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퉁이 서재
[폴 칼라니티] 숨결이 바람 될 때 본문
누군가에게 단 하나의 책만 추천해야 한다면,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난 다른 사람에게 책을 쉽사리 추천하지 않는다. 첫 번째 이유는 내 성향이나 가치관과 다를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고, 두 번째 이유는 좋은 책이 너무 많아 콕 집어 무얼 추천해야 할지 망설여지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고 생각이 바뀌었다. 우려와 망설임 따위를 신경 쓸 새 없이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고전만 훌륭한 책으로 취급하고, 현대 작가가 쓴 책은 잘 안 읽으려던 내 허영심도 더불어 사라졌다.
저자 폴 칼라니티는 신경외과의사다. 레지던트가 끝날 무렵 여러 대학에서 좋은 조건을 제시하며 스카우트 제의를 한다. 성공과 행복의 탄탄대로가 눈 앞에 펼쳐졌다고 생각했다. 행복의 순간은 짧았다. 그는 곧 폐암 말기 판정을 받는다. 병세는 점차 악화되었다. 지독한 항암 치료를 받으며 고통 속에서 살아가면서도 글을 썼는데, 자신이 죽은 뒤 이 글을 꼭 책으로 내 달라고 요청했다. 폴 칼라니티는 자신의 이야기를 책으로 남기고 싶은 이유를 친구 로빈에게 보내는 이메일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냥 충분히 비극적이고,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일이지. 독자들은 잠깐 내 입장이 되어보고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거야. '그런 처지가 되면 이런 기분이구나... 조만간 나도 저런 입장이 되겠지.' 내 목표는 바로 그 정도라고 생각해. 죽음을 선정적으로 그리려는 것도 아니고, 할 수 있을 때 인생을 즐기라고 훈계하려는 것도 아니야. 그저 우리가 걸어가는 이 길 앞에 무엇이 있는지 보여주고 싶을 뿐이지."
그는 폐암 말기 판정을 받은 뒤에도 의사 생활을 하고, 글을 쓰고, 아이를 낳았다. 이 시기에 폴에게 활기를 되찾아준 건 문학이었다. 폴은 죽기 이틀 전에도 T.S 엘리엇의 <황무지>를 거실에서 크게 읽었다. 내 가슴을 미어지게 한 장면이다. 책을 덮은 뒤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이다. 머리털도 없고, 몸도 앙상하고, 눈은 퀭하게 도드라진 그가 힘겹게 T.S 엘리엇의 <황무지>를 읽는 장면. 그것도 불과 죽기 이틀 전에. <황무지>가 얼마나 위대한 시집이길래? 얼마나 문학을 좋아하길래? 얼마나 삶을 향한 의지가 강하길래? 이런 얕은 의문을 지배하는 무언가가 느껴졌는데, 그것이 뭔지는 잘 모르겠다. 생명의 불씨가 꺼져가는 상황에서 거실 의자에서 담요를 덮은 채 힘겹게 <황무지>를 읽는 폴 칼라니티.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숭고함?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을 향해 속수무책으로 살아간다. 죽음은 당신에게도, 주변 사람들에게도 일어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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