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퉁이 서재
[박은미]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본문
내게 쇼펜하우어는 특별한 존재다. 나는 니체와 사르트르를 좋아하는데, 쇼펜하우어가 니체, 키르케고르, 베르그송, 사르트르, 까뮈로 이어지는 생철학, 실존철학의 뿌리이기 때문이다. 2,000년간 이어져온 서양 전통 이성 철학에 반기를 든 철학자여서 더 특별하게 느껴진다. 문학, 철학, 예술계에 쇼펜하우어의 영향력은 어마어마했다. 너무 많아 다 나열하기 힘들 정도다. 너무나 자명한 니체는 물론이거니와,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 아인슈타인, 비트겐슈타인, 프루스트, 에밀 졸라, 토마스 만, 프란츠 카프카, 프로이트, 헤르만 헤세, 앙드레 지드, 찰스 다윈, 헨리 데이비드 소로, 랄프 왈도 에머슨, 바그너 등.
톨스토이는 유일하게 쇼펜하우어 초상화만을 집에 걸어두었다고 한다. 아인슈타인은 세 명의 초상화를 연구실에 걸어뒀는데, 두 명은 과학자이고, 나머지 한 명은 쇼펜하우어였다. 천재 비트겐슈타인은 쇼펜하우어의 사상을 바탕으로 철학을 시작했다. 니체는 자신이 철학자가 된 계기가 쇼펜하우어 때문이라고 말했다. 어느 날 헌책방에서 우연히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읽은 뒤, 니체는 철학을 하기로 결심했다. 쇼펜하우어의 영향력에 관한 일화는 더 많겠지만 여기까지.. (놀라운 점은 쇼펜하우어가 이 독보적인 책을 30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썼다는 점이다.)
영향력은 차치하고 내가 좋아하는 철학의 원류이기 때문에, 쇼펜하우어의 주저인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꼭 읽고 싶은 책이다. 그런데 차마 읽지 못하고 있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분량도 제법 되지만, 글이 쉽게 읽히지 않아 긴 호흡을 갖고 읽어야 한다. 게다가 불친절하게도(?)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의 서론에서는 이 책을 읽기 전에 다음 세 가지를 먼저 읽고 오라고 말한다. ① 자신의 박사 논문인 『충족이유율의 네 겹의 뿌리에 관하여』, ② 칸트 저서, ③ 자신이 쓴 『칸트 철학 비판』. (칸트 철학을 사전에 이해해야 하는 까닭은 쇼펜하우어의 철학이 칸트 철학을 수정해서 완성한 철학이기 때문이다) 친절한 건지, 불친절한 건지, 하여간 사전 지식이 상당히 있어야 자신의 책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한 번으론 이해하기 힘드니 최소 두 번을 읽으라고 말한다. 상황이 이러니 함부로 도전하지 못하고 있다. 머지않아 읽어볼 참이다.
이번에는 대신해서 박은미 교수가 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해설서를 읽었다. 원서가 아닌 해설서를 좋아하는 편은 아닌데, 쇼펜하우어에 워낙 관심이 많은지라 한번 읽어봤다. 박은미 교수는 현학적인 글을 거의 쓰지 않았다. 되도록 쉬운 글로 쓰려는 노력이 보였다. 그만큼 글이 곧잘 읽혀 금방 읽었다. 쇼펜하우어의 핵심 사상을 이해할 수 있도록 주요 내용 위주로 정리를 해봤다.
쇼펜하우어는 염세주의자로 불린다. 삶의 고통을 적나라하게 파헤쳐서 염세주의로 분류되기는 하지만, 쇼펜하우어는 삶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드러냈을 뿐이다. 있는 그대로 드러낸 메시지의 핵심은 '세계는 나의 표상이며, 의지이다'이다.
2,000년간 이어진 이성 중심 서양 철학에 맞서는 쇼펜하우어의 의지 철학
고대, 중세, 근대 초기 서양 철학에서는 이성을 신뢰하고 신체를 열등하게 여겼다. 하지만 이성은 두뇌 작용일 뿐이라고 생각한 쇼펜하우어는 신체를 강조했다. 쇼펜하우어에게 인간은 감성에 따라 충동적으로 살아가는 육체를 가진 존재다. 이성이란 두뇌 작용으로서 '의지'의 영향을 받는 것일 뿐이다.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의지란 모든 만물을 지금 그것으로 존재하게 하는 힘으로, 모든 사물의 내적 원리, 생명의 원리, 생명 에너지, 즉 자연 속의 모든 힘을 말한다.
