. 

2. 동일철학의 기본 사상

동일철학은 셸링의 기본 철학체계다. 칸트는 현상계와 물자체를 나눠서 생각했다. 초월적 관념론자였다. 피히테는 이에 반대했다. 피히테는 자연 전체를 자아의 산물로 여겼다. 즉 자연은 자아가 스스로 저항을 낳아 자기 자신을 실현하기 위해 낳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셸링은 이 관계를 역전시킨다. 자연이 정신의 산물이 아니라, 정신이 자연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피히테는 자연과 자연과학에 관심이 없었지만 셸링은 자연과 자연과학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다.

피히테가 지식학에서 제시했듯 철학의 과제는 지식, 즉 주체와 객체가 일치됨을 설명하는 것이다. 칸트는 주체와 객체를 분리했다. 하지만 피히테는 주체와 객체를 자아 안에 두었다. 그래서 피히테는 이렇게 묻는다. '어떻게 자아가 세계를 낳을 수 있는가?' 이 물음에 답하는 게 피히테 철학의 과제였다. 셸링은 정반대다. 셸링의 철학 과제는 '어떻게 자연이 자아를 낳는가?'이다. 셸링에 따르면 자연과 정신(자아), 실재와 관념이 가장 깊은 근저에서는 모두 동일하다. 이게 바로 셸링의 동일철학 사상이다.

3. 자연

정신과 자아가 자연에서 비롯된다면, 자연은 기계적인 존재, 원자들의 집합일 수 없다. 살아 있는 근원적인 힘이어야 한다. 셸링에게 자연은 무한한 활동이다. 개별 현상에는 두 가지 계열이 공존한다. 하나는 객관적이고 현실적인 계열(좁은 의미의 자연)이며, 다른 하나는 주관적이고 관념적인 계열(정신과 역사)이다. 한쪽 계열 끝에는 무생명 물질이 있고, 다른 쪽 계열 끝에는 정신이 있다. 어떤 개별 현상도 두 계열 가운데 하나만 포함하지 않는다. 둘 다 포함하되 많고 적음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4. 예술

셸링 사상은 낭만주의적인 성격을 보인다. 실재와 관념, 자연의 무의식 작용과 의식 작용이 완전히 조화를 이루면서 나타나는 게 예술이다. 이런 조화는 이성으로 인식할 수 없다. 정신과 자연이 하나라는 비밀은 오직 '직관'으로만 파악할 수 있을 뿐이다. 예술 작품은 인간의 의식적 창조물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자연의 무의식적 산물이다. 따라서 예술은 동일철학 사상을 반영하는 것이다. 피히테는 이렇게 말한다.

"예술은 철학의 참되고 영원한 기관이다. 동시에 예술은 철학이 외적으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끊임없이 새롭게 드러낸다. 철학이 외적으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란 행위와 생산에 내재하는 무의식적인 것을 말하며, 또 이것과 의식의 근원적인 동일성을 가리킨다."

III. 헤겔

헤겔

1. 생애와 주요 저작

헤겔은 1770년 독일 슈투트가르트에서 태어났다. 튀빙겐 신학교에 입학해 철학을 공부했으며, 고대 문화에 심취했고, 프랑스혁명에 열광했다. 다섯 살 어린 천재 셸링과 달리 헤겔은 처음부터 남다른 재능을 보여 주지는 못했다. 더딘 발전을 보이지만 뛰어난 업적을 이룬 사상가였다. 

헤겔은 그의 첫 번째 주저인 <정신현상학>을 1806년에 완성했다. 그는 한동안 신문 편집인과 고등학교 교장으로 일했다. 이때 그의 두 번째 주저인 <논리학>을 완성했다. <논리학> 덕분에 하이델베르크 대학에 철학 교수로, 이듬해 베를린대학으로 초빙되었다. 베를린에서 큰 명성을 누렸는데, 당시 프로이센 지도자들에게도 깊은 영향을 줬다. 마침내 헤겔은 '프로이센 국가 철학자'이자 독일 철학의 공인된 수장으로 군림했다. 제자들도 독일 각지 대학에서 교수직을 얻었으며, 헤겔 학파는 칸트도 누리지 못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2. 헤겔 철학의 일반적 성격 - 변증법

헤겔 철학은 난해하기로 유명하다. 내용도 어렵지만 문체나 용어가 추상적이어서 더욱 그렇다. 쇼펜하우어는 헤겔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이미 독자들은 칸트에 의해 모호한 것이라 해서 무의미하지 않다는 점을 깨달았다. 그런데 그다음부터는 무의미한 것이 모호한 것 뒤로 슬그머니 숨기 시작했다. 피히테가 그 첫 번째였고 셸링도 이 점에서는 피히테 못지않다. 그런데 헤겔에 와서는 정말이지 불손하다 싶을 만큼 지독한 헛소리가 정신병원에서나 들을 수 있는 무의미한 미치광이 소리와 손을 잡고 등장한다."

