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퉁이 서재
[리처드 도킨스] 이기적 유전자 본문
1976년에 출간된 《이기적 유전자》는 진화생물학 분야의 대표적인 고전이다. 이 책 덕분에 진화생물학을 처음 접했는데, 퍽 매력적인 학문이라고 생각한다. 이 세상에 관해 상당히 많은 걸 설명해주기 때문이다. 우리가 왜 무언가는 좋아하고 무언가는 싫어하는지 그 이유를 설명해준다. 우리가 왜 서로 싸우고 경쟁하는지도 설명해준다. 우리는 왜 서로 의사소통을 하며 살아가는지도 설명해주고, 우리를 비롯한 지구상 생물이 왜 이런 모습을 갖게 됐고, 왜 이렇게 행동하며, 왜 이런 감정을 느끼는지 알려준다. 종합하자면 모든 생명체가 왜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밝혀주는 학문이 바로 진화생물학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궁금증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철학을 비롯한 인문학에서 답하려고 시도했지만 합치된 결론에 도달하지 못했다. 하지만 진화생물학은 명쾌한 답을 준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나도 진화생물학에 관심이 생겼다. 《이기적 유전자》를 읽은 뒤에는 아래와 같은 영화, 다큐, 강연도 챙겨봤다. 그만큼 재밌는 학문이다.
- 영화 - 《찰스 다윈: 종의 기원》
- 다큐 - 《코스모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빅 히스토리》 (10시간 분량)
- 강연 - 《2022 카오스 강연 '진화'》 (20시간 분량)
《이기적 유전자》가 주장하는 바는 사람을 비롯한 모든 동물은 유전자가 만들어 낸 기계라는 점이다. 유전자들은 스스로를 복제하는 존재고 우리는 그들의 생존 기계다. 우리의 임무를 다하면 우리는 폐기된다. 그러나 유전자는 지질학적 시간을 살아가는 존재이며, 영원하다. 우리는 유전자가 프로그래밍한 대로 살아가는 존재다. 허무해보일지라도 그게 사실이다. 무의미의 의미를 생각한다면 고귀한 사실 같기도..?
진화와 자연선택
20세기의 사상적 혁명을 이룬 사상가로 프로이트, 마르크스, 다윈을 꼽는다. 세 명이 주장한 이론 가운데 유일하게 다윈의 이론만이 오늘날까지 정설로 인정받고 있다. 다윈은 1859년 《종의 기원》을 출판하며 세상을 뒤집었다. 인간을 비롯한 생물의 기원이 무엇인지를 과학적으로 설명했기 때문이다. 이를 진화론이라고 한다. 흔히 진화론하면 사람들은 아래와 같은 그림을 떠올린다.
침팬지가 점점 진화해 호모 사피엔스가 되었다는 걸 설명하는 그림이다. 그런데 이 그림은 진화에 대해 오해를 불러 일으킨다. 진화는 일직선으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근엔 여러 진화 생물학자들이 위와 같은 그림을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족 보행하는 유인원이 우리의 조상이기는 하지만 고릴라나 침팬지는 인간과 다른 종이다. 침팬지는 침팬지고 인간은 인간이다. 진화는 아래와 같이 다양한 갈래로 이루어진다. 그중 대부분은 멸종하며, 환경에 적응한 종만이 살아남는다.
아래 그림은 지구가 처음 탄생한 이후로 오늘날까지 종이 어떻게 진화했는지를 보여준다. '생명의 나무'라고 보면 된다. 실제로 거의 대부분의 생명체는 중간에 멸종했다. 아주 일부만이 지금까지 살아남은 것이다.
이렇게 수많은 종들 중 어떤 종이 다른 종보다 우월하다는 객관적인 근거는 아무것도 없다. 침팬지와 인간, 도마뱀과 곰팡이, 우리 모두는 30억 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자연선택이라는 과정을 거쳐 진화해왔다. 각각의 종 안에서도 어떤 개체는 다른 개체보다 생존하는 자손을 더 많이 남겨 번식에 성공적인 유전자가 다음 세대에 더욱 많아지게 된다. 이것이 자연선택이다. 우리는 자연선택의 결과물이다.