이성 중심 철학에서 인간은 이성 덕분에 존엄한 존재다. 반면, 쇼펜하우어 철학에서 이성은 선의와 협력할 수도 악의와 협력할 수도 있는 사고 능력일 뿐이다. 쇼펜하우어는 세계의 근원을 이성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의지라고 봤다. 그렇기 때문에, 이성에는 생생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포착할 수 있는 힘이 없다고 보았다.
이성 때문에 덕 있는 행동을 한다기보다는 자신이 원하는 행동을 하고서 사후에 이성을 동원해 그럴듯한 이유를 갖다 대는 존재가 인간이다. 쇼펜하우어는 인간에게 그렇게 행동하도록 만드는 힘을 '의지'라 칭했다. 의지는 이 세상 모든 것을 그것으로 존재하게 하는 힘이다. 쇼펜하우어에게 인간의 본질은 이성이 아니라 의지다. 쇼펜하우어는 세상 모든 것이 의지에 따른 것이라고 말한다. 이렇듯 인간과 인생을 향한 독창적인 철학을 개진했다.
의지의 맹목적성
인간은 의지가 구현된 존재다. 신체를 통해서 말이다. 인간의 이성은 그리 믿을 만하지 못하다. 뇌에 의해 제약되는 두뇌 작용에 불과할 뿐이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어에게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의지의 목적 없는 움직임에 따른 것일 뿐이다. 의지에겐 목적이 없다.
결국 인생은 의지의 목적 없는 움직임에 따라 희로애락을 느끼는 그 무엇이다. 그런데 인간은 의지의 움직임에 일희일비한다. 불행은 행복보다 인간에게 더 생생하게 느껴진다. 기쁨은 늘 기대한 바에 못 미치고 괴로움은 늘 예상보다 더 큰 고통을 안겨준다. 쇼펜하우어가 보기에 인간은 그저 의지가 좌우하는 욕망에 따를 뿐이다. 의지는 알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미지의 그 무엇이다.
표상으로서의 세계와 의지로서의 세계
우리가 평소에 인식하는 세계가 바로 '표상으로서의 세계'이고, 세계 그 자체(본질)가 '의지로서의 세계'라는 것만 분명히 해두자. 다시 말해, 쇼펜하우어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주장하는 바는 세계가 한편으로는 '표상으로서의 세계'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의지로서의 세계'라는 것이다. 이 한 문장을 제대로 이해하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모두 이해한 셈이다.
표상(表象)은 인간의 오감으로 인지된 것을 말한다.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이 표상이다. 우리는 '표상의 전체'를 세계라고 부른다. 세계가 A라서 우리가 A로 인식한다고 보는가? 아니면 세계가 우리에게 A로 드러나서 세계를 A로 인식할 뿐이지 세계의 실재가 A임은 확인하지 못한다고 보는가? 전자가 실재론이고, 후자가 관념론이다. 실재론이 객체에 중점을 둔다면 관념론은 주체에 중점을 둔다. '표상으로서의 세계'라는 표현으로 쇼펜하우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인간은 표상으로밖에 세계를 감지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인식 주관에 의해 형성된다. 쇼펜하우어는 "주관 없이는 객관이나 대상도 없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고통을 느끼는 주체 없이는 고통을 불러일으키는 대상도 없다는 말이다. 철학적인 표현으로 바꾸면 "객체는 주체 없이 절대로 표상될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객체는 인식되는 대상이고 주체는 인식하는 인간을 말한다. 사물은 그것을 보는 사람이 없으면 인식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러니까 "객체가 있다"고 말한다는 건 주체도 이미 있다는 소리다.