헤겔 철학 체계는 철저하고 일관성 있다. 헤겔은 자신의 철학 원리를 개별 현상에 적용할 뿐만 아니라 존재 자체와 세계사 전체에 적용했다. 아주 논리적으로 말이다. 

헤겔 변증법은 피히테와 셸링이 먼저 고안했다. 피히테는 자아(1단계)와 비아(2단계)의 대립에서 종합(3단계)이 발생한다고 말했다. 셸링은 자연현상이 상호 반발에 의한 역동적 과정으로 전개된다고 보았다. 헤겔은 피히테와 셸링을 뛰어넘는다. 헤겔은 '종합' 개념을 좀 더 깊이 있게 다룬다. 피히테의 종합은 정립과 반정립을 타협하고 중립하는 정도를 뜻했다. 반면 헤겔의 종합은 좀 더 차원 높은 통일을 뜻한다.

헤겔은 변증법을 논리적인 형식으로만 간주하지 않는다. 헤겔을 변증법을 통해 우리 사유의 발전이나 현실의 발전이 근본적으로 같다는 점을 보여주려 했다.

3. 철학의 3단계 구조

헤겔은 청년기에 <피히테와 셸링 철학 체계의 차이>를 집필했다. 여기서 헤겔은 주체(자아)를 출발점으로 삼은 피히테의 철학을 주관적 관념론이라 일컬었다. 반면 자아에서 자연을 인식하고, 자연에서 자아를 인식한 셸링의 동일성 철학을 객관적 관념론이라 일컬었다. 헤겔은 피히테의 주관적 관념론과 셸링의 객관적 관념론을 종합해 절대적 관념론을 주장했다. 헤겔의 절대정신은 주관정신과 객관정신보다 위에 있게 된다.

물론 셸링도 '절대적' 입장에 도달하려고 했다. 하지만 헤겔은 셸링을 비판했다.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로, 셸링이 말하는 절대자는 갑자기 출현했다. 셸링은 정신이 변증법 과정으로 여러 단계를 거쳐 절대자에 도달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직관으로 곧바로 절대자에 도달한다고 생각했다. 둘째로, 셸링은 자연과 정신을 모두 중시했다는 점이다. 반면 헤겔은 정신에 주안점을 뒀다. 헤겔에 따르면, 세계 발전은 정신의 발전과 일치한다. 따라서 헤겔의 철학 과제는 정신의 발전을 고찰하는 것이다.

헤겔은 예술, 종교, 철학에서 절대정신을 이룩할 수 있다고 보았다. 변증법의 과정으로 예술, 종교, 철학은 절대정신에 도달하는 것이다.

4. 평가와 비판

헤겔은 예술, 종교, 철학은 절대정신 영역으로 여겼지만 이상하게도 역사는 객관정신 영역 정도로 취급했다. 예술, 종교, 철학도 역사에서 전개되고 상호 작용을 한다. 그런데 예술, 종교, 철학과 다르게 역사는 절대정신의 영역으로 보지 않았다. 헤겔이 비판받는 대목이다. 

또한, 독일 관념론 흐름은 칸트에서 시작해 피히테, 셸링, 마지막으로 헤겔까지 이어진다. 그러나 헤겔은 칸트 사상과 상당히 멀어졌다. 헤겔은 변증법 원리를 인간 사유의 원리로 봤을 뿐 아니라 존재 자체 원리로 삼았다. 경험적인 현실도 변증법의 원리에 기반해서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결국 헤겔은 경험적 지식도 경시했다.

제2장 실증주의, 유물론, 마르크스주의

I. 프랑스 실증주의: 콩트

오귀스트 콩트

1. 생애

오귀스트 콩트는 1798년 프랑스에서 태어났다. 1824년 콩트는 <실증 정치 체계>라는 책을 썼다. 하지만 그 후 정신병이 발병해서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자살 직전 상태까지 갔다. 다행히 병에서 회복했고, 자신의 실증 체계에 관한 강의를 시작했다. 파리 공과대학에서 강사로 임명됐으나 얼마 후에 해임되었다. 콩트는 1857년 사망할 때까지 개인 교습으로 근근이 돈을 벌었다. 하지만 그를 후원하는 많은 사람들 때문에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다. 후원자 중에는 존 스튜어트 밀도 있었다.

2. 실증주의 원리

콩트는 실증주의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했다. 실증주의는 형이상학을 향한 거부를 의미한다. 실증주의의 기본 원리는 주어진 것, 사실적인 것, 즉 '실증적인 것'에서 출발하고 이를 넘어서는 모든 논의와 물음은 거부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실증적으로 주어지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현상이다! 실증주의는 모든 학문 영역을 '현상'의 영역으로 제한한다. 따라서 우리는 현상이라는 사실을 그 자체로 받아들이고, 이 사실들을 일정한 법칙에 따라 정리해야 한다. 더불어 이 법칙을 기반으로 미래 현상을 예견하고 대처하면 된다. 