유전자와 생존 기계
《이기적 유전자》에서는 '유전자'와 '생존 기계'라는 중요한 개념 두 가지가 나온다. 생존 기계는 우리의 몸, 즉 개체라고 보면 된다. 유전자와 개체, 둘 다 모두 중요하다. 유전자는 '자기 복제자'이고, 개체는 '운반자'다. 자기 복제자란 말 그대로 자기 자신을 무수히 복제할 수 있는 존재를 말한다. 운반자는 자기 복제자, 즉 유전자를 운반하는 운반 기계를 뜻한다. 다시 말해, 우리 몸 안에는 스스로를 복제할 수 있는 유전자가 있고, 우리의 몸은 그 유전자를 생존케 하는 기계일 뿐이라는 말이다.
다윈은 자연선택의 단위가 개체라고 봤지만, 이후 진화 생물학 연구가 진행되며 자연선택의 단위는 유전자라는 게 밝혀졌다. 자연선택의 단위가 유전자라는 점은 해밀턴이 주장했는데, 이를 리처드 도킨스가 대중이 이해하기 쉽게 잘 정리한 것이다.
자연선택은 어떤 특정한 유전자를 선호한다. 자연선택이 어떤 유전자를 선호한다는 말은 그 유전자의 복사본 집합이 전체 유전자 풀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증가한다는 뜻이다. 자연선택에 의해 어떤 개체가 늘어나느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 개체를 조종하는 유전자가 늘어나는 것이다. 자연선택의 단위는 유전자다. 이때 우리는 생존 기계다. 즉 우리는 유전자로 알려진 이기적인 분자를 보존하기 위해 맹목적으로 프로그램된 로봇 운반자다.
우리가 주체적인 존재가 아니라 유전자를 위한 기계라고? 사뭇 이해하기 어렵고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을 수 있겠다. 실제로 이 이론을 접한 많은 사람들은 반발했다. 그동안 인간은 이성을 가진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인간에게는 삶의 목적도 없고 의미도 없는 걸까. 우리가 유전자에게 조종당하는 기계라면 인생은 허무한 것 아닐까. 《이기적 유전자》의 많은 독자들은 이 허무한 사실을 알게 되자 살아가는 이유와 목적을 잃었다며 방황하기도 하고, 반발하기도 했다.
그런데 다르게 생각해볼 수 있다. 《이기적 유전자》를 읽으면, 우리가 왜 어떨 때는 행복을 느끼고 어떨 때는 고통을 느끼는지, 왜 서로 싸우는지, 왜 서로 사랑하는지 다시 말해 우리가 왜 이 모양으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매우 명확하게 알게 된다. 그래서 허무하기보다는 장막이 걷혀서 세상을 다시 볼 수 있게 된다. 그 어떤 철학이나 심리학보다 세상과 인간을 명확하게 설명해주는 게 아닌가.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이제는 답할 수 있게 되었다.
과거부터 우리는 '생명에는 의미가 있는가?', '우리는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등과 같은 심오한 질문을 하곤 했다. 과학적으로 답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때마다 종교나 미신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동물학자 심슨은 이 세 가지 중 마지막 질문을 제기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점은,
1859년 이전에 이 문제에 답하고자 하던 시도들은 모두 가치가 없으며,
오히려 그것들을 완전히 무시하는 편이 나을 것이라는 점이다."
1859년은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이 출간된 해다. 종의 기원 덕분에 우리는 인류를 비롯한 동물의 기원을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우리는 '인간은 유전자가 만들어 낸 기계다.'라고 답할 수 있게 되었다. 1859년 이전에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답하려고 시도했던 모든 철학적 고찰들은 더 이상 의미가 없어진 셈이다.
스스로를 복제하는 유전자가 만든 생존 기계
유전자는 맨 처음 어떻게 생겨났을까? 오래 전 어느 시점에 주목할 만한 분자가 우연히 생겨났다. 이들을 자기 복제자라고 부르자. 자기 복제자는 크지도, 복잡하지도 않았겠으나 스스로 복제물을 만든다는 놀라운 특성을 가졌다. 모든 사본은 아무리 주의를 기울여 만들더라도 틀림없이 오류 몇 개를 갖고 있다. 그 사본들이 모두 원본을 베낀 거라면 내용이 심하게 곡해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사본에서 사본을 만들고 그 사본에서 또 다른 사본을 몇 번씩 만들 경우 오류는 누적되어 심각한 상태가 된다. 생물학적 자기 복제자의 복제 오류는 개량으로 이어지며, 몇몇 오류는 생명 진화가 진행되는 데 필수적이었다. 초기의 자기 복제자를 '살아있다'라고 하든 하지 않든 그들은 생명의 조상이며, 우리의 선조다. 어쨌든 오류는 생겨났고, 이 같은 오류가 누적되어 왔다는 사실은 확실하다.