철학사에서는 주체와 객체의 관계를 향해 여러 주장이 난무한다. 주로 객체를 강조하는 입장(실재론: 객체가 어떠냐에 따라 주체의 인식이 달라진다)과 주체를 강조하는 입장(관념론: 주체가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객체를 달리 인식한다)이 나뉜다. 여기서 쇼펜하우어는 주체를 강조하거나 객체를 강조하는 입장이 아니다. 주체와 객체 모두 동시에만 존재 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특히 주체 때문에 객체가 존재한다거나 객체 때문에 주체가 존재한다든가 하는 주장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주체와 객체 중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로부터 도출된 게 아니라는 말이다. 결론적으로 쇼펜하우어는 실재론자도 관념론자도 아니다. 주체와 객체 모두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칸트가 말하는) 물자체를 모두 인식한다고 보기 어렵다는 것은 과학으로 확인되기는 한다. 예를 들어 살펴보자. 인간의 가청주파수는 16헤르츠에서 2만 헤르츠다. 인간이 듣지 못한다고 해서 16헤르츠 미만의 소리나 2만 헤르츠 이상의 소리가 없는 게 아니다. 다른 예를 들어보자. 노란 분필은 원래 노란색이 아니다. 노란 분필은 노란색을 반사하기 때문에 우리 눈에 노란 분필로 보일 뿐이다. 그러면 우리는 반사하는 빛깔을 그 분필의 빛깔이라고 봐야 하는가, 그 분필이 보유하는 빛깔을 분필의 빛깔로 봐야 하는가? 눈에 보이는 빛깔로 그 사물의 색깔을 칭할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우리 인간의 눈에는 노란색으로 보이니 우리는 그 분필을 노란 분필이라고 한다. 그러니 노란 분필이 '원래 노란 분필이어서 노란 분필이라고 한다'가 아니라 '인간은 그 사물을 노란 분필이라는 표상으로 포착한다'고 말해야 옳다. 인간의 인식 능력이 닿지 않는 영역이라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어쩌면 신의 영역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인간의 인식 능력이 닿지 못해서 파악하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의지는 이유 없이 움직인다. 맹목적이다. 우주 전체를 관통하는 삶의 맹목적인 충동인 의지가 무생물, 식물, 동물, 인간으로 나타난 것이 바로 세계다. 이 가운데 의지의 성질이 가장 잘 드러나지 않는 게 중력이나 자기력 같은 자연력이다. 무기물이나 식물에서 드러나는 힘, 동물을 움직이게 하는 생명력, 인간에게서 나타나는 의욕과 욕망 등도 모두 의지에 따른 것이다. 돌과 같이 생명이 없는 사물은 의지가 낮은 단계에서 구현된 사물이고, 생명체는 의지가 높은 단계에서 구현된 존재다.
우리는 왜 고통스러운가?
'세계는 나의 표상이다.' 이 말은 삶을 살면서 인식하는 모든 존재에게 적용되는 진리다. 하지만 인간만이 이 진리를 의식한다. 이것을 의식할 때 철학적 사려 깊음이 생긴다.
그렇지만 이러한 인간의 능력은 고통의 뿌리가 된다. 쇼펜하우어는 "인간은 능력에서나 고통에서나 동물을 뛰어넘는다"고 말한다. 동물은 눈앞의 욕구만 해결하려 한다. 인간은 현재뿐 아니라 과거와 미래도 생각한다. 능력 차원에서 보면 동물은 현재 문제만 해결할 수 있으나 인간은 현재와 미래 문제까지도 해결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고통의 차원에서 보면 이야기가 다르다. 인간은 현재뿐 아니라 과거와 미래의 고통까지도 짊어지는 셈이다.
우리는 내가 원하는 대로 다른 사람이 행동하고 존재하기를 원한다. 이러한 희망이 고통을 낳는다. 타인은 자기 방식대로 존재하지 내가 원하는 대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엄정한 사실인데도 우리는 헛된 희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고뇌가 있으면 작은 고뇌는 별문제가 아니다. 반대로 큰 고뇌가 없으면 작은 고뇌가 크게 느껴진다. 그러니까 인간은 아무런 고뇌가 없는 상태에 있기 어려운 존재다. 어떤 상태에서도 문제를 느끼고야 마는 존재다. 어떤 사람에게는 암 진단을 받은 사실이 문제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입고 싶은 옷이 세탁소에 있다는 점이문제다. 세탁소에서 옷을 찾아오지 않은 게 지금 그 사람이 겪는 가장 큰 문제라면 우리는 그 사람이 그만큼 걱정이 없는 사람임을 알게 된다. 그렇지만 당사자는 오늘 그것이 가장 큰 고통이다. 남들 보기에는 별문제 아닌 문제로도 사람은 고통을 겪는다. 그래서 세상에는 고통이 없는 사람이 별로 없다.
의지를 움직여서 우리를 격렬하게 뒤흔드는 것이 바로 의욕이다. 우리가 의지에 사로잡혀 있는 한, 끊임없는 희망과 두려움으로 여러 소망의 충동에 내몰려 있는 한, 우리가 의욕의 주체인 한, 우리에게는 지속적인 행복도 마음의 안정도 결코 주어지지 않는다. 의지는 결코 채워지지 않는 끊임없는 욕구와 충동을 갖는다. 모든 존재가 이러한 충동적인 의지 때문에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아무리 필연적인 것처럼 보이더라도 안을 들여다보면 본능적이고 맹목적인 의지가 지배하는 세계일 뿐이다.
