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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륜] 인간 붓다

Baek Kyun Shin 2020. 1. 10. 20:04

개인적으로 불교를 하나의 철학으로서 좋아한다. 종교로서는 그다지 믿지 않는 편이다. 절에 가서 108배를 한다고 나의 바람이 이루어질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사실 과거 성인들은 모두 존경한다. 예수, 석가, 소크라테스, 공자, 노자 모두를 존경하고 그들의 철학 또한 존경한다. 이들 중 예수와 석가의 사상은 종교로까지 발전해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예수든 석가든 신으로서 우리를 보호해준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즉, 종교로서는 믿지 않는다는 뜻이다. 다만 예수와 석가 모두 존경받아 마땅한 사람이고, 그들의 사상은 두말할 나위 없이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개인의 호불호가 있듯이 나는 그런 성인 중 석가와 노자를 좋아한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석가와 노자의 철학을 좋아한다. 내가 평안한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라 그렇다. 순간적으로 기쁜 것보다는 평탄하게 평안한 것을 좋아한다. 석가의 가르침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사실 나도 잘 모르지만 그것은 내 마음을 차분하고 평화롭게 한다. 내 마음을 고요하게 하고 평안하게 한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는 마음가짐은 번뇌를 사라지게 한다. 

이 책은 석가의 삶에 대해 살펴보는 책이다. 석가는 왕족으로 태어나 풍요롭게 살다가 출가한 뒤, 수행을 하고 깨달음을 얻고 깨달은 진리를 제자들에게 전수하고 돌아가셨다.

석가의 성은 고타마 이름은 싯다르타다. 고타마는 왕족의 아들로 태어나 풍요 속에서 살아갔었다. 그러다 고통스럽게 일하고 있는 농부를 보고는 내가 이렇게 풍족하게 먹고 살기 위해서는 저 농부들의 고통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되었다. 고타마는 전에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충격에 휩싸였고, 어째서 아버지 슈도다나 왕과 대신들은 농부들의 고통을 보고도 아무렇지도 않은가 의심이 들었다. 

왜 강한 것은 약한 것을 잡아먹고 약한 것은 강한 것에게 잡아먹히는가? 왜 이 세상은 이렇게도 살벌하단 말인가. 왜 조금의 관용도 없이 서로 먹고 먹힌단 말인가. 왜 누구는 뜨거운 햇볕 아래서 고통스럽게 농사를 지으면서도 못 먹고 헐벗은 채 굽실거리며 살아야 하고, 왜 어떤 사람은 편안하게 나무 그늘에서 놀면서도 배불리 잘 먹고 잘 입고 살 수 있는 것일까?

결국 고타마는 출가수행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갖은 고난 속에서 수행을 이어 갔고, 결국 보리수 아래서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 깨달은 진리를 수많은 제자들에게 설파했고 그 가르침이 오늘날까지 이어져온 것이다.

첫번째 가르침은 우리의 삶이 모두 고통 그 자체임을 자각하라는 것이다. 현상을 자각해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듯이 인생이 고통임을 먼저 자각해야 한다. 자각이 해탈의 첫 단계이다. 두 번째 가르침은 이러한 고통의 원인이 무엇인가를 명확히 밝혀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고통을 해결하고 해탈의 세계를 이룰 수 있도록, 즉 고통의 원인을 제거할 수 있도록 방법을 제시했다. 그 방법이 무엇인지는 사뭇 심오해 나도 잘 모르겠다. 더 깊이 들어가면 종교적 사유의 단계까지 갈 것이다. 

종교적인 것, 철학적인 것을 차치하고서도 석가의 삶이 존경스럽다. 왕족으로 태어나 어떻게 모든 풍요를 떨쳐버리고 출가 사문의 길을 걸을 결정을 했을까. 죽기 전까지 수십년 동안 육체적 고통 (그의 표현에 의하면 이는 고통이 아니지만)을 겪을 것을 알면서도 어떻게 그런 결정을 했을까. 단지 인류에 대한 애정과 연민으로 그것이 가능했을까. 이런 존경심은 예수에게도 똑같이 든다. 스스로를 희생한 모든 성인은 정말 존경스럽다. 그들은 말 그대로 성인이라 불릴 자격이 충분하고, 그들의 가르침을 조금이나마 배울 수 있다는 것도 참으로 영광스러운 일이 아닌가 싶다.

내일이면 나는 다시 욕심과 이기심 가득한 마음으로 돌아갈 것을 안다. 단 1시간이라도, 아니 단 5분이라도 사문의 마음가짐을 가져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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