자기 복제자는 계속 살아남기 위해 자신을 담을 그릇, 곧 운반자(vehicle)까지 만들기 시작했다. 살아남은 자기 복제자는 자기가 들어앉을 생존 기계를 스스로 만든 것이다. 최초의 생존 기계는 아마도 보호용 외피 정도였을 것이다. 그러나 더 우수한 생존 기계를 갖춘 새로운 경쟁 상대가 나타나면서 살아가기가 점점 더 어려워졌다. 이 같은 환경에서 생존 기계는 더 커지고 정교해졌다. 이 과정은 누적되고 계속 진행되었다.
오늘날 자기 복제자는 덜거덕거리는 거대한 로봇 속에서 바깥세상과 차단된 채 안전하게 집단으로 떼지어 살면서, 복잡한 간접 경로로 바깥세상과 의사소통하고 원격 조정기로 바깥세상을 조종한다. 그들은 우리 모두들의 몸 안에 있다. 그들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창조했다. 그리고 그들이 살아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우리가 존재하는 궁극적인 이론적 근거이기도 하다. 그들은 유전자라는 이름으로 계속 나아가며, 우리는 그들의 생존 기계다.
여기서 '우리'란 인간만이 아니다. 모든 동식물, 박테리아, 심지어 바이러스도 포함된다. 생존 기계는 종류에 따라 외형이나 체내 기관이 매우 다양하다. 그렇지만 생존 기계의 기본적인 화학 조성은 거의 비슷하다. 특히 그들이 갖고 있는 유전자는 박테리아에서 코끼리에 이르기까지 기본적으로 모두 같은 종류의 분자다. 우리 모두는 같은 종류의 자기 복제자, 즉 DNA라고 불리는 분자를 위한 생존 기계다. 원숭이는 나무 위에서 유전자를 유지하는 기계고, 물고기는 물속에서 유전자를 유지하는 기계다. 심지어 독일의 맥주잔 받침에서 유전자를 유지하는 보잘것없는 작은 벌레도 있다.
우리는 언젠가 죽지만, 유전자는 불멸한다.
유성생식은 유전자를 섞는다. 이것은 개체의 몸은 잠시 유전자 조합을 유지하는 임시 운반체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내 몸 안에 있는 '유전자 조합'은 유일하다. 지구상에 어떤 생명체도 내 '유전자 조합'과 완벽히 같은 유전자 조합을 갖진 않는다. 그렇지만 '하나의 유전자'는 영속한다. 그 유전자는 내 몸에도 있지만 내 부모님이나 형제자매, 친척들에게도 존재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하나의 개체에 들어 있는 유전자의 '조합'은 일시적이지만 유전자 자체는 잠재적으로 수명이 매우 길다. 유전자 조합은 끊임없이 교차하면서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진다. 유전자 한 개는 수많은 개체의 몸을 끊임없이 거쳐 생존하는 단위라고 생각해도 좋다.
유전자는 늙지도 않는다. 유전자가 백만 년을 살았다고 해서 백 년쯤 산 유전자보다 쉽게 죽는 게 아니다. 유전자는 죽을 운명인 몸이 노쇠하거나 죽기 전에 그 몸을 버리면서 세대를 거쳐 몸에서 몸으로 옮겨 간다. 생존 기계인 우리는 수십 년을 살 수 있다. 하지만 유전자의 기대 수명은 10년 단위가 아닌, 1백만 년 단위로 측정되지 않으면 안 된다. 유전자는 불멸의 존재다. 유전자들은 자기 복제자이고 우리는 그들의 생존 기계다. 우리의 임무를 다하면 우리는 폐기된다. 그러나 유전자는 지질학적 시간을 살아가는 존재이며, 영원하다.
우리가 이렇게 살아가는 이유는?
생존 기계는 유전자의 수동적 피난처로 처음 생겨났다. 처음에는 생존 기계가 경쟁자들로부터 유전자를 지키는 벽에 불과했다. 그러한 생존 기계는 점차 발전해서 행동도 하고 말도 하게 되었다. 유전자가 생존 기계를 조작한 것이다.