쇼펜하우어는 의지가 세계의 본질이라고 말하면서도 의지의 지배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의지가 이 세계를 어떤 식으로든 고통스럽게 하기 때문이다. 한 사람에게 체현된 의지와 다른 사람에게 체현된 의지는 원래 하나다. 그렇지만 서로 다른 사람에게 체현되면서 충돌한다. 이때 고통이 생긴다. 우리는 갈등이 생길 때 저 사람이 일부러 나를 괴롭힌다고 생각하곤 한다. 그러나 그 사람은 그저 자기 방식대로 존재할 뿐이다. 나는 내 방식대로 존재하고 그 사람은 그 사람 방식대로 존재할 뿐인데, 나는 그 때문에 고통을 받고 그는 나 때문에 불편을 느낀다.
우리는 자유로운가?
쇼펜하우어는 '행위의 자유'라는 개념이 허상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의지가 드러나는 매개체에 불과하니 말이다.
인간은 자신이 무엇인가를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두 가지 선택지 가운데 하나를 고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그렇지 않다. 동물과 달리 인간은 선택을 하기는 한다. 그러나 쇼펜하우어가 보기에 이 선택은 경쟁하는 동기들 가운데 가장 강한 동기의 영향을 받아서 결정된다. 선택을 한다고는 해도 동기에 의해 결정된 것이지, 자유에 의한 것은 아니다. 선택하고 행동하는 당사자조차도 자신의 동기를 알지 못한다.
이념과 예술
객관화된다는 말은 시공간 안에서 구체적인 존재로 드러난다는 이야기다. 쇼펜하우어는 의지가 객관화되는 단계 가운데 최상의 단계를 '이념'이라고 부른다. 쇼펜하우어가 이념이라는 말에 사용한 독일어는 Idee(이데)이다. 원래 플라톤이 말한 이데아를 뜻한다. 플라톤에게 이데아는 만물의 본질이지만, 쇼펜하우어에게 이념은 의지와 다양한 표상을 연결해주는 무언가다.
쇼펜하우어는 이념을 인식하는 방법이 예술이라고 말한다. 이념을 직관하는 대표적인 것이 바로 예술이다. 예술은 표상 세계에만 집착하는 우리 시선을 의지의 세계로 이끈다. 예술은 사물의 고유한 내적 본질로 침잠해 들어가는 행위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고 자기 자신에 속박되지 않고 육체의 구속에서 자유로워지는 경험을 잠시나마 준다.
법칙을 파악해 정립해놓은 이론 체계를 '학문'이라고 한다. 학문은 보편적인 원리를 탐구한다. 하지만 학문이 만든 법칙은 절대적·보편적 법칙이 아니다. 쇼펜하우어가 보기에 학문은 표상을 향한 인식에서 그 표상들이 근거하는 이념에 대한 인식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행위다. 부질없는 짓이다. 표상 세계의 뿌리는 의지 세계다. 의지를 직관하지 않고는 이념에 대한 인식을 할 수 없다. 그런데 의지의 세계는 근거율에 제약받지 않기 때문에 학문으로는 알 수 없다. 다만, 예술은 의지의 다양하면서도 통일된 모습을 직관한다.
다른 사람을 향한 연민 (feat. 쇼펜하우어식 윤리학)
쇼펜하우어는 삶의 맹목성을 인정하고, 나에게 좋네 나쁘네 따지는 자기 중심성을 탈피하면 남들도 나와 마찬가지로 맹목성 때문에 힘들어하는 동지, 고통의 바다를 같이 건너야 할 동료라는 점을 알게 된다고 생각했다. 나만 고통을 당하는 게 아니라 저 사람도 고통의 바다를 건너느라 힘들다는 사실을 알면 자연스럽게 타인의 고통에 연민이 생긴다. 타인의 고통을 모른 체하지 않게 된다. 인생의 동지에게 한 번이라도 손을 내밀어주고 남들과 다정하게 살게 된다.