실증주의는 형이상학을 거부한다. 현상 배후에 있는 본질은 의미가 없다. 우리는 사실만 보고 판단해야 한다. 또, 실증주의는 사회에서 유용한 것만을 다룬다. 그리고 논쟁만 되풀이하던 과거 형이상학과 달리 확실하게 규정될 수 있는 것만을 다룬다.

3. 3단계 법칙

실증주의 개념을 파악하려면 먼저 인간의 사유가 거치는 3단계 법칙을 알아야 한다. 콩트에 따르면, 인간의 사유는 3단계를 거친다. 3단계란 1) 신학적 내지 허구적 단계, 2) 형이상학적 내지 추상적 단계, 3) 과학적 내지 실증적 단계를 말한다.

신학적 단계에서 인간의 사유는 사물에 내재된 본성, 최초 원인, 궁극 목표를 탐구한다. 형이상학적 단계는 신학적 단계의 변형에 지나지 않는다. 형이상학적 단계에서는 초자연적 힘, 추상적인 힘, 본질을 탐구한다. 마지막 실증적 단계에서는 절대 인식에 도달하려는 시도가 모두 헛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인간은 만물의 기원이나 궁극 목표, 본질 따위를 알 수 없다. 대신 인간은 사실을 관찰해 주어진 사실에서 유사성과 계기성의 법칙을 찾아내려 한다. 실증적 단계에서 '설명'은 개별 사실을 연결해서 일반 사실에 이른다는 점을 보여줄 뿐이다.

4. 학문의 단계적 구조

개별 학문은 점점 전문성을 띄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선 전문 영역에서 새롭게 거둔 성과를 하나의 보편 이론으로 편입하는 게 바로 실증 철학의 과제가 된다. 나아가 실증 철학은 교육제도를 개혁하기도 한다. 전문성을 보이는 개별 학문이 모든 개별 학문의 보편 토대가 될 수 없다. 따라서 개별 학문은 일반적인 교육 체계가 될 수 없다. 개별 학문의 보편 토대를 서술하는 학문, 즉 실증 철학만이 일반적인 교육 체계가 될 수 있다. 우리가 이렇게 개별 학문을 총괄하면 개별 학문도 새로운 자극을 받는다. 이게 바로 실증 철학의 효용이다. 

사회현상을 다루는 학문이 사회학이다. 사회학은 콩트가 처음 제시한 학문이다. 콩트는 그의 주저인 <실증 철학 강의>에서 사회학에 관해 상세히 설명했다. 콩트가 처음 제시한 사회학은 그 이후로 중요한 학문으로 자리 잡았다. 

II. 영국 공리주의

1. 정신적 상황

영국은 경험을 모든 지식의 기초로 삼은 프랜시스 베이컨의 사상, 로크-버클리-흄의 경험론, 형이상학을 거부하는 풍조가 있었다. 이 모든 게 콩트 철학을 받아들이기에 적합했다. 영국은 프랑스와 달리 정신적 대립이 극단적이지 않았다. 당시 영국은 자유로웠기 때문이다. 콩트 사상이 수용되기 전에 이미 벤담의 공리주의가 알려져 있었다. 

2. 벤담과 밀

제러미 벤담(1748~1832)은 공리주의를 주장했다. 벤담이 말한 공리주의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다. 이를 양적 공리주의라고 한다. 우리 목표는 많은 사람이 행복한 것이다.

벤담과 콩트의 사상은 존 스튜어트 밀(1806~1873)에게서 하나로 합쳐진다. 밀은 세 살 때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배우기 시작했고, 열 살 때 미분을 배웠으며, 열일곱 살 때 공리주의 협회를 결성했다. 어려서부터 천재적인 기질이 있었다. 밀은 벤담의 공리주의에 개초한 개인과 공동체의 균형을 추구했다. 밀에 따르면, 인간은 쾌락을 원한다. 따라서 쾌락을 주는 대상이 가치 있는 것이다. 

3. 스펜서

허버트 스펜서

다윈과 진화론

19세기 후반 진화론은 철학 사상 전반에 큰 영향을 끼쳤다. 찰스 다윈(1809~1882)의 <종의 기원> 때문이다. 진화론은 생명체의 변이, 유전, 과잉번식, 적자생존을 설명하는 이론이다. 진화론은 생물학 이외에도 여러 학문에 영향을 줬다. 진화론에 따르면 생명체는 신이 만든 존재가 아니다. 자연이 합목적성을 가지고 기계적으로(인과적으로) 만든 존재다. 진화론은 모든 수수께끼를 풀 마법으로 받아들여졌다. 진화론은 자연과학과 정신과학 모두에 영향을 주었으며, 진화론 덕분에 자연과학과 정신과학이 서로 가까워졌다.

생애와 저작

허버트 스펜서는 1820년 영국에서 태어났다. 그는 서른 살까지 철학과 무관한 삶을 살았다. 시계 기술자이자 철도와 교량 건설 기술자였다. 관찰력이 뛰어났고 많은 일을 하며 경험을 쌓았다. 그밖에도 기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스펜서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고, 친구들도 별로 없었다. 고집도 강했으며, 다른 사람이 쓴 저작도 거의 읽지 않았다. 독학으로 철학자가 된 스펜서는 복잡한 내용을 명료하게 분석해서 일목요연하게 정리해내는 능력이 탁월했다.

