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퉁이 서재
[류시화 엮음] 마음챙김의 시 본문
좋은 시는 무엇을 믿으라고 하지 않는다. 좋은 시는 몇 개의 단어로 감성을 깨우고 삶에 영감을 불어넣는다. 좋은 시는 머리가 아니라 가슴에 속한다. - 아잔 브라흐마 -
<마음챙김의 시>는 류시화 시인 엮은 시집이다. 그가 엮은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과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그리고 <시로 납치하라>도 읽었으니 이번이 네 번째 시집이다. <마음챙김의 시>는 류시화 시인의 최근작인데, 전작 못지않게 훌륭하다. 그의 시집을 유독 좋아한다. 울림이 있는 전 세계 시를 엮는 능력이 탁월해서이기도 하지만, 류시화 시인과 내가 삶을 향한 가치관이 어느 정도 일치해서 그렇지 않나 싶다.
그는 시에 관해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날마다 경험하는 두려움, 망설임, 냉소와 의심, 물질주의로부터 우리를 치유해주는 부적 같은 힘이 시에는 있다. 당신이 누구이든 어디에 있든 한 편의 시를 읽는 것은 '속도에 대한 세상의 숭배에 저항하는 것'이며, 숱한 마음놓침의 시간들을 마음챙김의 삶으로 회복하는 일이다. - 류시화 -
기억하고 싶은 시 몇 편을 그대로 옮겨 적어본다.
옳고 그름의 생각 너머
옳고 그름의 생각 너머에 들판이 있다.
그곳에서 당신과 만나고 싶다.
영혼이 그 풀밭에 누우면 세상은 더없이 충만해 말이 필요 없고
생각, 언어, 심지어 '서로'라는 단어조차
그저 무의미할 뿐.
- 잘랄루딘 루미 -
정화
봄이 시작되면 나는 대지에
구멍 하나를 판다. 그리고 그 안에
겨울 동안 모아 온 것들을 넣는다.
종이 뭉치들, 다시 읽고 싶지 않은
페이지들, 무의미한 말들,
생각 파편들과 실수들을.
또한 헛간에 보관했던 것들도
그 안에 넣는다.
한 움큼의 햇빛과 함께, 땅 위에서 성장과
여정을 마무리한 것들을.
그런 다음 하늘에게, 바람에게,
충직한 나무들에게 나는 고백한다.
나의 죄를.
나에게 주어진 행운을 생각하면
나는 충분히 행복해하지 않았다.
너무 많은 소음에 귀 기울였다.
경이로움에 무관심했다.
칭찬을 갈망했다.
그러고 나서 그곳에 모여진
몸과 마음의 부스러기들 위로 구멍을 메운다.
그 어둠의 문을, 죽음이라는 것은 없는 대지를
다시 닫으며,
그 봉인 아래서 낡은 것이
새것으로 피어난다.
- 웬델 베리 -
꼭두각시 인형의 고백
...중략...
옷을 간소하게 입고 태양 아래 누우리라.
내 육체만이 아니라 영혼도 적나라하게 드러내면서.
...중략...
인간들이여, 많은 것을 나는 당신들에게서 배웠다.
모든 인간이 산 정상에서 살기를 원한다는 것을 나는 알게 되었다.
진정한 기쁨은 가파른 비탈을 오르는 과정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중략...
나는 또한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내려다볼 권리를 지니고 있음을 배웠다.
오직 그가 일어서는 걸 도우려고 손을 내밀 때만.
- 조니 웰치 -
새와 나
나는 언제나 궁금했다.
세상 어느 곳으로도
날아갈 수 있으면서
새는 왜 항상
한곳에
머물러 있는 것일까.
그러다가 문득 나 자신에게도
같은 질문을 던진다.
- 하룬 야히아 -
더 느리게 춤추라
회전목마 타는 아이들을
바라본 적 있는가.
아니면 땅바닥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에
귀 기울인 적 있는가.
펄럭이며 날아가는 나비를 뒤따라간 적은,
저물어 가는 태양빛을 지켜본 적은.
속도를 늦추라.
너무 빨리 춤추지 말라.
시간은 짧고,
음악은 머지않아 끝날 테니.
하루하루를 바쁘게 뛰어다니는가.
누군가에게 인사를 하고서도
대답조차 듣지 못할 만큼.
하루가 끝나 잠자리에 누워서도
앞으로 할 백 가지 일들이
머릿속을 달려가는가.
속도를 늦추라.
너무 빨리 춤추지 말라.
시간은 짧고,
음악은 머지않아 끝날 테니.
아이에게 말한 적 있는가,
내일로 미루자고.
그토록 바쁜 움직임 속에
아이의 슬픈 얼굴은 보지 못했는가.
어딘가에 이르기 위해 그토록 서둘러 달려갈 때
그곳으로 가는 즐거움의 절반을 놓친다.
걱정과 조바심으로 보낸 하루는
포장도 뜯지 않은 채 버려지는 선물과 같다.
삶은 달리기 경주가 아니다.
속도를 늦추고,
음악에 귀 기울이라.
노래가 끝나기 전에.
- 데이비드 L. 웨더포드 -
고양이는 옳다.
날마다 고양이는 무엇을 기억하는가?
추위를 피해 안으로 들어가는 길,
가장 따뜻한 지점과
먹을 것이 있는 위치를 기억한다.
고통을 안겨 주는 장소와 적들,
애를 태우는 새들,
흙이 뿜어내는 온기와
모래의 쓸모 있음을.
마룻바닥의 삐걱거림과 사람의 발자국 소리,
생선의 맛과 우유 핥아먹는 기쁨을 기억한다.
고양이는 하루의 본질적인 것을 기억한다.
그 밖의 기억들은 모두 무가치한 것으로 여겨
마음속에서 내보낸다.
그래서 고양이는 우리보다 더 깊이 잔다.
너무 많은 비본질적인 것들을 기억하면서
심장에 금이 가는 우리들보다.
- 브라이언 패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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