생존 기계의 행동에는 뚜렷한 특성이 하나 있는데, 마치 목적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점이다. 프로그래머가 게임 프로그램을 만든 상황을 생각해보자. 게임 프로그램은 온갖 전략과 기술을 구사한다. 이때 중요한 점은, 컴퓨터가 게임을 하는 순간 프로그래머의 훈수는 기대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프로그래머가 할 수 있는 건 '미리' 전략과 기술을 바탕으로 최선의 상태로 컴퓨터를 설정해 놓는 것뿐이다. 유전자도 마찬가지다. 유전자는 생존 기계를 직접 조종하지 않고, 컴퓨터 프로그래머처럼 간접적으로 제어한다. 유전자가 할 수 있는 건 미리 생존 기계의 체제를 만드는 것뿐이다. 유전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예상할 수 있는 많은 우발적 사건들에 대처하기 위한 규칙을 '사전에' 프로그램으로 만들어 두는 것뿐이다.
그러나 체스 게임이 그렇듯이 생명체가 맞닥뜨릴 수 있는 우발적 사건이란 수없이 많기 때문에 도저히 그 모든 걸 예상하진 못한다. 북극곰 유전자는 곧 태어날 자신들의 생존 기계가 미래에 추위를 느낄 것이라고 예측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유전자가 예언을 하는 건 아니다. 유전자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다. 그저 두꺼운 모피를 만들 뿐이다. 왜냐하면 이것이 그 유전자가 과거의 몸속에서 항상 해 왔던 일이고, 또 그 유전자가 아직도 유전자 풀 속에 존재하는 이유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만약 북극 기후가 갑자기 바뀌어 열대 사막과 같은 환경처럼 된다면, 유전자의 예측은 빗나가고 그 유전자는 대가를 치를 것이다. 아기 북극곰은 죽고 그 속의 유전자도 사라질 것이다.
복잡한 세상에서 예측이란 불확실하기 마련이다. 생존 기계가 내리는 결정은 모두 도박이다. 따라서 유전자가 할 일은 생존 기계의 뇌가 평균적으로 이득이 되는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뇌에 미리 프로그램을 짜 놓는 일이다. 프로그램은 생존 기계에게 다음과 같은 지령을 내릴 수 있다.
"여기에 달콤한 것, 오르가슴, 따스한 기후, 방실거리는 아이 등 보상이라고 불릴 만한 것들의 목록이 있다. 그리고 여러 가지 고통, 구역질, 공복, 우는 아이 등 불쾌한 것들의 목록이 있다. 만약 당신이 무엇인가를 한 뒤에 불쾌한 것 중 하나가 발생한다면 다시는 그것을 하지 마라. 그러나 좋은 것 중 하나가 생기면 그것을 반복하라."
결국 우리가 무엇은 그토록 좋아하는데 무엇은 싫어하는 이유는 유전자가 그렇게 하라고 미리 프로그래밍해두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유'를 가진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우리의 성향, 성격, 취향, 행태는 모두 유전자의 영향을 받는 요소다. 우리가 배고픈 걸 싫어하는 이유는 유전자가 그렇게 프로그래밍했기 때문이다. 배고픈 상황은 내가 굶어 죽을 수도 있고, 적의 공격을 받을 수도 있는 상황이라고 판단해 얼른 무언가를 주워 먹게끔 한다. 수많은 사람 앞에 서면 긴장을 하고 가슴이 두근거리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나를 보고 있는 상황은 내가 공격받기 쉬운 조건이다. 나를 지키고 내 유전자를 영속시키기 위해 긴장을 하고 위험한 상황을 경계하려는 것이다.
새, 개구리, 귀뚜라미의 노래, 개가 꼬리를 흔들거나 털을 세우는 행동, 이를 드러내는 침팬지의 표정, 인간의 몸짓이나 말씨 등 생존 기계의 수많은 동작은 다른 생존 기계의 행동에 영향을 줌으로써 간접적으로 자기 유전자의 번영을 증진시킨다. 결국 이러한 의사소통도 다 유전자가 시킨 것이다. 거의 모든 게 유전자 때문이다. 이 사실이 허무하거나 슬프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다르게 생각해보면 오히려 마음이 편하다.
《이기적 유전자》를 읽다보면 이런 생각이 들 수 있다. '우리는 그저 유전자의 폭정에 굴복하는 존재가 되고 마는 것일까?' 동식물은 그렇겠지만, 이성을 가진 인간은 조금 다르다. 도킨스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창조자에게 대항할 힘이 있다.
이 지구에서는 우리 인간만이 유일하게
이기적인 자기 복제자의 폭정에 반역할 수 있다.