진화의 법칙

스펜서에 따르면, 종교와 형이상학은 해결할 수 없는 주장만 한다. 세계는 어떻게 탄생했는가? 물질이란 무엇인가? 참된 본질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주어진 현상만 파악할 수 있다. 현상을 넘어서 어떤 궁극적이고 절대적인 것을 알 수는 없다. 알 수 없는 건 제쳐두고 현상을 정리하는 일에 집중하자. 이게 철학의 과제다. 이런 주장을 하자 신학자와 형이상학 철학자는 스펜서를 크게 비판했다. 

생물학, 심리학, 사회학, 윤리학에는 공통 원리가 있다. 단일체가 복합체로 통합되고, 다시 복합체가 단일체로 해체된다. 이런 과정에서 균형이 맞춰지고 발전을 이룩한다. 진화론에 기반한 원리다. 

인간 사회

사회학은 콩트가 맨 처음 제안한 학문이다. 스펜서는 콩트 못지않게 사회학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스펜서는 사회를 유기체에 비교했다. 사회에서도 일반적인 발전 원리가 작용한다는 사실을 설명한 후에 정신 영역, 특히 종교 문제를 논했다. 통합 원리에 따라 원시 애니미즘에서 신 개념으로 발전했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스펜서는 사회주의도 비판했다. 공동 배분을 하면 경쟁이 이루어지지 않아 사회가 붕괴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국가가 사회 모든 면에서 세부적인 통제를 할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스펜서는 자유를 옹호했다. 그는 국가 기관을 불신해서 원고도 절대 공공 우체국에서 부치지 않았다. 

비판

스펜서 사상은 두 가지 이유에서 비판을 받는다. 첫째로, 스펜서는 종교와 형이상학을 비판했다. 독단론 성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펜서 철학도 결국 하나의 독단론이다. 그는 사실들을 진화론 도식에 끼워 맞추는 데만 급급했다. 둘째로, 스펜서는 영국 사회 상황에 국한되어 있었다. 영국은 유럽 대륙에 비해 정치적으로 안정된 상황이었다. 그리하여 산업사회가 자유롭고 평화롭다고 믿게 됐다. 하지만 두 차례 세계대전은 산업국가도 얼마든지 군국주의가 될 수 있다는 교훈을 줬다.

III. 독일: 헤겔학파의 붕괴와 유물론의 대두

1. 포이어바흐

루트비히 포이어바흐

루트비히 포이어바흐(1804~1872)는 종교를 비판했다. 포이어바흐에 따르면, 종교가 발생한 이유는 인간이 행복을 추구하는 이기적인 본성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이 원하지만 현실에서는 실현되지 않은 상태가 신에게서 실현돼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신을 믿는 이유는 상상력과 감정 때문만이 아니라 행복해지려는 욕구 때문이기도 하다. 따라서 신이란 인간의 소망에 불과하다. 인간에게 소망이 없다면 상상력이나 감정이 있어도 종교나 신은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인간마다 소망이 다르듯 종교도 각양각색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상상의 종교에서 소망을 충족하려는 일은 유치한 꿈일 뿐이다. 꿈에서 깨어나야 한다. 종교를 이용해 상상으로 얻었던 것을 스스로 현실에서 획득해야 한다. 그래야만 인간은 아름답고 행복한 존재가 된다. 

IV. 마르크스

칼 마르크스

1. 생애와 저작

카를 마르크스는 1818년 독일에서 태어났다. 마르크스는 본대학과 베를린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동시에 헤겔 철학에도 관심을 가졌다. 마르크스는 박사 논문(1840/41년 예나대학)으로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고대 철학을 다뤘다.

훗날 마르크스는 헤겔 좌파 입장을 취했다. 저널리스트로 글을 쓸 때도 좌익 부르주아 민주주의 경향을 보여 사임을 당했다. 사임 후에 프랑스 파리로 망명했다. 파리에서 프리드리히 엥겔스를 만났고 둘은 평생 우정을 유지하며 공동 집필을 했다. 마르크스가 망명 후 연구를 계속할 수 있었던 이유는 엥겔스의 지원 덕분이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국제 정치에 관여했다. 공산주의자 동맹을 가입했고, 이 조직에서 위탁을 받아 <공산당 선언>(1848)을 집필했다. <공산당 선언>은 마르크스주의적 사회주의자들에게 성전과 같은 책이 됐다.

2. 헤겔과 마르크스

변증법적 유물론

마르크스 철학은 헤겔 철학에서 출발한다. 후일 포이어바흐, 프랑스 유토피아 사회주의자, 영국 고전경제학과 통합되었다.