쇼펜하우어는 동고(同苦)를 말한다. 동고란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의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느끼는 심정이다. 모든 존재가 의지의 지배를 받아 고통스럽다는 점을 이해하면 동고의 마음을 갖게 된다. 쇼펜하우어는 자기에게만 관심을 집중하면 나에게만 소심하게 배려하지만, 살아 있는 모든 존재에게 관심을 가지면 '조용하고 자신 있는 명랑함'이 생긴다고 말한다. 다른 존재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처럼 느끼는 사람의 마음이 동고다. 모든 참되고 순수한 사랑은 동고이고 동고가 아닌 모든 사랑은 사욕이다.
동고는 세계의 근원과 본질에 대한 성찰로 얻을 수 있는 상태다. 인간은 누구나 의지의 움직임에 굴복하고 의지에 좌우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알게 되면, 너나없이 의지의 맹목성에 휘둘리는 게 부질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인간은 까닭 없이 움직이는 의지의 작용에 따라 기뻐하고 슬퍼하게 마련이다. 이런 인간의 기본 조건을 이해하면 의지의 맹목성에 춤추는 것 자체가 문제임을 알게 된다. 그래서 의지의 작용에 지나치게 영향받지 않도록 마음을 간수하려고 노력하게 된다. 더불어 의지의 작용 때문에 절망하는 타인도 애틋하게 보살펴주게 된다.
예를 들어 생각해보자. 우리는 누군가와 다툴 때 '저 사람 이해 안 돼!' 하면서 괴로워한다. 저 사람이 나를 괴롭히려고 작정했다고 생각하며 더욱 괴로워한다. 그런데 그 사람도 자신을 움직이는 의지의 맹목적인 움직임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나도 의지의 맹목적성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렇듯이 저 사람도 어쩔 수 없다. 그가 그러한 모습인 게 그만의 책임도 아니고 내가 이러한 모습인 것도 나만의 책임이 아니라는 점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에게 구현된 의지나 나에게 구현된 의지가 결국은 하나다. 너나 할 것 없이 의지의 맹목적인 움직임에 의해 그렇게 된다는 점을 받아들이면 곧 개체화의 원리에 매이지 않는다. 곧, '나'라는 개체에 매몰되지 않고 '그'라는 개체에 매몰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그도 의지가 그렇게 구현되어 그렇게 살고 나도 의지가 이렇게 구현되어 이렇게 사는 존재인데 결국 너나 나나 모두 의지의 맹목적인 움직임에 따라 고통을 느끼게 된다는 사실을 이해하면 그의 고통이 나와 무관하게 여겨지지 않는 마음, 즉 동고의 마음을 갖게 된다.
삶의 고통에 대해 썼기 때문에 쇼펜하우어 철학이 '염세주의'라 불린다. 그러나 고통을 직시하고 타인의 고통에 동고할 것을 주문한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염세주의라고만 치부하기에는 적절하지 않다. 염세주의라기보다는 인간의 삶을 있는 그대로 묘사했다고 보는 게 더 적절하겠다. 물론 삶은 곤궁함으로든 지루함으로든 인간에게 고통을 준다라는 쇼펜하우어의 일갈은 염세주의라는 소리를 들을 만하다. 욕망이 있으면 그 욕망을 채우지 못해 괴로워지고 욕망이 없으면 욕망 없어서 삶의 무의미에 시달린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그렇다. 삶은 결핍이 있거나 권태롭다는 쇼펜하우어의 진단에 사람들이 주목한 것도 이해가 될 만하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윤리학의 진정한 토대는 칸트식의 의무론적이고 형식적인 원리가 아니라, 맹목적인 의지에 끌려가면서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가는 모든 존재를 향한 동고의 마음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
쇼펜하우어는 인생에서 일어나는 문제에 무심한 태도를 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원하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아도 인생이 그러함을 받아들이라는 말이다. 삶의 진실은 '인생이라는 것은 제멋대로 흘러가고, 인간은 거기에 좋네 나쁘네 추임새를 넣을 뿐'이라는 것이다. 제멋대로 굴러가는 일에 관해 자기에게 유리하면 좋다고, 불리하면 나쁘다고 난리를 치지만, 세계를 만들고 일들이 생기게 하는 의지는 아무런 목적 없이 작용할 뿐이다. 왜 비가 오느냐고 따져도 비는 그치지 않는다. 의지가 맹목적으로 춤출 때 왜 그렇게 작용해서 나를 괴롭히냐고 따진다고 해서 고통이 없어지지 않는다. 이는 그저 인간 혼자 기운 빼는 일이다.