아주 단순한 예를 들자면, 달콤한 걸 먹고 싶지만 참는 것도 유전자의 폭정에 반하는 행동이다. 결혼을 하지 않거나 아이를 갖지 않는 행태들도, 하기 싫은 운동을 기어이 해내고야 마는 행동 등도 모두 마찬가지다. 적어도 인간은 아무런 자유 의지가 없는 생존 기계는 아니라는 말이다.
같은 종인 우리끼리 서로 싸우고 경쟁하는 이유는?
여러 종의 생존 기계는 다양한 방법으로 다른 생존 기계에 영향을 준다. 그들은 포식자와 피식자 관계일 수도, 기생자와 숙주 관계일 수도, 희소 자원을 놓고 싸우는 경쟁 관계일 수도 있다. 그런데 같은 종의 생존 기계끼리는 더 직접적으로 서로의 생활에 영향을 미친다. 여러 이유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는, 자기 종에 속하는 개체군의 반은 잠재적으로 교미 상대이며, 또한 잠재적으로 자기의 자손을 낳고 열심히 길러 줄 부모가 될 개체이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는 같은 종의 구성원끼리는 생활에 필요한 모든 자원을 두고 직접 경쟁하는 상대이기 때문이다. 지빠귀와 두더지는 지렁이를 두고 다투겠지만, 같은 지빠귀끼리는 지렁이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것을 놓고 싸운다. 우리들끼리 서로 싸우고 경쟁하는 이유이다.
그렇다면 동물들이 기회 있을 때마다 동종의 경쟁자를 죽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앞뒤 재지 않고 싸우면 이득보다 손실이 클 수 있기 때문이다. B와 C가 모두 나의 경쟁자라고 하자. 마침 B를 만났다면 그를 죽이는 게 당연해보인다. 그렇지만 C는 내 경쟁자이기도 하지만 B와도 경쟁 관계가 아닌가. 내가 B를 죽이면 잠재적으로 C의 경쟁자 하나를 제거해 C에게 이익을 주는 셈이다. B를 살려두면 B와 C가 다투거나 싸울 것이므로 결국 나 자신에게는 간접적으로 이익이 될 것이다. 함부로 경쟁자를 죽이려고 하는 것에는 뚜렷한 이익이 없다는 말이다.
왜 유전자가 이기적라고 말하는가?
이기적 유전자의 목적은 유전자 풀 속에 그 수를 늘리는 것이다. 유전자는 생존하고 번식하는 장소인 몸에 프로그램 짜 넣어 이 목적을 달성한다. 하지만 유전자는 여러 다른 개체에 동시에 존재하는 분산된 존재다. 유전자는 남의 몸속에 들어앉아 있는 자신의 '복사본'을 도울 수도 있다. 만약 그렇다면 이것은 개체의 이타주의로 나타나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유전자의 이기주의에서 생겨난 것이다. 나를 희생해 내 형제를 구하는 행위는 겉보기에 이타주의 같지만, 사실상 내 유전자와 같은 유전자를 많이 가진 형제를 구하는 것뿐이다. 내 몸속의 유전자뿐만 아니라 자신의 '복사본'을 돕는 것이다.
성공한 유전자는 '비정한 이기주의'를 지녔다. 유전자가 이기적이기 때문에 개체도 이기적일 수밖에 없다. 비정한 이기주의라는 유전자의 보편적 법칙에만 기초를 둔 인간 사회는 매우 험악한 사회가 될 것이다. 아무리 개탄스러운 일이라 해도 그게 사실임에는 변함없다. 한편, 개체 수준에서 한정된 이타주의를 보임으로써 유전자의 이기적 목표를 잘 달성하는 특별한 유전자도 있다. 겉보기에 이타적인 행위는 실제로는 유전자의 이기주의가 둔갑한 경우가 많다. 이는 기저에 깔린 동기가 이기적이라는 뜻이 아니라, 생존 가능성에 미치는 실제 영향이 우리가 처음 생각했던 것과는 반대라는 뜻이다.
참고로, 여기서 '이기적'이라는 말은 비유적인 표현이다. 유전자가 정말 이기적인 주관을 갖는 실체는 아니다. 다만 비유적으로 이해하기 쉽게 일시적으로나마 유전자가 지적 판단력이나 모종의 선택의 자유를 갖는다고 생각하자는 표현일 뿐이다. 이러한 태도야말로 《이기적 유전자》를 읽을 때 가져야 할 올바른 태도라고 도킨스는 말한다.
《이기적 유전자》는 독단의 잠에서 깨게 만들어주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진화생물학의 기원인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도 이다음에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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