마르크스는 헤겔의 변증법을 자신만의 방법으로 받아들였다. 마르크스는 변증법에서 혁명 원리를 발견한다. 변증법에 따르면 세계는 완성된 복합체가 아니다. 과정의 복합체다. 만물은 생성과 소멸을 반복한다. 과정 속에 있다는 말이다. 헤겔은 관념론적 변증법을 주장했지만 마르크스는 유물론적 변증법을 주장했다. 

헤겔에게는 실재하는 존재는 정신이다. 물질은 정신의 산물에 불과하다. 헤겔은 절대적 관념론자였다. 마르크스의 주장은 반대다. 마르크스는 유물론자였다. 마르크스는 포이어바흐와 유물론자들의 견해에 동조했다. 다만 두 가지 점에서 견해가 다르다. 첫째, 과거 유물론은 비변증법적이고 정태적이며 따라서 비역사적이다. 과거 유물론은 역동성이 없다. 사물은 고정돼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사물은 발전이 없다. 반면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유물론에서는 사물은 변증법적으로 발전한다. 둘째, 과거 유물론은 추상적이다. 반면 마르크스는 변증법적 유물론을 사회에 적용하려고 했다. 추상적이지 않고 아주 구체적이며 실천적이다. 

3. 역사적 유물론

변증법적 유물론을 사회에 적용한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레닌은 이렇게 말한다. "유물론은 의식을 존재에서 설명하는 것이지 존재를 의식에서 설명하는 게 아니다. 유물론을 사회에 적용한다는 말은 사회 의식을 사회 존재에서 해명한다는 의미다." 다시 말해, 유물론에 따르면 물질만이 현실적이다. 의식은 현실의 반영일 뿐이다. 따라서 사회에서도 현실적인 것은 사회 존재뿐이다. 이념에 주목해서는 안 된다. 주목해야 하는 건 물질 토대이다. 곧, 생활양식이 사고 양식을 규정한다. 

역사적으로 보면, 생산력은 지속적으로 발전했다. 고대 노예제에서 봉건제로, 이어서 자본주의로 바뀌었다. 각 단계마다 공통점이 있다. 생산력이 특정 개인이나 집단에 귀속됐다는 점이다. 

4. 자본

<자본>은 마르크스의 주저다. <자본>에서는 계급투쟁 양상을 간단하게 설명한다.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 착취는 잉여가치를 매개로 일어난다. 노동자는 노동을 제공해 임금을 초과하는 가치를 생산한다. 노동자는 노동력을 유지할 정도로 필요한 만큼만 임금을 받는다. 노동자는 생존을 위해 그렇게라도 일을 한다. 노동자가 생산한 잉여가치는 고스란히 자본가가 가져간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이러한 자본주의 문제점은 사회주의로 이행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혁명을 통해서 말이다. 프롤레타리아가 혁명을 통해 생산 수단을 사회에 귀속시키면 더 이상 계급투쟁은 없을 것이다. 사회주의에서는 모든 생산 수단과 재화를 사회가 소유하기 때문에 계급투쟁이나 착취가 사라질 것이다. 마르크스는 혁명을 위해 프롤레타리아를 교육하는 걸 실천 과제라고 보았다.

제3장 쇼펜하우어, 키르케고르, 니체

I.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1. 생애, 인품, 저작

아르투어 쇼펜하우어(1788~1860)는 주저 <의자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발표했을 때 겨우 30세였다. 쇼펜하우어는 낭만주의자, 헤겔, 유물론자, 마르크스주의자들처럼 특정한 철학 당파가 없다. 쇼펜하우어는 독일 관념론, 특히 칸트 철학에 영향을 받았다. 게다가 고대 인도 철학에도 영향을 받았다. 쇼펜하우어 철학을 이해하려면 그의 독특한 성격을 알아야 한다.

쇼펜하우어는 거상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독일인이지만 불어와 영어도 잘했다. 말년까지 날마다 <타임>을 읽었다고 한다. 쇼펜하우어는 학문을 하고 싶었지만 아버지의 뜻에 따라 상업학교에 다녔다. 하지만 바로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쇼펜하우어는 상인교육을 접고 고전어를 배웠다. 괴팅겐과 베를린에서 2년씩 대학생활을 하며 철학, 문헌학, 화학, 물리학, 생물학, 해부학, 생리학, 지리학, 천문학을 수강했다.

쇼펜하우어는 1813년 <충족이유율의 네 가지 뿌리에 관하여>라는 논문을 써 박사학위를 받았다. 쇼펜하우어의 어머니는 자유분방했는데, 그런 어머니를 못마땅하게 여긴 쇼펜하우어는 어머니와 자주 말다툼을 했다. 어느 날 그가 어머니에게 박사학위 논문을 보여주자 그녀가 비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뿌리가 주제인 걸 보니 약제사를 위한 책인가 보구나."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대꾸했다. "어머니 소설을 헛간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때가 오면 제 책이 읽힐 거예요." 그러자 어머니는 이렇게 응수했다. "네가 쓴 책은 단 한 권도 안 팔릴 게다." 두 사람의 말은 나름 적중했다. 쇼펜하우어는 어머니와 절교했고, 두 번 다시 만나지 않았다.

