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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

Baek Kyun Shin 2021. 5. 13. 22:46

우울감에 휩싸인 작가가 쓴 글의 분위기는 어떨까? 그 극치를 보여준 작품이 <인간실격>이다. 읽다가 포기한 사람이 있을 정도로 우울감, 패배감이 가득한 책이다.

주인공 요조는 소위 사회 부적응자, 말하자면 패배자다. 그렇다고 순수하지도 정의롭지도 않다. 적어도 다른 사람 눈에는 인간과 사회를 이해 못하는 떠돌이다. 다섯 번의 자살 시도 끝에 생을 마감한 다자이 오사무 자신을 투영하지 않았을까 싶다.

<인간실격> 첫 번째 수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
저는 인간의 삶이라는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리곤 바로 이렇게 이어진다.

정거장에 있는 육교를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면서도 그것이 선로를 건너기 위해서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전혀 생각 못하고 다만 그것이 정거장 구내를 외국 놀이터처럼 복잡하고 즐겁고 세련되게 만들기 위해 설치된 것이라고만 믿었습니다. 그것도 꽤 오랫동안 그렇게 믿고 있었습니다.

... 중략...

나중에 그것이 단순히 손님들이 선로를 건너 다닐 수 있도록 만들어진 극히 실용적인 계단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는 단박에 흥이 깨졌습니다.

... 중략...

곧 인간의 알뜰함에 암담해지고 서글퍼졌습니다.

요조는 사람이라는 존재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삼시 세끼 정해진 시간에 어두컴컴한 방에 모여서, 먹고 싶지 않아도 고개를 숙이고 말없이 밥알을 씹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것이 일종의 의식은 아닐까 생각한다.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고 두려워한다. 그렇지만 극도로 두려워하면서도 사람을 단념하진 못했다. 그래서 생각해낸 삶의 방식이 '익살'이다. 속으로는 고통스러워도 겉으로는 늘 웃고 다니는 거다. 

어느 날 요조는 우연히 공산주의 비밀 모임에 가입한다. 비밀 모임에서는 마르크스를 연구했는데, 요조는 마르크스에도 공산주의에도 큰 관심이 없다. 요조가 그 모임을 좋아한 이유는 비합법적인 일원들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비합법. 저는 그것을 어렴풋하게나마 즐겼던 것입니다. 오히려 마음이 편했습니다. 이 세상의 합법이라는 것이 오히려 두려웠고(그것에서는 한없는 강인함이 느껴졌습니다.) 그 구조가 불가해해서, 도저히 창문도 없고 뼛속까지 냉기가 스며드는 그 방에 앉아 있을 수가 없어서 바깥이 비합법의 바다라 해도 거기에 뛰어들어 헤엄치다 죽음에 이르는 편이 저에게는 오히려 마음이 편했던 것 같습니다.

요조는 어딘지 엉성하고 패배자 같은 음지 사람들이 마음에 들었다. 비합법적인 분위기가 좋았을 게다.

한편 요조가 친구 호리키와 술집에 갔을 때다. 요조가 좋아하던 쓰네코라는 여급이 있는 술집이다. 쓰네코는 호리키 옆에 앉았고, 요조 옆에는 다른 여급이 앉았다. 호리키는 쓰네코에게 키스를 할 게 뻔하다는 걸 요조는 알고 있었다. 그래도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요조에게는 그 상황을 막을 이유도 의향도 없다. 그러나 상황은 더 나쁘게 전개됐다. 호리키는 쓰네코가 궁상맞다며 그만두었다. 그 순간 요조는 쓰네코에게 동질감을 느낀다. 쓰네코는 취한의 키스를 받을 가치조차 없는, 그저 초라하고 궁상맞은 여자였던 것이다. 요조는 처음으로 정신을 잃을 만큼 술을 마셨다.

쓰네코가 사랑스럽고 불쌍했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때 적극적으로 미약하나마 사랑의 마음이 싹트는 것을 자각했습니다. 토했습니다. 정신을 잃었습니다.

<인간실격>에서 수사적으로 가장 마음에 드는 문장이다. 자각하고, 토하고, 정신을 잃는 사건 사이에 묘사하고 설명할 게 많을 텐데, 다자이 오사무는 '토했습니다. 정신을 잃었습니다.'라고 쓰고 끝냈다. 요조의 감정을 두 페이지에 걸쳐 표현했어도 이 두 문장보다 감흥이 덜 하지 않았을까. 다시 봐도 명문이라고 생각한다.

시간이 지나 요조는 자신과 같은 처지인 요시코라는 여자를 사랑하게 됐다. 요시코의 장점이자 단점은 사람을 지나치게 믿는 성품이다. 아무 저항도 못 하고 사람을 신뢰한다. 어느 날 요시코는 요조를 위해 삶은 콩을 만든다. 요시코가 요리를 하는 동안 요조는 옥상에서 바람을 쐬고 있는다. 그 사이 다른 남자가 요시코를 꼬드겨 관계를 맺는다. 요조는 그 장면을 우연히 보고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다시 옥상으로 가 소주를 마시며 꺼이꺼이 운다. 요시코는 일을 끝내고 삶은 콩을 가져와 멍하니 요조 앞에 선다. 요조는 요시코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라며 앉아 콩을 먹자고 한다.

신에게 묻겠습니다. 신뢰는 죄인가요?

신에게 묻겠습니다. 무저항은 죄입니까?

요조는 자신과 같은 처지인 사람을 제외하고 다른 모든 사람에게 반감을 느꼈다. 요시코는 자신과 같은 처지인 마지막 사람이었다. 요시코를 믿었다. 신뢰했었다. 요조는 미약하게 남아있던 존재의 이유를 상실했다.

인간실격.

이제 저는 더이상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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