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퉁이 서재

[피천득] 인연 본문

책과 사유

[피천득] 인연

Baek Kyun Shin 2020. 1. 29. 00:12

코엑스 영풍문고에서 책을 구경했을 때였다. 매번 서점에 가면 철학 섹션과 고전 섹션을 먼저 본다. 특히 철학 섹션에서 오랜 시간 머물며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그 넓은 코엑스 영풍문고에서 철학 섹션은 단 한 칸에 불과했고 그마저도 2단으로 되어있는 책꽂이의 뒤쪽에 있어 보기가 여간 불편했다. 게다가 철학자들이 쓴 원저가 아니라 그 원저를 설명해놓은 해설서나 철학 입문서들 위주였다. 문득 군 시절 휴가 나왔을 때가 생각이 났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휴가 나올 때마다 천안 교보문고를 찾았다. 철학 섹션의 바닥에 아빠 다리를 하고 앉아 이 책 저책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인생에 무슨 도움이 되는지 잘 모르겠는 그런 책들을 보며 뭐가 그리 재밌었는지.. 그러나 코엑스 영풍문고에서는 그렇게 할 수가 없어 안타까웠다. 실망을 안고 다른 책들을 구경했다. 눈에 잘 띄는 곳엔 화려하게 치장된 알맹이가 없을 것 같은 책들이 많았다. 플라톤, 니체, 괴테의 책들은 도서 검색대에서 검색해보지 않으면 쉽게 찾을 수 없었다. 양서가 구석에 박혀있고, 겉만 화려한 책들이 눈에 잘 보이는 곳에 있다고 서점을 비난할 순 없다. 서점은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책을 잘 보이는 곳에 둔 것뿐이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와중 피천득 선생님의 인연이라는 수필집이 눈에 띄었다. 마땅히 볼 것도 없어서 의자에 앉아 그 수필집을 잠시 읽어보았다. 이 수필집은 여러 편의 짧은 수필을 모아둔 책이다. 책 제목과도 같은 '인연'이라는 수필을 우선 읽어봤다. 단 5페이지의 수필이다. 그 짧은 수필에 압도당했다. 읽자마자 멍한 느낌이 들었다. 허공을 바라봤다. 절절하지 않은 담백한 문체였지만 굉장한 감동을 주었다. 5페이지의 그 짧은 수필을 다시 한번 읽었다. 그리고 이어 '은전 한 닢'이라는 수필도 읽어보았다. 아...  다시 허공을 바라봤다. 수필을 읽으며 감탄을 한 건 김훈의 [자전거 여행]을 읽은 이후 처음이었고, 한국인의 정서를 몸소 느낀 건 김유정의 [봄봄]을 읽은 이후 처음이었다. 그리고는 바로 그 수필집을 구매했다. 지금까지 '인연'만 5번은 읽은 것 같다. '인연'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영화가 있을 것만 같아 찾아봤는데 역시나 있었다. 보고 싶어서 이래 저래 뒤져봤지만 좀 오래된 영화라 그런지 다운받기가 쉽지 않아 그만두었다. 꼭 한 번 보고 싶은데 여간 아쉬운 게 아니다.

그리고 뒤늦게 알게 된 사실이지만 예전에 읽은 셰익스피어의 소네트 시집을 피천득 선생님께서 번역하셨다고 한다. 소네트를 읽으면서 영어로 된 시를 어떻게 이런 식으로 번역을 했을까 신기해 하던 기억이 있다. 한국 시인이 한국어로 쓴 시 같이 감정을 그대로 옮겨놓았기 때문이다. '평범한 번역가가 아닌 피천득 선생님이 번역을 하셔서 그랬던 거구나'하고 뒤늦게 수긍하게 됐다. 언젠가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를 한 번 더 읽어야겠다.

피천득 선생님은 검소하면서 소박하고 솔직했다. 그의 성품이 수필에 온전히 드러난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은 60부터 라며 일종의 정신승리를 하지만 피천득 선생님은 늙음을 늙음으로 솔직하게 받아들이셨다. '젊음이 더 즐겁고 재밌는 건 사실이다. 늙으면 여러 제약이 있어 슬픈 것도 사실이다. 이미 내가 늙은 걸 어쩌랴. 그래도 오래 살아왔기 때문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자세를 가졌다는 건 좋은 일이다.'와 같은 입장이다. 그는 글에서 자신의 감정을 숨기거나 포장하지 않았다. 받아들이고 생각을 솔직하게 글로 표현했다. 힘을 빼고 글을 쓰니 글이 더 훌륭해진 것이다. 5페이지의 짧은 글로도 한 권의 책 보다 더 큰 울림을 주었다. 나는 서양 고전을 좋아한다. 하지만 피천득 선생님 덕분에 한국 작가에게도 관심을 더 기울일 것 같다. 이 글을 다 쓴 지금, '인연'을 한 번만 더 읽어보고 자야겠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