이후 4년간 드레스덴에 머물면서 <시각과 색채에 관하여>(1816)와 주저인 <의자와 표상으로서의 세계>(1819)를 집필했다. 그는 부친에게 물려받은 유산으로 생활했다. 검약한 생활과 비상한 수완으로 이 재산을 평생 유지하면서 불려 나갔다. 때문에 쇼펜하우어는 평생 일을 하지 않아도 됐다. 노령에는 과거와 달리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리고 대화도 즐겼다. 1860년 심장마비로 돌연히 사망했다. 유언에 따라 모든 재산은 자선단체에 기부되었다. 

2.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쇼펜하우어가 30살에 쓴 책이다.

"세계란 의지와 표상이다."

이게 바로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말하는 주된 메시지다.

표상으로서의 세계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이렇게 시작한다. "세계는 나의 표상이다." 선험적 진리가 있다면 바로 이것이다. 칸트가 이미 말한 바이기도 하다. 칸트는 모든 사물이 현상으로 주어진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칸트는 현상과 사물 자체를 구분했다. 쇼펜하우어는 칸트의 공적을 높이 평가했지만 많은 내용을 비판했다. 쇼펜하우어가 비판한 점은 모든 사상에 통일된 체계적 구조를 부여하려 한 칸트의 욕심이다. 예컨대 범주 형식이나 판단 형식 말이다. 

칸트는 인과 추론으로 사물 자체에 도달했다. 그런데 인과 추론은 현상 영역에서만 타당하다. 현상 영역에서만 타당한 걸 기반으로 사물자체를 떠올린다는 건 올바른 방법이 아니다.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표상을 초월하는 사물자체에 다 다를 길은 없다. 쇼펜하우어는 이 점을 비판했다.

의지로서의 세계

칸트는 현상계와 물자체를 나눴다.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표상은 칸트의 현상계와 같다. 그리고 쇼펜하우어는 물자체를 의지라고 봤다. 의지는 활동적 충동 혹은 욕망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모든 행위의 근거는 의지다. 의지 때문에 우리는 행동한다. 심지어 동물이나 무생물도 의지를 갖는다. 신체 활동은 의지가 객관화된 활동이다. 따라서 신체란 공간과 시간 속에서 객관화된 의지다. 

인간의 본질은 사유, 의식, 이성에 있지 않다. 오래전부터 철학자들은 이런 착각을 했다. 의식이나 이성은 우리의 본질을 둘러싼 표피에 지나지 않는다. 의식과 이성을 조종하는 건 바로 의지다. 인간을 좌지우지하는 건 무의식적인 생의 의지다. 오직 이 의지만이 불변하는 것이다. 칸트에게 불변하는 건 물자체였지만 쇼펜하우어에게 불변하는 건 의지다. 의지는 성격과 신체 모두를 규정한다. 공간과 시간 속에 있는 모든 현상은 시공간을 초월하고 근거조차 알 수 없는 의지의 객관화일 뿐이다. 물자체란 바로 의지이다.

그렇다면 의지는 자유로운가? 전체로서 세계 의지는 자유롭다. 세계 의지에 영향을 주는 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개체 의지는 자유롭지 않다. 개체 의지는 세계 의지가 규정하기 때문이다. 

3. 세계의 고뇌와 구원

고뇌로서의 삶

의지는 무한하지만 충족에는 제한이 따른다. 우리가 욕망만 추구한다면 결코 행복할 수 없다. 욕망이 충족되면 또 다른 욕망이 움트게 마련이다. 고통이 사라지면 권태라는 또 다른 고통이 따른다. 따라서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인생은 살아갈 가치가 없다. 그럼 자살이 해결책인가? 그렇지 않다. 자살은 개체 의지를 없앨 뿐 세계 의지를 없애진 못한다. 고통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는가? 쇼펜하우어는 두 가지 길을 제시한다. 심미적 구원과 윤리적 구원이다. 심미적 구원은 잠정적이고, 윤리적 구원은 영속적이다.

심미적 구원의 길 - 천재와 예술

우리는 현상 배후에 있는 걸 어떻게 인식할 수 있을까? 의지가 이성을 규정하는 한 우리는 현상 배후를 인식할 수 없다. 의지를 벗어나야만 가능하다. 그래야만 욕망의 속박에서 해방된다. 가능한 일인가? 동물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인간은 가능하다. 인간은 의지가 없는 순수한 인식 주체가 될 수 있다. 예술을 통해서 가능하다. 예술은 인과율이나 의지와 무관하게 존재를 고찰한다. 특히 가장 돋보이는 예술은 음악이다. 음악은 의지의 모상이기 때문이다. 음악에서는 인간의 본질이 표현된다. 