"나는 저 친구보다 더 열심히 살았는데 왜 저 친구보다 성공하지 못하는가" 하는 볼멘소리를 하면 쇼펜하우어는 "너의 노력이 의지의 작용 방향과 맞으면 성과가 나오고, 노력이 의지 작용에 반하면 노력한 만큼의 성과가 나오기 힘들어. 성과를 얻고 싶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건 열심히 노력하는 일뿐이야. 성공을 했네 못했네 하는 사실에 연연하는 것은 네가 모르는 의지의 작용을 두고 투정하는 짓에 불과해"라고 말할 것이다.
의지의 맹목적인 움직임을 두고 사람들은 호불호에 따라 기쁨이니 고통이니 낙인을 찍지만 의지는 아무 이유 없이 움직일 뿐이다. 파도가 오고 가듯이 삶의 일들은 무심히 일어나는데 인간은 파도처럼 밀려오는 의지의 움직임에 희로애락을 겪느라 고통스럽다. 의지의 움직임이 인간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인간은 고통을 겪는다. 그런데 문제는, 이 맹목적인 움직임에 대한 이러저러한 판단을 다른 동물보다 훨씬 많이 한다는 점이다. 동물은 자신을 문제 삼지 않지만 인간은 자기 자신을 문제 삼는다. 인간은 자괴감을 느끼는 사고 능력을 가져서 더 고통스럽다. 그러나 의지의 움직임에서 자유로운 인간은 없다는 점에서 의지의 움직임은 공평하다. 이러한 의지의 움직임의 이유 없음을 직시할 때 의지로 인한 고통을 그칠 수 있다.
쇼펜하우어는 인간은 고통 자체보다도 고통에 대한 표상 때문에 고통받는다고 했다. 희로애락이 고통인 이유는 분노와 슬픔은 그치기를 바라고 기쁨과 즐거움은 그치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쳤으면' 혹은 '그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을 버리고 순수하게 희로애락을 느끼면 희로애락은 그저 흘러가는 무엇일 뿐 고통이 되지 않는다. 쇼펜하우어가 말한 '삶에의 의지 부정'이 바로 이러한 상태이다. 의지의 맹목적인 움직임을 관조하면 나도 너도 결국 의지의 맹목적인 움직임의 대행자일 뿐임을 수용하게 된다.
자기가 못하는 것을 파악하고, 잘하는 게 있으면 못하는 것도 있다는 점을 받아들이면 자신을 향한 불만이 없어진다. 괴로움도 없어진다. 우리는 보통 모든 걸 잘하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못하는 게 있으면 그 문제를 부여잡고 괴로워한다. 잘하는 게 있으면 못하는 것도 있기 마련이므로 자신이 잘하지 못하는 것에 너무 괴로워하지 말고 잘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하면 될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말한다. "우리가 화를 입었다는 사실보다 오히려, 사정에 따라서는 그것을 피할 수도 있었다는 생각이 우리를 더 고통스럽게 한다." '다를 수도 있었다'는 인식은 우리를 고통에 빠뜨린다. 다를 수 있었는데 선택을 잘못해서 좋지 않은 결과를 얻었다는 생각은 우리를 힘들게 한다. 그런데 오히려 '바꿀 수 없었다'는 것이 확인되면 '선택을 달리할 수 없었다'는 것이 되기에 마음에 평화가 온다. 쇼펜하우어의 말대로 '필연성을 완전히 확신하는 것보다 우리에게 더 효과적인 위안은 없다.'
삶의 고통을 파도에 비유해보자. 끊임없이 치는 파도를 보며, 파도가 오면 온다고 괴로워하고 가면 간다고 괴로워한다면 너무나 많은 괴로움을 느끼게 될 것이다. 터무니없는 이유로 괴로워한다면 그 터무니없는 이유에 영향받고 싶지 않게 된다. 모든 존재가 의지의 맹목성 때문에 고통에 시달린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사람은 '금욕'을 행하게 된다고 쇼펜하우어는 말한다. 의지가 자신에게 의욕을 불러일으키지 않도록 조절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한 번 의지를 부정했다고 이 상태가 지속되는 것은 아니다. 끊임없이 투쟁해야 한다. 인간은 육체를 가지고 있는 의지의 구현체여서 언제든 의지에게 침입당하기 때문이다. 평정은 쇼펜하우어의 표현대로 '끊임없는 극복에서 생긴 꽃송이'다. '의지의 끊임없는 유혹'을 견뎌내야만 평정을 누릴 수 있다. 쇼펜하우어는 이를 '의지의 자유'라고 말한다.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고통에서 시작해 해탈로 끝난다.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결론이 우파니샤드의 주장과 일치한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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