윤리적 구원의 길 - 의지의 부정

음악을 통한 구원은 순간적이다. 반면 쇼펜하우어가 제시한 두 번째 구원의 길, 즉 윤리적 구원은 궁극적인 구원이다. 윤리적 구원은 고대 인도 사상가가 제시한 길과 비슷하다. 바로 '무아경', '황홀경', '신으로의 자아 승화' 등이다. 욕망을 버리는 일이다. 욕망을 버리고 깊은 평정을 추구하는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열반'에 이르는 길이다. 이렇게 의지를 부정하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봤다. 우리가 구원을 얻으려면 욕망(의지)에서 벗어나 열반에 이르러야 한다. 

II. 쇠렌 키르케고르

쇠렌 키르케고르

1. 코펜하겐의 소크라테스

키르케고르는 1813년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부유한 상인의 일곱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1838년 아버지가 죽고 키르케고르는 많은 재산을 물려받았다. 그는 재산을 유지하려 애쓰지 않았다. 집 근처를 어슬렁거리며, 연극을 보러 다니거나 지인들과 어울리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한 편으로는 돈 많은 무위도식자였고, 다른 한 편으로는 취미로 글을 쓰는 아마추어 학자였다. 

키르케고르는 1840년 열 살 연하인(당시 17세) 여인과 약혼했다. 그러나 1년 후 파혼을 하고 베를린으로 떠나 학업을 했다. 키르케고르에게는 어떤 깨달음이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 중 오직 자신에게만 부여된 사명을 완수하려면 사랑과 결혼을 포기해야 한다는 깨달음이다. 그는 번번한 직업도 없이 평생 상속받은 재산으로 살아갔다. 심한 정신적 갈등을 겪다가 노상에서 쓰러져 얼마 후 사망했다. 그의 나이 42세 때였다. 

2. 실존적 사상가의 예수

키르케고르는 보편적인 것, 추상적인 것을 불신했다. 이전의 대부분 철학은 내 삶이 아니라 보편적인 삶 자체를 탐구했다. 진리나 보편 원리를 다뤘다. 이전 철학자들은 개인의 삶보다는 보편적인 진리나 원리가 더 우위에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입장에 따르면, 개별 물음에 대한 해답은 보편 원리에서 저절로 도출할 수 있다. 

하지만 키르케고르는 반대로 생각했다. 진정한 삶의 문제는 언제나 실천적인 개별 문제라고 보았다. '인간 일반이 이러저러한 일을 해야 하는가?'가 아니라 '개별 인간인 내가 이 순간에 특정한 상황에서 이러저러한 일을 할 수 있는가?'가 참된 문제다. 이러한 물음을 '실존적인' 물음이라고 한다. 철학이 참된 의미를 가지려면 보편 원리가 아니라 실존 문제로 시선을 돌려야 한다. 

객관적 사유는 주체와 그 실존에 무관심하지만,
실존적 존재는 자신의 사유에 관심을 가지며 그 사유에서 실존한다.

이런 점에서 키르케고르의 사상은 인간학이라고 볼 수 있다. 

키르케고르는 유신론적 실존주의자였다. 기독교인이었지만 그 누구도 참된 기독교도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키르케고르는 이렇게 말한다. "공공 예배에 참석하는 일을 그만둔다면 무거운 죄를 한 가지 면하게 될 것이다. 실상은 그렇지도 않으면서 신약성서에 근거한 기독교인 양 속여 신을 우롱하고 마는 그런 의식에는 참여하지 말라."

키르케고르는 끊임없이 회의하는 사람이었지만 신의 의지를 받들고 있다는 확신만은 변함이 없었다. 

그리고 유고로 남은 어떤 글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설령 어떤 교수가 내 글을 읽는다 해도 제지하지 않을 것이며, 그의 양심에 호소하지도 않을 것이다. 결국 이 글도 강의 소재가 되고 말 것이다."

3. 뒤늦은 영향

키르케고르 사상은 회의적이며 냉엄하다. 그의 사상은 당시 사회에 큰 충격을 줬다. 덴마크뿐 아니라 주변 국가에도 영향을 줘 19세기 철학 사상을 변화시킬 만큼 강력했다. 키르케고르는 실존철학의 선구자다. 키르케고르가 발견한 고독, '내던져짐', 부조리, 인간 존재의 불안 등은 가브리엘 마르셀에서 알베르 카뮈에 이르는 사상가에서 다시 나타난다.

III. 프리드리히 니체

프리드리히 니체

1. 생애와 주요 저작

니체의 철학 역시 쇼펜하우어와 마찬가지로 의지의 철학이다. 니체는 1844년 독일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니체는 다섯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여자들만 있는 집안에서 자랐다. 후일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고전문헌학을 공부했다. 그는 오래된 서점에서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발견하고 밥도 먹지 않아 가며 단숨에 읽었다. 이를 계기로 쇼펜하우어 사상에 깊이 빠졌다. 또한 니체는 대학을 마치기도 전에 문헌학 논문을 발표했다. 스승인 리츨 교수의 추천으로 24세에 스위스 바젤대학 고전문헌학 교수가 됐다. 1870년 전쟁이 발발하자 니체는 의무병으로 참전했다. 하지만 곧 병에 걸려 귀환했다. 이후로 그는 완전한 건강을 되찾지 못했다.

니체는 바그너를 찬양했다. 하지만 바그너가 개최한 축제에 가고 나서 니체는 바그너와 절교하고 말았다. 바그너와 절교를 계기로 니체는 제2기로 접어든다. 이전까지 숭상하던 이상이나 인물에게 등을 돌렸으며 예술과 형이상학에도 비판적 입장을 취했다. 이제 니체는 자연주의적 실증주의로 접근했다. 이 시기에 건강이 급속도로 안 좋아졌다. 결국 교수직에서 물러났다. 1879년 잠깐 회복되어 <아침놀>(1881)과 <즐거운 학문>(1882)를 집필했다. 니체의 주저인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1882)도 집필했다. 

니체는 자신의 철학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려고 했다. 책 이름은 '힘에의 의지. 모든 가치의 전도를 위한 시론'이라고 지으려고 했다. 하지만 <선악의 저편>(1886), <도덕의 계보>(1887)을 집필하느라 결국 완성하지 못했다. 1888년 니체는 많은 책을 집필했다. <바그너의 경우>, <니체 대 바그너>를 써 바그너와 돌이킬 수 없는 관계가 됐다. 기독교를 공격한 <우상의 황혼>과 <안티크리스트>, 그리고 자서전인 <이 사람을 보라>를 썼다. 

모든 가치를 전도하려는 고독한 작업은 니체의 체력과 정신력을 모두 갉아먹었다. 그는 시력마저 거의 잃었다. 1889년 토리노에서 갑자기 마비 증세를 일으켰다. 그 후 12년 동안 정신병을 앓다가 1900년 사망했다.

2. 니체 철학의 통일성과 특성

니체 철학에서 통일성이나 일관성을 찾아내기는 쉽지 않다. 니체의 저작을 잠언집이나 명언집이라고 여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이 세계는 힘에의 의지다.
그리고 그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대들 자신도 이러한 힘에의 의지이다.
그리고 그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니체는 세계의 본질은 의지라고 봤다. 정확히 말하면, 힘에의 의지다. 그리고 그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형이상학을 거부한다는 말이다. 배후에 있는 '이상적' 세계를 생각해내려는 철학과 종교를 모두 거부했다. 니체는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신은 죽었다'라고 선포했다. 과거 철학자가 만들어 놓은 신은 죽었다. 영원한 이념, 물자체, 피안 등은 모두 망상이나 착각이다. 그것도 유익하지 않은 착각이다. 신체와 대지를 경멸하고 하늘나라와 구원을 생각해 낸 자는 모두 병든 자, 죽어가는 자들이다. 

3. 망치를 든 철학자

니체는 망치를 들고 철학한다. 낡은 가치를 파괴하며, 새로운 가치와 이상을 수립한다. 

"선한 일에서건 악한 일에서건
진실로 창조자가 되려는 자는
우선 파괴자가 되어야 한다."

니체에 따르면 도덕은 주인 도덕과 노예 도덕이 있다. 노예 도덕에서 선이란 평화롭고 무해하며 친절하고 자비로운 것을 뜻한다. 악은 비범하고 대담하며 위험한 것, 요컨대 주인 도덕에서 '선'인 모든 것이다. 니체는 <도덕의 계보학>에서 선과 악의 기원에 대해 설명한다. 사람들은 노예 봉기를 통해 주인 도덕을 노예 도덕으로 갈아엎었다. 주인의 특성을 '악'으로 규정해버리며 정신적 보복행위를 가했다. 그리고 노예의 특성을 '선'으로 규정했다. 무력한 자, 고통받는 자, 병든 자, 추악한 자를 선한 인간으로 둔갑했다. 그리하여 고귀하며 아름다우며 강력하고 행복한 것이 선이라는 주인 도덕은 지배력을 상실했다.

또한, 니체는 의식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니체에 따르면, 본능이야말로 모든 지성 중에서 가장 지적이다. 생각의 대부분도 본능에 불과하다. 철학적인 사유도 마찬가지다. 과거 철학자들이 냉철한 논리로 진리를 획득하려고 했지만, 그 배후에는 본능의 요구가 숨어 있다. 이처럼 니체는 기존 인식을 모두 파괴했다. 

4. 새로운 가치

"신은 죽었다.
이제 우리는 위버멘쉬가 살기를 원한다.
내 형제들이여, 맹세코 이 대지에 충실하라.
천상에 대한 희망을 설교하는 자들을 믿지 말라!"

위버멘쉬는 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자다. 동시에 모든 피안이란 한갓 환영임을 아는 자, 대지와 생명에 헌신하고 이를 즐겁게 긍정하는 자다. 게다가 위버멘쉬는 자신이 이 세계의 한 부분, 한 조각 '힘에의 의지'에 지나지 않다는 점을 알고 있는 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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